祈禱와 修行의 意味(생활속의 수행) / 법상스님

2014. 4. 12. 18:5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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祈禱와 修行의 意味(생활속의 수행) / 법상스님

 

 

 

 

 

 

基本的으로 祈禱는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길 원하면서 불보살님께 이루어질 수 있게 가피를

내려달라고 비는 것으로써 기복적이고 타력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는 관음기도, 지장기도, 미타기도 등 특정한 불보살님을 대상으로

기도 성취를 비는 경우가 많다. 불보살님께 가호와 가피를 내려 달라는 의미다.

 

 

 

 

反面에 修行은 마음을 텅~비우고 마음을 集中하고 마음을 專念하고 마음을 觀察함으로써

스스로 마음을 닦아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자력적인 정진을 말한다.

 祈禱를 통해서는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원하는 바를 얻는데 그 목적이 있다면,

修行을 통해서는 자비와 지혜를 깨닫는데 그 목적이 있다.

 

 

 

 

 

 

기도와 수행이 필요한 이유

 

 

 

 

 

아무리 修行을 하려고 해도, 당장에 경제적으로 먹고 살기 힘들거나, 의식주에 문제가 있거나,

큰 어려움과 역경에 처해 있는 사람이라면 수행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로 그런 때에 당장의 눈앞에 있는 어려움을 먼저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수행보다 먼저

祈禱를 한다. 기도를 통해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원하는 바를

성취함으로써 수행할 수 있는 기초를 다지고, 수행의 터전을 닦는 행위가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도라는 方便을 통해 결국에는 수행이라는 本質로 들어가는 구조를 띄고 있다.

 

 

 

 

 

 

한국불교의 기도와 수행 패턴

 

 

 

 

 

예를 들어 한국불교에서 중요한 신행의 패턴은 자녀를 위한 수능 기도, 남편을 위한 진급

발원기도,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 천도기도 등을 통해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祈禱 因緣으로 불교에 첫 발을 내딛는 불자가 많다.

그러나 그 원하는 기도 성취를 이룬 분들이 처음에는 기도를 위해 절에 왔지만, 기도를 하면서

불교가 무엇인지, 수행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조금씩 깨달아 가게 되고, 불교를

자연스럽게 종교로 갖게 되며 그럼으로써 결국 기도로부터 시작해 결국 수행에 이르는

신행패턴을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기도가 좋은 方便이 되는 것이다.

이런 순기능 면에서는 기도와 수행이라는 두 가지 실천행의 方便을 통해 비불자들을 불법으로

이끄는 효과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기도의 가피력

 

 

 

 

 

그렇다면 佛菩薩님께 기도하면 그 가피를 실제로 받을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기도의 가피가 내려질 수 있는 것일까?

[金剛經]에서는 ‘만일 형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삿된

道를 행하는 것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말한다.

佛菩薩님은 우리 外部에 있는 어떤 形像에 속해 있는 분이 아니다. 외부의 불보살과 내면의

三寶는 둘이 아니다. 그렇기에 참된 기도는 자기 내면의 근원적인 본래 힘을 되살리기 위한

자력적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 기도는 타력이라고 알고 있지만 자력과 타력 또한 둘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기도는 바깥으로 특정 존재에게 성취를 비는 것이 아니라,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우리 根源의 힘이요 宇宙法界의 根源의 힘이 나의 기도에너지와 共鳴하고 가지력(加持力)을

形成하도록 하는 것이다.

 

加持力이란 나의 기도와 불보살님의 가피력이 '하나 되어 나타나는 힘'을 말한다.

 

 

 

 

사실 根源에서 살펴보면, 우리는 언제나 完全하며, 無限한 힘(力)과 智慧와 慈悲가 完全히

갖추어져 있는 存在다. 내가 바로 三寶요, 佛法僧 自性三寶가 이미 우리에게 갖추어져 있다.

다만 우리가 我相으로 인해 그 무한한 불법승 자성삼보의 능력을 내다 쓰지 못할 뿐이다.

불보살의 가피력이라는 것은 곧 우리가 그 무한한 힘과 능력과 지혜를 가져다 쓰는 能力인

것이다. 이처럼 불보살과 내가 둘이 아니며, 자력과 타력이 둘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가피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양자물리학에서 본 기도와 가피

 

 

 

 

 

量子物理學에서는 이 기도와 가피를 量子수프(quantum soup)라고 설명하는데, 卽 宇宙는

그 무엇도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만들어낼 수 있는 無限 可能性의 量子수프 상태로 있다가

人間의 意識과 意圖가 일어나는 瞬間 그 무한한 가능성 중에 하나를 現實로 만들어낸다고 한다.

量子수프는 불교의 공성(空性)과도 같이, 텅~비어 있지만 그 속에 무한한 가능성의 현실이

갖추어져 있는 空間이다.

이러한 그 무엇도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만들어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양자수프는

우리가 원력을 세워 기도를 올림으로써 그 願力에 意識을 集中할 때 그 願力이 이루어지는

現實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자물리학에서 설명하고 있는 가피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도의 가피력은 때때로 기적적인 치유를 가능하게도 하는데, 이를 양자물리학에서는

量子跳躍이라고 설명한다. 즉 우리는 하나의 우주에서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존재하다가 때때로 다른 가능성으로 양자도약을 한다고 한다.

질병으로 고생하는 세계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괴로워하고 살다가 기도를 통해 불보살의 가피,

즉 量子跳躍을 통해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세계로 갑자기 옮겨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양자물리학에서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양자도약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量自 얽힘(quantum entanglement)이라는 神秘한 連結性

때문이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粒子들이 서로 分離되어 서로 疎通할 수 없다고 여겼지만,

양자물리학에서는 粒子들이 아무리 먼 거리에 떨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超空間性, 非局所性으로

서로 連結된 것처럼 行動하는 神秘로운 連結性, 緣起性을 발견했고, 이를 양자 얽힘이라고 부른다.

 

波動은 곧 粒子와 다르지 않은데,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하는 정신적인 에너지 波動이

초공간성으로 연결된 이 우주법계 곳곳에까지 連結되어 힘이 미치게 되고, 비슷한 振動으로

波動하는 에너지들을 끌어당겨 共鳴의 법칙으로 서로 感應하게 함으로써 기도가 이루어지는

物質現實을 만들어 내게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기도를 할 때, 그 기도의 에너지 파동이 초공간성으로 인하여 우주 끝까지

연결되고 전파되어서 그 에너지 파동에 공명하는 입자들을 서로 신비롭게 연결시킴으로써

양자얽힘을 통해 기도가 현실로 이루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원력이 담긴 기도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원력을 세워 기도해야 한다는데 있다.

願力과 所願은 다르다. 所願은 아상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소망이지만 願力은 아상을 넘어 일체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이타적 서원이다.

개인적인 소원은 자신 개인의 복력을 가져다 쓰는 것이지만 이타적인 발원은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에너지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이 우주법계의 무량대복과 불보살님의 무한한

加被力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남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타적인 원력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면, 곧 나부터 먼저 잘 될 수밖에 없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에, 상대를 위한 기도는 곧 나를 위한 기도가 된다.

 

이런 원력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도와 수행은 서로 다르지 않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수행의 목적 또한 고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고에서 벗어남으로써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자비가 그 근원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간절한 기도의 함정

 

 

 

 

 

중생이란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고 성취하며 살아나가는 존재다. 자기다운 삶을 통해 이 생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함으로써 이 세상에 자기다운 방식으로 기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나온 목적이다. 그렇기에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를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기도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그것 또한 문제가 된다.

과도한 집착은 곧 좋은 쪽으로 달리 말하면 간절한 기도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도가 너무 과도하게 간절해지면 오히려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기도하는 이의 마음은 願力을 내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절대 이것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마음과는 다르다.

 願力에는 執着이 붙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선호’와도 같다. 과도한 집착이 아닌 순수한

선호이기 때문에 원력에 힘이 붙는 것이다. 집착을 한다는 것은 곧 거기에 ‘나’가 붙는다는 말이고,

그러한 아집은 이타적 원력이 아니다. 그렇기에 집착을 한다는 것은 이타적 원력이 아닌

이기적인 소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집착하면 오히려 거꾸로 이루어지기 쉽다. 執着하는 마음 裏面에는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과 두려운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게 되면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이루어지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마음 속에서 演習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는 집착하는 대신 순수하게 원할 수 있어야 한다.

‘과도한 집착’이 아닌 ‘순수한 선호’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쉽게 말하면, 기도를 할 때는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불보살님께서 내려주는 것은 내 생각을 넘어서는 더 크고 깊은

의미가 있음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라는 대수용의 마음이 바탕 되어야 한다.

되도 좋고 안 되도 좋은 것이다. 다만 마음을 내어 선호하는 방향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도할 뿐,

결과는 모두 불보살님께 내맡기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 생각에 좋은 것과 불보살님의 지혜에서 정말 좋은 것은 다를 수도 있음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宇宙法界에서는

지금 당장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듯 해도 더 깊은 차원에서 또 다른 더 큰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意圖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참된 기도인의 자세는 원력을 세워 기도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이처럼 참된 기도는 집착과 아상의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닌, 기도성취를 통해 이 세상에 기여하고,

 

중생을 구제할 수 있으며, 나다운 삶의 길을 찾아감으로써 깨달아가는 마음공부의 장이 된다.

 

 

 

 

 

 

 

기도할 때의 주의점

 

 

 

 

 

보통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를 하는 중에 계속해서 원하는 바를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염원하고

되뇌이곤 한다. 원하는 바를 부처님께 고하여 말씀드려야지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를 할 때는 처음과 끝에 발원문을 한번씩 읽을 수는 있겠지만, 기도 중간에 계속해서

원하는 바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기도 할 때는 염불이든, 주력이든, 다라니든, 절이든 그 기도수행에만 집중해야 한다.

 

 

 

 

원력을 이루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모든 생각들이 내려 놓아진 텅~빈 內面의 깊은 空間으로

들어감으로써 그 根源의 텅~빈 空의 자리에서 無限한 可能性이 깨어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無限한 可能性, 즉 一切唯心造의 現實創造의 힘은 생각이 많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들이 놓여지고 순수한 원력만이 있을 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기도와 수행의 연결점

 

 

 

 

 

이런 점에서 참된 기도는 곧 수행과 다르지 않다. 다만 修行은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며,

지금 이 자리에서 온전히 충분하고 완전함을 깨달으면서 오로지 그 순간에 바라는 것 없이

현존하는 것이라면, 祈禱는 그 순간에 깨어있는 기도를 하지만, 원력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이

개입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즈음에 이르면 기도는 타력이며 기복이고 하근기 사람들의 전유물인 것 같고,

수행은 자력이며 상근기 수행자들이 행하는 수준 높은 것처럼 느끼는 분별심 또한 내려놓아야

할 것임이 드러난다. 참된 기도는 곧 수행과 연결되기 때문에, 바르게 기도를 하는 이는 곧

그 기도가 하나의 方便 修行이 되는 것이다.

 

 

 

 

 

사실 기도가 가장 잘 될 때는, 수행을 통해 온갖 번뇌 망상과 욕망이 내려놓아 진 때라고 할 수

있다. 수행을 통해 무수한 생각들이 잦아들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비로소 우리 意識 本然의

텅~빈 無限 可能性의 空間이 열린다. 그렇게 고요해진 무한가능성의 공간 마음에서 한 생각

일으켜 순수하게 바라는 기도의 원력을 일으킨다면 그 기도는 힘을 받는다.

무수한 생각과 번뇌들 속에서 기도를 하면 기도하는 바 그 한 가지에만 집중이 되지 않고

기도의 힘이 分散되지만, 수행을 통해 텅~빈 그 고요한 마음 위에 바라는 바를 일으켜 기도를

한다면 바로 그 한 가지에 모든 힘이 集中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수행과 기도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래서 수행자는 따로 기도를 하려고 애쓰지 않더라도 ‘한 생각’ 일으켜 무엇이든 쉽게 만들어내고,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늘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에 그 고요한 마음 가운데서 일어난 한

생각에는 高度로 集中된 創造的 에너지가 모이는 것이다.

 

 

 

 

 

이처럼 기도와 수행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듯 하지만, 참된 기도는 곧 수행과 연결된다.

그러나 처음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당장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수행하라고 하면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중생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어려움을 힐링해주며,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기도의 신행 방식은 중생의 눈높이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불교의 관점에서는

매우 뛰어난 方便의 信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對機說法이며, 應病與藥의 方便說法인 것이다.

 

 

 

 

이렇게 기도를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고, 이타적인 원력을 세우며, 내면의 본래청정성을 일깨우다

보면 저절로 보다 깊은 깨달음의 세계와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그 때 수행이라는 불교 본연의 공부가 보다 깊이 와 닿기 시작하는 것이다.

 

 

 

 

 

 

 

 

 

수행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가

 

 

 

 

修行은 왜 하는 것일까? 단순하다. 괴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祈禱에서 괴로움은 일상생활 속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등 일상의 소소한 괴로움이라면, 修行에서의 괴로움은 생노병사

등 인간의 근원적 괴로움들을 포괄한다. 부처님께서는 근원적 괴로움에서 벗어나 참된 열반을

얻을 수 있음을 설하시며 바로 그 고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道聖諦를 설하셨다.

그 도성제가 바로 ‘수행’인 것이다. 초기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곧 緣起, 無我, 慈悲에 있으며 이를 깨닫기 위한 實踐 修行法이 바로 道聖諦요

도성제가 바로 中道다. 중도를 세부적으로 구현한 것이 八正道이고, 그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바로 四念處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中道와 八正道, 四念處가 바로 ‘修行’이라고 말씀하셨다.

 

 

 

 

중도는 양 극단에 치우침 없고 분별없는 행이다. 양 극단의 판단이나 분별들은 곧 집착을 가져오고,

실체화시킨다. 그렇게 집착하고 애쓴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을 실체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실체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아와 연기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중도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은 곧 無分別과 無執着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바로 이처럼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팔정도의 핵심 수행법인 정념이고 이를 보다 구체화시킨 것이

바로 사념처다.

 

 

 

 

 

조금 더 쉽게 단순화하면 中道, 八正道, 四念處 修行은 한 마디로 ‘분별없는 관찰’을 의미한다.

그러나 막연하게 분별없이 관찰하라고 하면 잘 집중이 안 된다. 어느 한 가지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모아 집중(止)’함으로써 분별없는 관찰(觀)은 더욱 쉽게 이루어진다.

부처님께서는 그 집중적 관찰대상을 사념처 즉 ‘신수심법’이라는 네 가지에 두셨다.

그러나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그 집중하는 대상은 조금씩 달라진다.

 

 

 

 

우리가 흔히 수행이라고 알고 있는 그 모든 것들 즉 절, 염불, 간경, 진언 다라니, 위빠사나,

간화선, 묵조선 등 그 모든 수행법들 또한 사실은 ‘분별없는 관찰’의 대상에 따른 수행법이며,

중도와 팔정도, 사념처에 이르는 길이다.

 

 

 

 

예를 들어 염불수행은 그 집중과 관찰의 대상이 부처님 명호인 것이다. 염불을 하면서 온갖

생각과 판단, 분별들은 내려놓고 분별없이 염불하는 소리를 관찰하거나,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지를 관찰하는 것이 바로 염불수행이다.

마찬가지로 절이나 간경, 진언, 다라니, 호흡관, 간화선 등도 근본에서는 마찬가지다.

절을 하면서 온갖 생각을 내려놓고 분별을 쉬고 절하는 몸의 동작에 집중하여 관찰하고,

간경이나 진언, 다라니를 외우면서 외우고 있는 것을 분별없이 관찰하는 것이다.

 

 

 

 

 

이처럼 온갖 번뇌, 망상과 생각을 그치고 마음을 모아 집중하는 수행을 지(止)라고 하고,

분별없는 관찰을 관(觀)이라고 하여, 지관겸수, 혹은 정혜쌍수라는 수행법이 나온 것이다.

이처럼 불교 수행은 부처님 명호나 진언, 다라니, 호흡, 화두 등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止)

하여, 분별없이(中道) 관찰(觀)하는 것을 통해, 無我와 緣起, 中道와 空, 慈悲등의 思想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현재 한국 불교의 핵심 수행법인 看話禪 또한 부처님의 수행법과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근본

원리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면서도 최상승 근기의 수행자들을 위한 역사적인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간화선에서 간(看)은 ‘볼 간’자로 이 또한 본다는 것이다. 그저 자신의 본성을 보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려워하기에, 話頭를 주고 그 화두를 의심함으로써

그 의심 자체를 보도록 하는 것이다.

화두를 통해 正定과 正念, 卽 止觀의 수행이 이루어진다. ‘분별없는 관찰’이 생겨나는 것이다.

 

 

 

 

 

 

올바른 기도와 수행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기도를 단순히 개인적인 소원을 이루는 것으로만 한정시켜 기복적인

불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기도는 아직 수행으로 옮겨가기 어렵거나, 당장에 괴로움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위한 훌륭한 방편이며, 결국에는 기도로 시작하지만 기도 속에 담긴 불법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고, 나아가 근원적인 생노병사의 고에서 해방되고,

일체 중생을 구제하리라는 참된 원력으로써 수행의 문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또한 수행에 대한 초기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을 기본으로 하여, 그 이후에

역사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방편의 수행법들을 아울러 닦아가며,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아

나가되, 어느 특정한 수행법만이 최상이라고 하거나, 특정 수행법을 폄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불법은 일체의 상을 타파하는 종교이므로, 수행법의 높고 낮음이라는 상, 수행을 잘 하고

못한다는 상 등 일체의 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기도와 수행의 목적, 자비의 실천

 

 

 

 

 

『金剛經』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하는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내가 모두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리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설하고 계신다.

또한 『화엄경』에서는 보살이 발보리심을 내는 이유가 열 가지 있으니 그것은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일체 중생의 고통을 소멸하기 위해, 안락을 주기 위해, 어리석음을

없애기 위해, 불지혜를 주기 위해, 공양 공경하기 위해, 법을 듣고 환희케 하기 위해,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를 보기 위해, 광대한 지혜에 들게 하기 위해, 부처님의 힘을 나타내고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해 보리심을 낸다”라고 함으로써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불교의 핵심에는 일체 중생을 구제하여 고통을 여의게 하고 완전한 행복인 열반에

이르게 하겠다는 誓願이 담겨 있다. 기도와 수행을 하는 목적 또한 이와 같다. 불교의 목적,

기도 수행의 목적은 자신 개인의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大慈大悲心에 있다. 일체 중생을 완전한 열반에 이르게 하려면 나 먼저 열반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에 불교에서 그렇게 깨달음을 중시하는 듯 보이지만, 그 근원에서는 나의 깨달음이 먼저가

아니라 일체중생에 대한 구제가 먼저인 것이다.

 

 

 

 

그렇기에 기도든 수행이든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이타적인 원력과 서원이 바탕이 되었을 때

 

비로소 참된 기도와 수행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귀소 - 김영동 (명상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