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 청화큰스님

2014. 8. 6. 18:3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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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청화큰스님

 

 

산은 산 물은 물

 

조사어록에 "산시산(山是山)이요 수시수(水是水)"라, 卽 山은 바로 山이요 물은 바로 물이라는 法語가 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우리 중생이 본 山 그대로 山이요, 물 그대로 물이라고 生覺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삼독심(三毒心)에 가려서 實際的인 실상(實相)을 못 보고 自己 本來面目도 미처 못 보며,

또한 一切 存在의 本來性稟도 못 봅니다. 따라서 山은 바로 山이요, 물은 바로 물이라는 조사어록의

法語는 우리 중생이 보는 山 그대로 山이요, 보는 물 그대로 물이라는 그런 意味가 아닙니다.


부처님 法門에는 많은 갈래가 있습니다. 고마문령(瞽馬聞鈴)처럼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면서

그대로 공부하는 성문승(聲聞乘)이 있고, 또는 스스로 명상을 하여 인연 따라서 깨닫는 연각승(緣覺乘)도

있으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실상 그대로를 믿고 닦아 나가는 보살승(菩薩乘)의 법도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法 가운데 참선하는 법이 최상승의 법이며, 바로 불도의 정문(頂門)입니다. 그래서 불경에서도

최학도(最學道)라고 했듯이 참선 공부는 우리 불자가 배우는 공부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배움의 길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중생들에게 49년 동안 설법을 하셨습니다. 45년설도 있으나 49년설을 더 많이 주장합니다. 부처님의 설법은 그때그때 중생의 그릇 따라서 하는 법문이기 때문에 方便說이 많이 있습니다. 연도로 따지면 부처님께서 成道하신 후 12년 동안에 하신 法門은 우리 중생 차원에서 常識的으로 보고 느끼는

'있다' '없다'의 二元性의 次元에서 하신 法門입니다. 그것을 흔히 初期 法門, 卽 初期 根本佛敎의 法門이라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一切宗旨, 萬衆生의 本來性稟(本質/바탕)과 現象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方便法門을 하신다 할지라도 부처님 法門 속에는 모든 深深微妙한 뜻이 다 깃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중생들은 그저 문자나 말에만 집착하여 부처님의 초기 경전에 대해서, '있다' 혹은 '없다'에

대해서, 일반 세간적인 윤리도덕의 차원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별로 깊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初期 法門은 우리 중생의 그릇에 따라서 하신 법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정도의

법문은 기독교나 유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에도 있습니다. 즉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든지,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든지, 명상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정도의 법문은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의 그릇이 조금 익어진 때에는 부처님이 今生에 나오신 뜻이 그냥 世間的인 범주, 일반 윤리도덕적인 범주에 멈추는 것이 아니므로 事實 그대로를 말씀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모든 法이 다 공(空)하다는

空道理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49년의 설법 가운데 22년은 반야설(般若說), 즉 空의 道理를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그 심심미묘한 뜻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있습니다만, '이 소중한 내 몸이 원래 공(空)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 때까지 공부한 소중한 내 觀念도 모두 공(空)이다'라고 生覺할 때는

 

굉장히 虛無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實相智慧에서 볼 때는 그 모든 것이 空임에 分明합니다.


영가현각(永嘉玄覺) 대사가 道를 깨닫고 법희선열(法喜禪悅)에 넘쳐서 지은 노래인 <證道歌> 가운데

"몽리명명유육취(夢裏明明有六趣) 하고 각후공공무대천(覺後空空無大千)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말을 풀어 보면, "꿈속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지옥이나 아귀ㆍ축생이나 그런 것이 분명히 實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깨달은 뒤에는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뿐만 아니라 天地宇宙의 모든 大千世界가 텅~텅 비어 보인다"는 뜻입니다. 이런 뜻을 우리 중생들이 쉽사리 알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이런 뜻을 모르면 우리 불자님들은 그저 '있다' '없다' '나' '너' '내 것' '네 것'이라고 하는 次元에서

머물다가 맙니다. 따라서 煩惱에서 解脫하지 못하고 맙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欲界, 色界, 無色界를 다 解脫하고 모든 煩惱를 다 滅盡시키는 가르침입니다. 즉 三界를

解脫하는 가르침입니다. 煩惱에서 解脫을 해야만 참다운 自由가 있고, 참다운 幸福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바로 人間論이며, 또한 바로 幸福論입니다. 本來的인 人間의 참다운 自己(참나)를 아는 것이고, 또한 同時에 가장 最上의 永遠한 幸福을 맛보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煩惱에 拘束되어서 解脫을 못하면 참다운 自由와 幸福은 없습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으면 나를 위해서 나 좋은 쪽으로 生覺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것은 자기한테, 자기한테 싫은 것은 남한테 떠넘기는 것이 중생들의 根性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다 空이라는 空의 道理를 모르면 우리 衆生心의 次元에서 약간 좋은 짓을 한다고 해도 事實은 僞善을 면치 못합니다. 내가 분명히 있으니

기왕이면 좋은 음식을 자기가 먹고 싶고, 좋은 옷을 입고 싶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따라서

억지로 道德을 부린다 하더라도 이런 諸法空의 道理를 모르는 次元에서의 僞善은 절대로 면치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 깨달은 성자 외에는 모두 위선자의 범주를 못 벗어납니다.


聖者는 宇宙의 참다운 實相을 깨달은 분입니다. 내 마음의 本體가 무엇인지,

宇宙의 참다운 본모습이 무엇인지, 宇宙의 참다운 實體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분이 성자입니다.


우리가 남의 글을 본다 하더라도 깨달은 입장에서 쓰인 글은 조금도 막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분들은 여기 부딪히고 저기 부딪히면서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是非를 미처 떠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22년 동안이나 우리 중생이 보는 이 모든 것이 다 텅~비어 있다고 般若空의 道理를

말씀했던 것인데, 그냥 텅~비었다고 하면 우리 중생은 잘 납득을 못합니다. 어째서 텅~비어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은 因緣 따라서 생겨납니다. 因緣 따라서 잠시간 結合되어 있는 것이 한瞬間도 머물지 않고 變化해 마지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연생(因緣生)이고 연기법(緣起法)이기 때문에 다 텅~비어 空하단 말입니다.


時間的으로 보면 恒常性이 없으니까 무상(無常)이요, 空間的으로 보면 '나'라고 할 것이 없으니까 空이요,

無我입니다. 이것은 다행히도 현대물리학이 다 증명한 것입니다. 물리학이라 하는 것은 物質의 道理를 체계 있게 공부해서 밝힌 것으로, 바로 과학입니다. 그런 물리학이 모든 것은 本바탕에서 보면 다 텅~비어 있다는 道理를 證明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은 제로(zero), 공(空)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다 증명했습니다. 부처님처럼 철저하게 증명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모든 法이 空이다" "모든 것이 다 虛妄無常하다"라는

般若空의 道理는 이미 과학자들도 다 증명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도 저것도 다 텅~비어 있다고 生覺할 때는

우리가 工副할 必要가 무엇이며, 그야말로 虛無主義에 빠지기 딱 쉽습니다. 다 텅~비어 있는데 무슨 幸福이 있으며 善惡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空에 그치지 않고, 모두가 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이며, 因緣 따라 모아져도 한瞬間도 머무르지 않고 變化無常하기 때문에 바로 無常이요, 따라서 空間的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空이요, 또한 이런 것에 대해서 '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無我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本來의 참다운 實相은 우리 중생이 보는 것같이 存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般若思想에서

말하는, 단지 텅~비어 있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 본 것이 텅~비어 있는 空이지, 참말로

있는 것은 眞如佛性이 이 宇宙空間과 森羅萬象萬物에 充滿해 있습니다. 따라서 초기 불교에서 있다, 없다, 좋다, 궂다와 같은 二元性의 次元만 공부한 사람들은 부처님 가르침의 全部를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까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山은 저런 푸른 山이고, 물은 저런 영롱한 물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근래에 와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하는 그런 도리를 그렇게만 생각하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우리 중생이 三毒心에 가려 있는 凡夫心에서 보는 것이지 淸淨한 불안(佛眼)이나 慧眼으로 보는 眼目은 아닙니다. 三毒心을 다 떠나버리고 煩惱를 다 여의어 버린 부처님 눈, 성자의 눈으로 보는 것만이 事實을 事實대로 봅니다. 따라서 事實을 事實대로 보시는 그런 眼目에서는 山은 그냥 山이 아니고, 법성(法性)의 山, 法界性稟 그대로의 山이란 말입니다. 물론 물도 그냥 물이 아니고 法性의 수(水)입니다. 法性인 山이요, 法性인 水요, 實相인 山이요, 實相인 水란 말입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現代의 病은 무엇인가? 유물주의(唯物主義)라는 病입니다. 내 몸도 物質이고, 다이아몬드도 物質이고, 山도 物質이고 다 物質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物質, 이것이 우리 중생이 보는 그대로 있다고 生覺합니다. 唯物論的인 制度는 설사 人間의 간혜지(乾慧地)로 이모저모 變用시킨다 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宇宙의 道理에 어긋나 있기 때문입니다. 가을 간 뒤에 봄이 바로 오겠습니까? 응당 겨울이 와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天地宇宙의 道理 그대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법이자연(法爾自然)이라고 합니다. 즉 조금도 무리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보는 눈이 짧아서 自己의 本來面目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자기가 아는 것이 절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대체 무엇을 안다는 것입니까? 諸法이 虛妄한

것인데 空道理를 모릅니다. 緣起法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空의 道理를 分明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思想은 법계연기(法界緣起)입니다. 宇宙의 實相, 宇宙에 充滿해 있는 끝도 갓도 없는 無邊廣大한 眞如佛性이 因緣 따라서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진여연기(眞如緣起),

법계연기(法界緣起)라 합니다.


잘나나 못나나 동물이든 식물이든 모두가 다 眞如佛性자리에서 이렇게 저렇게 因緣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바다에서 바람 따라 이루어진 波濤가 똑같은 물이듯이, 法性에서 이루어진 一切 存在 모두가 그대로

眞如佛性입니다. 動物이나 植物이나 無生物이나 모두가 다 眞如佛性 道理입니다. 돌이요, 나무요,

사람이요 다 다르지만, 本來性稟에서 본다면 모두가 다 하나의 부처님 性稟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겉으로 드러난 상(相)밖에는 못 봅니다. 現象밖에는 못 봅니다.

現象은 實際로 있는 것이 아니라 無常이요 無我요 空이란 말입니다.


참선이란 어떤 것인가? 부처님 공부는, 부처님께서 설사 유루적(有漏的)인 간단하고 쉬운 말씀을 하셨다 하더라도 가상(假相)을 떠나고, 가명(假名)을 떠나서 實相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참선 공부는 그와 같이 유루적인, 있다 없다 하는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을 떠나야 합니다. 因緣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모두가 다 虛妄한 것으로 空이고  原來는 實相이 없습니다. 다만 假相으로만 있는 것입니다.


 

또한 空도 그냥 텅~빈 空이 아닙니다. 虛無한 空이라 하면 因緣 따라서 일어날 必要가 없겠지요.

眞如佛性, 宇宙의 本性은 바로 내 마음의 本性입니다. 내 마음이라는 것은 物質이 아닌 하나의

精神  아니겠습니까? 生命입니다. 宇宙는 어떤 形相으로 있든 간에 하나의 生命體입니다.

生命은 物質이 아니기 때문에 限定的으로  制限的으로 여기에 있거나 저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空間性이 있는 物質이라면 여기가 있고, 저기가 있고, 大小 長短이 있겠습니다만, 空間性과 時間性이 없는,

따라서 物質이 아닌 純粹生命자리는 여기 있고, 저기 있고 또는 생겨나거나 消滅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般若心經》에서도 分明히 말씀하신,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不生不滅), 또는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다는(不增不減) 空의 道理를 그냥 方便說로 우리한테 하신 게 아닙니다.

宇宙萬物의 實相 있는 그대로를 말씀하신 겁니다.


參禪 工夫는 이런저런 方便說을 다 除해 버리고 심즉시불(心卽是佛), 즉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깨닫자는 공부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나무 그러면 나무 그대로 부처이고, 꽃 그러면 꽃 그대로 부처입니다. 宇宙의 實相자리, 宇宙의 佛性자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두워서 못 볼 뿐, 밝은 눈으로 본다면 모든 것이 바로 그대로 부처란 말입니다. 바다에서 일어나는 千波萬波의 波濤라든가 수십 억 개 되는 거품 모두가 다 그대로 물이듯이, 이 現象界를 이루는 宇宙森羅萬相, 하늘에 있는 모든 별이라든가 一切 存在가 그대로 바로 부처입니다.


이렇게 믿고 하는 공부가 참선 공부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바로 頓悟입니다. 이것이 中國을 통해서 들어온 이른바 조사선(祖師禪)의 도리입니다. 참선 공부라 하는 것은 마음 열고 하는 공부입니다. 마음을 닫아 놓고서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저것이 있고 이것이 있고, 이렇게 分別의 걸림이 있는 공부는 참선 공부가 못 됩니다. 석가모니와 내가 둘이 아닙니다. 또는 한 마리 곤충과 내가 둘이 아닙니다.


人類는 20세기의 文明社會에 이르렀다고 합니다만, 現代의 高度 産業社會는 단지 物質을 많이 만들고 自己가 많이 所有하고 消費하면서 모두가 物質이 第一이라고 生覺합니다. 그러나 物質이라는 것은 限界가 있게 마련이어서 내가 많이 所有하려면 다른 사람들은 적게 所有해야 되므로 싸우고 맙니다. 따라서 唯物主義 思想에 입각한 自本主義, 또는 共産主義 등은 結局  宇宙의 眞理에 따르지 않았으므로 人類에게 害惡을 남기고 結局에는 崩壞되고 맙니다. 이것은 人類 歷史가 證明하고 있습니다. 共産主義도 한두 번 시행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공산주의가 무너졌으니까 앞으로는 自本主義 社會가 옳다고 生覺해서 정말로 自由競爭을 하고, 끝도 갓도 없이 所有觀念을 擴大해 간다면 그것 亦是 허물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부처님주의 혹은 生命主義, 卽 宇宙의 道理에 따라서 우리가 成功도 하고 마음도 便하고, 드디어는 解脫을 하게 됩니다. 살생하지 마라, 훔치지 마라, 음란한 짓 하지 말라는 등의 부처님 戒律도 그냥 부처님께서 道德的인 次元을 위해서 德目으로 시설하신 것이 아닙니다. 宇宙의 道理로 보아 宇宙는 하나의 生命이니까 眞如佛性의 道理에 따르는 것이 계율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함부로 해버립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것저것, 가지, 이파리 다 제해 버리고서 근본 줄기와 뿌리만 가지고 하는 공부, 이것이 참선 공부입니다. 따라서 중국을 거쳐 온 조사선 도리는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꼭 거쳐야 하고, 가장 발전된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육조 혜능스님께서도, "내 법문은 本體를 안 여읜다"고 하셨습니다. 상(相)에 걸리지 않고 本體를 여의지 않는단 말입니다. 本體를 여의지 않아야 참선입니다. '이뭣고'를 하고 '무(無)'자를 들고, 어떠한 話頭를 든다 하더라도 本體를 떠나서 그냥 疑心만 품어서는 參禪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하였습니다. 참선은 바로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바로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宇宙萬物은 오로지 佛心뿐입니다.


중세의 데카르트나 여러 철인들은 물질 따로 마음 따로, 이른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주장했습니다. 사실 서구문명은 대체로 이러한 물심 양원론(兩元論)과 창조주 하나님에게 우리가 섭리를 받는다는 두 가지 사상이 지배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창조주 하느님이 우주를 지배한다'는 식의 서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허심탄회하게 기독교 성경을 본다면,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다만 지나치게 확대시켜 말하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우리 사람을 떠나서 對相的으로 하늘 어디엔가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면, 기독교는 그야말로 형편없는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고 하질 않습니까? 아니 계신 데가 없고, 또 능히 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이른바 凡神론이 되어야 기독교의 가르침이 참다운 眞理가 됩니다.


아무튼 어설픈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하느님이 우리 밖의 저 하늘에 계시다가 우리가 잘못하면 벌을 주고, 또 종말론이 있어서 천구백 어느 해에 천지우주가 다 파괴되어 기독교를 믿는 사람만이 '휴거', 즉 선택받아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식의 가르침이 20세기의 문명시대를 풍미했습니다.



  참철학 참종교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 것은 정말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입니다. 어쩌다가 금생에 다행히 부처님 법을 만났습니다. 부처님 法은 무가정(無假定)의 原理입니다. 이것저것 다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과학도 가장 참과학이고, 철학도 가장 참철학이고, 종교도 가장 참종교입니다. 따라서 참선 공부를 할 때는 먼저 신(信)이 앞서야 합니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화두를 의심하면 참선이고, 화두를 의심하지 않으면 참선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本體를 본 사람, 法性자리를 아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本體가 여기 있고, 저기 있고 하겠습니까?


여기 있고 저기 있다면 그것은 眞如佛性이 아닙니다. 宇宙에는 眞如佛性 하나일 뿐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가르침은 眞如佛性 一元論입니다. 宇宙는 오직 佛心일 뿐입니다. 佛心 이외에 다른 것이 있지 않습니다. 眞如佛性이 緣起法을 따라서, 法界緣起를 따라서 宇宙가 이루어지고, 사람이 생겨나고, 다른 모든 것이 이루어지곤 합니다. 따라서 物質이 아닌 宇宙의 精氣인 眞如佛性이 宇宙가 되고, 무엇이 되고, 했기 때문에 설사 상(相)으로 해서 사람 같은 相을 나투든, 산(山)과 같은 모양(相)으로 있건 그런 것은 物質이 아니라, 山 그대로 바로 佛性이고, 사람 그대로 바로 佛性입니다. 그러기에 보조국사가 어록의 돈오에서도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한 것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이며, 본래로 모두 부처인 것입니다.


本來 바로 부처라는 것은 사람만이 바로 부처란 말이 아닙니다. 어떤 當體, 책상이면 책상 모두가 다 그대로 부처입니다. 다만 중생이 못 볼 뿐입니다. 설사 중생이 못 본다 하더라도, 석가모니를 위시한 무수한 성자들이 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을 먼저 믿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참선도 먼저 신(信)이 앞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흐리멍덩한 눈으로 봐서 안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宇宙 이대로 眞如佛性이요, 宇宙 이대로 毘盧遮那佛이요, 宇宙 이대로 充滿한 光明의 世界요, 宇宙 이대로 極樂世界입니다. 경(經)에 더러는 극락세계가 저 십만 억 국토 밖에 있다고 하나, 이것은 우리 중생이 너무 모르니까, 그렇게 말씀하셔야 중생이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같이 모든 物質이 다 텅~비어 있고 物質의 根本이 波動하는 에너지뿐이라는 大明天地 과학문명시대에 와서는 그런 法門이 通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 저 空間世界에 극락세계가 있고,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의 식(識)이 맑은 程度에 따라서 맑은 識이 사는 색계(色界)도 있고, 무색계(無色界)도 있습니다. 가장 맑아서 天地宇宙의 本來的인 眞如佛性과 같은, 맑은 識이 사는 世界가 極樂世界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 마음이 참말로 맑아서 한 점도 티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이 자리에서 바로 極樂의 幸福을 受容하는 것입니다. 몸이 저 空間 속에 몇 만 리 成層圈에 있으나, 磁氣圈에 있으나 또는 전리권(電離圈)에 있으나, 空中 높이에 있으나, 지금 이 자리에 있으나 할 것 없습니다. 어디에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 意識이 얼마만큼 맑은가에 따라서 人間 程度 맑으면 이 大氣圈 속에서 고생만 하는 것이고, 더 맑으면 그 때는 저 공거천(空居天)이라는 높은 次元의 世界에서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보조국사 어록에서 말한 것처럼, 本來是佛, 卽 本來 부처이므로 때 묻지 않은 청정무비(淸淨無比)한 自性을 本來로부터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할 데 없이 깨끗하여 한 점도 때 묻지 않은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상(相)으로 볼 때는 이것은 虛妄한 것이지만, 本性稟으로 볼 때는 우리 모두가 이대로 석가모니의 智慧, 예수의 智慧, 공자의 智慧와 같은 無量의 智慧를 갖추고 있습니다. 참선 공부하는 신앙은 이런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本來부터 어느 것과 比校해도, 설사 眞如佛性과 比較한다 해도 전혀 差異가 없는 佛性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佛性 次元에서는 나나 너나 여기 지금 우리는 다 佛性일 뿐입니다. 이 空間이라고 佛性이 아니겠습니까? 空間은 酸素나 水素 等으로 채워져 있는 空間인데, 산소나 수소나 어떤 것이나 모두가 다

本來性稟/本性은 眞如佛性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眞如佛性 次元에서 본다면, 나만을 위해서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나를 위해서 남을 구박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열려서 자타(自他)가 없고(無主客), 天地宇宙에 참말로 있는 것은 空間性도 時間性도 因果律도 超越한 眞如佛性뿐이라고 生覺해야 비로소 참선하는 마음의 준비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확실히 믿을 때만 마음을 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 열고 하는 공부가 참선 공부입니다. 念佛을 하던 呪文을 하든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염불이나 주문이나 명상이나 부처님 공부는 모두가 다 마음 열고 하는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중생이 모르기 때문에 그때그때 중생들의 根機에 따라 이래저래 말씀하신 것이지, 부처님의 참뜻은 時間性, 空間性, 또는 因果律을 超越한 참다운 眞如佛性에 있습니다.

法界, 法性, 여래장(如來藏) 모두가 다 眞如佛性과 같은 뜻입니다. 그러한 法界 道理를 확실히 믿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런 때는 화두를 들어도 좋고, 염불을 해도 무방하고 또는 주문을 외워도 무방합니다.


우리가 本來 부처인 자리를 알았다 하더라도 아직은 해오(解悟), 즉 理致로만 알았단 말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程度로는 生死解脫이 못 됩니다. 그러므로 닦고 닦아서 證悟를 해야 합니다. 佛性光明을 證明하는 그런 깨달음이 되어야 참다운 깨달음인 것이고, 그렇게 되어야 貪欲心도 煩惱도 어리석은 마음인 無明도 뿌리를 뽑습니다. 그렇게 되면 自動的으로 삼명육통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無量하고 不思議한 부처님의 智慧, 眞如佛性의 智慧를 다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眞如佛性은 宇宙의

本來面目인 同時에 삼명육통, 무량한 신통 지혜를 다 갖춘 그 자리입니다. 그렇게 믿어야 그렇게 됩니다.



  바른 인생관

 

초기 경전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교만할 때는 더러 당신 몸을 하늘로 나투셔서 하늘을 걷고 나는 모습 등을 보이셨는데, 그것은 동화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안 믿는 분들께 알려드릴 길이 없어서 답답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정통 조사는 모두가 다 중생이 말을 안 들으면 그냥 신통지혜를 갖추셔서 몸으로 보여주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중생들의 마음을 다 조복시킨단 말입니다. 그런 지혜가 우리한테도 다 분명히 다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런 신통묘지를 갖추고 우리가 참선 공부나 염불 공부를 한다면 그런 도리에 걸음걸음 가까워집니다.


그와 같은 우리 중생들이 무엇 때문에 있지도 않은 그림자 같은 物質 때문에 다투고 싸우겠습니까? 또 권력이나 감투 같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모두가 다 유루(有漏)라고 하는 唯物主義에 病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病 때문에 社會가 混亂스럽고 道德도 피폐했습니다. 그러나 그 病을 고치려면 그저 倫理를 바르게 한다거나 남한테 베풀라는 식으로는 곤란합니다. 그 정도로는 이 총명한 시대에 통하지 않습니다.


根本的으로 바른 人生觀을 지녀야 합니다. 내 生命은 原來 物質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사는 집도 따지고

보면 내 것이 아니고, 내 財産이나 내 權利나 모두가 다 내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事實을 바로 알아야

비로소 社會는 自然스럽게 平等이 되고, 平和스러워지고, 自由롭게 됩니다.


우리는 今生에 나와서 배운 것이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집에서 배운 것이나 학교에서 배운 것이나, 대학에서까지 배웠다 하더라도 모두가 '있다' '없다'고 하는 空間性과 時間性의 範圍 내에서 배웠습니다.


사실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철학하는 사람들 외에는 거의 못 배웁니다. 그러므로 승려가 되어도 '있다'는

生覺을 떠나기 어렵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般若波羅蜜을 못 느끼고는, 般若思想을 왔다 갔다

한다 하더라도 공부가 별로 진전이 없습니다. 過去 前生에 사람으로 있다가 또는 다른 動物로 있다가,

天上에도 있다가 또는 더러 菩薩도 되었다가, 이렇게 돌고 돌다가 今生에 왔는데, 今生에 또한 나쁜 버릇만 많이 배웠습니다. 나쁜 버릇만 많이 심어 놓아서 그 習性을 떼자니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 習性을 뽑아버리기 위해서 기도도 모시고 참선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과 싸울 때 集中的으로 공격을 해야지 싸우다

말다 싸우다 말다 하면 결국은 적이 다시 세력을 만회해 가지고 덤벼 온단 말입니다.


煩惱와 싸울 때도 集中的으로 煩惱를 調伏 받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삼동결제(三冬結制)나 백일기도를 합니다. 공부하는 우리 스님들, 얼마나 소중한 스님들이십니까? 출가하신 스님네들이 모든 人間 가운데 가장 상객(上客)이라 하여 '오호사해위상객(五湖四海爲上客)'이라 하지 않습니까?


在家佛子님들께서는 우리가 工夫도 제대로 못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면 '하나의 아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스님이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젊은 나이에 온갖 五欲을 뿌리치고 스님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삼동 동안, 또 여름 석 달 동안 산문(山門)도 안 나가고 오직 부처님을 지향하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있다, 없다' 하는 나쁜 習性이 별로 많지 않아서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習性이 짙은, 業障이 무거운 중생들은 할 수가 없는 노릇이 스님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出家스님들 가운데는 더러 名實相附하지 못한 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체로 五湖四解爲上客입니다. 중생 가운데 상객입니다. 우리 출가한 상객들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최상의 도리인 '심즉시불(心卽是佛)', 즉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 즉 마음과 중생과 부처의 이 셋이 원래 조금도 差異가 없다는 도리를 증명해 보이도록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宇宙에는 오직 부처님 하나일 뿐입니다. 부처님 一元主義입니다. 오직 佛心일 뿐인 것입니다. 物質은 중생이 잘못 보아서 상(相)을 보고 物質이라 하는 것이지, 瞬間마다 變化해 마지않는 것이 物質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스님네는 '物質은 없다'는 生覺을 꼭 하시고 공부를 해야 할 것이고, 우리 재가불자님들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을 依持해서 나올 때 우리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는 中陰界에서 식(識)으로 헤매다가 父母님

연(緣)을 따라 胎中에 들어가서 이렇게 人間이 되었습니다. 죽은 뒤에 우리 識은 識대로 갑니다.

우리 몸은 地水火風  四大가 각각 지(地)는 地대로, 수(水)는 水대로, 화(火)는 火대로, 풍(風)은 風대로,

酸素는 酸素대로, 水素는 水素대로 다 흩어지고 맙니다. 지금 이 몸은 前生이나 來生에는 分明히 없습니다. 이런 道理는 우리가 대체로 알지만, 이대로 공(空)인 줄은 잘 모릅니다. 이대로 空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物質이 그대로 空이라 하여 '色卽空'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마음만 열어서 諸法이 空하다는 道理를 안다면 걸림이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공부는 순풍에 돛단배입니다. 우리 사부대중들께서도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虛妄한 空이라고 먼저 아셔야 합니다. 虛妄하다고 해서

어버이에 대한 도리를 함부로 한다거나 또는 게으름 부린다거나 하는 것은 空道理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因緣은 所重한 것입니다. 因緣 따라서, 모든 중생이 成佛하기 위하여 最善을 다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實相道理를 瞬間 찰나도 안 여의고 공부하기 위해서 염불이 있고 주문이 있습니다.

觀世音菩薩이나 阿彌陀佛이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實相道理를 안 여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話頭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가 무엇인가[如何是佛]?"나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인가

[如何是祖師西來意]?" 또는 本來面目이 무엇인가[如何是本來面目]?"와 같은 話頭는 모두

우리가 眞如佛性의 道理를 깨우칠 수 있도록 이래저래 서술된 方便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선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참말로 알았으면 가만히 묵조(默照)해서 그대로 비춰 보아도 무방합니다. 本體性, 根本 眞如佛性자리만 여의지 않으면 念佛을 해도 선(禪)이요, 가만히 비추어 冥想을 해도 禪인 것이고, 話頭를 疑心해도 禪입니다. 물론 참선 공부에는 문자와 이치로만 알고, 참답게 닦지 않는 문자선(文字禪)도 있고, 자기 마음이 얼마만큼 밝아 있는가, 혹은 내 마음이 얼마만큼 닦여 있는지도 모르면서 하는 암중선(暗中禪)도 있습니다. 그러한 잘못된 참선도 있습니다.


공부할 때는 無數히 많은 境界가 나옵니다. 成佛까지 단박에 벗는 분도 있겠지만, 그런 것은 특수한 경우이고, 석가모니부처님도 육 년 고행을 하셨듯이, 우리 중생들이야말로 오랜 세월 동안 닦고 닦아 習氣가 녹아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단박에 되기는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過程에서 無數한 境界가 나옵니다. 더러는 기쁘고 더러는 부처님 같은 모양도 나오고, 더러는 광명도 비춥니다. 그런 모양들은 모두 다 虛相입니다.


내 몸 自體가 天地宇宙의 眞如佛性과 하나가 되기 前에는 모두가 虛相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境界가

오던 간에 實相이 아니라고 느껴야 합니다. 그렇게 느낀다고 生覺할 때는 특별히 스승도 필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꼭 마음을 훤히 열어버려서, 정말로 習氣를 녹여서, 眞如佛性자리를 한사코 證明하실 것을 기원하며 부탁드립니다. 社會에 參與를 한다 하더라도 나나 너나 모두가 다 하나인 本質자리, 本性稟자리를 깨닫는 데에다 역점을 두는 것이 참다운 사회참여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根本的인 社會病理를 除去할 수 있습니다.


共産主義가 사회참여를 못했습니까? 사회주의가 사회참여를 못했습니까? 함부로 참여하면 날뛰기만 하는 결과가 됩니다. 아무 도움도 못 됩니다. 본질적으로 내 자성이 무엇이며, 우주의 본질은 또 무엇인가 하는 것, 즉 우주는 모두 다 진여불성의 생명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자리를 깨닫기 위해서 나가는 길이면 다 참다운 사회참여가 됩니다. 설사 선방에 있든, 자기 방에서 명상만 하고 있든, 또는 사회에 나가서 기치를 들고 이런저런 자기주의(主義)를 표방하고 운동권이 되든 그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문제는 진여불성 자리, 우주의 본래성품 자리를 분명히 자기가 깨닫고자 애쓰고, 또는 만 중생이 깨닫도록 하고자 하는 그 마음을 지닐 때는 농장에 있으나 회사에 있으나 공장에 있으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진정한 사회참여입니다.


이렇게 해서 꼭  今生에 위없는 大道를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관세음보살.


<불기 2535년 11월, 태안사 동안거 결제법회>  

 

 

부처님 위신력(威神力) : 사지(四智) 삼명육통(三明六通) 여래십호(如來十號)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부처님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위신력(威神力, 지혜능력智慧能力)을 말하는 것은 끝이 없다 한다

부처님 위신력(威神力) -

사지(四智) 육신통(六神通) 여래십호(如來十號)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 사지(四智)

번뇌에 오염된 식(識)을 변혁하여 얻은 네 가지 청정한 지혜.

(1) 성소작지(成所作智) : 중생제도하는 데 걸림없이 자재한 방편 지혜. 즉, 이 지혜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을 모두 성취함으로 이와 같이 말함.

(2) 묘관찰지(妙觀察智) : 모든 중생의 업과 근성 등을 미묘하게 보는 지혜. 즉, 이 지혜는 모든 현상을 잘 관찰하여 자유 자재로 가르침을 설하고 중생의 의심을 끊어 주므로 이와 같이 말함.

(3) 평등성지(平等性智) : 모든 법의 평등여일(平等如一)한 모습을 보는 지혜. 즉, 이 지혜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떠나 자타(自他)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을 일으킴으로 이와 같이 말함.

(4) 대원경지(大圓鏡智) : 모든 법을 통달하여 원만하게 비추어 보는 지혜. 즉, 이 지혜는 마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내는 크고 맑은 거울처럼, 아뢰야식에서 오염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함.

 

* 육신통(六神通, 삼명육통三明六通)

세 가지 지혜와 여섯 가지 신통력.

수행으로 갖추게 되는 여섯 가지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1) 천안통(天眼通) :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2) 천이통(天眼通) :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

(3) 타심통(天眼通) :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

(4) 숙명통(天眼通) : 나와 남의 과거, 전생을 아는 능력.

(5) 신족통(天眼通) : 자유자재로 몸을 변화시키거나 불가사의한 힘을 나툴 수 있는 능력

(6) 누진통(天眼通) :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

천안통의 지혜인 천안명(天眼明), 숙명통의 지혜인 숙명명(宿命明), 누진통의 지혜인 누진명(漏盡明)의 세 가지를 특히 3명이라고 한다.

 

* 여래십호(如來十號)

여래십호(如來十號) : 부처님의 위대한 덕성을 열가지의 명호로 부르는 말.

(1) 여래(如來): 진여(眞如,眞理)의 세계에서 오신 분이란 뜻으로 진리의 세계에서오시고 진리를 여실히 깨달으신 분.

(2) 응공(應供): 응수공양(應受供養)의 준말로 남의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

(3) 정변지(正遍知): 모든 법에 대하여 바르고 두루한 지혜를 가진 분.

(4) 명행족(明行足): 명은 지혜를, 행은 실천을 의미하여 지혜와 실천을 두루 구족하신 분.

(5) 선서(善逝): 사바세계에서 진리의 세계로 가신 분으로 모든 중생의 갈 길을 명확하게 밝히신 분.

(6) 세간해(世間解): 일체 세간의 모든 것를 잘 알아서 중생을 구제하시는 분

(7) 무상사(無上士): 영원한 광명, 영원한 진리를 체득하신 부처님은 세간과 출세간에서 가장 높으신 분

(8) 조어장부(調御丈夫): 지혜, 자비를 갖춰서 적절한 말과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하시는 분

(9) 천인사(天人師): 천인교사(天人敎師)라고도 하며, 육도중생을 무한한 행복, 영원한 광명으로 인도하는 교사와 같은 분.

(10) 불세존(佛世尊): 복덕, 지혜를 다 갖추시고 중생에게 베푸시므로 세상 사람들이 가장 존귀하게 생각하는 분. 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여래십호를 여래십일호(여래11호)로 말할때는 불세존을 여래(如來)와 불(佛)을 나누어 말하기도 한다.

 

 

*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 ① 부파불교 십팔불공법 ② 대승 십팔불공법

=십팔불공불법(十八不共佛法)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십팔대구법(十八大具法)

=십팔대공법(十八大共法)

부처에게만 있는 공덕(功德)으로 이승(二乘)이나 보살(菩薩)들에게는 공동(共同)하지 않는 열 여덟의 공덕.

 

< 1 > 부파불교 십팔불공법(부파 불교에서 설함)

* 십력(十力)

(1)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 : 이치에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을 분명히 구별하는 능력.

(2)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 : 선악의 행위와 그 과보를 아는 능력.

(3)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 모든 선정(禪定)에 능숙함.

(4)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 : 중생의 능력이나 소질의 우열을 아는 능력.

(5)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 : 중생의 여러 가지 뛰어난 판단을 아는 능력.

(6)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 : 중생의 여러 가지 근성을 아는 능력.

(7)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 : 어떠한 수행으로 어떠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지를 아는 능력.

(8)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 : 중생의 숙명을  여실히 아는 지력.

(9) 사생지력(死生智力) : 중생이 죽어 어디에 태어나는지를 아는 능력.

(10) 누진지력(漏盡智力) : 일체의 번뇌(漏)를 모두 소멸시키는 능력.

 

* 사무소외(四無所畏) = 사무외(四無畏)

부처가 가르침을 설할 때, 누구에게도 두려움이 없는 네 가지.

(11) 정등각무외(正等覺無畏) :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었으므로 두려움이 없음.

(12) 누영진무외(漏永盡無畏) : 모든 번뇌를 끊었으므로 두려움이 없음.

(13) 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 : 끊어야 할 번뇌에 대해 설하므로 두려움이 없음.

(14) 설출도무외(說出道無畏) : 미혹을 떠나는 수행 방법을 설하므로 두려움이 없음.

 

* 삼염주(三念住)

(15) 제일염주(第一念住) : 중생의 공경을 받아도 기뻐하지 않고 바른 기억과 바른 지혜에 안주함.

(16) 제이염주(第二念住) : 중생의 공경을 받지 않아도 근심하지 않고 바른 기억과 바른 지혜에 안주함.

(17) 제삼염주(第三念住) : 어떤 중생에게는 공경 받고 어떤 중생에게는 공경 받지 않아도 기뻐하거나 근심하지 않고 바른 기억과 바른 지혜에 안주함.

 

* 대비(大悲)

(18) 대비(大悲) : 항상 중생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함.

 

< 2 > 대승 십팔불공법(대승에서 설함)

(1) 신무실(身無失) : 몸으로 짓는 행위에 허물이 없음.

(2) 구무실(口無失) : 입에서 비롯되는 말에 허물이 없음.

(3) 염무실(念無失) : 기억이나 생각에 허물이 없음.

(4) 무이상(無異想) : 모든 중생에 대해 평등한 마음을 가짐.

(5) 무부정심(無不定心) : 중생의 산란한 마음을 없애 줌.

(6) 무부지이사심(無不知已捨心) : 중생을 모른 체 내버려 두지 않고 구제함.

(7) 욕무감(欲無減) : 중생을 구제하려는 의지가 줄어들지 않음.

(8) 정진무감(精進無減) : 수행에 퇴보가 없음.

(9) 염무감(念無減) : 기억력이 감퇴하지 않음.

(10) 혜무감(慧無減) : 지혜가 쇠퇴하지 않음.

(11) 해탈무감(解脫無減) : 모든 집착을 떠난 해탈의 경지에서 퇴보하지 않음.

(12) 해탈지견무감(解脫知見無減) : 모든 해탈을 명료하게 알아 부족함이 없음.

(13) 일체신업수지혜행(一切身業隨智慧行) : 모든 행위는 지혜를 수반함.

(14) 일체구업수지혜행(一切口業隨智慧行) : 모든 말은 지혜를 수반함.

(15) 일체의업수지혜행(一切意業隨智慧行) : 모든 생각은 지혜를 수반함.

(16) 지혜지견과거세무애무장(智慧知見過去世礙無障) : 과거세의 모든 것을 알아 막힘이 없음.

(17) 지혜지견미래세무애무장(智慧知見未來世無礙無障) : 미래세의 모든 것을 알아 막힘이 없음.

(18) 지혜지견현재세무애무장(智慧知見現在世無礙無障) : 현재세의 모든 것을 알아 막힘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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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 사랑으로 - 여행

 

 
 
행복과의 커피 한 잔
 
- 엔젤트리
 
 
햇살 한 줌.
음악 한 소절.
나뭇잎 하나.
 
넘실대며 다가오는 향기로운 바람  
그 모든 정경속에서의 커피한잔
 
숨쉴때마다 희망을 간직한다면
숨쉬는  모든 순간이 행복입니다.
 
희망이 곧 행복입니다.


 
느린날의 행복편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