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7. 16:39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 법문 3 : 빔[공]을 실천하는 길 (3)
The second occasion is the moment of contact with sense - objects. When visible forms, sounds, odors, flavors and tangible objects contact the eyes, ears, nose, tongue and body we must practise letting phassa stop at phassa and let vedana stop at vedana, in the way that I have previously explained in many places and on many occasions. Letting phassa stop just at phassa is an extremely high level of practice. on the ordinary level, phassa develops into vedana and then we stop it just there, without allowing the further development of craving and grasping, of "I" and "mine".
두 번째 경우는 감각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입니다. 시각 대상, 소리, 냄새, 맛, 및 촉각 대상이 눈, 귀, 코, 혀, 및 몸에 접촉할 때, 전에 많이 언급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팟사(접촉)를 팟사에서 멈추게 하고 웨다나(느낌)를 웨다나에서 멈추게 하는 실천을 해야 합니다. 팟사(접촉)를 팟사에서 멈추게 하는 것은 매우 높은 수준의 실천 수행입니다. 보통 수준의 실천 수행에서는 팟사(접촉)는 웨다나(느낌)로 진전되므로 '나'와 '내 것'으로 움켜쥐거나 집착하는 것으로 더 진전시키지 않고 이 웨다나(느낌)의 단계에서 멈춥니다.
Some of the articulate talkers in monastery halls and teachers in Buddhist colleges say that stopping just at phassa is impossible, that there is always the development of vedana. That is because they cling to the written word. It's not the truth.
수도원의 말 잘하는 설교자나 불교 대학의 교수들은 팟사(접촉)에서 바로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고 항상 웨다나(느낌)까지 진전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기록된 말에 매달리기 때문이며 진실이 아닙니다.
In fact, the Buddha taught that when seeing forms there should be just the seeing, when smelling odors just the smelling, tasting flavors just the tasting and touching tangible objects just the touching. If you can do it then there is no you, the ego is not born. It is the end of Dukkha, immutable emptiness.
실제로 붓다께서는, 형색을 볼 때는 봄 만이 있어야 하고, 들을 때는 들음 만이 있어야 하며, 냄새를 맡을 때는 냄새 맡음 만이 있어야 하고, 맛 볼 때는 맛봄 만이 있어야 하며, 촉각 대상이 접촉할 때는 접촉 만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여러분은 없고 에고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둑카(고)의 끝이며, 불변의 빔(공)입니다.
It is sufficient to observe one's reactions at the times that we glance in the direction of some neutral form or other.
Try casting your eyes on the door or a window and you'll notice that there is merely phassa, there are no feelings. of satisfaction or dissatisfaction. When visible forms, sounds, odors, flavors and tangible objects enter as contact let them stop there in the same way.
Let it be like the soldier asleep by the side of a piece of artillery. When a shell is fired he merely registers the sound without feeling anything and just goes on happily sleeping. No matter how heavy the shelling he is not startled or disturbed. There is just the sound of the piece of artillery contacting his ear and then ceasing.
어떤 사물을 중립적인 경향으로 힐끗 볼 때 자신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문이나 창문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단지 접촉 만이 있음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만족이나 불만족의 느낌이 없습니다. 형색, 소리, 냄새, 맛, 및 촉각대상이 접촉될 때 이것들을 동일한 방식으로 그 접촉단계에서 멈추도록 하십시오.
대포 곁에서 잠자고 있는 병사와 같이 되도록 하십시오. 포탄이 발사되었을 때 병사는 어떠한 느낌도 없이 단지 그 소리만 듣기 때문에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대포 소리가 있더라도 그 병사는 놀라거나 교란되지 않습니다. 단지 귀에는 대포 소리만 접촉하고 그 단계에서 멈추기 때문입니다.
Can you let phassa stop at phassa in that way when you hear the sound of a' man or the sound of a woman or the sound of a loved one? If you can then you're really adept. Here animals may be more accomplished than we are because they lack all the excess mental baggage carried by humans. If we wish to reach the peak of excellence then we must train ourselves to let phassa remain as merely phassa.
여러분은 남자의 소리나 여자의 소리나 사랑하는 사람의 소리를 들을 때 (그 병사와 같이) 그런 식으로 접촉을 접촉에서 멈추게 할 수 있습니까? 멈추게 할 수 있다면 실로 능숙한 수행자입니다. 여기에 있는 동물들이 우리보다 더 능숙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이 동물들에게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과도한 정신적 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동물보다) 뛰어남의 꼭대기에 이르고자 한다면 접촉을 단순히 접촉에서 그치도록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But if you can't do it and concede defeat, you can still stop at vedana. As soon as there is a feeling of comfort or discomfort, of satisfaction or dissatisfaction then extinguish it just there, without giving birth to the various kinds of desire that spring from the urges of craving and clinging. This is the practice on the occasion of contact with sense-objects.
그러나 여러분이 접촉에서 멈출 수 없고 실패했다고(멈추지 못했다고) 인정되면 아직 웨다나(느낌)에서 멈출 기회가 있습니다. 편안 또는 불편, 만족 또는 불만족의 느낌이 있자마자 움켜쥠과 집착의 충동에서 튀어나오는 여러 종류의 갈망을 일으키지 않고 바로 그곳에서 없앱니다. 이것이 감각대상과 접촉할 경우에 하는 실천입니다.
Now in the short remaining time I would like to talk about the practice on the third occasion, the moment when the mind is extinguished and the body breaks up and dies. How can we practise so as to be empty at that time? For this matter we must depend on taking remainderless extinction as our basic principle in life.
이제 조금 남아 있는 시간 동안, 마음이 소멸되고 몸이 파손되어 죽는 순간인, 세 번째 경우의 실천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죽을 때에는 (마음을) 비우기 위해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이 상황에서는 인생의 기본 원칙으로서 '남김없는 소멸'을 취하는 것에 의지해야 합니다.
The natural death of the aged is something definite and sure. When someone reaches old age it's said that they have little time left. What can be achieved in that short remaining time? So as to be in time, those who are old and unlearned, who don't have the time to study very much and whose brains aren't as good as they were, can hold to this very principle of remainderless extinction of the 'I', that I have been speaking of.
늙어서 자연적으로 죽는 것은 확실하고 틀림없는 일입니다. 나이가 많으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에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요? 나이가 많고 배우지 못했으며 공부할 시간도 많이 없고 머리도 예전처럼 잘 돌아가지 않는 사람은 앞에서 말한 '나(자아)'가 남김없이 소멸하는 바로 이 원칙에 의지하여 실천할 수 있습니다.
Make it natural to yourself to see that being a person is not pleasant, being a deva is not pleasant, being a father is not pleasant, being a mother is not pleasant, being a son, a daughter, a husband, a wife, a servant, a master, a victor, a loser, a good person, a bad person, a fortunate person or an unfortunate person - none of them is pleasant, none of them is any fun. Then the mind will hold no hope of having or being anything at all. The phrase 'absence of hope' may be used in regard to the attainment of arahantship, but it's not the resignation of the foolish and lazy, it's a different matter altogether. It is the absence of hope of one who with true wisdom sees that there is nothing in this or any world that one should wish to have or be. Truly nothing is worth having or being at any time or at any place.
사람이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고 천신이 되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니며, 아버지가 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고 어머니가 되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니며, 아들이 되는 것이나 딸이 되는 것, 남편이 되는 것이나 아내가 되는 것, 하인이 되는 것이나 주인이 되는 것, 승리자가 되는 것이나 패배자가 되는 것,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나 악한 사람이 되는 것, 운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나 운나쁜 사람이 되는 것 등, 어떤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니고 재미있는 것이 아님을 보는 것이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은 어떤 것도 전혀 가지거나 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바라지 않음'이라는 구절은 아라한을 성취하는 것에 사용되는 말이지만, 얼빠지고 게으른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이 '바라지 않음'은 이 세계 또는 어떤 다른 세계에서 가지거나 되기를 바랄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아는 '참 지혜'를 가진 자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정말로 어떤 때나 장소에서 가지거나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So what path will be taken by the mind of a person without hope? It won't take any path at all because it sees that nothing is worth wishing for. Thus it lays the way for its own death. There being no desire to have or be anything, it dissolves into emptiness. This is the skillful means to cheat nature a little. When the time of death has truly arrived, we give rise to the feeling that nothing anywhere is worth having or being. If that feeling is present in the mind at the moment of death then one will inevitably reach Nibbana through the act of dying itself. It's a really good deal-putting down a tiny amount of capital certain of great results!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의 마음이 무슨 길을 취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바랄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혀 어떤 길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그 자신이 죽는 길입니다. 어떤 것을 가질 갈망도 없고 어떤 것이 될 갈망도 없는 빔(공)에 녹아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향(인성)을 조금 속이는 능숙한 수단입니다. 진짜 죽을 때가 왔을 때 어떤 것도 어디에서도 가지거나 될 만한 가치가 없다는 느낌이 일어나서, 이 느낌이 죽음의 순간에 마음에 나타나면 그 자는 그 자체가 죽는 행위를 통해 닙바나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적은 투자로 큰 결과를 얻는 정말로 대단한 거래입니다!
Let the great scholars of the land come and test out what it's like for the mind to meet death with the authentic feeling that nothing anywhere is worth having or being. Death will be a disintegration accompanied by nirodhadhatu. The mind will be transformed into nibbanadhatu through physical death. If a grandma or grand-dad are unlearned and inarticulate but have this single feeling it's enough.
죽을 때에 마음이 어떤 것도 어디에서도 가지거나 될 만한 가치가 없다는 진정한 느낌을 가질 때, 이것이 무엇과 같은지 이 땅의 위대한 학자가 와서 조사하게 해 보십시오. 이 죽음은 '니로다다뚜(소멸요소)'와 함께 해체될 것입니다. 이 때 마음은 육체의 죽음을 통해 '니로다다뚜' 속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배우지 못했고 똑똑하지 못하지만 단지 이 느낌 만을 가진다면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When the time of death arrives let this feeling be present. You should remember that close to death the mind will gradually slip away. As the body runs down nearing its end, consciousness will gradually disappear. You will forget more and more until you forget everything. Yon won't know what time it is, whether it's day or night; you won't be able to tell where you are or whose house you're in, you won't even be able to remember your name or even the most basic daily chants properly. But the way for you to stay as the companion of the mind until the end is to be aware that nothing is worth having or being. Volunteer for the remainderless extinction! Let that feeling of volunteering for the remainderless extinction, that readiness to accept it be a partner of the mind until the very end. With this skilful means the mind will be able to dissolve itself into the emptiness that is Nibbana. This is the practice at the moment of physical death for those of little knowledge. With it an unlearned grandma or granddad can reach the final extinction. We call it the skilful means of turning a fall from a ladder into a measured leap.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이 (무집착) 느낌이 나타나게 해 보십시오. 죽음이 임박하면 마음은 점점 약해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몸이 종점에 다다르게 되면 의식은 점점 희미해질 것입니다. 점점 더 기억이 사라져 마침내 모든 것을 잊게 됩니다. 몇 시인지 낮인지 밤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의 집에 있는지도 모를 것이고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을 것이며 매일 읊는 가장 기본적인 예경송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것도 가지거나 될 만한 가치가 없다는 알아차림이 마음의 동반자로서 끝까지 유지될 수 있습니다. 남김없는 소멸(자아의 완전한 소멸)의 자발자! 이 남김없는 소멸(자아의 완전한 소멸)이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느낌과 이를 받아들이는 의향이 마음의 동반자로서 끝까지 유지되게 하십시오. 이 능숙한 수단으로서 마음은 닙바나인 빔(공) 속으로 녹아들 수 있을 것입니다. 거의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육체가 죽는 순간에 이렇게 실천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실천함에 의해 배우지 못한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최종적 소멸(닙바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능숙한 수단은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것에서 균형잡힌 뛰어오름으로 전환한다고 합니다.
The body must inevitably break up, it's old it has reached its end. This is to have fallen from the ladder. As one falls one leaps on, leaps on to the remainderless extinction by establishing in the mind the feeling that nothing is worth having or being. It may be called leaping in the right direction. There is no pain of any sort. There is, on the contrary, the best possible result, attainment of remainderless extinction.
몸은 부서질 수 밖에 없습니다. 늙어서 죽게 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떨어지므로 뛰어오르고, 가지거나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느낌을 마음에 확립하여 남김없는 소멸(자아의 완전한 소멸)로 뛰어오릅니다. 이 남김없는 소멸로 뛰어오름이 바른 방향으로 뛰어오르는 것입니다. 이 방향에서는 어떠한 고통도 없습니다. 반면에 가장 바람직한 결과인 남김없는 소멸(자아의 완전한 소멸)이 있습니다.
It is to be adept. It is to know how to fall from the ladder. It's not like the foolish people who, when, they fall from a ladder, break their necks and all their limbs. Even those who've studied a lot and travel about, giving articulate talks in monastery halls, can still fall from the ladder and break all their bones. They can't compare with those who have been interested in the right way even if it's only in this one matter.
이것이 능숙하게 되는 것이며, 사다리에서 떨어지는 법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다리에서 떨어질 때 목을 다치고 사지를 다치는 우둔한 사람과는 다릅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여행하고 수도원 강연장에서 법문을 잘하는 사람조차도 사다리에서 떨어져 뼈를 다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방법이지만 바른 방법(남김없는 소멸로 뛰어오르는 방법)을 실천한 사람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Now in the event of accidental death, such as getting run-over by a car, having a building collapse on top of you, being gored in the rear by a bull or getting blown up by an atom bomb, what should you do? If you have a little intelligence you'll see that it's exactly the same. If there is even a tiny amount of awareness left, in that moment resolve on the remainderless extinction. Through having previously developed the feeling that there is nothing worth having or being, until it is completely fluent and natural to you, on reaching the moment of death, you will be able to bring it to mind for a split second before the end. For example, someone run-over by a car doesn't die immediately there is always an interval even if it's only a fraction of a second or a single thought-moment, and for the flash of feeling resolving on remainderless extinction that is plenty of time.
그럼 돌발적 사고로 죽는 경우, 즉 차에 치이거나 빌딩이 무너져 내리거나 황소 뿔에 찔리거나 원자폭탄이 터지는 경우 등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해력이 조금만 있다면 (자연적으로 죽을 때와)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주 미소한 알아차림만 있다면 그 순간에 남김없는 소멸로 녹아듭니다. 가지거나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느낌이 완전히 거침없고 자연스럽게 될 때까지 이전에 계발되면,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마지막 전 잠깐동안 그 느낌은 마음에 생길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차에 치인 사람은 즉시 죽지 않고 몇 분의 1초 또는 단 한 생각 순간일지라도 항상 그 사이에 간격이 있으며, 남김없는 소멸로 녹아드는 느낌의 섬광은 그 시간 간격으로 충분합니다.
Now suppose that death occurs in an instant with no feeling at all, well that itself is the remainderless extinction! As I have already explained we have already trained in the normal times to keep this feeling that nothing is worth having or being constantly in the mind, so that when the body meets death with no opportunity to think or feel anything, that awareness being already present there will be remainderless extinction. But if there is even one thought - moment or half a second then we can think comfortably. So don't be cowardly, don't be afraid! Don't let cowardice and fear sap your strength: "please may I go with you doctor", "take me to the hospital" and so on. If you go you'll die there just the same, it's a waste of time.
이제 죽음이 그 순간에 전혀 아무런 느낌이 없이 일어난다고 해 봅시다. 느낌없는 이 자체가 남김없는 소멸로서 적당한 것입니다!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가지거나 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느낌이 마음에 부단히 유지되도록 평상시에 이미 훈련했으므로 몸이 죽음에 이를 때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느끼는 경우가 없더라도 그 알아차람은 이미 나타나서 남김없는 소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한 생각 순간이나 반초라도 있으면 안락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의사를 데려다 달라', '병원에 데려다 달라' 는 등등, 겁과 두려움으로 힘을 약화시키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Against unnatural death, dying not wanting to die, dying unexpectedly, the sublime Dhamma can not only provide an infallible protection, but can provide Nibbana right there at the wheels of the car, beneath the collapsing building, at the horns of the bull or in the pile of bodies charred by the atomic blast. There is no violent unnatural death, instead there is Nibbana.
죽고 싶지 않은 죽음, 예상치 못한 죽음 등 돌발적 죽음에 대하여, 고귀한 담마는 확실한 보호가 될 뿐만 아니라 차바퀴 밑이나 무너진 빌딩 속이나 황소 뿔에 찔렸을 때 그 곳이나 또는 원자폭탄에 의해 탄 잿더미 속 바로 그곳에서 닙바나(열반)에 이르게 합니다. 결렬한 돌발적 죽음 대신에 닙바나(열반)가 있습니다.
Those who have studied little, know little, right down to grandma and granddad who can't read, are all capable of understanding this teaching and should keep training in this correct understanding.
거의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람에서 문맹의 할머니나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훈련을 해야 합니니다.
Now as for the death of those of perfect knowledge and truth - discerning awareness, those who have studied sufficiently and are proficient both in the theory and practice of Dhamma, for such people it doesn't have to be a matter of leaping as they fall from the ladder. They are deathless from the start, from before any illness. Through having attained a high level of Dhamma since long before, they have no death.
충분히 공부하고 담마 이론과 실천의 양면에서 능숙한, 완전한 앎과 진리를 식별하는 알아차림이 있는 자들은 죽을 때에 사다리에서 떨어지고 뛰어오르는 문제를 거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자들은 어떤 병이 있기 전에 처음부터 죽음이 없습니다. 오래 전부터 높은 수준의 담마에 이르렀으므로 이들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If a person has such abundant knowledge then when the time of death truly arrives, his preparations will be much better than those of people who have to leap as they fall from the ladder. Knowing how to establish mindfulness and self - awareness that is incorruptible he may laugh contemptuously at death. It might be called descending the ladder rung-by-rung and is the way of one with perfect knowledge.
그런 풍부한 앎을 가진 사람은 죽음이 실제로 닥쳤을 때 사다리에서 떨어짐에 따라 뛰어 올라야 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준비가 있을 것입니다. 불후의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법을 알므로 죽음에 직면하여 가소롭다는 듯이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다리를 한 단씩 내려가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완전한 앎이 있는 자의 방법입니다.
Now I would like to talk about the way that the sick and diseased should prepare themselves for death. When one knows that death is inevitable, such as when suffering from a terminal disease like tuberculosis, one should make the very best of it with mindfulness and self-awareness, without cowardice or fear.
이제 병에 걸린 자가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지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폐결핵과 같은 병의 말기로 고통받고 있을 때와 같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겁이나 두려움없이 정말 최선을 다해 마음챙기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I'd like to relate to you an account I once came across of the way that people in the time of the Buddha prepared for death. For those who kept the Precepts of Virtuous Conduct fasting was not at all difficult because they were used to abstaining from an evening meal on Uposatha [26]days. When their illness reached the point that they felt that they had no more than ten days left to live they would stop eating. Not like us. These days, if someone is close to death we go out and look for the most expensive and delicious foods, so that some people even die prematurely from the food. Their efforts to avoid food were for the purpose of having a mind completely undisturbed. When the body starts to run down it loses its ability to digest food and so anything consumed turns to poison, making the mind restless and confused.
붓다 시대에 사람들이 죽음을 준비한 방법이 생각나서 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계를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우뽀사타날(보름과 그믐날 사원에 모여 8계를 지키는 날)에 저녁식사를 하지 않았으므로 단식하는 것이 전혀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병이 악화되어 살 날이 열흘도 남지 않았다고 느낄 때 환자는 음식을 끊었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의) 우리들과는 달랐습니다. 오늘날에는 누군가 죽음이 임박하면 밖에 나가서 가장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찾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음식으로 인해 너무 빨리 죽기도 합니다. 환자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음식을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몸이 기능을 잃어가게 되면 음식을 소화하는 능력도 잃게 되므로 삼킨 음식은 독약으로 바뀌고 마음을 들뜨고 혼란되게 합니다.
So they prepared themselves for death by abstaining from food and taking only water or medicine. As death got closer, they would stop taking even water or medicine in order to focus their mindfulness and self - awareness, so as to die in the way of remainderless extinction.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음식을 절제하고 단지 물이나 약으로 자신들의 죽음을 준비하였습니다. 죽음이 가까워짐에 따라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에 집중하여 남김없는 소멸의 길에서 죽기 위해 물과 약까지도 끊었습니다.
People who cling to goodness and virtue prepare themselves for death by clinging to goodness and virtue. The wise prepare themselves to let go and meet the remainderless extinction. There is nothing that they want; injecting drugs to extend their lives would be a great irritation. This is relinquishing the body (sankharas). Relinquishing the body while still alive they prepare to make the best of its disintegration by acquiescing in remainderless extinction.
선행과 덕행에 집착하는 사람은 이에 매달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놓아버림에 의해 남김없는 소멸에 이르도록 자신의 죽음을 준비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약을 주사하는 것은 매우 성가시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몸(상카라)을 단념하는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몸을 단념함으로써 남김없는 소멸의 방향으로 마음을 기울게 하여 몸의 해체를 최고로 하는 준비를 합니다.
As for us these days, we mill around the doctor in a tumult, sometimes until the room is packed tight, trying to get the dying person to take medicine or eat or have injections. We try to do so many things that the sick person becomes anxious and flustered, and has no peace of mind. He doesn’t know how he is going to die or whether in fact he will die at all. There is nothing but doubt and anxiety. The sick person does not experience victory over death, he does not realize emptiness or the remainderless extinction that I have been speaking of.
오늘날 우리들을 보면, 때때로 방이 빽빽하게 찰 때까지 죽어가는 사람이 약을 먹고 주사를 맞도록 준비를 하고 의사 주위를 맴돌며 법석을 떱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하려고 하여 환자는 근심하고 당황하며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게 됩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지 사실 도대체 죽을지 죽지 않을지 모르게 됩니다. 의심과 근심만 있습니다. 따라서 환자는 죽음을 극복하는 경험을 하지 못하며 앞서 언급한 빔(공)이나 남김없는 소멸을 깨닫지 못합니다.
Unlike the people of the Buddha's time, people today usually look for the most comfortable bed, the most comfortable room, the most expensive foods and medicines, and then die with a great fuss. They want to go on living, to put off their death even if it's only for a single minute. They start having all sorts of injections and treatments and die with no mindfulness or self awareness. It is the action of delusion.
붓다시대의 사람들과는 달리, 오늘날 사람들은 가장 안락한 침대, 가장 편안한 방, 가장 비싼 음식과 약을 찾고, 그래서 법석을 떨며 죽습니다. 사람들은 계속 살기를 바라고 단 몇 분이라도 죽음을 연기하기를 원합니다. 온갖 종류의 주사와 처치를 하기 시작하고, 따라서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없이 죽어갑니다. 이것이 무지에 따른 행위입니다.
To die in the right way we must be brave with Dhamma, and die having victory over death, die realizing emptiness in the last second of life. Please remember well, there is an opportunity right up to the last moment.
바르게 죽으려면, 담마와 함께 용기를 가지고 죽음을 극복하며 죽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빔(공)을 깨달으며 죽어야 합니다. 바로 마지막 순간까지 기회가 있다는 것을 잘 기억하십시오.
These then are the ways of practice divided into three moments or occasions.
1. The 'normal' times when we're doing our normal tasks.
2. The moments of sense contact - how to deal with it so as to produce emptiness.
3. The moment of death-what to do when the five 'aggregates' khandas meet their inevitable disintegration.
(지금까지 말한) 이것들이 세 가지 때 또는 경우로 나누어 설명한 실천방법입니다.
1. 평상시 -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 지
2. 감각 접촉의 순간 - 빔(공)을 일으키기 위해 감각 대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3. 육체적 죽음의 순간 - 오온의 피할 수 없는 해체에 직면하여 무엇을 해야 할 지
These are things that should be brought up and thought about, spoken about and discussed regularly in the same way that we chat about radio and television programmes, and the general goings-on of the world. People who like boxing can get so excited talking about it that they can't get the words out quickly enough.
이것들은 라디오와 텔레비젼 프로그램에서 정치, 경제 등 세계의 일반 문제에 대해 담소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정기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토의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복싱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것에 대해 너무 흥분하여 말하면 아주 빨리 말할 수 없습니다.
Why is it that we can talk about those things all day and all night and yet when it comes to something as important as this we don't discuss it at all? Why don't we ever talk about fighting with death, of having victory over it and being free of both death and birth? If we did it could become easier straight away. If we talk about and discuss these things as much as we talk about other matters, in no great time the practice will become truly easy. If we follow the correct method everything will be easy, even attaining Nibbana or leaping as we fall from the ladder.
왜 우리는 이런 세상일들을 하루 종일 말할 수 있지만, 이와 같이 중요한 것(죽음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을까요? 죽음과 싸우고 죽음을 극복하고 죽음과 탄생에서 해방되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을까요? 이런 것들을 언급한다면 더 쉽게 바로 길(수행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다른 문제에 대해 말하는 만큼 이것들에 대해 말하고 토의한다면, 오래지 않아 실천(수행)이 정말 쉬워질 것입니다. 올바른 방법을 따른다면 모든 것이 쉬워질 것이며, 닙바나, 또는 사다리에서 떨어질 때 뛰어오르는 것까지도 쉬워질 것입니다.
To sum up, we must understand correctly the meanings of the phrases 'empty', 'realizing emptiness', 'abiding with emptiness', 'being naturally empty' and 'being emptiness' itself.
요약하면, '빔', '빔을 깨달음', '빔에 머무름', '자연적으로 비게 됨', 그리고 '빔이 됨' 그 자체, 이 구절들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Emptiness is present in all things; it is their characteristic. If the mind is empty of grasping at and clinging to all things, then it is itself emptiness, the remainderless extinction of 'I' and 'mine' and there is no more birth.
빔은 모든 사물에 나타납니다. 모든 사물의 특성이 빔입니다. 마음이 모든 것에서 해방되면(집착하지 않으면), 그것이 빔이고 '나'와 '내 것'에 대한 남김없는 소멸입니다. 그러면 더 태어나지 않습니다.
Here I will bring to an end this talk on the practice that leads to emptiness.
여기서 '빔을 실천하는 길'에 대한 이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법문 3 및 '보리수의 심재' 전체 끝-
봉 축
佛紀 2558年
부처님 오신날을 봉축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
만남마다 좋은 인연이소서!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고-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슬픔이 있다.
그러므로
기쁨과 슬픔을 가다듬어서
선도 없고 악도 없어야
비로소 집착을 떠나게 된다.
지난 날의
그림자만을 추억하고 그리워 하면
꺾어진 갈대와 같이 말라서
초췌해 지리라.
그러나
지난날의 일을 반성하고 현재를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리라.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지도 말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기다리지도 말라.
오직 현재의 한 생각만을 굳게 지켜라.
그리하여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진실하고 굳세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최선의 길이다.
- 법구경 -
온 누리에
부처님의 가피와 자비 광명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불기2558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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