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 없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

2014. 4. 23. 17:4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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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없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

 

 

鶴蓮惠民|아산 인취사 주지

 

 

세상 사람들은 눈을 잃으면 세상 모든 것을 잃은 듯 불행해 한다. 그리고 다리가 하나 없거나 코나 귀가 하나 고장나 쓸 수 없는 것을 또한 불행하다고 말한다. 참으로 그것이 불행인가. 귀 하나 없으면 귀 하나 잃은 것뿐이요, 눈이 없으면 눈 하나 잃은 것뿐이다. 그러므로 눈 먼 자가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이며, 다리를 잃은 자가 할 수 없는 일이 또 무엇인가.

 

 

그러나 스승이 없으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이다. 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육신을 가지고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세상 사람들은 스승이 부재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그리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 육신을 이끌고 살면서도 자신이 불행한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또한 스승을 찾으려 애쓰지도 않는다. 애석한 일이다.

 

 

우리 인생에 있어 스승은 무엇인가. 스승은 거친 항로를 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나침반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스승 없이는 언제 어디서 좌초할지 모르는 게 우리네 인생이건만 스승의 중요함을 자각하는 이들은 매우 드문 것 같다. 그래서 이 세상엔 좌초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스무 살 안팎, 나는 내 인생의 방향을 정확히 잡아줄 스승을 만나기 위해 출가의 길을 택했다. 그 길에서 나는 이 생에서 다시는 만나기 어려운 스승을 만났고, 그 스승을 시봉하며 내가 걸어야 할 길을 발견했다.

 

 

내 스승 설봉스님은 구김살 하나 없이 순수한 분이었다. 몇날 며칠을 좌선삼매에 빠져 있어 엉덩이 살이 썩어 있거나 곪아 터져 있을 만큼 수행에 매진하셨는가 하면, 내외 경전에 거침이 없었고 禪에 관한 중요한 어록은 다 통하다시피 한 특별한 분이었다.

 

 

그런가 하면 곡차 한 잔에 시 한 수가 물 흐르듯 거침없이 나왔던 무애자재한 분이었으니, 말하자면 시공을 격의 없이 넘나든 분이었다.

 

 

돌아가실 때 플라스틱으로 된 바릿대 한 남기셨을 만큼 한평생을 무소유로 일관하셨던 내 스승을 두고 광덕스님께선 생전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시는 태어날 수 없는 선지식이야.”

 

 

강아지 한 마리에게도 최선을 다해 선지식으로 대했고, 나이 어린 사미에게도 아주 깎듯이 예를 갖추어 대했던 내 스님을 광덕스님 또한 지극히 信했고, 받들었다.

 

 

곡차 드시기를 즐겨하셨던 내 스승에게 광덕스님은 때때로 곡차값을 챙겨드렸고(무척 이례적인 일). 어디 나가면 으레 노잣돈 드리는 것도 잊지 않으셨던 기억이 난다.

 

 

범어사에서 내가 행자 신분으로 스승을 시봉하고 있을 때 광덕스님도 범어사에 계셨는데, 두 분이 마치 친 사제처럼 지내던 모습을 뵐 수 있었다. 우리 스님은 광덕스님의 은사스님인 동산스님과 각별히 지내셨다.

 

 

수덕사 말사인 향천사에서 우리 스님을 시봉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듣다가 ‘동산스님께서 열반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우리 스님께서 주르르 눈물을 흘리시면서 “걸망 싸라, 가자” 하셨다. 그리고 바로 범어사로 갔던 기억이 엊그제처럼 새롭다.

 

 

동산스님은 한마디로 원력보살이셨던 분이다. 범어사에서 가장 먼저 새벽에 일어나시던 분이었고, 언제나 솔선수범하며 도량 청소에 앞장섰으므로 대중이 전부 빗자루를 들었던 기억도 잊을 수 없다.

 

 

예전에 우리가 공부하던 시절엔 스승으로부터 매를 많이 맞았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무언으로 오갔던 가르침이요 사랑이었을 것이였으니, 반항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내 은사스님의 매를 무수히 맞곤 했다. 분명 잘못한 일이 아닌데도 매를 내리시면, 주위에서 ‘도망가지 왜 맞고만 있느냐’고 했으나 나는 맞는 게 법이고 도리라고 생각했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지 부당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 얼마나 그리운가! 그렇듯 매를 들었던 스승이 말이다.

 

 

광덕스님도 당신의 스승이신 동산스님으로부터 각별한 훈도를 입은 것으로 안다. 광덕스님께선 당신의 스승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던 효상좌였다.

 

 

그 스승에 그 제자 아닌가. 아마도 광덕스님께서 그리도 효상좌이셨기에 오늘날 송암스님과 같은 효상좌를 두셨을 것이다. 제자란 무릇 스승의 언행 하나하나를 뼛속 깊이 새기고 또 새기는 자가 아닌가.

 

 

원력보살이셨던 동산스님이셨으니, 그런 스승 밑에서 배우고 익힌 광덕스님 또한 원력보살이 아니 될 수 있었겠는가. 이 시대 보현보살로 사시다 간 것도 스승의 영향이 컷으리란 생각이 아니 들 수 없다. 또한 송암스님의 스승은 가셨으나 그분의 가르침을 세상에 펼치고자 힘쓰는 것도 원력보살이 아니고 이 무엇이겠는가!

 

 

내 스승이 돌아가시고 내가 이곳 인취사 허름한 절에 둥지를 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광덕스님께서 몇몇 분과 찾아오셨다.

그리곤 다음에 한번 더 올라오셨는데, 그땐 법당에 둘 불전함을 하나 만들어 가지고 오셨다.

 

“지난번에 오니 법당에 불전함이 없어서 내가 하나 준비해 왔어요.”

그때 스님께서 만들어 오신 불전함이 지금도 법당에 세월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내 은사스님인 설봉스님께선 가끔 내 이름을 부르셨다.

“혜민아.”

“예.”

그리 대답하고 스님을 바라보면 거두절미하고 그러셨다.

“인정이 덕이니라.”

그 한마디뿐 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그리곤 잊을 만하면 내 이름을 부르고 또 그 말씀을 하시곤 했다. 어렸을 땐 그 말씀의 진의를 헤아릴 수 없었으나, 나이 들어 세월을 살다 보니 스승의 말씀은 만고의 진리였다.

 

 

수행자의 가슴속에 넓은 강이 흘러야 하고 푸른 숲도 있어야 한다. 해서 중생의 마음을 감싸주는 인정이 흘러야 한다. 그래야 덕이 쌓이는 법이다. 수행자에게 덕이 없다면 어찌 자비 문중의 권속이라 할 수 있겠으며, 중생제도는 또한 무엇으로 하겠는가.

 

 

나는 오늘 생각해 본다. 한 생을 보현보살로 중생 포교에 전념하시다 가신 광덕스님이야말로, 가슴 한복판에 깊은 강이 흐르고 드넓은 숲을 지녔던 분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8권-인천(人天)의 안목, 글-송암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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