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봉 이야기 1- 구품화(九品華) 석경옥|우바이, 불광사

2014. 4. 12. 18:4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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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봉 이야기

 

 

구품화(九品華) 석경옥|우바이, 불광사

 

 

 

1. 영원한 현재

 

 

 

“나, 죽지 않아. 죽어도 죽는 몸이 아니야.”

이 말씀은 큰스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신 금생 마지막 법문이었다. 항상 큰스님의 일상생활은 모두가 법문 그 자체였다. 삶이 법문과 다르지 않았고 법상에서 하신 설법의 내용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말하자면 법상 위에서나 아래서나 한결같은 모습 그대로였다.

 

 

사람들의 금생 만남은 그 사람이 과거 숙세(宿世)에 쌓아온 인연을 바탕으로 현실 속에서 이루어져 나타난다고 본다. 그러기에 만남을 통해 각자 인생의 길이 열리고 그 길에서 누구를 만나고, 또 어떤 삶을 엮어 가느냐가 결국은 그 사람의 인생 내용이 될 것이다. 우리 불교에서 보면 그것은 바로 보살행의 실천 과정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에 금생의 누구를 만났든, 사람의 만남에는 그 자체로 중요한 뜻이 담겨 있을 것이고, 그 만남 속에는 비밀 코드(보살행의 다짐)가 담겨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서로 만나 얘기하다 보면 그 사람이 지닌 인격과 터득한 지식 내지 무엇을 지향하는가의 인생 목표에 따라 각기 서로 같거나 다른 점을 주고받게 되고 느끼고 알게 된다. 그래서 친구도 되고 동지도 되며 존경하는 스승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큰스님은 내가 오랜 세월 동안(16년) 곁에서 배우고 시봉하면서도 어느 때나 여여(如如)하여 아무런 차이를 못 느꼈다. 그것은 내가 느끼기에는 너무 높았고, 내가 알기에는 너무나 깊었기에 뭐라고 말로 형용하여 표현할 수가 없다. 한없는 크기와 무게를 가진 어마어마한 세계를 접하는 것 같은 외경심만 날이 갈수록 쌓여갔다. 오랫동안 곁에 있으면 더러는 실망스럽기도 하고, 인간적으로 이해해야지 하는 생각이 한두 번쯤은 들기도 할 법한데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 그것은 큰스님이 완벽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직 큰스님의 생각과 행동이 같았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런 삶을 진실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그랬기에 오랜 기간을 존경하며 그 곁에 머물기를 나는 간절히 서원하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었다. 그것은 큰스님께서 나를 힘들게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문제로 스스로 힘들고 어려웠던 것이다. 그때마다 큰스님은 하얀 빈 종이를 내 앞에 꺼내 놓으시며, ‘네가 가지고 있는 물감을 여기에 칠해보라’는 듯한 가르침을 주셨다. 나는 주저하여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고, 그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흰 종이에 물감을 아무렇게나 칠하는 것은 정말 못할 일이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칠해서는 안 되며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내면의 명령을 따랐다. 자신을 극복한 사람만이 모든 것을 참고 극복할 수 있으며 더 높은 가르침을 실천해 간다. 큰스님은 그 가르침을 더욱 깊이 심화시킬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다는 믿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 하얀 종이 위에 나의 눈으로 선택한 보잘 것 없는 색깔을 칠하고 싶지 않았다.

 

 

큰스님은 몸은 비록 불편하셨지만 정신은 언제나 유리처럼 투명했다. 맑고 단정하기가 젊은 사람이 흉내내지 못했고 어떤 사람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철저하기는 그 무엇에도 견주어 볼 곳이 없었다. 도저히 노인이 아니었고 환자도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나, 대중 앞에서도 혼자 있을 때나 조금도 흐트러진 정신 상태를 볼 수 없었다. 큰스님은 그러한 훌륭한 인격자였고 수행자였기에 한국 불교계의 새로운 사상가였으며 거목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스님은 진리 그 자체로 머물고 진리 그 자체로 살았다. 열반에 당하여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다시금 그 사실을 증명한다.

 

“나, 죽어도 죽는 몸 아니야.”

 

 

이제 큰스님의 그 말씀은 법의 증거자로 한평생을 살았던 삶을 마지막 순간에 다시 우리에게 확인해 보여 주신 것이다. 미욱하기 그 없는 우리들에게 큰스님은 그렇게 대자비를 베풀어 주셨다. 삶과 죽음이 없는 영원한 현재, 바로 그것이었다.

 

 

평소 큰스님께서 자주 들려주신 법문에 의하면,

“영원한 현재의 의미는 부처님은 삼천 년 전에 오셨고, 그 이전에 오셨고, 태초 이전부터 시간과 공간이 벌어지기 전 이미 와 계셨고, 어제도 오늘도 오시고, 내일도 모래도 먼 후일 우주가 멸망한 후에도 상관없이 오로지 와 계시고, 지옥에도 천상에도 지금 여기도 저기도 꽉 차게 와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다만 각자 개인의 업의 무게나 두께에 따라 부처님을 볼 수 있는 눈의 밝기가 다를 뿐이라고 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대상들, 사물이나 사람 개개인의 겉모습을 보고 그가 지닌 내면의 고귀성을 함부로 규정짓고 겉껍데기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 부처님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밝은 지혜의 눈으로 생사를 보면 진리(육

신)가 앉고 서는 동작과 같을 뿐, 진리 그 자체에는 전혀 부동하다고 했다. 사람의 죽음은 생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통해서, 하나의 과업을 마치고 또 다른 자기표현을 향해 형태를 바꾸는 준비 작업이라고 했다.

 

 

예를 들면 죽음에 따르는 병고는 새 출발을 위한 육체가 변화하기 위한 준비운동을 하는 것이고, 그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므로 그냥 아프면 아플 뿐이라고, 그리고 순리의 법칙에 따라주는 것뿐이라고 말씀했다. 따라서 ‘나’라는 깊은 생명 의식은 겁 전부터 겁 후까지 영원히, 바로 지금 여기 이렇게 여법하게 눈부시고 찬란하게 광명 그 자체로 현존한다고 말씀 하셨다. 큰스님은 끝까지 부처님 말씀과 자신의 사상을 증명해 주셨다. 마지막 순간까지.

 

 

 

2. 어머니

 

 

“구품화 보살님,”

“네, 큰스님!”

“도포가 뭔지 알아요?”

“네, 알고 있습니다.”

“우리 어머님은 그전에 도포까지 만드실 줄 알아서 동네에서 큰 일이 있으면 불려 다니시며 바느질도, 음식도 모두 맡아서 동네일을 돌봐 주셨어요.”

누구나 그러하듯 큰스님께서도 어머니를 떠올리실 때면 가뜩이나 맑고 어린이처럼 천진하신 분께서 더욱더 동심으로 돌아가 활짝 웃으며 어머니 이야기를 즐거이 들려주시곤 하셨다.

 

 

겨울에 무김치를 아주 맛있게 넉넉히 담가서 동네 사람들이 모두다 퍼다 먹었다는 일화. 또

손칼국수도 아주 잘하셔서 아들이 오기 전 삶아 건져 소쿠리에 담아 놓았다가 국물에 말아 주시는데, 어찌나 맛이 있던지 포식했다는 어린 시절의 흐뭇한 이야기. 평소 어머니께서는 틈만 나면 책을 읽으셨고 붓글씨를 쓰시곤 하셨다는 정경. 또 큰스님이 기억하고 있었던 어머니와의 짧은 대화 한 토막.

 

“네가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나만큼은 못 읽을 거다.”

  

 

그 당시 소년이었던 큰스님은 지금의 서울 한국은행 뒤 도서관에서 찌는 듯한 여름 날씨에 옷 위로 땀이 배어 나와 소금이 되어 굳어 버릴 정도로 책을 열심히 보셨다고 했다. 그때는 냉방기구는 물론 선풍기마저도 없었던 때였으므로 더우면 더운 대로 묵묵히 책만 읽었던 것이다. 아무리 더워도 더운 것을 전혀 못 느끼고 오로지 독서삼매에 빠져 있었다. 그런 아들이 대견하기도 하고 또 한편 고생하는 모습이 애처롭기도 했던 모정의 표현을 그렇게 했으리라고 했다. 실지로 큰스님 어머님께서 보시던 책들은 골방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큰스님께서 기억을 살려 말씀했다.

 

 

인자하시고 고결하시고 섬세하신 어머님께서 돌아가실 즈음 큰스님은 잠시도 어머님 곁을 떠나지 않고 병간호를 했는데, 하나밖에 없었던 아들인 큰스님께 유언으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은

 

 

“사람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사람답게 소중하게 보고 대하는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기를 부탁한다"라고 하셨는데 그 교훈을 마음 깊이 새겼다고 말씀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유언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큰스님께서 토로하신 적도 있었다. 그러한 어머니에 대한 말씀 중에도 어머니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큰스님 얼굴에 만면한 것을 느꼈다. 그때는 마치 소년 같았다. 도저히 칠십이 넘은 고령의 노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어머니 생각을 하고는,

“우리 어머니는…….”

하고 목이 메이는 것을 간혹 볼 수 있기도 했다.

 

 

한번은 내가 자동차를 운전해서 어디로 모시고 가는 도중에 우연히 라디오를 켰더니 마침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대중가요가 흘러나왔다. 큰스님께서 대중가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약간의 염려도 있었지만, 그 대신 소리를 살짝 낮추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는데 뭔가 차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뒤비치는 거울을 통해 큰스님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당혹스럽고 민망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평소에 위엄 있고 무서웠던 큰스님께서 소리없이 울고 계셨다. 큰스님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에 휩싸여 하염없이 울고 계신 것이었다. 늙고 병든 한 노인이 어머니가 그리워 어린아이처럼 울었고, 평소 근엄하고 엄숙하기만 했던 큰스님이 돌연 어린 소년이 되어 어머니를 보고 싶어하는 사모의 고귀한 인간 감정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미처 영문도 몰랐던 나는 라디오 켠 죄로 고개를 숙인 채 앞만 바라보고 운전대만 꽉 움켜쥔 채 달리고 있었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8권-인천(人天)의 안목, 글-송암지원


 

그리운 꽃편지 2 / 김용택

 

 

꽃이 핍니다
꽃이 피면 기쁩니다
꽃이 집니다
꽃이 지면 슬픕니다

 

꽃이 피면
당신이 금방 올 것 같고
꽃이 지면
당신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이 이렇게
꽃 피고 지는 것에 따라 변하는 것은
꽃 피고 지는 그 사이에
당신의 반짝이는 여러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꽃 피고 지는
그대와 나의 멀고 먼 거리 
이 한반도의 허리는
어디나 밟으면 터질
지뢰밭 길입니다

 

 

 

 

 

 

 

 

 

 

 

 

 

 

 

 

어디서 길을 잃었을까 / 이정옥

 

 

산다는 것은

물처럼 흐르는 것인데

 

나도 한때 그랬었는데

바다 위에 안개비로 내려

녹아 없어지려 했는데

 

해안 절벽에 철썩이는

파도의 포말처럼  하얗게

부서지며 노래하려 했는데

 

어디서 길을 잃었을까

그리움에 목이 타는 나는

오늘도 슬퍼하며

어머니의 손을 놓친 아이처럼

무릎을 안고 잠이 든다


 

 

 

 영상 이미지: bluepoppy 음악편집: sunog2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