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은 업장때문이다/청화큰스님

2014. 5. 28. 18:3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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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명은 업장때문이다 

 / 청화스님 

 

 

 

 

 

 

우리 젊은 불자님들이 불교운동 佛敎運動하는 것은 굉장히 갸륵합니다.

갸륵하지만 정견 正見에 입각해야 합니다. 팔정도 八正道 가운데

정견이 허두입니다. 정견 正見이 바로 서야 정사유 正思惟 바른 사고,

정어 正語 바른 말, 정업 正業 바른 생활 바른 행동, 정명 正命, 정정진

正精進, 정념正念, 정정 正定을 하는 것입니다.

 

정견正見이 바로 서지 못하면 전부가 빗나가고 맙니다. 위 단추 하나를

잘못 끼우면 그 밑의 전체가 잘못 끼워지듯이 그와 똑같습니다.

정견正見은 무엇인가? 정견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이 있어야 정견입니다.

 

사제법문도 정견입니다. 사성제는 고집멸도 苦集滅道이지요. 고집멸의

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멸滅, 그것은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불성 즉 진여불성眞如佛性 그것만이 사실인 것이고, 그것만이 검은 것을 검게

본다는 것이고, 흰 것은 희게 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그렇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왜 안 보이는 것인가?

무명심 無明心때문입니다.

 

지금 냉방시설도 안 되어서 이처럼 더운데 장황하게 말씀드리면 모처럼

기회이나 여러분들이 좀 난감하시겠지요. 그래서 이제 제 말씀을 될수록

간추려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정견 正見을 가지고 정견대로 행동行動하고 또는 정견에

입각해서 증명 證明해야 합니다. 교행증 敎行證이라! 교敎만 있고 행行이

없으면, 증證은 고사하고 수행修行이 따르지 못하면 그때는 말법末法인

것입니다.

 

정법正法, 상법象法, 말법末法이란 그런 법을 다 말하지 않습니까.

그 해석을 여러 가지로 하고 있으나, 그래도 전통적인 해석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법은 꼭 정견 正見, 바른 이해와 바른

가르침과 거기에 따르는 바른 수행修行과 또 거기에서 바른 증명

證明이,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래야 정법입니다.

 

부처님 당시는 분명히 그렇게 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고, 부처님과 과거 전생前生에 인연 因緣이 깊은 훌륭한 도인道人

들이 많이 나오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부처님 같이 신통자재 神通自在를 갖추어 타심통 他心通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딱 알맞은 법문을 하신다고 하면 깨달은 도인이

많이 나올 것인데 그럴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존 釋尊이 가신 뒤에는 또 상법 천년이라, 증명

證明을 못하고 마음으로만 도인이 되어서ㅡ 더러는 있다 하더라도ㅡ

많이 깨닫지 못하고 그냥 가르침만 있고 행만 있단 말입니다.

 

오늘날 불교는 어떠한가? 오늘날 불교는 교敎와 수행修行과 증證,

이 세 가지 가운데서 행行도 있고, 증證도 별로 없지 않습니까.

行도 증證도 별로 없고 교敎만 있습니다. 교敎도 바로 모르고

반야사상般若思想도 미처 모르고 불법佛法을 안다고 합니다.

 

무아無我의 증명證明은 고사하고, 무아無我의 도리道理도 모른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는 분명히 말법 末法입니다. 말법으로

해서는 생사生死를 못 건너는 것입니다. 불교 佛敎의 마지막 구제

求濟는 내야 생사해탈 生死解脫 아닙니까.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사회에 봉사하고 다 좋습니다. 다 좋으나

불법이 불법인 점은, 불법이 불법인 그런 소이所以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내가 내 생명生命을 본질本質을 안다는 데 있습니다.

 

내 생명의 본질을 알고 모든 중생衆生과 더불어 우리 생명의 본질을

깨닫는단 말입니다. 설사 우리가 못 살아서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좋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으로 기왕 태어났으면 내 생명의

본질을 알고, 우주만유 宇宙萬有의 본바탕을 알아 모든 중생과 더불어

그렇게 되도록 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불법입니다.

 

마땅히 우리가 하는 불교운동은 정법시대로 우리가 가져와야 합니다.

또는 정법시대가 안되면 행복幸福은 없습니다. 우리 단체의 행복도

없습니다. 바른 부모도 못되고 바른 스승도 못됩니다.

 

바른 정치인도 못됩니다. '나'라는 인간이 무엇인가? 자기 본래

면목本來面目이 무엇인가를 모른단 말입니다. 인간은 대체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런 의미도

모른단 말입니다. 또는 감투는 무엇인가, 내 몸뚱이는 무엇인가,

이런 것을 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바른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은 명명백백 明明白白하게 반야바라밀을

알아야 합니다. 제법공 諸法空도리, 오온개공五蘊皆空 도리,

즉 무색성향미촉법 無色聲香味觸法이라. 모양도 공이요, 소리도

공이요, 향기도 공이요, 맛도 공이요, 촉감도 공이요, 다 공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 업장業障 때문에 그렇

습니다. 무명 無明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못 느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말로 기도 祈禱, 정말로 허심탄회 虛心坦懷하게 명상

暝想도 하고, 참선參禪도 하고 하면 틀림없이 그때는 그야말로

텅텅 비어오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비어 옵니다. 내 몸뚱이 오십 몇 킬로그램, 육십 몇 킬로

그램 된다고 하지만 무게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 자기권磁氣圈에

올라가면 거의 무게가 제로입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가볍습니다.

 

이 대륙권 大陸圈 내에서만 몇 십 킬로그램이라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본래 고유한 무게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을 물리학적인 사실이 아닙니까.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있을 유 유교有敎라,

상식常識차원에서 하는 부처님 가르침이 있고, 또 만법萬法이 모두

비었다 하는 빌 空, 공교空敎라, 다 비었다는 가르침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비었다고 하면 그것은 결국 이유離有이지요, 허무虛無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보아서 허망한 것이지, 본래 참말로 있는

것은 진여불성 眞如佛性입니다. 따라서 우주라는 것은 진여불성 뿐입니다.

우주가 진여불성 뿐이라고 이와 같이 실상 實相을 파악하는 가르침,

이것이 중도교中道敎입니다.

 

이것과 저것과의 중간 中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주라는 것은 중도

中道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주라는 것은 진여불성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식적인 차원을 넘어야 합니다. 상식을 못 벗어나면 속물俗物

입니다. 불교운동을 한다 하더라도 상식을 못 넘으면 그것은 속화운동

俗化運動입니다. 불교를 속화俗化시키면 안 됩니다.

 

응당 대중화大衆化를 시킨다 하더라도 속화해서는 안 됩니다. 꼭 반야사상

般若思想을 기조 基調로 해야 합니다. 반야사상은 모든 철학哲學의 기조가

되어 있습니다. 무철학 無哲學이라. 어려운 말로 하면 무無의 자각적 自覺的

한정 限定이라. 모두가 원래 없던 것인데 인연 因緣을 따라서 이렇게 보인단

말입니다.

 

이렇게 상만 보이는 것입니다. 나라는 상相, 너라는 상, 밉다는 상, 곱다는

상, 그런 상만 있을 뿐입니다. 상相은 본래 本來 공空입니다. 즉공卽空

입니다. 분석한 뒤에 공이 아닙니다. 성자聖者는 분명히 명명백백 明明

白白 이것 그대로 공空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명명백백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 전도몽상 顚倒夢想

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이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전도몽상을 타파

하는 것이 반야 般若가 아니겠습니까. 전도몽상을 타파하셔서 꼭 행

行과 증證을 갖추어서 정법正法이 되어야 합니다.

 

정법이 되어야 남북통일 南北統一도 그런 본질적인 의미에서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졌으니 앞으로 자본주의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자유민주주의가 앞으로는 승리해야 할 것이 아닌가.

 

자유민주주의도 얼마나 흠이 많습니까. 공산주의의 대안이 아니란

말입니다. 무슨 이데올로기나 모두가 다 중생들이 이렇게 얽어매고

저렇게 얽어서 만든 것은 상대유한적 相對有限的인 것입니다.

 

오직 부처님 가르침, 중도실상 中道實相의 부처님 가르침만이 참답고

기본적인 해결책입니다. 부처님 공부는 출가出家한 스님들은 제법

할 수 있지만 재가불자在家佛子는 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하고 생각

하시겠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 공부를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지금 별로 못 배우고

업장이 많아서 인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도 역시 과거 전생에 무던히

오계五戒정도를 지켜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우리는 석가모니와 더불어 조금도 본성품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또는 내 앞에 있는 독사 毒蛇 같이 징그러운 것도 역시 본성품은

석가모니와 더불어 조금도 호리불차 豪釐不差의 차이가 없습니다.

 

상相만 차이가 있는 것이지 차이가 없습니다. 남을 죽인 강도强盜도 역시

겉만 어쩌다가 인연 따라서 강도짓을 한 것이지 그 사람도 우리와 더불어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한테 가서 "상대편이

잘못할 경우 일곱 번 쯤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질문했단 말입니다.

 

그 때 예수 말씀이 "일곱 번씩 일곱 번도 더 용서해라."였습니다. 반야를

모른 사람들은 남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반야를 모르는 사람들은 한번

미운 사람은 절대로 밉다고만 생각합니다.

 

우리의 번뇌 煩惱가 멸滅하여 실상을 바로 보면 분명히 청정무비 淸井無比한

부처님의 광명光明으로 누구나 빛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흐리멍텅한

눈으로는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미운 사람은 밉게 보이고 좋은 사람은

좋게 보입니다. 따라서 죄罪는 밉게 보는 '나'한테 있는 것입니다.

 

왜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동체대비 同體大悲라고 우리가 말은 다

하지 않습니까. 동체대비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동체同體

라는 말은 본질에서는 모두가 다 부처라는 뜻입니다. 본성품에서는

부처라는 뜻입니다. 본성품에서는 다 부처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대비大悲라 합니다. 그냥 약삭빠른 인정이 아닙니다.

 

팔정도 八正道의 정견 正見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의

모두가 두두물물頭頭物物 자타시비 自他是非 없이 일여평등 一如平等한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정견正見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사유正思惟라,

이렇게 생각하는 견해에서 말한다고 생각할 때에 남 듣기 싫은 말 하겠

습니까. 누구한테 베풀어라, 말 바르게 해라, 남을 용서하라, 우리가 정견만

굳건히 갖는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동적으로 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약능요심 若能了心하면 만행구비

萬行俱備라. 만약 자기 마음의 본체本體를 깨닫는다면 만덕 萬德이 다

갖추어온단 말입니다.

 

고기 잡는 그물코가 천 코, 만 코, 있다 하더라도 양쪽 걸이를 쭉 잡아당기면

모든 코가 따라 오듯이 우리가 내 마음이 무엇인가, 우주宇宙라는 것은 모두가

다 청정무비 淸淨無比한 마음뿐이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저절로 모두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思想 밑에서 화두話頭를 들고 염불念佛을 하고, 주문呪文을

해야 참다운 염불이고, 참다운 화두입니다. 어느 사람들은 참선 參禪이라

할 때 화두만 의심 疑心하면 참선이고,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 합니다.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셨습니까, 달마스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화두 아니면 참선이 아니라는 소리는 이것은 중국 中國에서도 저 북송

北宋 때에 임제 臨濟 일파 一派에서 한 것이고, 또 우리나라에서는 이조

李朝 오백년 동안 불교가 중국에서 청신 淸新한 그런 기풍이 못 들어 올

때에 그러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오히려 화두를 의심하면 참선인

것이고,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다, 이런 것은

전도몽상입니다. 법집法執입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부처님 법문法門은 주문으로 가는 문이나,

염불로 가는 문이나, 경經을 보는 문이나. 복숭아 꽃 보고 깨닫고,

길 가다가 맑은 물을 보고 깨닫곤 합니다.

 

그런데 염불이 참선이 아니고 경론經論은 참선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우리 마음이 상대 유한적인 상에 걸리지 않고 앞서 말씀과 같이 정견을

갖는다고 생각할 때는 어떠한 공부나 다 참선입니다.

 

 

 

 

 

하나님 부르나, 알라를 부르나 다 참선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종교는 앞으로 틀림없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眞理가

하나인데 종교가 하나가 안 될 수가 있습니까.

 

기독교 성경이나. 이슬람의 코란이나 여러분들이 불교의 반야바라밀로

조명 照明한다고 생각할 때에 모두가 다 진리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

때입니다. 재가불자 在家佛子나 출가불자 出家佛子나 마음을 열 때

입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마음을 연다는 것은 상相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상我相

'나'라는 상, 인상人相 '너'라는 상, 수자상 壽者相 시간이 짧고 길고

내 생명生命이 짧고 길고 또 중생상 衆生相 나는 사람이고 저것은

개다, 저것은 풀이다, 저것은 자연이다,이와 같이 구분하는 이런 상相이

없어야 합니다.

 

상相을 떠나면 자연히 공해公害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 한방울도

우리가 오염汚染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땅도 살아 있고 돌멩이 하나도

무두가 다 살아 있습니다. 중중무진 重重無塵이라, 법계法界라는 것은

모두가 더 부처님의 광명光明으로 충만 充滿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생명生命입니다.

 

요즈음 한마음 운동運動, 한 몸 운동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카톨릭에서

한마음 운동을 합니다만 그네들은 아직 한마음을 모릅니다. 오랫동안

앞으로 두고두고 우리 불교인들이 제도 濟度를 해야 한마음을 알 것입니다.

 

한 몸, 한마음은 불교의 대승大乘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진소위 眞所謂, 참말로 한 몸 운동, 한마음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네들은

기껏해야 사람과 사람끼리만 한몸으로 압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천지우주가

한 몸이란 말씀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선 공부하기가 참 쉬운 것입니다. 천지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하므로 쉽습니다. 부처님의 본원 本願이라, 우주宇宙는

우주 자체의 목적 目的이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모두 다 부처가 되게끔

하는 원願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홍서원 四弘誓願을 외우지 않습니까.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되게

하소서! 모든 중생이 무량법문無量法門을 다 알게 하소서! 그런 것이 우주의

뜻입니다. 우주의 목적입니다. 그것 보고 부처님의 본원이라고 합니다.

 

우주는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의 본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싫든

좋든 간에 불교를 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현대과학을 안 믿을 수가

없듯이 불교는 진리眞理이기 때문에 싫든 좋든 간에, 미련한 사람들은 불교를

더디 믿겠지요. 금생에 못 믿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총명한 사람들은 금생에

믿고 닦아서 성불하실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의 도리에 따라서 있습니다. 절대로 과학적科學的

이고 절대로 철학적 哲學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대로 따르면 굉장히

쉬운 것입니다. 음식도 적게 먹으면 그렇게 좋고 말입니다.

 

또는 절약도 낭비 않고서 과소비 않고서 절약하면 그렇게 좋단 말입니다.

자기고 가볍고 생활도 좋고 남도 숭상하고 고기도 먹는 것보다도 아니

먹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고기 안 먹던 사람이 고기를 먹어 보십시오.

 

얼마나 느끼한가 말입니다. 그런 것을 많이 먹고 허튼 살이 붙어 보았자

그것은 우리 생명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 모두가 다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개나 소나 돼지나 우리가 먹는 고기도

역시 우리와 생명이 같단 말입니다. 우리가 먹으므로 해서 더 많이

죽여야 하겠지요. 우리가 많이 먹으므로 외국에서 수입을 해야 하겠지요.

 

내가 먹은 고기 한 점이 과거 어느 생生에 부모님 살肉身일 수가 있습니

다. 또는 개나 소나 돼지나 그런 것은 우리보다 더 업장業障이 무겁지

않습니까. 과거세 過去世와 오계五戒를 못 지켜서 사람이 못 된

것입니다.

 

업장이 무거운 그놈의 세포가 내 몸에 들어오면 내 몸 세포가 오염이

안 되겠습니까. 오염되기 때문에 그런 것을 많이 먹으면 현대 문명병

文明病에 걸리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신앙 信仰이라 하는 것은 철저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서운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대중화 大衆化 시키는 것이 불법佛法이다.!

이런 식으로 믿어서는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말법末法이라 하는

상식차원 常識次元, 속물차원 俗物次元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러면 남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세계를 움직이려면 자기自己를 먼저 움직여야 한다.'라는 말처럼 자기

부터 부처님의 정견正見을 바로 세워두고 바른 수행修行으로 증명 證明

해야 합니다. 증명만 해버리면 그때는 별 말하지 않더라도 벌써 향기

香氣가 풍깁니다.

 

우리가 사향麝香를 가지고 있으면 사향 같은 향내가 훈감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향을 갖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몸에 구태여 향香을 안 바르고

치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절로 향기가 풍겨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 법을 믿고 법대로 수행하는 것을 보고, 향광

장엄 (香光莊嚴: 念佛三昧)이라 합니다. 부처님 이름 한번 외우고, 우리가

화두도 한번 참구 參究하고 말입니다. 한 번 한 만큼 우리한테는 우리 생명

生命에 향기 香氣가 그만큼 플러스가 됩니다.

 

치장하지 않더라도 그만큼 빛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후광 後光을

보십시오. 본래 本來 우리한테는 그런 광명 光明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잘못 살아서 그런 후광을 인멸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외길로 천지우주의 진리인

부처님 길을 따라가는 그 길 위에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다른 선택은

우리가 궤도軌道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한테는 불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苦의 인因을 지었기 때문에 고를 받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의 인을 안 지었다고 생각하면 과거 전생에 탐심 貪心도

없고, 진심 嗔心도 없고, 무명無明도 없으면 인간으로 나올 필요가 없

습니다. 극락 極樂에서 영생 永生을 구가 謳歌합니다.

 

우리는 바꿔져야 합니다.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부처님 법으로

바꿔져야 합니다. 영생의 길로 걸음걸음 나아가야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이 뭣꼬' 화두나, 무자 화두나 모두가 다 성불

成佛의 공부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린 정견 正見, 정견과 더불어서,

정견을 확고부동하게 마음에 두고서 해야 참선입니다.

 

그러면 다 참선입니다. 아버지를 부르나, 어머니를 부르나, 어떻게 부르

나, 이름을 안 부르고 명상暝想을 하나, 그냥 호흡법呼吸法을 하나,

호흡법도 그냥 호흡만 해서는 참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정견과 더불어서 해야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정견을 한사코 가지고서

거기에 따르는 수행, 거기에 따르는 수행은 부처님 계행戒行을 지켜야

합니다, 정말로 적게 먹고, 적게 쓰셔야 합니다. 적게 먹고 적게 쓰는

것이 나그네 길에서 우리를 가볍게 하고, 공부를 쉽게 하는 것입니다.

 

태국 泰國 '잠렁' 시장, 그의 가르침을 알지 않습니까. 재가불자는

적어도 잠렁시장 정도는 해야 합니다. 적게 먹고, 적게 쓰고, 부지런히

벌어서 남한테 베푼다, 그 정도는 되어야 재가불자의 본분입니다.

 

한 달에 , 음력으로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 육재일六齋日이

있는데 육재일 정도는 꼭 출가 수행자같이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청정한 생활을 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오늘 내일 다르고

차근차근 맑아져야 합니다.

 

이 가운데 미니스커트를 입은 분이 있으면 대단히 죄스럽습니다만,

그러나 저는 저번에 수원水原에 가서 어느 신도 信徒님이 구경을

시켜 주어서 자연 민속촌民俗村 구경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일본 日本사람이 굉장히 많이 왔습니다. 관광객 가운데

그들이 3분의 2쯤 되었습니다. 그날 우리 노덕 老德 스님들도 동행 했습

니다만, 일본의 어느 여자학교에서 온 여학생들이 유니폼을 입었는데

그렇게 선량 善良하게 보인단 말입니다.

 

그 선생님들도 일률적으로 유니폼을 다 입었습니다. 그 여인들의 치마는

무릎 아래로 쑥 내려갔습니다. 미니 입은 사람이 한 분도 안 보인단 말

입니다. 그렇게 미니스커트 입은 것이 더 예쁘게 보이겠습니까.

 

저 같은 구닥다리는 도저히 이해를 못합니다. 그것이 무슨 필요인가.

건강에 좋은 것인가, 다른 사람이 더 예쁘게 볼 것인가, 우리네 어머니나

아버지들 좀 반성 反省을 해야 합니다. 딸이나 누가 그러면 엄격하게 꾸

중을 하셔야 합니다. 한 더위에도 우리 보십시오. 이렇게 다리도 묶고

있지 않습니까. 불교는 그렁저렁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활을 부처님 법에 맞추어야 합니다. 가장 검소한 것이 부처님

생활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것은 우리 절寺도 낭비를 많이 합니다.

낭비를 많이 하므로 앞으로는 더욱더 검소하게 우리가 생활을 해야

합니다.

 

저희들 출가불자나, 재가 불자나 정말로 부처님 법대로 따르셔서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꼭 말법 末法을 떠나고 상법 像法을 떠나고 정법

正法이 아니고서는 우리나라도 절대로 훌륭한 나라가 못 됩니다.

 

세계평화 世界平和도 절대로 안 옵니다. 진리 眞理와 더불어서만 참다운

자유, 참다운 평등 平等, 참다운 해탈 解脫 이 있습니다. 부처님 교법 敎法에

따라서 바른 수행 修行, 바른 수행에 따라서 증명 證明을 꼭 하시기를

바랍니다. 증명해 들어가면 그렇게 몸도 마음도 가벼운 것입니다.

 

계행 戒行 지키기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욕을 하기보다 더 쉽습니다.

술을 먹기보다 안 먹기가 더 쉽지 않습니까. 매서운 결단 決斷을 하십

시오. '부처님 법法이 아닌 것은 내가 단연코 안 한다,'라는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철학哲學은 결단의 가르침입니다.' 하이데거의 말과 마찬가지로

종교는 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종교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바뀌어야

합니다. 범부凡夫가 바뀌어 성자 聖者가 되는 것이 종교 宗敎입니다.

이런 정법正法의 방향으로 불교 佛敎를 전환 轉換시켜서 나가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산승 山僧의 말씀을 마칩니다

 

 


어떤 남자의 사랑이야기

 

 

작년에 비가 많이 오던 어느 여름날이였어요..
교통사고로 인해서 하반신이 마비가 되었죠..

그전에 저는 잘나가는 직장,연봉,학벌까지...
더이상 부러울게 없었답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소중한 여자친구가 있었지요...
아주아주 이쁜 얼굴에, 그보다도 더
예쁜 마음씨를 가진 그런 여자였어요..
사고가 났을당시...
저는 하반신 마비 선고를받았고...

부모님보다도 더 먼저 보고싶고,
생각났던게 여자친구였답니다.
내가 앞으로 하반신을 쓸수 없다는 생각에...
그녀와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에..
너무 슬펐죠..

 

 

그녀를 처음 본건 5년전, 대학교 캠퍼스였어요...
웨이브진 긴 생머리에 예쁜 눈웃음,
그리고, 맑고 투명한 피부까지...
저의 이상형이였고, 저는 첫눈에 반했어요..

그녀는 우리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1년 반을 쫓아다녔고..
저희는 연인이 되었죠..

제 친구들 모두가 저희 커플을 부러워 했고...
그녀가 제 여자친구라는게 너무나도 자랑스러웠고,
행복했답니다.
그당시 저의 나이 26살, 그녀는 21이였죠..

저보다 5살이나 어린 그녀는 마냥 예뻐보였고,
모든것을 다 주고 싶었어요...

내가 할수 있는 한 정말로 최선을 다했고
더 해주지 못해서 항상 미안했었죠..

 

 

대학교를 졸업후, 몇년이 지나서...
저는 직장에 자리를 잡았고,
그녀는 약국의 약사가 되었어요...
그리고 올해, 결혼을 하자고 했었죠..

하지만, 그런저에게 사고가 생겼죠...
사고후, 그녀가 저에게 했던...

"오빠 너무 다행이야...
고마워"라고 그녀가 말했어요...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았을걸"하고 생각했었죠..
25살의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짐을 짊어지게 할수 없으니까요...
하반신 마비... 정말 너무 힘이들더군요...

 

 

미안한 마음에 날 떠나지 못할까봐...
저는 결심했었요...
제가 그녀를 보내주자고..
결심후에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했어요..

얘기를 듣던 그녀는 눈물을 보이며,
그러지 말라고 애원했고,
그러고는 내일 또 오겠다고 하며,
나가는 것이였어요...

다음날 그녀는 제가 좋아하는 메론을 사왔고,
싱글생글한 예쁜미소를 지으며,
우리는 대화를 나눴고,
갈때 "조금만 참고 기다려"하고 말했어요...

그녀가 병실 문밖을 나가자마자
저는 가슴이 아파 겨우 참고있던 눈물을 흘렸답니다.
저에게는 정말 지옥같은 시간이였어요...
그녀에게 너무 미안했었답니다.

정말 이렇게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보내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그녀는 너무 가진게 많았어요..
이쁜외모에, 약사에..학벌까지 겸비한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그녀였지요...
다른 남자에게도 고백을 많이 받아왔을겁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그녀의 손을 놓아준다면...
그녀는 아마도 나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날수 있을거고,
그녀가 내곁에 두는 것이...
내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 죽고 싶었어요...

 

 

그 이후로 그녀는 매일 같이 병원에 찾아오는
그녀에게 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답니다.

그녀를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했기에...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매일 아침...점심..저녁 전화도 받지 않았답니다...
그렇게 몇달을 매일 병원에 찾아와서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돌아가기 일수였지요...

아무런 대답도 없는 저에게 그녀는
"내일 또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갔지요...

어느날 그녀는 어김없이 병원에 왔고,
그리고 편지한통을 주고 갔습니다..
꼭 읽어보라면서요....

 

 

-편지-

 

오빠..안녕...
지금은 새벽2시야..
내일 출근하려면 자야하는데 잠이안와...

이게 다 오빠 때문이야..
전화도 안받궁...ㅠㅠ
왜 나한테 미운소리만 골라서하는거야?

뭐 그래야봐야 난 괜찮지만 헤헤~
난 내일도 모래도 일끝나면 오빠한테 찾아갈거야~

오빠가 아무리 떼어내려고 해도 소용없어..
20대초반...한참 예뻤을대 청춘을 다가져가 놓고,
풋풋했던 내몸과 마음을 다가져가 놓고, 뭐?

이런식으로 나올꺼야?
치~ 예전에 오빠했던말 기억나?
나없이 살수 없다더니..

이제는 나없이도 살수 있다는 고야?
그런거야?

오빠말대로 오빠보다 젊고 멋지고 능력있는 남자
만나서 잘 해볼까? 하고...

생각도 해봤어...
그런데 나는 그렇게 못해..
오빠를 4년간이나 만났고,

오빠만 바라보고 의지했는데...
오빠와의 결혼, 미래만을 보면서 살았는데...

이제와서 내가 어떻게 오빠를 지워...
말도 안됑~~!!

오빠는 나에게 한없이 베풀기만 하고,
주기만 했자나...
난 그런 오빠의 사랑을 받았고,

이제는 내가 오빠에게 주고 싶어...
오빠의 다리가 되어줄게...

주변의 어떤시선도 고통도 감당할수 있어...
이건 동정도 연민도...아쉬움도 아니야..
사랑이야... 오빠를 사랑해... 진심으로...

만약 오빠와 나의 상황이 바뀔수만 있다면..
난 1초의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할거야..

오빠를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나를 받아줘...
행복하게 잘 살자...

오빠도 알지? 나 능력되는거..
그러니까 그런걱정말고.. 나에 대한 미안함..
다떨쳐버리고... 나랑 결혼해줄라~...

지금까지 오빠가 나한테 해줬던것들..
이제는 내가 해줄게...

오빠는 지금까지 그래왔던것 처럼 나만 이뻐해주고...
사랑만 해주면돼....
내일은 내눈 피하지 말고...
옛날과 같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봐줬으면 좋겠어...

우리 처음 만난 그때처럼...
나 아직도 오빠보면 설레,
그리고 오빠를 사랑해...
보고 싶다.. 내전부

 

그 편지..
더이상 그녀를 사랑하는 나는
그녀를 밀어낼 자신이 없었고,
두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그래서 저는 욕심내기로 했답니다...
욕을 먹어도 듣고,
돌을 맞아도 맞겠습니다.

지금 그녀를 놓친다면 정말로 후회할겁니다...
저는 그녀를 제목숨같이 사랑합니다...
그녀를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들자신은 없지만...

그 누구보다 사랑해줄 자신은 있습니다.
그녀가 내게 해준것 처럼...

 

우리는 그녀의 생일날 결혼을 했습니다.
그녀는 이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었고...
저는 가장 행복한 신랑이 되었습니다....

그녀를 사랑합니다.... 영원히....
ㅡ모셔온글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