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사 풋내기 기자와 발행인 고병완

2014. 4. 16. 16:3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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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사 풋내기 기자와 발행인 고병완

 

 

보리장 권경희(菩提藏 權敬姬)| 소설가․심리상담가

 

 

1979년은 내게도 국가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던 해였다. 나라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는 10․26과 군부의 하극상인 12․12 사태 등 굵직한 사건이 연달아 터졌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나는 가난한 가정 형편에 집까지 철거되는 바람에 대학을 중퇴했다.

 

 

이후 복학을 하기 위해 고급 술집의 바에서 칵테일을 만드는 것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꽤 비싼 수강료를 내고 전문 학원을 두 달 동안 다닌 후 학원에서 소개해 준 곳으로 취업을 나간 것이다. 두 달만 일하면 한 학기 학비를 벌 수 있을 정도로 소득이 높았지만 일터가 술집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때마침 불교학생회에서 만난 대학 선배가 잡지사에 취직하지 않겠느냐고 권유해 왔다. 그 잡지사가 바로 광덕 큰스님이 발행하고 있는 월간 「불광」이었다. 나는 고소득의 바텐더 생활보다 수입은 적더라도 잡지사 기자가 되는 게 훨씬 낫겠다 싶어서 흔쾌히 일터를 옮겼다.

 

 

당시 불광출판부 인원은 발행인으로 광덕 큰스님(당시에 나온 「불광」지의 판권 난에 발행인 ‘高秉完’이라는 속명이 기재돼 있다). 주간으로 지범스님, 편집장 1명, 경리 1명, 총무부에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는 법월거사 김희증 불자, 그리고 영업부에 역시 현재도 근무하고 있는 지웅거사 허성국 불자가 있었다. 큰스님은 불광법회가 열리는 종로 봉익동 대각사에 계시고 사무실에는 기자인 나까지 합하여 모두 6명이 있었으나, 내가 기자로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편집장이 다른 출판사로 가버리는 바람에 5명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주간이 따로 있었으나 운영만 맡아 잡지 편집과 제작은 기자 초년생인 내가 전담하게 되었다.

 

 

당시 불광지의 규모는 현재와 같은 판형인 4×6판에 124쪽, 세로쓰기 편집이었다. 현재 발행면이 154면이니 지금보다 약간 부피가 적은 분량이었다. 당시는 컴퓨터 조판은커녕 사진식자조차 많이 보급되지 않던 시절이라 활판 인쇄로 책을 펴냈다. 따라서 작업 절차가 매우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우선 편집 기획안이 만들어지면, 면 배정을 하고, 그에 맞추어 필자들에게 원고 청탁을 하였다. 그때만 해도 전화로 부탁드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하여 일일이 필자를 찾아가 그야말로 정중하게 ‘청탁’을 했다. 원고료가 다른 잡지사에 비해 현저히 적으므로 매우 미안한 마음으로 원고를 부탁하곤 했다. 그 다음에는 원고를 받으러 다시 한번 일일이 필자를 찾아뵈었고, 잡지를 내고 난 다음에는 원고료를 드리기 위해 또다시 찾아갔다. 원고를 한번 불광지에 싣는데 필자를 무려 세 번 혹은 네 번이나 만나다 보니 자연히 친분이 쌓이게 되고, 업무를 떠나 개인적인 교분을 갖는 경우도 많았다.

 

 

원고가 다 모이면 원고지 위에 교열과 교정을 미리 보고, 원고 상태가 지저분하면 다시 베껴 쓴 다음 인쇄소에 넘겼다. 그러면 문선에서 활자를 뽑아 정판에서 판을 짜고 1차 교정쇄를 냈다. 그걸 찾아와서 교정을 본 다음 다시 넘기고, 수정을 거쳐 재교지가 나오면 재교를 봐서 넘긴 다음 정판에서 판을 제대로 짜서 지형을 뜬 다음 납으로 판을 구워 인쇄기에 걸었다.

 

 

그러는 동안 화가에게 컷을 부탁하고(컷은 동도중학교 미술 교사이며 동양화가인 고소 방국진 선생이 맡았다), 컷을 찾아와 동판 집에 맡겨 동판을 뜬 다음 인쇄소에 갖다 주었다. 그러면 동판을 활판에 붙여 활자와 함께 인쇄하면 그림이 인쇄되어 나오는 것이었다. 당시에도 표지와 화보는 옵셋으로 컬러 인쇄를 했다. 표지와 화보용 사진을 사진작가(불상과 절 사진만 전문으로 촬영하는 안장헌 선생이 표지 사진을 제공해 주었다)한테서 받아와 색 분해 집에 맡겨 색 분해를 한 다음 인쇄소에 넘기고, 표지에 들어가는 글자는 사진식자 집에 맡겨서 치게 한 다음 찾아와서 역시 인쇄소에 넘겼다. 이런 모든 과정을 나 혼자서 직접 오가며 모두 해야 했다.

 

 

마침 사진식자를 해주는 회사가 「자비의 소리」란 소책자를 만들어 대중불교 포교에 앞장선 반영규 선생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반 선생은 청년 불교 지도자, 불교학자, 불교단체 법사, 불교음악 작사가, 불교연극 연출가 등 다양한 방면으로 불법을 전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사진식자를 하러 가서 과외로 불교도 배우고 잡지 편집에 관해서도 조언을 구하곤 했다.

 

 

인쇄소 역시 불광법회의 열심 신도인 박충일 거사가 운영하는 신흥인쇄소였다. 서대문 로터리에서 독립문 방향으로 가다가 오른쪽에 위치해 있었다. 「불광」이 월간지이므로 제때에 내려면 시간이 늘 촉박했다. 다른 잡지사들에 밀려 교정지가 늦게 나와도, 인쇄가 늦게 들어가도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인쇄소에 문선부터 정판, 그리고 인쇄실을 오가며 일을 독촉했다. 그래도 안 될 때는 사장실에 찾아가서 박충일 사장님께 직접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박 사장은 다른 어떤 잡지보다 「불광」을 우선으로 해서 일하라고 아랫사람들에게 지시를 해 일하기가 수월했다.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업무량이 너무 많았으나 나는 신명이 나서 일을 했다. 무엇보다 일하면서 배우는 기쁨이 컸다. 「불광」에 싣는 원고를 교정 보면서 읽은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되었다. 대학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으니 말이다. 굳이 복학을 해서 대학 공부를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 큰스님을 모시고 일하면서 가장 많은 것을 배웠다. 큰스님은 일본 잡지 몇 종을 정기 구독해 보면서 「불광」 잡지 발행에 참고로 하였고, 책 만드는 공정을 훤히 꿰뚫고 있어서 어느 단계에서는 어떻게 일하면 되는가 자세히 지도해 주기도 하였다.

 

 

큰스님은 매달 많은 양의 원고를 직접 썼다. 「불광」 잡지의 거의 3분의1에 해당하는 분량을 큰스님이 담당했으니 말이다. 잡지사 재정이 어려운 형편이라 원고료를 아끼기 위해 큰스님이 직접 원고를 쓴 것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큰스님께서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펼쳐갈 때였기에 큰스님의 사상에 맞지 않은 원고는 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직접 원고 쓰는 양이 많기도 했다.

 

 

 

큰스님은 권두언을 쓸 때는 광덕이라는 법명을 썼고, 시나 수필․ 동화 등 가벼운 글을 쓸 때는 금하라는 필명을 썼다. 불광법회에서 신도들과 불교에 관해 주고받은 신앙상담의 문답을 정리해서 쓸 때는 ‘불광회 구도부’라고 했고, 교리 강좌를 쓸 때면 ‘불광회 교학부’라 했으며, 신도들의 신앙수기도 큰스님이 신도한테서 들은 것을 다시 글로 적어 주었다. 이 밖에 해외 불교 소식이라든가 ‘불광다실’이란 칼럼 등을 쓸 때는 필자를 따로 밝히지는 않았으나 글 말미에 반드시 ‘문책기자’ 라고 적었다. ‘글의 책임이 쓴 사람에게 있다’는 뜻이었으나, 독자들 가운데는 ‘문책기자가 대체 누구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기자라곤 나 하나밖에 없었으니, 내가 그 글을 쓴 줄을 알고 내가 불교에 관해 대단한 경지에 오른 사람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큰스님이 편집후기까지 손수 쓰셨으니, 초기의 「불광」은 권두언부터 편집후기까지 큰스님의 법음이라 소홀히 여길 부분이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8권-인천(人天)의 안목, 글-송암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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