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바라밀(十波羅蜜)과 보살십지(菩薩十地) - 청화큰스님

2014. 4. 16. 17:0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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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바라밀(十波羅蜜)과 보살십지(菩薩十地)

청화큰스님

 

 

가끔 그때그때 언급을 했습니다만 공부해가는 과정 즉, 위차(位次)를 가장 권위 있게 다룬 가르침이 보살십지(菩薩十地)입니다. 십지에 대해서는 연각십지나 또는 성문십지 등 여러가지가 있고, 다 소중한 것이지마는 가장 권위 있는 전거(典據)로 삼을 법문은 화엄경에 있는 보살십지입니다.


보살초지에 올라갈 때는 앞서 살펴본 사선근(四禪根四加行)을 이미 닦은 정도로서 설사, 난법(煖法) 등 4선근의 법상(法相)은 모른다 하더라도 선근이 쌓여서 마음의 번뇌가 사라져 가면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이 맑고 고요하게 되어야 하는데 더욱 정진하여 범부(凡夫)의 이생성(異生性)을 초월하고 불성(佛性)을 견성하는 보살초지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十波羅蜜과 菩薩十地


초환희지歡喜地; 단(보시)바라밀檀波羅蜜을 성취成就

2이구지垢地; 계바라밀戒波羅蜜을 성취成就

3발광지發光地;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을 성취成就 

 

4염혜지焰慧地;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을 성취成就

5난승지難勝地;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을 성취成就

6현전지現前地; 혜바라밀慧波羅蜜을 성취成就 

 

7원행지 遠行地; 방편바라밀方便波羅蜜 성취成就 

8부동지不動地; 원바라밀願波羅蜜을 성취成就
   9선혜지善慧地; 력바라밀力波羅蜜 성취成就
  10법운지法雲地; 지바라밀智波羅蜜을 성취成就

의 4四(方便 智)바라밀波羅蜜; 제6第六 혜바라밀慧波羅蜜을 세분하여 10지十地에 배대配對

 

처음에는 보살이 이미 탐심(貪心)의 3분의 2를 제하고 견혹(見感)을 파할새, 견혹은 견해에 따른 번뇌요, 견도후(見道後)에 닦는 번뇌 습기(習氣)는 수혹(修惑) 또는 사혹(思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견도전(見道前)의 범부지에서는 수행(修行)이라 하고 견도 후에 비로소 참다운 수도(修道)가 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성인(聖人)의 성품을 얻어서, 진여불성을 현관(現觀)하여 즉, 불성과 계합하여 아() 법()이 공()한 도리를 증명하고, 내가 있다는 실아(實我)와 또는 법이 있다는 실법(實法) 즉, 금이요 다이아몬드요 또는 나요 너요 이런 것은 본래 실제에서 있지가 않다는 실법이 공한 도리를 증명한다는 말입니다.


대환희를 생()하니 환희지(歡喜地)요, 우리가 근본 성품을 깨닫고 우주와 하나로 되어버리면 한량없는 기쁨을 느끼게 되어 환희용약하니 환희지입니다.


동시에 일체를 구호하여, 본래 천지 우주와 하나가 되어버렸으니 나무도 내 몸이요 자기 원수도 내 몸이요 모두가 하나가 되어 자비심이 저절로 나오는 이른바 동체대비(同體大悲)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주상(無住相)의 보시를 행하고, 자타가 없거니 상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에 근거해서 열반안(涅槃岸)에 이를새, 해탈의 언덕에 이른다는 뜻으로서 모든 번뇌와 일체 만사에 걸리지 않는 깨달음의 경계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단()바라밀을, 보시바라밀을 바로 성취한다. 그전에는 보시하기 싫어도 체면 때문에 주기도 하고 위선을 여읠 수가 없었으나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니 상()이 없는 무주상(無住相)의 보시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제2에는 나머지 일분의 탐심을 제()함에 따라, 보살 초지에서는 3분의 2를 제거했지요. 따라서 보살 초지에서 견성오도를 했다하더라도 어떤 경계에 부딪치면 번뇌를 일으킬 때도있으나 파계(破戒)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2지(二地)에서는 나머지 3분의 1의 탐심의 뿌리까지를 뽑는 것입니다. 저번에 소승4과 중 수다원(須陀洹豫流果)과 다음의 사다함(斯陀含)과까지도 탐심을 다 끊어버리지 못하고 약간 남아있기 때문에 일래과(一來果)라, 욕계에 한번 와서 공부해 가지고 성취한다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견혹(見惑)에 근거했던 사혹(思惑修惑)을 제()하는 동시에, 사혹 즉 수혹이 분별에 근거해 있던 것이므로 이치만 통해버리면 과거 습기는 남아있을 망정 다시 새삼스럽게 번뇌를 일으킬 필요는 없겠지요. 계()바라밀을 성취할새, 이미 범한 허물이라도 여읜 몸으로 하여금 사념(思念)이 청정하니 이구지(離垢地)요, 파계한 허물은 보살2지가 되어야 비로소 가시게 됩니다. 사혹을 제()하여 우리 생각에 있는 습기까지도 어느 정도 끊어버려야 과거에 지었던 파계의 허물, 이미 지었던 번뇌의 때를 벗어나는 경계라는 말입니다.


제3에는 진심(嗔心)을 억제하고, 진심이 뿌리가 더 깊습니다. 탐심을 다 끊어버렸다 하더라도 물론 미세한 것이지만 진심의 습기는 아직 남아있는 것입니다. 인욕(忍辱)바라밀을 성취하여서 체찰법인(諦察法忍)을 얻으니, 모든 것을 뚜렷이 본래대로 여법히 통찰할 수 있는 것을 얻어서 지혜가 현발(顯發)할새 발광지(發光地)요, 우리가 천안통같은 신통을 하려면 적어도 발광지까지 정진해야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선 수자가 되면 한사코 발광지까지는 밀어 부쳐야겠지요. 우리 자성이 본래 광명인데 본전은 좀 찾아야만 합니다.


제4에는 정진(精進)바라밀을 성취하니 혜성(慧性)으로 하여금 치성케 할새 염혜지(焰慧地)요, 더욱더 지혜가 현발한다는 말입니다.


제5에는 진심(嗔心)의 근본이 제거되는 동시에, 품위가 있고 자비심이 좀 있다 하여도 기분이 사나울 때는 찌푸리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참선을 오래 했다는 수행자도 기분이 언짢으면 불현듯 진심(嗔心)이 나오는 것인데, 진심의 근본이 제거되어야 선정(禪定) 바라밀을 성취하는 것이며, 진정한 선정이 된다면 마땅히 진심으로 동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5지에서 비로소 선정 바라밀을, 참다운 깊은 선정을 성취한다는 말입니다. 리사(理事)를 계합(契合)하여서, 원리나 현상이나 상대나 절대나 모든 상대관념을 다 비워버리고걸림없는 하나로 된다는 말입니다. 앞에는 약간 어렴풋이 계합하였지만 이제는 온전히 계합이 되어서 진속이지(眞俗二智)의 상응(相應)을 성공함에 따라 진사혹(塵沙惑)을, 항하사같은 번뇌를 다 제거하게 되니 지극히 극복하기 어려운 극난승지(極難勝地)를 성취하게 됩니다.


제6에는 하등의, 이렇다 저렇다 할 탐심 진심이 이미 끊어짐에 따라 혜()바라밀을 성취하니 최승지(最勝智)를 발하여 염정(染淨)이, 염오되고 또는 청정함이 없는 일진법계(一眞法界)의 행상(行相)이 현전(現前)할새 현전지(現前地)요, 6지에 이르러야 삼천대천 세계를 앉아서 훤히 볼 수 있는 경계가 됩니다. 마치 손바닥에다 암마라(Amra 과일 이름)과를 하나 놓고 보는 것과 같이 삼천 세계를 확연히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현전하므로 모든 현상을 다 통달하는 경지라는 말입니다.


제7은 탐ㆍ진이 이미 끊어짐에 따라 남아있던 일분의 치심이 제거되니, 물론 미세한 무명심은 아직도 남아 있겠습니다 마는 대비심(大悲心)을 발하여 방편(方便)바라밀을 성취하고,부처님께서 경을 설하실 때 그 심심미묘한 방편을 보십시오. 진정한 방편 지혜는 모든 탐진치 삼독심이 끊어져야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승(二乘)의 자도(自度)를 원리(遠離)할새, 성문이나 연각의 자기 스스로만을 제도하는 그런 옹졸한 경계를 떠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원행지(遠行地)요.


8지에는 이미 이승(二乘) 곧 성문(聲聞)ㆍ연각(緣覺)을 멀리 여의고 보살의 대원을 발한지라 차지(此地)에서 원()바라밀을 성취하고 무상관(無相觀)을 작()하여 임운무공용(任運無功用)을 상속할 뿐이니 부동지(不動地)요, 그때는 아무런 것도 자기가 지어서 할 필요가 없이 신통도 마음대로 하고 모두가 다 마음먹는 대로 되어버린다는 말입니다.


9에는 역()바라밀을 성취하고 십력(十力)을 구족하여서 일체처에서 가도(可度)와 불가도(不可度)를 다 알아서 능히 설법할새 선혜지(善慧地)요.


10에는 장도(障道)무명의, 자성(自性)을 가리운 근본 무명의 근본을 다 끊어버리고서 수용법락지(受用法樂智) 곧, 모든 영원한 안락, 극락세계를 다 수용할 지혜와 성숙유정지(成熟有情智) 곧 모든 유정을 성숙시키는 지혜로써 지()바라밀을 성취할새 무변(無邊)의 공덕을 갖추어서 무변의 공덕수를 출생하니 대운(大雲)이 청정한 진여불성의 물을 생()함과 같을새 법운지(法雲地)니, 후의 4바라밀이란 제6을 개()하여서, 곧 제6반야바라밀을 부연하여 십지(十地)에 배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수행 정진할 때는 여러 가지 경전이나 조사(祖師) 스님 어록도 많이 있는데 특히 화엄경 10지 법문을 소홀히 하면 공부 경계를 자기 나름대로 그릇 해석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부하는 과정이나 차서를 참고할 때는 꼭 화엄경 같은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점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삼계는 허공의 꽃과 같다 / 무비스님 

 보고 듣는 것은 환영이나 눈병의 현상이며
삼계는 실재하지 않는 허공의 꽃과 같나니
들음을 회복하여 눈병이 없어지면
번뇌는 소멸하고 깨달음만 원만하고 깨끗하다.

깨끗함이 지극하면 광명이 사무쳐 통하고
고요하게 비추어 허공을 모두 머금을 제
다시 돌아와서 세간을 살펴보니
마치 꿈속의 일과 같아라.

見聞如幻翳  三界若空花  聞復翳根除  塵銷覺圓淨
견문여환예  삼계약공화  문복예근제  진소각원정
淨極光通達  寂照含虛空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
정극광통달  적조함허공  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능엄경』



『능엄경』 6권에 있는 글이다.
『능엄경』의 제 1게라 할 만큼 뜻이 깊고 유명한 게송이나.
깨달은 사람들의 삶이든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삶이든
삶이란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듣고 감각을 느끼고 사실들을 알고
또 거기에 따라 필요한 반응과 작용을 하는 일 그 자체이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의 안목에 따라
보고 듣는 존재 자체에 대해서 몇 가지로 분류해서 이야기한다.

첫째, 보통 사람들, 즉 범부의 안목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그대로 집착해서 있다고 본다.
둘째, 성문(聲聞)들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가르침에 의존하여, 보이고 들리는 모든 존재들이
공하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안다.
셋째, 연각(緣覺)들은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결합된 가유(假有)이기 때문에
공하다는 것을 안다. 교리적 용어로는 필경공(畢竟空),
또는 분석공(分析空)의 견해이다.
넷째, 보살들은 모든 존재가 존재 그대로 공하다는 것,
곧 당체즉공(當體卽空)의 이치를 안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공의 철학을 역설한다.
어떤 공을 설하든지 들은 대로 짐작하여
사량 분별로 설하면 성문의 설공(說空)이며,
필경공이나 분석공을 설하면 연각의 설공이며,
당체 그대로가 공임을 설하면 보살의 설공이다.

부처님이나 조사들도 근기에 맞춰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공을 설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신의 깨달음의 극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일 때에는 앞에서 열거한 어떤 공도 설하지 않는다.
불조(佛祖)의 삶은 공(空)만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존이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인 것이 세존의 살림살이며 세존의 삶이다.
오대산에서 무착 문희(無着文喜) 선사가
죽을 끓이고 있을 때 문수보살이 죽 끓이는 솥 위에 나타나자
주걱으로 문수보살을 후려친 것이 무착 선사의 삶이다.
임제(臨濟) 스님이 황벽(黃蘗)스님에게
불법의 대의를 물었는데 황벽스님이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팬 것은 황벽선사의 설법이다
할이나 방이나 손가락을 세워 보이는 등등의
법을 거량해 보이는 일이 곧 그들의 삶이며 설법이다.
이것이 선사의 법문이다.
성문이나 연각이나 보살의 설법과는 다르다.

보고 듣는 일은 모두가 환영이며
삼계는 실재하지 않는 허공의 꽃과 같으니,
번뇌가 소멸된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그 모든 것이 꿈속의 일과 같다고 하는
『능엄경』의 가르침은 보살의 안목으로 볼 때
모든 존재가 그대로 공하다는 당체즉공을 말하는 것이다.


- 출처 : 무비 스님이 가려뽑은 명구 100선 ④
  [소를 때려야 하는가,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 음악 / 김영동 국악명상곡 - 달빛자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