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수행법 특강/봉은사

2014. 9. 3. 17:4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발심수행장·수행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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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부터 12월까지

월간 봉은 판전에

'심출가, 생활수행'이라는 제목으로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기도 수행하는 방법에 대해 연재를 시작합니다.

 

목탁소리 지대방 카페에

함께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법우님들의 생활 속 기도수행에 작은 지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봉은판전의 지면이 좁은 관계로,

원래 적어 놓았던 글을 축약하여 제출하였으나,

목탁소리 지대방에는

본래 적어 놓았던 글 원문 전체를 게재하여

보다 알찬 지침이 될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법우님들의 일상 생활 속

기도수행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서원합니다.

 

 

 

 

봉은판전 특집 '심출가, 생활수행'

수행의 개관 - 수행은 무엇이고, 왜 하는가?

 

수행은 왜 하는가?

 

불자들이 타종교 신자와 다른 점이라면 무엇보다도 수행을 한다는 점일 것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수행을 하고 정진을 한다. 일상적으로도 우리는 도반들을 만날 때면 수행은 잘 되어가고 있는지, 어떤 수행을 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묻곤 한다. 그러나 정작 수행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나, 혹은 구체적인 수행방법에 대해서는 궁금한 것들이 많아 보인다.

수행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먼저 왜 수행을 해야 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설이 담겨 있는 아함경, 니까야 경전에서는 왜 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까? 이것에 대한 아름다운 가르침이 바로 사성제에 담겨 있다.

우리는 왜 수행을 하는 것일까? 괴롭기 때문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생노병사의 사고와 원증회고, 애별리고, 구부득고, 오음성고를 포함한 팔고라고 하는 인생 근원의 괴로움이 있다는 것은 불자라면 가장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즉 현실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이다. 현실 삶을 보니까, 순간 순간의 즐거움과 기쁨 또한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삶 전체를 놓고 통찰해 보았더니 누구나 언젠가는 늙고 병들고 죽을 수밖에 없는 괴로움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성제다.

괴로운 것이 올바른 통찰이라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사성제에서는 멸성제를 통해 괴로움에서는 누구나 벗어날 수 있으며, 괴로움이 모두 소멸한 이상적인 멸성제, 즉 열반의 상태를 누구라도 얻을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로 그렇게 괴로움에서 벗어난 열반을 얻기 위한 실천의 방법을 설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도성제다. 도성제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현대화되어 정착된 용어로 설명하자면 수행인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붓다의 통찰

 

이상에서 설명한 바대로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아셨고, 괴로움에서 벗어난 열반의 길에 도달하셨으며, 괴로워하는 중생들이 부처님처럼 모두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실천 수행의 방법을 설해주셨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이 모든 고를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으실 수 있었던 구체적인 방법과 통찰을 설명해 주셨으니, 그것이 바로 집성제다. 즉 집성제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괴로움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을 부처님께서는 십이연기로써 살피셨다. 즉 특정한 한두 가지의 원인이 괴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12가지 인연의 고리가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인연들이 화합함으로써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괴로움이라는 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그 어떤 실체적인 힘인 줄 알았는데, 연기적으로 살펴보았더니 다만 인연 따라 꿈처럼 잠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괴로워하는 주체인 또한 연기적으로 살펴보니 다섯 가지 오온의 모임일 뿐이며, 그 오온의 요소들 또한 제각기 무아였다. 우리는 보통 괴롭다고 하면 내가 괴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괴로운 가 진짜가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괴롭다고 하는 감각이나 느낌 또한 사실은 인연 따라 생겨나는 상대적인 것일 뿐 실체가 아니다.

괴로움이 일어난 원인 또한 십이연기에 의하면 무명에 기인한다. 이 말은 진짜로 괴로운 것이 아니라 잠시 어리석음에 가려 괴롭다고 착각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나에게 욕 하는 소리를 듣고 며칠 동안 괴로움에 빠져 있었는데, 나중에 자세히 알고 보았더니 그 때 그 욕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님을 알았다고 해 보자. 그런데 이 사람은 나에게 한 말인 것으로 오해하고, 즉 분명히 지혜롭게 알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에 며칠 동안 공연한 괴로움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올바로 알고 났더니 그것이 더 이상 괴로움이 아닌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실 우리가 괴롭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은 어리석음에서 기인한다. 모르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지 알고 나면 괴로울 것이 하나도 없다. 십이연기에서는 무명과 함께 대표적인 괴로움의 원인으로 집착과 애욕을 설하고 있다. 즉 어리석기 때문에 (육입)’대상(명색)’도 행위()도 의식()도 괴로운 대상과의 접촉도, 괴로운 느낌도, 애욕과 집착도 그 모든 것이 실체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다만 인연 따라 신기루처럼 잠시 잠깐 모였다 사라지는 것일 뿐인데, 무명에 가려있으므로 진짜인 것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어리석음 때문에 진짜로 오인하니 그 모든 것에 집착하게 된다. 가짜인 줄 알면 집착할 이유가 없지만, 진짜인 줄 알면 그것을 내 것으로 가지려고 집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집착이란 곧 과도하게 좋아하거나 과도하게 싫어하는 것을 말한다. 즉 좋거나 싫은 쪽의 극단에 치우치게 되면 좋은 것은 가지려고 집착하고, 싫은 것은 거부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애욕()과 거부로 인해 만들어진 집착()은 곧 분별심과 판단을 생겨나게 함으로써 더욱 더 집착하게 만든다.

이렇게 무명과 집착으로 인해 우리는 그 모든 가짜들을 진짜인 것으로 오해하여 판단하고 분별하면서 또 붙잡아 집착함으로써 괴로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라는 존재와 내가 느끼는 괴롭다는 마음 또한 사실은 연기된 것이며, 고정된 실체가 아닌 무아이고 대승불교 용어로 설명한다면 공한 것이다. 그렇기에 집착할 것이 없고, 극단적으로 좋거나 나쁘다고 분별할 것이 없는 중도로써 보아야 한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정견)이 곧 치우침 없는 중도로 보는 것이고, 그렇게 분별 없이 보는 것이야말로 곧 자비행이다. 즉 자비심이란 좋아하는 것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좋고 싫은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대평등심으로 분별 없이 바라보는 데서 오는 무한한 사랑이다. 어느 한 쪽만을 좋아하는 것은 애욕이지 자비가 아니다. 참된 자비는 무분별의 관찰에서 온다.

그러면 이제 괴로움을 통해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의 핵심이 다 나왔다. 즉 연기, 무아, 중도, 자비, 정견, 정념(바른 관찰)이야말로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 말을 조금 더 정리해 본다면,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연기와 무아, 중도, 자비를 깨달으셨다. 사성제의 도성제가 곧 중도와 팔정도, 사념처를 의미하는데서 보듯이, 연기와 무아와 자비는 곧 중도로 실천되어진다. 즉 우리가 수행이라고 알고 있는 도성제의 핵심은 곧 중도와 팔정도와 사념처를 말하는 것이다.

 

불교 수행법의 핵심

 

그러면 조금 더 쉽게 초기불교 수행법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중도와 팔정도, 사념처가 의미하는 실천적인 의미를 살펴보자. 중도는 양 극단에 치우침 없고 분별없는 행이다. 양 극단의 판단이나 분별들은 곧 집착을 가져오고, 실체화시킨다. 좋거나 싫은 사람이라는 극단적 판단이 심한 사람일수록 좋은 사람은 더 곁에 두려고 집착하고, 싫은 사람과는 더욱 멀어지려고 애를 쓰게 마련이다. 그렇게 집착하고 애쓴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을 실체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실체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아와 연기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중도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은 곧 무분별과 무집착으로 이어진다. 참된 중도는 양 극단으로 몰아가거나 해석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처럼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팔정도의 핵심 수행법인 정념이고, 그러한 정념을 통해 바르게 보는 견해가 생기는 것을 정견이라고 한다. 정념을 보다 구체화시킨 수행법이 바로 사념처다. 정념, 즉 바르게 관찰하는데 있어서 네 가지 대상에 집중하여 바르게 관찰한다는 것이 사념처인 것이다.

조금 더 쉽게 단순화하면 중도, 팔정도, 사념처의 실천은 한 마디로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 분별없는(중도) 관찰(사념처)’인 것이다. 도성제라고 알고 있는 중도, 팔정도, 사념처는 곧 분별없는 관찰이다. 결론적으로 수행이란 곧 분별없는 관찰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분별없이 관찰하라고 하면 잘 집중이 안 되고, 관찰이 안 된다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보다 쉽게 관찰을 이어가기 위해 네 가지 대상을 정해서 그 네 가지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찰하도록 사념처를 설해 주셨다. 의식을 몸에 모아 집중하여 몸을 관찰하고,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을 관찰하고, 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관찰하려면 어느 한 가지 대상에 집중을 해야 한다. 일상적일 때 우리는 끊임없는 생각과 분별과 비교, 판단들이 멈추지 않기 때문에 그 수많은 생각들을 멈추게 하기 위해 특정 대상에 집중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집중의 수행을 팔정도에서는 정정이라고 하며, ‘멈출 지()’자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바른 집중과 바른 관찰이야말로 모든 불교 수행의 핵 중의 핵이다. 이 두 가지의 중요성으로 인해 지관겸수, ‘정혜쌍수니 하는 말들이 나왔다.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곧 지관, 곧 정정과 정념을 말한다.

불교 수행법의 핵심인 지관(止觀)이 바로 멈추고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멈춘다는 것이 바로 분별을 멈추고 생각과 번뇌 망상을 멈추는 것이다. 즉 멈추고 관찰하는 지관 수행이 바로 분별없는 관찰을 말한다.

이처럼 불교 수행은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분별없이(中道) 관찰()하는 것을 통해 무아와 연기, 중도와 공, 자비를 깨닫는 구조를 가진다.

 

불교 수행의 공덕

 

불교 수행의 핵심인 중도와 팔정도를 실천하여 열반을 얻기 위해 구체적으로 닦아야 하는 수행법을 초기불교 경전인 대념처경에서는 사념처라고 설함으로써, 사념처야말로 중도와 팔정도라고 하는 불교수행의 가장 중요한 실천수행법임을 설파하고 있다.

대념처경에서는 비구들아, 모든 중생들의 청정을 위해,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해,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팔정도에 이르기 위해, 열반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유일한 수행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사념처다.”라고 함으로써 사념처야말로 괴로움을 없애고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수행이라고 설하고 있다.

또한 같은 경에서 사념처는 일곱 가지 이익과 공덕을 가져온다고 설하고 있다. “첫째는 번뇌의 제거에서 오는 마음의 청정, 둘째는 슬픔과 근심의 극복, 셋째는 비탄의 극복, 넷째 육체적 고통의 극복, 다섯째 정신적 고뇌의 극복, 여섯째 네 가지 도과 성취, 일곱 번째로 열반의 성취라고 설하고 있듯이, 번뇌와 모든 고를 극복하여 결국 열반에 이르는 수행법이다.

 

많은 수행법이 나온 이유

 

이처럼 불교 수행은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분별없이 관찰하는 것을 통해 무아와 연기, 중도와 공, 자비를 깨닫는 구조를 가진다. 초기불교는 바로 그 특정한 대상을 신수심법이라는 사념처에 두었다. 그러나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그 집중하는 대상은 조금씩 달라진다. 크게 보면 신수심법 그대로지만 관찰의 집중 대상이 보다 구체화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수행이라고 알고 있는 그 모든 것들 즉 절, 염불, 간경, 진언 다라니, 호흡관, 위빠사나, 간화선, 묵조선 등 그 모든 수행법들 또한 사실은 분별없는 관찰의 대상에 따른 수행법이며, 중도와 팔정도, 사념처에 이르는 길이다.

그냥 관찰하라고 하면 도대체 어디를 관찰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카메라도 목표가 없으면 초점이 맞지 않고, 높이뛰기 선수도 목표가 없으면 제대로 넘지 못하는 것처럼, ‘분별없는 관찰또한 그 관찰할 목표와 대상이 분명하게 서 있으면 더욱 집중하기 쉽다.

예를 들어 염불수행은 그 관찰대상이 바로 염불이다. 불보살님의 명호를 외움으로써 염불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더욱 더 집중하고 관찰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염불을 하면서 그저 입으로만 불보살님의 명호를 외운다면 그것은 수행이라 할 수 없다. 염불을 하면서 그 염불하는 소리를 똑똑히 관찰하고,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지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염불하면서 온갖 생각과 판단, 분별들은 내려놓고 분별없이 염불하는 소리를 관찰하거나,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지를 관찰하는 것이 바로 참다운 염불수행이다. 염불을 통해 분별없이 관찰하는 도성제를 이루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절이나 간경, 진언, 다라니, 호흡관, 간화선 등도 근본에서는 마찬가지다. 절을 하면서 온갖 생각을 내려놓고 분별을 쉬고 절하는 몸의 동작에 집중하여 관찰하고, 간경이나 진언, 다라니를 외우면서 외우고 있는 것을 분별없이 관찰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념처 중 신념처에서 특히 강조하셨던 호흡관 또한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분별없이 관찰함으로써 지관이 더욱 깊어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수행 원리에 따라, 불교 역사 속에서 수많은 수행법들이 발전하며 꽃을 피웠지만 그 열매이자 결실로써 드러난 중국불교의 독특한 수행법이 있으니 바로 간화선이다. 간화선은 중국에서 대혜종고 선사를 통해 확립되었고, 한국불교에서 그 명맥을 잘 유지하고 있는 수행법이다. 이러한 간화선 또한 부처님의 수행법과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근본 원리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면서도 상근기의 수행자들을 위한 수행법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간화선에서 간()볼 간자로 이 또한 본다는 것이다. 그저 자신의 본성을 보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려워하기에, 화두를 주고 그 화두를 의심함으로써 그 의심 자체를 보도록 하는 것이다. 화두를 통해 정정과 정념, 즉 지관의 수행이 이루어진다. ‘분별없는 관찰이 생겨나는 것이다.

 

생활수행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생활수행이란 무엇일까? 말 그대로 생활 속에서 행하는 실천수행이다. 보통 사람들은 불교의 수행은 선방의 스님들이나 특별히 근기가 높은 이들만의 전유물 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전혀 그렇지 않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행이란 고에서 벗어나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기 때문이다. 즉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괴로움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수행이 필요하다. 괴로움을 없애고 행복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생활수행이라고 이름 붙인데는 일상을 벗어나 한적한 선방 같은 곳에서 몇 시간씩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어야만 수행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수행은 현장 속에서 더욱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이라는 생생한 현실 속에서 경계와 부딪칠 때 괴로워지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삶이 벌어지고 있는 공간이 곳 일상생활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특정한 안거 기간에만, 혹은 일주일에 절에 가 있는 동안에만, 혹은 하루 중 새벽에 일어나 예불하고 좌선하는 시간에만 수행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짧은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가장 평범하고도 우리의 삶이 벌어지는 대부분의 현장, 지금 여기라는 현실을 놓치는 것이 된다.

수행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직 수행은 지금 여기라는 생생한 현존의 문제다. 그것이 바로 수행이 진정으로 필요한 시공이다. 별도로 준비된 아란냐(고요한 수행처)나 선방, 혹은 특별한 시간에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매 순간의 지금 여기야말로 수행이 필요한 곳이다. 그렇기에 모든 수행은 곧 생활 수행아님이 없다. 선방이나 절에서 한 수행의 힘이 생활 속에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른 수행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생활 수행일까? 수행은 곧 분별없는 관찰이라고 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매 순간 생각하고, 판단하고, 비교하며 무수히 복잡하게 돌아가는 분별을 멈추고 관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관찰한다는 것은 곧 지금 여기에 깨어있다는 말이고, 매 순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생각이나 분별을 한다는 것은 곧 마음이 과거나 미래로 달려간다는 것을 뜻한다. 생각은 언제나 과거나 미래와 연동된다. 그럼으로써 지금 여기라는 현재에 존재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야 하고,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 단 한 순간도 지금 이 순간속에 그저 존재하는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행위에서 존재로의 전환, 'doing'에서 'being'으로의 전환, 그것이 바로 수행이며, ‘분별없는 관찰이다.

분별하고’, 판단하고’, 하고’, 성취하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우리는 무언가를 하고있는 상태에 있다. 하고있는 상태는 과거나 미래이기 때문에 지금 여기라는 현재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수행이란, ‘분별없는 관찰이란 곧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면서 과거나 미래를 기웃거리던 삶에서, 무언가 하기를 멈추고() 곧장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함으로써 지금 여기에 어떤 보배가 주어져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숲 길을 산책하면서 고요한 시간을 즐기는 것,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는 것,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감동하는 것, 어린 아이의 천진한 눈망울에 관심을 가지는 것 등과 같이 일상 생활 속에서 더 많이 행위하기 보다, 더 많이 느끼고 누리고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하나의 생활수행이다. 끊임없이 TV를 켜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시간 대신에 내 몸과 마음의 현재 상태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것이다.

 

생활수행과 집중수행

 

이상에서와 같이 생활 수행의 핵심은 분별없는 관찰즉 지관에 있다. 편의상 이를 다시 집중수행과 생활수행으로 나눌 수 있다. 집중수행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정해두고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며, 생활수행은 말 그대로 매 순간, 삶의 현장 곳곳이 다시말해 지금 여기라는 모든 순간이 바로 수행의 순간임을 말하는 것이다.

집중수행은 선방이나 절에 가서 행하는 수행도 포함될 수 있고, 집에서 새벽이나 잠들기 전, 혹은 특정 시간을 정해 놓고 행할 수도 있다. 수행방법 또한 분별없는 관찰이 될 수 있는 모든 방편수행이 될 수 있다. 즉 매일 새벽 108배 절 수행과 금강경 독송 7독을 한다거나, 매일 잠들기 직전 1시간씩 좌선을 하는 것 또한 집중수행이다.

생활수행은 말 그대로 생활 속에서 언제나 늘 깨어있는 마음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쉽게는 ‘2분명상이나 호흡관’, 혹은 사념처에서 말하는 몸의 관찰, 느낌 관찰, 생각 관찰 등도 될 수 있다.

이처럼 생활 속에서 심출가한 수행자라면, 매 순간 생활수행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그 뿐아니라 매일 특정한 시간을 정해 자기 나름의 수행법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생활수행의 종류

 

다음 달부터 본격적으로 심출가한 재가수행자들이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생활수행법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순서는 먼저 준비수행이라고 이름 붙인 귀의, 참회, 발원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수행법의 장에서는 먼저 초기불교의 수행법인 중도, 팔정도, 사념처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고, 이어서 대승불교의 수행법인 간경, 염불, 주력 다라니, , 간화선 등의 수행을 어떻게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닦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활 수행에 대한 결론으로써 보다 구체적인 생활 속 수행방법과 다양한 수행법들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 현대인들에게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수행법은 없는지, 불교의 수행법이 현대 사회를 어떻게 바꾸고 변화시키고 있는지 등에 대해 전체적으로 살펴보며 연재를 이어갈 예정이다.

 

 

준비 단계의 수행 - 귀의, 참회, 발원

 

 

먼저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기에 앞서 모든 수행의 바탕이 되는 준비 단계의 기초 수행이 있으니 귀의와 참회 그리고 발원이다. 귀의는 내가 가야 할 수행의 길에서 어느 곳에 의지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참회는 본격적인 수행이 시작되기 전에 과거에 지어 온 죄업을 참회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마음을 정화함으로써 수행의 토대를 갖추기 위한 수행이며, 발원은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원력과 서원을 가지고 수행을 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방향설정이자 목표를 분명하게 해 준다.

 

(1) 귀의

 

 

불자의 첫걸음, 삼귀의

 

불교 최초로 재가 신도가 된 야사의 아버지가 부처님께 법을 듣고 모든 번뇌가 다하고 법의 눈이 밝아져 부처님께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씀드린다.

이제부터 저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하겠사오니, 바라옵건대 우바새가 되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사분율

또한 부처님께서는 먼 고장으로 전법의 여행을 떠나는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신다.

비구들이여, 나는 너희에게 가는 고장마다 출가시키고 구족계를 줄 것을 허락한다. 출가하여 구족계를 줄 때는 먼저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위옷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비구의 발 밑에 절한 다음 꿇어 앉아 합장한 뒤 이렇게 말하게 하여라.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 다시한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 또 다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율장 대품1

이와 같이 출재가자를 막론하고 부처님께서는 처음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믿고 따르고자 마음을 낸 이들에게 가장 먼저 삼귀의를 다짐하도록 이끌어 주셨다. 귀의야말로 불자가 되는 첫걸음인 것이다.

 

삼귀의의 의미

 

삼귀의는 불법승(佛法僧) 삼보에 귀의하는 의식이다. 삼보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이겠지만, 특히 육조 혜능은 육조단경에서 자성(自性)의 삼보에 귀의하나니, 불이란 깨달음이요, 법이란 바름이며, 승이란 청정함이라고 하였고, 또한 경에 오직 자신의 부처님께 귀의한다하였고[只卽言自歸依佛:화엄경 정행품]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하지 않았으니, 자성에 귀의하지 않는다면 돌아갈 곳이 없다고 설함으로써, 삼보란 곧 자기 내면의 완전성인 본래 깨달음, 본래 바른 법, 본래의 청정함임을 설하고 있다.

또한 대승기신론에서는 귀의를 목숨 바쳐 삼보에 귀의 한다고 하여 귀명(歸命)이라고 말하고 있는 바, 이를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에서 귀명은 근원으로 돌아감을 뜻한다고 하였고, 이는 곧 목숨을 다해 근원의 자리인 일심(一心)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 모든 중생들은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살고는 있지만, 사실 우리의 근본은 무명에 가린 어리석은 중생의 모습이 아니라 거룩한 삼보가 거하는 본래 부처로써 바른 법이 이미 갖추어져 있고 본래부터 청정한 자성 삼보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본질은 완전성을 갖춘 자성삼보의 존재다. 본 바탕은 본래부터 부처요 근원의 한마음 즉 일심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생 일대의 과제는 본래 나왔던 자성삼보요 일심인 그 본래자리로 되돌아가는데 있다. ‘목숨을 다해 근원 자리인 일심으로 다시 돌아가야하는 것이다. 이 길은 돌아감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이 새롭게 길을 내어 없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가 나왔던 근원의 자리, 다시말해 생명의 고향이요 본향인 자성삼보로 되돌아 가는 것일 뿐이다.

 

본향으로 되돌아가겠다는 방향설정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이미 깨달아 있다. 다만 무명에 가려 잠시 착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바로 그 무명이라는 착각을 걷어내기만 하면 본래 부처가 드러난다. 귀의와 귀명은 바로 이러한 본래부처로 되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야 할 삶의 방향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성삼보에서 본다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부처가 아닌 적이 없다. 부처와 하나이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진리에서 멀어진 적도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유일한 일은 단지 본래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그 자리에 완전하게 있음을 알아차리고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 모든 것을 그저 본래 있던 대로 되돌려 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되돌아가는 귀의야말로 삶의 행로다.

우리는 애써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거나 없는 열반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본래 구족되어 있는 부처를 드러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기에 귀의는 나 자신이 본래 무능하고 어리석은 중생이 아니라 본래부처라는 무한권능의 마음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그렇기에 귀의는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방향성, 수행의 목표를 설정해 준다. 내가 나온 자리가 바로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인 본래부처요 일심에서 나왔기에 본래 나왔던 그 자리, 그 본향으로 되돌아 가겠다는 삶의 방향설정과 목표를 뚜렷이 해 주는 것이다. 목표가 분명해야 바른 길로 바르게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수행자에게 있어 귀의는 수행의 첫 걸음이며, 본격적인 수행으로 가는 근원 바탕의 마음자세라 할 수 있다.

 

귀의는 불자들만의 전유물? NO!

 

이러한 귀의는 불교 신자들만의 전유물일까? 그렇지 않다. 용어를 불법승 삼보에 대한 귀의라고 하다보니, 자칫 불자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이 말에는 일체 모든 인류와 모든 사람들이 가야 할 삶의 방향성에 대한 지혜가 담겨 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보다 이해하기 쉽게 풀어 본다면 자기 자신의 내면에 완전한 지혜와 자비가 담겨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독교 용어로 본다면, 자기 내면에 신성, 영성이 충만하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 내 바깥에 어떤 신과 완전성과 지혜와 힘이 있다고 여기는 마음을 돌이켜, 내가 그렇게 원하고 구하고 꿈꿔왔던 그 모든 진리와 지혜와 완전성과 불성과 신성, 신이라고 알려진 그 모든 근원이 바로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돌이켜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나의 내면에 완전성이 불보(佛寶)가 있고, 그 모든 삶의 지혜와 지침이 내 안에 이미 들어 있으며(법보(法寶)), 나라는 존재는 바로 그 완전한 지혜와 사랑과 완전한 행복과 평화로 가고자 하는, 바로 그 근원적 완전한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 바로 승보(僧寶)의 의미다.

그러니 어찌 삼보귀의가 불자들만의 전유물이겠는가. 이는 일체 행복과 평화와 지혜를 찾고자 하는 모든 존재들이 가야 할 삶의 방향이다.

 

우주로부터 보호받는 길, 귀의

 

귀의는 나마스(namas)에서 유래한 말로, 한역에서는 나무(南無)’라고 음역하는데, 이는 곧 의지처혹은 피난처의 의미를 지닌다. 폭풍과 비바람이 몰아칠 때 안전한 피난처를 구하듯, 고통 바다를 헤매는 중생들에게 불법승 삼보는 안전한 피난처가 될 뿐 아니라, 든든한 의지처가 된다.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게 되면 그 어떤 역경이나 고난이 온다고 할지라도 마음 안에 본래 완전하고 안전한 삼보라는 의지처요 근원적인 공간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그 어떤 외부적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 중심이 서게 되는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불법승 삼보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죽음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이 몸을 맡길 진정한 귀의처이며 그래서 세 가지 보물이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죽음 이후에 수많은 혼란과 혼돈 속에서도 삼보에 귀의한 자는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는 불보살님들의 도움으로 고통 속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이처럼 귀의는 단순히 불자가 되겠다는 맹세를 넘어서서, 내 안에 불법승 삼보라는 또한 불보살과 둘이 아닌 한마음, 우주법계와 둘이 아닌 일심이라는 근원 자리에 내 생명을 바쳐 귀의하는 마음으로써 모든 수행자를 근원에 뿌리내리게 해 준다. 또한 자신의 근원 뿌리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해 주며, 이 우주법계로 나의 근원성품이 본래 부처임을 선포함으로써 귀의한 자를 우주법계로부터 보호받게 해 준다.

실제 마음속에 삼보를 품고 있고, 삼보라는 불법승의 완전성과 지혜와 청정성이 갖추어진 존재임을 스스로 자각하며 규정하고 굳게 믿어 귀의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그 어떤 풍랑과도 같은 삶의 파도 속에서도 든든한 자기중심을 세울 수 있고,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우주법계라는 법신불의 가피와 보호를 받게 된다. 이 보호는 최악의 상황에 처할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놀라운 도움이고 호념이다.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자비로써 100% 완전히 돕고 있지만 우리가 내 스스로 부처인 줄 모르고 중생이라 여기며, 스스로 부족하고 소외된 존재라 여김으로써 가슴을 활짝 열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그 무한한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귀의는 바로 그러한 중생이라는 생각, 어리석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자신의 근원이 무량공덕의 바다인 삼보임을 자각하고 굳게 믿음으로써 나 자신을 부처님께로 활짝 여는 의식이다. 귀의를 통해 가슴을 활짝 열게 되면 비로소 법신 부처님의 무한한 도움과 호념과 자비로운 가피를 온전히 100% 놓치지 않게 받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무한한 자비로운 도움을 스스로 제한하던 삶에서, 온전히 받아들이고 수용할 뿐 아니라, 내가 바로 불법승 삼보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삶으로 전환하는 인생 일대의 대전환이 바로 귀의인 것이다.

 

귀의의 공덕

 

부처님께서 밧지국 중각 강당에 계실 때, 많은 상인들이 타국으로 떠날 준비를 마치고 부처님께 떠나기 전에 곳곳에 있을지 모를 위험과 두려움을 안고 부처님께 법을 청하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너희들은 넓은 벌판을 가다가 두려움이 생겨 놀라고 털이 곤두설 때 부처님을 생각하라. 여래십호를 떠올리며 귀의하는 자는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라. 부처님의 바른 법과 율은 번뇌를 떠나게 하며 지혜에 통달하게 하며 법을 가까이 한 인연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또한 승가를 생각하라. 세존의 제자는 착하고 바르게 나아가며 세상의 복받이시다라고 생각하면 두려움은 곧 없어질 것이다... 이처럼 상인들이여, 너희들이 넓은 벌판으로 가다가 두려움이 생기거든 불법승 삼보를 생각하라잡아함경 권35 염삼보경

또한 증일아함경 권12에서는 세 가지 귀의의 덕이 있으니,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덕이다. 부처님께 귀의하는 덕이란... 일체 중생들 가운데 부처님이 가장 높고 제일이어서 일체 중생이 받들어 섬기나니 이 덕을 갖추면 천상이나 인간의 복을 받는다. 법에 귀의하는 덕이란... 모든 법 가운데서 열반법이 가장 높고 제일이어서 미칠 것이 없으니 천상이나 인간의 복을 받는다. 거룩한 승가에 귀의하는 덕이란... 여러 무리와 여러 종류의 삶들 가운데 여래의 승가 대중이 가장 높고 제일이어서 미칠 것이 없으니 천상이나 인간의 복을 받는다... 첫째로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면 세상에서 가장 높게 되고, 부처님의 법을 섬기면 탐욕과 집착이 사라지며, 거룩한 승가를 받들면 가장 좋은 복밭이 된다. 불법승에 귀의하는 이는 세상에서 으뜸가는 지혜가 생기고, 그 누구보다 좋은 복을 먼저 받으며, 만약 그가 천상이나 인간에 살면 중생들의 올바른 길잡이가 될 것이다.”

제법집요경에서는 삼보에 귀의하는 이들은 천상의 즐거움을 누리고, 깨달음의 과보를 얻게 된다고 하였으며, 출요경에서는 청정한 신심을 가진 이가 있어 여래에게 법을 듣고 착한 뜻을 일으켜 삼보에 귀의하면 부처님의 청정한 계법을 받고, 다함이 없는 큰 공덕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고, 십이인연경에서는 괴로움에서 구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으니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참회를 해야 하는 이유

 

가장 먼저 귀의를 하고 난 뒤에 어떤 수행을 해야 할까? 본격적인 수행에 앞서 수행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어야 한다. 즉 혼탁하고 번뇌로 오염되어 있거나 과거의 죄업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이라면 아무리 수행을 하려고 해도 마음이 고요해 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먼저 참회를 통해 죄의식과 과거세의 업장을 소멸시키게 된다면 청정하고 깨끗해진 마음이 드러나기에 더욱 집중과 관찰이라는 수행에 들어가기가 쉬워질 것이다.

 

일제시대 수월스님은 견성의 방법을 묻는 용성스님께 지난 세상 업장은 무겁고 선근은 약하니 견성하기가 어려우니 대비주를 외움으로써 먼저 업장을 소멸시키라고 하셨다. 용성스님은 아홉달 동안 대비주를 십만번 외우고 났더니 모든 번뇌가 없어지고 마음이 환해졌고, 그런 뒤에 화두를 참구했더니 엿새만에 의문을 풀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수많은 큰스님들께서는 본격적인 수행에 앞서 수행에 장애가 되는 업장을 녹이고 번뇌를 조복받기 위해 다양한 방편수행으로 참회와 업장소멸의 시간을 가졌다.

 

참회란 지난 과거의 잘못과 죄업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반성하고 깨달음으로써 죄의 업장을 소멸하고, 번뇌를 소멸하여 마음을 청정히 하기 위한 기초 수행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수행을 하라고 하면 온갖 번뇌와 잡념, 망상 때문에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곤 한다. 그 수많은 망상과 번뇌가 일어나는 이유는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고 온갖 혼란스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지난 과거에 저지른 죄업이 많은 사람일수록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나 같이 악업을 많이 지은 사람도 수행해서 깨달을 수 있을까하는 의심이 생기고, 때로는 악몽을 꾸기도 하는 등 끊임없이 죄의식과 번뇌망상에 시달린다. 이 죄의식과 죄업을 참회하여 맑히지 않고 앉아서 수행을 한다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헛된 것이어서 시간만 낭비하기 쉽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사람은 먼저 참회기도, 참회수행을 닦아야 한다. 많은 스님님께서 절에 처음 나온 신도님들께 참회기도를 권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죄의 과보에 담긴 의미

 

그러면 참회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죄를 짓는 것과 참회하는 것 사이에 담긴 우주적인 원리를 먼저 살펴보자.

 

죄를 지으면 반드시 그 죗값을 치러야 할까? 부처님이나 혹은 진리는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실까 아니면 벌을 주실까? 사실 진리는, 부처님은 죄 지은 사람을 단죄하는 법칙을 만들지 않았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오로지 대자대비한 사랑으로 용서할 뿐이다.

 

그렇다면 인과응보는 뭐고, 잘못한 사람이 받는 과보는 뭐고, 천벌은 무엇이며, 지옥은 또 무엇일까? 부처님께서는 무한한 자비로써 늘 사랑하고 용서하는 분이라면 인과응보와 죄의 과보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통 사람들은 인과응보의 목적을 단죄 혹은 죄 지은 사람을 벌할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죄 지은 사람은 벌을 받고, 선을 행한 사람은 복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인과응보라는 균형의 법칙이다. 이를 자작자수(自作自受) 혹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다.

 

인과응보를 받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목적은 단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다. 인과응보가 일어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 잘못했으니 당해도 싸다거나, ‘죄를 지었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거나 하는 이유가 이니라, 죄를 지은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참회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인과응보가 일어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주법계는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깨닫게 해 주고 싶기 때문에 그가 깨달을 때까지 그에 합당한 과보를 받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동체대비의 사랑이며, 부모님의 자식 사랑의 매와도 흡사한 방식이다.

 

결과적으로 벌을 받는 것은 똑같은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이것을 깨닫는 것은 삶의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한다면 죗값을 치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이 지혜와 자비라는 그 근원의 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즉 죄업을 지었을지라도 벌을 받기 전에 먼저 그 죄업에 대해 참회하고 깨닫게 된다면 그 죄의 과보를 기계적으로 받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불교에서의 인과응보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기계적으로 무조건 받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깨달았느냐에 따라, 더 크게 혹은 더 작게 받게도 되고, 다른 방식으로 받음으로써, 받지 않는 효과를 얻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소금물의 비유도 이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릇에 소금(죄업)이 가득 담겨 있으면 어떻게든 그 소금물을 다 자신이 먹어야 한다. 그러나 그릇을 크게 키우게 되면 소금물을 계속 마시더라도 크게 짜지 않게 먹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릇을 키운다는 것이 바로 참회와 용서, 보시와 수행을 통해 복덕과 지혜를 증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그 어떤 죄업을 지었더라도 진정한 참회를 통해 업장소멸, 죄업의 소멸이 가능한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자작자수로써 죄업은 받아야 하겠지만 참회를 통해 다르게 익어가게 함으로써 죄업이 소멸되는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참회로 죄가 소멸되는 원리

 

그렇다면 참회를 하면 과거의 죄업이 사라지는 것일까? 천수경에는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라고 함으로써 죄라는 것은 본래 자성이 없어 마음따라 일어난 것일 뿐이라고 한다. 죄의식이라는 마음이 멸하면 죄 또한 소멸한다. 죄와 죄의식이라는 마음 모두 공한 것임을 바로 깨닫는 것이야말로 참된 참회임을 설하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금강경에서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고 했듯이, 꿈과 같고 헛개비와 같으며 물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아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죄업 또한 고정된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죄업을 실체로 여기는 마음이 거짓으로 죄업을 꾸며내는 것일 뿐 실체적인 죄는 있지 않다. 사실 고정된 절대적인 선악이나 옭고 그른 것은 없다. 어떤 나라에서는 죄가 되는 것이 다른 나라에서는 오히려 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요, 전쟁터에서 여러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며, 전부를 죽이면 신이다라고 한 말처럼 선악은 모두 상대적이기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

 

이처럼 선악이나 죄업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면, 우리 마음 속의 모든 죄의식은 실체이고 고정된 죄악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서 만들어낸 허망한 것일 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그 어떤 최악의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진실된 마음으로 참회를 한다면 죄의 업장이 소멸되고 참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설한다. 죄도 선도 모두가 마음에서 만들고 마음에서 소멸시키는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허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실제 대보적경에서는 백천만겁 동안 오래 익힌 번뇌의 업이라도 일실(一實)로 관찰하면 곧 모두 소멸된다고 했고, 제법무행경에서는 만약 보살이 일체중생의 성품이 곧 열반의 성품임을 볼 수 있다면 모든 업장과 죄를 소멸시킬 수 있다고 함으로써, 그 어떤 큰 죄업이라 할지라도 죄의 실체를 바로 관해 볼 수 있으면 죄업이 소멸된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천수경에서는 백겁적집죄 일념돈탕진 여화분고초 멸진무유여라고 하여 백겁이나 쌓아 온 온갖 죄업일지라도 한 생각에 단박에 녹아 없어지나니 마른 풀이 불에 타서 없어지듯이 남김 없이 사라져 자취가 없다고 하였다.

 

구체적인 참회기도 방법

 

참회기도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 또한 정해진 수행법이 있지 않은 것은, 참된 참회란 어떤 방편을 통해서든 죄무자성종심기라는 죄의 실체 없음을 깨닫고, 과거에 지은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앞으로는 더 이상 짓지 않겠다는 분명한 자기 다짐을 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생각 돌이켜 진심으로 참회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그 한 마음으로 곧바로 참회가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보통 불자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참회기도, 참회수행의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가장 대표적으로는 절 참회가 있다. 108배든, 300배든, 1000배든, 절 수행을 하면서 한 번씩 절을 할 때마다 참회합니다라고 외치면서 절을 할 수도 있고, 절 한 번 올릴 때마다 108참회문을 하나씩 읽으면서 참회하는 방법도 있다. 구체적인 죄업이 떠오르는 것은 절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참회를 하고, 구체적으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과거에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업을 진심으로 참회합니다라는 마음으로 참회를 해도 좋다.

 

또한 절을 하면서 천수경에 나오는 십악참회를 하나 하나 외울 수도 있다. 절을 한 번 할 때마다 살생으로 지은 죄업 금일참회 하옵니다를 반복하면서 지난 과거생에 알게 모르게 지은 살생의 죄업을 참회하는 것이다. 혹은 구체적으로 과거에 짐승이나 작은 생명 등을 헤친 기억이 떠오른다면 그 떠오르는 죄업에 대고 살생중죄 금일참회라는 참회문을 독송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절을 하며 참회문을 독송하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죄의식이 올라오지 않고, 그 참회의 항목에 대해 더 이상 거리끼는 마음이 올라오지 않고 고요해지게 된다면, 그 다음의 항목인 투도중죄 금일참회로 넘어가는 식으로 참회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몸으로 짓는 세 가지(살생, 투도, 사음), 입으로 짓는 네 가지(망어, 악구, 양설, 기어), 뜻으로 지은 세 가지(탐애, 진에, 치암)의 죄업을 참회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염불 혹은 다라니 진언을 통한 참회로써, 불보살님의 명호를 외우거나, 참회진언을 외우거나, 대비주(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하면서 참회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좋은 참회기도가 된다. 염불이나 다라니, 진언을 외우면서 마음속으로 참회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염불이나 진언 독송, 혹은 절 수행 등을 참회기도에 접목시켜서 참회를 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저 단순하고 정직하게 참회합니다 용서합니다’, ‘수용합니다 용서합니다혹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하세요. 진심으로 참회합니다라는 말을 계속해서 염불하듯 반복하는 것도 구체적이고 좋은 참회기도가 될 수 있다. 하루에 100번이든, 300번 혹은 1,000번이든 기간이나 횟수 등을 정해 놓고 꾸준히 참회합니다 용서합니다라고 반복해서 염불하듯 참회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지은 죄업에 대해 참회문을 적어 읽으면서 참회하거나, 구체적으로 죄업을 설명하면서 부처님 전에 다시는 죄업을 짓지 않겠다는 다짐을 바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사리불회과경에서는 과거에 지은 악업을 어떻게 참회하여야 합니까?”하는 사리불의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항상 아침, 저녁, 인정, 밤중, 새벽에 씻고 양치질하고 의복을 정갈하게 하고 합장하여 시방에 예배하고, 어느 쪽을 향하던지 마땅히 허물을 뉘우쳐서 다음과 같이 말하도록 하라. ‘저희가 과거 무수한 겁으로부터 지은 과오를... 원컨대 시방 모든 부처님을 따라 자비를 구하고 참회하옵니다. 저희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또한 이 죄과의 재앙을 입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자비를 구하는 까닭은 부처님께서는 환히 보고 들으시오니 감히 부처님 앞에서 속이지 못하겠습니다. 저희들에게 있는 나쁜 허물을 감히 덮어서 감추지 못하오나, 앞으로는 감히 다시 나쁜 죄업을 범하지 않겠나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도 자신이 지은 잘못과 과오, 죄에 대해 참회합니다’ ‘재앙을 입지 않게 하소서’ ‘다시는 범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직접적으로 고해 바침으로써 참회가 될 수 있음을 설명하고 계신다.

 

나와 남에 대한 용서와 참회

 

보다 넓게 생각했을 때 참회는 용서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에 나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고 용서해 주는 것 뿐 아니라,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용서해 주는 의미를 내포한다.

 

먼저 나 자신의 과거 모든 잘못을 스스로 용서해 주는 것이야말로 참된 참회가 된다. 자신을 용서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두려움과 죄의식에서 놓여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자신을 용서하고 참회하는 것은 곧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과거의 모든 죄의식과 티끌들을 비워내며 텅 빈 충만이라는 공과 하나되는 최고의 수행이 된다.

 

다음으로는 타인이 내게 행한 악행과 그로인해 내 마음 속에 미움과 증오, 원한이 남아 있다면, 바로 나를 괴롭힌 그 상대방을 용서해 줌으로써 내 마음 속에 응어리 져 있는 미움과 증오, 원한의 마음이 비워지고 내려놓아 지는 것이다. 사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과 같다. 미워하는 그 마음은 바로 내 마음이기 때문에 내 마음이 먼저 오염되기 때문이다. 홧병에 시달리던 사람이 용서함과 동시에 병이 낫기도 하지 않는가.

 

중아함경에서는 욕설을 한 비구가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였는데도 그 용서를 받아주지 않은 비구에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남이 참회하고 용서를 구함에도 받아주지 않는 어리석은 이여, 남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으로 긴긴 밤 속에서 항상 괴로움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이 나 자신을 온전히 용서하고 참회함으로써 내 마음 속에 있던 죄의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 과보를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등의 번뇌망상을 깨끗이 비워내고, 나아가 모든 타인을 용서해 줌으로써 내 마음 안에 쌓여 있던 상대방에 대한 온갖 증오와 미움, 원한의 마음을 맑끔히 비우고 청정히 함으로써 결국 우리의 내면이 청정해지는 것이다.

 

나 스스로를, 나의 과거를, 온전히 용서해 주고, 상대방을 온전히 용서해 주라. 자신이 살아 온 인생을 돌이켜 볼 때, 그 누구도 미운 사람이 없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완전히 사랑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나와 타인 모두에 대한 진정한 용서와 참회와 비움이 완성된다. 그 때 비로소 삶의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무한한 자비와 지혜를 배워나가는 아름다운 깨달음의 장이 우리 눈 앞에 눈부신 삶의 모습으로 열릴 것이다.

 

참회기도는 짧게 끝내라

 

, 참회기도를 하는데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참회기도는 너무 오래도록 끌면서 하지 말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을 보면 자신이 죄가 깊다고 여겨서인지, 몇 년 동안 계속해서, 혹은 평생을 참회기도만 하고 살겠노라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본래 우리 마음은 청정하기 때문에 죄의식이 있을지언정 실체적인 죄는 없다. 물론 죄를 지으면 그에 따른 과보를 받는다. 그러나 그 또한 기계적으로 A라는 죄에는 a라는 과보를 천편일률적으로 보내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얼마나 진심으로 참회를 하고 용서를 했느냐에 따라, 그 이후의 삶이 얼마나 수행과 복덕이 구족한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죄의 과보는 다르게 익어갈 수 있다. 업보라는 말에서 보()다르게 익어간다는 의미를 지닌다.

 

앞에서 소금물의 비유를 설명했듯이 이처럼 악업 또한 다르게 받을 수 있다. 다르게 좋은 방향으로 받으려면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고 용서하며, 보시와 수행을 통해 복덕과 지혜를 증장시켜야 한다.

 

또한 금강삼매경에서는 아난존자의 무엇이 참회입니까하는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진실관에 들면 모든 죄가 사라진다고 설하고 계신다. 이를 원효스님은 금강삼매경론에서 모든 죄업은 망상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모든 상을 파하면 진실관에 들고, 일체 망상경계를 여의게 되면 모든 죄는 일시에 사라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곧 죄의 근원이 본래 없다는 진실관에 들면 망상 따라 일어날 뿐인 죄의식을 일시에 소멸시킬 수 있다고 하는 천수경의 이참회와 뜻을 같이 한다.

 

결론적으로 죄의 본성이 본래 없으나, 우리가 망상으로 마음속에서 죄의식과 죄책감을 느낌으로써, ‘내가 이만한 죄를 지었으니 이에 합당한 과보를 받아야 해라고 스스로 처벌과 징벌을 끌어당기기 때문에 그 마음에 의해 죄의 과보를 받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참회를 계속해서 오랫동안 하게 되면, 오히려 이러한 처벌과 징벌을 스스로 받아야 한다는 죄의식을 강화할 뿐이다. 계속해서 참회를 한다는 것은 곧 아직은 여전히 죄의 업보가 소멸되지 않았다고 하는 자기 죄의식을 강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참회를 할 때에도 이미 참회가 되었다’, ‘부처님은 이미 나를 용서해 주셨다는 마음으로 참회기도를 해야 한다. 사실 부처님은, 진리의 근원에서는 이미 용서를 끝냈기 때문이다. 아니 용서를 끝냈다기 보다, 그 누구도 처벌과 징벌을 줄 아무런 의도가 없다. 오직 끊임없이 자비로써 사랑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부처님과 우주법계의 진리는 단 한 번도 우리를 벌하거나 징벌할 마음이 없다. 모든 죄의 과보는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을 뿐이다. 이 모두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환상일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이미 참회가 끝났다고 여긴다면, 참회기도를 몇 년 씩이고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해야 할 아무 이유가 없다. 짧게는 7일이나, 3.7(21), 아무리 길어도 100일 기도 한 번 정도를 끝으로 이미 용서가 되었으며, 참회는 이루어졌다라고 굳게 믿고, 완전히 자기 자신을 용서해 줌으로써 참회기도를 끝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완전히 청정해진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과거의 모든 망상과 번뇌, 죄업과 원망, 원한 등을 다 놓아버린 채 그 텅 빈 마음으로 새로운 것들을 담아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참회 이후에 담아내야 할 새로운 것이 바로 발원(發願)이다.

 

참회를 하고 나면 어느정도 수행을 시작할 수 있는 기본 준비가 거의 다 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남은 것이 있으니, 수행의 분명한 목표설정과 방향을 정해주는 원력을 세우는 발원인 것이다.

 

참회의 공덕

 

업보차별경에서는 만일 어떤 사람이 무거운 죄를 지었더라도 짓고 나서 깊이 스스로 뉘우치고 참회하며 다시 짓지 않는다면 능히 그 근원적인 업을 없앨 수 있다라고 함으로써 참회로써 죄업이 소멸될 수 있음을 설하고 있다. 또한 사십이장경에서는 사람이 많은 허물이 있으면서도 뉘우치지 않고 그대로 지나간다면 냇물이 바다로 들어가 점점 깊고 넓게 되듯 죄 또한 무겁게 쌓여 간다. 그러나 허물이 있을 때 스스로 그릇된 줄 알고 악을 고쳐 선을 행하면 죄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니, 병자가 땀을 내고 차차 회복되어 가는 것과 같다.”고 함으로써 허물이 있을 때 바로 뉘우치고 참회하며 그 악을 고치고 선을 행하면 죄가 소멸된다고 설하고 계신다.

 

열반경에서도 악을 저질렀다면 바로 이를 고백하며, 뉘우치고, 부끄러워하여 다시는 그런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탁한 물도 마니주를 놓으면 그 힘으로 물이 곧 맑아지고, 안개나 구름도 걷히면 달이 곧 청명해 지듯이 악을 지었더라도 참회하면 이와 같이 사라진다. 비록 죄를 범한 것이 있더라도 참회하여 뉘우치면 깨끗해지게 마련이다라고 함으로써 참회의 공덕을 설하고 있다.

 

선가귀감에서도 죄가 있으면 바로 참회하고, 잘못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데에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된다면 그 죄업 또한 마음 따라 사라질 것이다라고 했다.

 

이상에서와 같이 참회의 공덕은 무량하며, 그 어떤 최악의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마땅히 뉘우치고 참회한다면 그 모든 죄업은 사라지고, 그 청정해진 마음으로 수행해 나아간다면 마땅히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도 있음으로 앙굴리마라가 말해주고 있다. 앙굴리마라는 스승의 꾀임에 빠져 999명의 목숨을 죽였던 전무후무한 희대의 살인마였지만 지난 과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참회한 뒤 부처님께 귀의하여 다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출가 수행하여 결국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었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지었다 할지라도 불법문중에서는 죄의식에 사로잡힐 필요도, 그 죄업이 발목을 잡아 인생을 망칠 필요도 없다. 진실된 마음으로 참회만 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죄업 또한 소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


 참회가 된 마음은 과거에서 기인하는 어둡고 탁한 망상과 번뇌, 죄의식과 오염들이 정화가 된 고요하고 텅 빈 마음이다. 이렇게 고요한 마음에서 한생각 일으켜 원력을 세운다면 그 원력에는 강력한 힘이 붙게 되고, 현실로 이루어지는 강력한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이 된다.
 사실 모든 마음에는 강한 현실 창조의 에너지가 붙는다. 하지만 평소에 우리 마음은 온갖 죄의식과 망상, 분별심, 번뇌 등으로 오염되어 있거나, 원하는 마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그 모든 마음에 힘이 분산될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현실로 이루어지는 힘이 약할 수밖에 없다.
 특히 대부분의 마음은 서로 다른 극성의 두 가지로 치닫기 쉽다. 예를 들어 부자가 되고 싶다고 마음을 내지만 지금 이대로는 너무 가난하다고 여기거나 이 연봉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김으로써 마음 속에 ‘가난’과 ‘결핍’감을 키우는 것이다. 즉 한 쪽에서는 부자를 원하고, 다른 한 쪽에는 가난과 결핍이 연습되기 때문에 에너지가 정확히 양 극의 두 쪽으로 분산되고, 결국 그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한 채 똑같은 현실만 계속되곤 하는 것이다. 참된 발원은 그래서 참회와 용서를 통해 먼저 마음이 정화된 뒤에 하는 것이 좋다.

 

소원과 발원의 차이


 그러면 발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자. 발원이란 말 그대로 원을 세우고 일으키는 것이다. 원이란 원하는 것인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소원과 발원은 차이가 있다. 소원은 개인적인 아상과 에고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소망을 말한다. 그러나 발원은 아상을 넘어서서 일체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이타적 원력이다.
 예를 들어 ‘부자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을 때, 개인적인 소원일 경우에는 부자가 되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겠지만, 발원은 똑같이 ‘부자가 되기를 발원’하는 것이지만 부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부자가 됨으로써 가난한 보다 많은 이들을 구제하고 도움을 주겠다고 하는 이타적인 원력이 바탕이 되는 것이다.
 개인적인 소원은 자신이 복 지은 바를 가져다 쓰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이루어 지더라도 그것은 인과응보의 틀 속에서 내가 지은 복이 있을 때만 그 소원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타적인 발원은 나 개인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하는 우주적인 서원이기 때문에 그 사람 개인의 복력을 넘어서는 무량대복의 공덕이 붙고, 무한한 창조적 에너지가 그 서원에 힘을 보태주게 된다. 이처럼 발원은 이타적이기 때문에 우주법계의 힘,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을 가져올 수 있는 강력한 힘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불자는 아상에 기초하는 이기적인 기복의 기도를 행할 것이 아니라, 아상을 뛰어넘는 이타적인 발원을 함으로써 이 우주법계에 회향해야 한다. 그래서 절에서 방편으로 기도를 하라고 할 때도 '내 아들 건강하게 해 주세요' '내 남편 승진하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하라고 하지 않고, '아들 건강해 져서 이 사회에 큰 도움 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남편 승진하여 더 높은 자리에서 더 많은 이들에게 큰 사랑과 지혜를 베풀게 하소서' 하고 기도를 하라고 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비슷한 것 같아도, 전자는 그 근본에 '나'라는 아상의 기복이 깔려 있지만, 후자에는 그 근본에 아상을 뛰어넘는 이타적인 사랑과 자비가 깔려 있다.

 

발원의 핵심은 자비심


 이상에서처럼 발원의 개인적인 소원과 달리 일체중생을 구제하리라는 이타적인 서원력을 말한다. 이는 불교의 목적과도 연결된다. 불교의 목적, 수행의 목적을 보통 깨달음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불교의 목적, 수행의 목적은 깨달음이 아닌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력에 있다. 일체 중생을 향한 자비심이 그 원동력인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하는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내가 모두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리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설하고 계신다. 또한 『화엄경』에서는 보살이 발보리심을 내는 이유가 열 가지 있으니 그것은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일체 중생의 고통을 소멸하기 위해, 안락을 주기 위해, 어리석음을 없애기 위해, 불지혜를 주기 위해, 공양 공경하기 위해, 법을 듣고 환희케 하기 위해,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를 보기 위해, 광대한 지혜에 들게 하기 위해, 부처님의 힘을 나타내고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해 보리심을 낸다”라고 함으로써, 발원의 이유가 오로지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임을 설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발원의 핵심에는 일체 중생을 구제하여 고통을 여의게 하고 완전한 행복인 열반에 이르게 하겠다는 서원이 담겨 있다.
 발원을 세우는 이유는 발원한 바 대로 살기 위함이다. 즉 우리 삶의 핵심적인 목표 또한 우리가 발원하는 바와 같이 일체 중생을 위하고, 일체중생에게 어떻게 하면 행복을 전해주며 고통을 없애줄 수 있을까 하는 이타적 발원이 원동력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내가 잘 먹고 잘 살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타인들을 돕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발원이란 우리들의 삶의 방향을 ‘나’를 위한 삶에서 ‘일체중생’을 위한 이타적인 삶으로 전환하게 해 준다.
 
발원의 정의


 발원(發願)이란 스님 또는 신도가 불법승 삼보님께 자신과 대중의 바람과 원하는 바를 일으키고 발함으로써 자신의 원력을 부처님께 공양 올리듯 고(告)하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신이나 절대자에게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비는 것과는 다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발원은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이나 타인의 희생에 기초한 나의 행복을 원하는 등의 소원이 아니라,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연기(緣起)적 진리와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자비심에 기초하여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하는 이타적인 서원을 발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이타적인 서원을 발하여 부처님께 고하여 발원하게 된다면 그것은 강력한 발현의 힘을 가진다. 부처님 전에 이타적으로 세운 발원은 안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
 부처님께서 사리불과 목건련보다 일찍 출가한 1,000여 명 이상의 비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을 상수제자로 선언한 이유 또한 그들이 더 잘나서가 아니라 그 두 사람이 전생에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기를 서원했던 원력 때문임을 말씀하셨다. 이처럼 이타적인 원력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부처님께 고한 부처님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며, 개인적인 사사로운 소망이 아닌 우주법계를 돕고자 하는 이타적인 발심이기 때문이다.
 발원에는 아미타 부처님의 48대원, 약사여래의 12대원 등과 같이 불보살님께서 세운 개별적인 서원인 별원(別願)이 있고, 사홍서원과 같이 모든 이들이 공통적으로 세워야 하는 총원(總員)이 있다.
 물론 그렇더라도 발원은 불보살님이나 스님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님들이 하는 축원과는 달리 발원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 모두는 누구나 자신의 삶의 등불이 되어 줄 서원을 발해야 한다.

 

발원문의 구성


 보통 불자들이 개별적인 발원문을 세우려고 하지만 어떻게 세우고, 어떻게 작성해야 하는지 어려움을 느끼는 분들이 많다. 올바른 발원문을 세우려면 먼저 발원문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발원문은 대체로 다음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삼보님께 귀의를 다짐하는 귀의분(歸依分), 둘째로 지어온 바 죄업이 소멸되기를 바라며 뉘우치는 참회분(懺悔分), 셋째는 원하는 바의 발원 내용을 하나하나 부처님께 아뢰는 행원분(行願分) 혹은 발원분(發願分)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원문의 마무리로서 모든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되돌려 회향하며 불국토 성취를 기원하는 회향분(廻向分)으로 구성된다. 여기에 때로는 불보살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찬탄분이 추가되기도 한다.
 아래에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일상발원문’에서 어떻게 귀의, 참회, 발원, 회향이 담겨 있는지를 살펴보자.

[귀의]
 “시공을 초월해 항상 하시는 부처님. 저희들은 그동안, 밝은 부처님의 성품을 등지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마음을 돌이켜 본래 고향인 부처님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거룩한 삼보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옵니다.”
[참회]
 “저희들은 너와 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를 모른 채 나만 생각하며 살아왔고, 나와 내 것이 영원하지 않은 줄 모르고 끊임없이 집착하며 살아왔습니다. 무명과 애욕에 가려 어리석게 살아 온 지난날을 참회합니다. 욕심 많고 화 잘 내고 어리석어 저질러 온 모든 잘못을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옵니다.”
[발원]
 “거룩하신 부처님, 이제 저희들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깨달아 완전한 행복인 열반에 이르기를 서원합니다. 위로는 수행과 정진으로 깨달음을 이루고 아래로는 모든 이들의 참된 행복을 위해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부처님 전에 발원합니다.”
[회향]
 “저희들의 이러한 참회와 발원, 수행과 나눔의 공덕을 온 우주법계로 널리 회향하오니, 바라옵건대 부처님이시어 저희들의 간절한 발원이 원만히 이루어지게 하시옵소서. 이 공덕으로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모든 사람, 모든 생명에게 행복과 평화가 항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개별 발원문 작성


 이제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기에 앞서 생활 속에서 심출가 수행자가 되기 위해 누구나 발원을 세워야 한다. 발원의 종류에 총원과 별원이 있듯이, 대승보살의 기본적인 발원인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나, 사홍서원과 같은 총원이 우리 모두의 근원적인 발원이 되어야 하겠지만, 저마다 자기만의 발원을 세움으로써 자기다운 방식으로 일체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원, 개개인의 별원을 세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개별적인 발원을 세우는 방법은 불보살님들의 총원이나 별원처럼 몇 가지를 정하는 방법이 있고, 다른 방법으로는 그 서원을 구체적으로 서술해서 발원문을 만들어 기도 수행할 때마다 수시로 독송하며 발원을 더욱 굳게 해 나갈 수도 있다. 보통은 후자를 많이 한다.
 앞서 발원문의 구성을 살펴보았듯이 발원문은 처음에 부처님께 귀의를 하고 참회를 한 뒤 본격적인 발원을 하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회향하는 구조를 띄고 있다. 이러한 발원문의 구성을 보면, 오늘 원고의 제목인 귀의, 참회, 발원과 같음을 발견할 것이다. 발원문이야말로 그 안에 귀의와 참회, 발원 그리고 회향까지 수행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고 중심이 되는 나침반과도 같은 지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개별 발원문을 작성할 때는 너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발원문을 써도 좋고, 형식을 갖추고자 한다면 위에서 설명한 귀의, 참회, 발원, 회향 등이 잘 드러나게 쓰면 더욱 좋다.
 다만 직접 다 쓰기가 어려운 사람이라면 위 발원문의 구성 중에서 특별히 행원분의 끝부분에 자신 개인의 발원 내용을 추가하여 자신의 개인 발원문을 만들 수도 있다. 혹은 특별히 참회할 내용이 있다면, 참회부분에 자신 개인의 참회 내용을 추가할 수도 있다.

 

발원문을 독송하는 순서


 보통 신도님들께서 발원문은 언제 읽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이렇게 작성된 발원문은 절이나 집에서 개인 기도 수행을 할 때는 독송이나 주력, 참선이나 절 수행 등 개인 수행이 모두 끝나고 난 뒤에 마지막 순서로 수행의 끝부분에 발원문을 읽는 것이 좋다. 물론 법회 식순에서는 중간에 발원문을 봉독하기도 하지만 사홍서원이라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서원을 마지막에 봉독하는 데는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앞서 잠시 설명했듯이 원력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므로, 수행을 통해 마음이 고요해진 뒤에 한 생각 일으켜 서원을 발원한다면 발원에 산란심이나 번뇌가 끼어들지 않기 때문에 더 큰 힘과 집중이 붙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이 시작할 때는 아무래도 마음이 복잡하고, 온갖 번뇌와 망상들이 들끓기 때문에 그 때 발원문을 읽어도 발원에 힘이 붙지 않지만, 수행과 기도를 통해 마음을 청정히 하고, 비워져 마음이 고요해 진 뒤에 간절히 원하는 서원을 읽음으로써 부처님께 발원하게 된다면 텅 빈 가운데 무한한 창조적 에너지가 붙기 때문에 발원이 이루어지는 큰 힘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발원의 공덕


 발심의 공덕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경전은 『화엄경』이다. 『화엄경』에는 발원, 발심, 발보리심, 보리심이라는 용어로 다양한 발원의 공덕을 설하고 있다.
 “내가 옛적에 큰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았을 때는 많은 두려움이 있었지만 발심한 뒤로는 그것들을 다 떨쳐낼 수 있었다. 이제는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겁내거나 무서워하지도 않고, 온갖 마의 무리와 외도들이 깨뜨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보리심은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며 모든 불법의 공덕과 같다. 왜냐하면 보리심은 보살의 행을 낳게 하며 과거, 현재, 미래의 여래가 모두 보리심에서 출현하기 때문이다. 위없는 보리심을 발하는 이는 한량없는 공덕을 이룬 것이며, 일체지를 증득하여 가지게 된다”




 

기도와 수행의 의미


기본적으로 기도는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길 원하면서 불보살님께 이루어질 수 있게 가피를 내려달라고 비는 것으로써 기복적이고 타력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는 관음기도, 지장기도, 미타기도 등 특정한 불보살님을 대상으로 기도 성취를 비는 경우가 많다. 불보살님께 가호와 가피를 내려 달라는 의미다.


반면에 수행은 마음을 비우고 집중하고 전념하고 관찰함으로써 스스로 마음을 닦아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자력적인 정진을 말한다. 기도를 통해서는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원하는 바를 얻는데 그 목적이 있다면, 수행을 통해서는 자비와 지혜를 깨닫는데 그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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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수행이 필요한 이유


아무리 수행을 하려고 해도, 당장에 경제적으로 먹고 살기 힘들거나, 의식주에 문제가 있거나, 큰 어려움과 역경에 처해 있는 사람이라면 수행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로 그런 때에 당장의 눈앞에 있는 어려움을 먼저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수행보다 먼저 기도를 한다. 기도를 통해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원하는 바를 성취함으로써 수행할 수 있는 기초를 다지고, 수행의 터전을 닦는 행위가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기도라는 방편을 통해 결국에는 수행이라는 본질로 들어가는 구조를 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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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기도와 수행 패턴


예를 들어 한국불교에서 중요한 신행의 패턴은 자녀를 위한 수능 기도, 남편을 위한 진급 발원기도,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한 천도기도 등을 통해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기도 인연으로 불교에 첫 발을 내딛는 불자가 많다. 그러나 그 원하는 기도 성취를 이룬 분들이 처음에는 기도를 위해 절에 왔지만, 기도를 하면서 불교가 무엇인지, 수행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조금씩 깨달아 가게 되고, 불교를 자연스럽게 종교로 가지게 되며 그럼으로써 결국 기도로부터 시작해 결국 수행에 이르는 신행패턴을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기도가 좋은 방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순기능 면에서는 기도와 수행이라는 두 가지 실천행의 방편을 통해 비불자들을 불법으로 이끄는 효과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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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가피력


그렇다면 불보살님께 기도하면 그 가피를 실제로 받을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기도의 가피가 내려질 수 있는 것일까? [금강경]에서는 만일 형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말한다. 불보살님은 우리 외부에 있는 어떤 형상에 속해 있는 분이 아니다. 외부의 불보살과 내면의 삼보는 둘이 아니다. 그렇기에 참된 기도는 자기 내면의 근원적인 본래 힘을 되살리기 위한 자력적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 기도는 타력이라고 알고 있지만 자력과 타력 또한 둘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기도는 바깥으로 특정 존재에게 성취를 비는 것이 아니라,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우리 근원의 힘이요 우주법계의 근원적 힘이 나와 공명하고 가지력(加持力)을 형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가지력이란 나의 기도와 불보살님의 가피력이 하나 되어 나타나는 힘을 말한다.


사실 근원에서 살펴보면, 우리는 언제나 완전하며, 무한한 힘과 지혜와 자비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는 존재다. 내가 바로 삼보요, 불법승 자성삼보가 이미 우리에게 갖추어져 있다. 다만 우리가 아상으로 인해 그 무한한 불법승 자성삼보의 능력을 가져다 쓰지 못할 뿐이다. 불보살의 가피력이라는 것은 곧 그 무한한 능력과 지혜를 가져다 쓰는 능력인 것이다. 이처럼 불보살과 내가 둘이 아니며, 자력과 타력이 둘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가피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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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물리학에서 본 기도와 가피


양자물리학에서는 이것을 양자수프(quantum soup)라고 설명하는데, 즉 우주는 그 무엇으로도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만들어낼 수 있는 무한 가능성의 양자수프의 상태로 있다가 인간의 의식과 의도가 일어나는 순간 그 무한한 가능성 중에 하나를 현실로 만들어낸다고 한다. 양자수프는 불교의 공성(空性)과도 같이, 텅 비어 있지만 그 속에 무한한 가능성의 현실이 갖추어져 있는 공간이다. 이러한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양자수프는 우리가 원력을 세워 기도를 올림으로써 그 원력에 의식을 집중할 때 그 원력이 이루어지는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자물리학에서 설명하고 있는 가피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도의 가피력은 때때로 기적적인 치유를 가능하게도 하는데, 이를 양자물리학에서는 양자도약이라고 설명한다. 즉 우리는 하나의 우주에서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존재하다가 때때로 다른 가능성으로 양자도약을 한다고 한다. 질병으로 고생하는 세계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괴로워하고 살다가 기도를 통해 불보살의 가피, 즉 양자도약을 통해 기적적으로 치유되는 세계로 갑자기 옮겨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양자물리학에서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양자도약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이라는 신비한 연결성 때문이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입자들이 서로 분리되어 소통할 수 없다고 여겼지만, 양자물리학에서는 입자들이 아무리 먼 거리에 있다고 할지라도(초공간성, 비국소성) 서로 연결된 것처럼 행동하는 신비로운 연결성, 연기성을 발견했고, 이를 양자 얽힘이라고 부른다. 파동은 곧 입자와 다르지 않은데, 우리가 기도할 대 기도하는 정신적인 파동이 초공간성으로 연결된 이 우주법계 곳곳에까지 연결되어 힘이 미치게 되고, 비슷한 파동으로 진동하는 것들을 끌어당겨 공명의 법칙으로 서로 감응하게 함으로써 기도가 이루어지는 물질현실을 만들어 내게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기도를 할 때, 그 기도의 에너지 파동이 초공간성으로 우주 끝까지 연결되고 전파되어서 그 파동에 공명하는 입자들을 서로 신비롭게 연결시킴으로써 양자얽힘을 통해 기도가 이루어지는 현실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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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력이 담긴 기도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원력을 세워 기도해야 한다는데 있다. 원력과 소원은 서로 다르다. 소원은 아상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내가 잘 되기를바라는 이기적인 소망이지만 원력은 아상을 넘어 일체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이타적 서원이다. 개인적인 소원은 자신 개인의 복력을 가져다 쓰는 것이지만 이타적인 발원은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이 우주법계의 무량대복과 불보살님의 무한한 가피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남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타적인 원력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면, 곧 나부터 먼저 잘 될 수밖에 없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에, 상대를 위한 기도는 곧 나를 위한 기도가 된다.

이런 원력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도와 수행은 서로 다르지 않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수행의 목적 또한 고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고에서 벗어남으로써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자비가 그 근원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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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도의 함정


중생이란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고 성취하며 살아나가는 존재다. 자기다운 삶을 통해 이 생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함으로써 이 세상에 자기다운 방식으로 기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 나온 목적이다. 그렇기에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를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기도 또한 거기에 과도하게 집착하면 문제가 된다. 과도한 집착은 곧 좋은 쪽으로 달리 말하면 간절한 기도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도가 너무 과도하게 간절해지면 오히려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기도하는 이의 마음은 원력을 내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절대 이것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마음과는 다르다. 원력에는 집착이 붙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선호와도 같다. 과도한 집착이 아닌 순수한 선호이기 때문에 원력에 힘이 붙는 것이다. 집착을 한다는 것은 곧 거기에 가 붙는다는 말이고, 그러한 아집은 이타적 원력이 아니다. 그렇기에 집착을 한다는 것은 이타적 원력이 아닌 이기적인 소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집착하면 오히려 거꾸로 이루어지기 쉽다. 집착하는 마음 이면에는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쩌지?’하는 불안과 두려운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게 되면 오히려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이루어지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마음 속에 연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는 집착하는 대신 순수하게 원할 수 있어야 한다. ‘과도한 집착이 아닌 순수한 선호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쉽게 말하면, 기도를 할 때는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불보살님께서 내려주는 것은 내 생각을 넘어서는 더 크고 깊은 의미가 있음을 받아들이겠습니다라는 대수용의 마음이 바탕 되어야 한다. 되도 좋고 안 되도 좋은 것이다. 다만 마음을 내어 선호하는 방향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도할 뿐, 결과는 모두 불보살님께 내맡기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 생각에 좋은 것과 불보살님의 지혜에서 정말 좋은 것은 다를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원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주법계에서는 지금 당장에는 이루어지지 않은 듯 해도 더 깊은 차원에서 또 다른 더 큰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참된 기도인의 자세는 원력을 세워 기도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이처럼 참된 기도는 집착과 아상의 확장을 위한 것이 아닌, 기도성취를 통해 이 세상에 기여하고, 중생을 구제할 수 있으며, 나다운 삶의 길을 찾아감으로써 깨달아가는 마음공부의 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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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 때의 주의점


보통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를 하는 중에 계속해서 원하는 바를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염원하고 되뇌이곤 한다. 원하는 바를 부처님께 고하여 말씀드려야지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를 할 때는 처음과 끝에 발원문을 한번씩 읽을 수는 있겠지만, 기도 중간에 계속해서 원하는 바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기도 할 때는 염불이든, 주력이든, 다라니든, 절이든 그 기도수행에만 집중해야 한다.


원력을 이루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모든 생각들이 내려 놓아진 텅 빈 내면의 깊은 공간으로 들어감으로써 그 근원의 텅빈 공의 자리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깨어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가능성, 즉 일체유심조의 현실창조의 힘은 생각이 많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들이 놓여지고 순수한 원력만이 있을 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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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수행의 연결점


이런 점에서 참된 기도는 곧 수행과 다르지 않다. 다만 수행은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며, 지금 이 자리에서 온전히 충분하고 완전함을 깨달으면서 오로지 그 순간에 바라는 것 없이 현존하는 것이라면, 기도는 그 순간에 깨어있는 기도를 하지만, 원력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이 개입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즈음에 이르면 기도는 타력이며 기복이고 하근기 사람들의 전유물인 것 같고, 수행은 자력이며 상근기 수행자들이 행하는 수준 높은 것처럼 느끼는 분별심 또한 내려놓아야 할 것임이 드러난다. 올바른 기도는 곧 수행과 연결되기 때문에, 바르게 기도를 하는 이는 곧 그것이 하나의 방편 수행이 되는 것이다.


사실 기도가 가장 잘 될 때는, 수행을 통해 온갖 번뇌 망상과 욕망이 내려놓아 진 때라고 할 수 있다. 수행을 통해 무수한 생각들이 잦아들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비로소 우리의 본연의 텅 빈 무한 가능성의 공간이 열린다. 그렇게 고요해진 마음에서 한 생각 일으켜 순수하게 바라는 기도의 원력을 일으킨다면 그 기도는 힘을 받는다. 무수한 생각과 번뇌들 속에서 기도를 하면 기도하는 바 그 한 가지에만 집중이 되지 않고 힘이 분산되지만, 수행을 통해 텅 빈 그 고요한 마음 위에 바라는 바를 일으켜 기도를 한다면 바로 그 한 가지에 모든 힘이 집중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수행과 기도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래서 수행자는 따로 기도를 하려고 애쓰지 않더라도 한 생각일으켜 무엇이든 쉽게 만들어내고, 창조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늘 마음이 고요하기 때문에 그 고요한 가운데 일어난 한 생각에는 고도로 집중된 창조적 에너지가 모이는 것이다.


이처럼 기도와 수행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듯 하지만, 참된 기도는 곧 수행과 연결된다. 그러나 처음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당장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수행하라고 하면 설득력이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중생들의 관점에서 그들의 어려움을 힐링해주며,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기도의 신행 방식은 중생의 눈높이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불교의 관점에서는 매우 뛰어난 방편의 신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부처님의 대기설법이며, 응병여약의 방편설법인 것이다.


이렇게 기도를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고, 이타적인 원력을 세우며, 내면의 본래청정성을 일깨우다보면 저절로 보다 깊은 깨달음의 세계와 이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그 때 수행이라는 불교 본연의 공부가 보다 깊이 와 닿기 시작하는 것이다.



수행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가


수행은 왜 하는 것일까? 단순하다. 괴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에서 괴로움은 일상생활 속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등 일상의 소소한 괴로움이라면, 수행에서의 괴로움은 생노병사 등 인간의 근원적 괴로움들을 포괄한다. 부처님께서는 근원적 괴로움에서 벗어나 참된 열반을 얻을 수 있음을 설하시며 바로 그 고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도성제를 설하셨다. 그 도성제가 바로 수행인 것이다. 초기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곧 연기, 무아, 자비에 있으며 이를 깨닫기 위한 실천 수행법이 바로 도성제요 도성제가 바로 중도다. 중도를 세부적으로 구현한 것이 팔정도이고, 그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바로 사념처다. 즉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중도와 팔정도, 사념처가 바로 수행이라고 말씀하셨다.


중도는 양 극단에 치우침 없고 분별없는 행이다. 양 극단의 판단이나 분별들은 곧 집착을 가져오고, 실체화시킨다. 그렇게 집착하고 애쓴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을 실체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실체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아와 연기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중도에서 가장 중요한 실천은 곧 무분별과 무집착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바로 이처럼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팔정도의 핵심 수행법인 정념이고 이를 보다 구체화시킨 것이 바로 사념처다.


조금 더 쉽게 단순화하면 중도, 팔정도, 사념처라는 수행은 한 마디로 분별없는 관찰을 의미한다. 그러나 막연하게 분별없이 관찰하라고 하면 잘 집중이 안 된다. 어느 한 가지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모아 집중()’함으로써 분별없는 관찰()은 더욱 쉽게 이루어진다. 부처님께서는 그 집중적 관찰대상을 사념처 즉 신수심법이라는 네 가지에 두셨다. 그러나 대승불교로 넘어오면서 그 집중하는 대상은 조금씩 달라진다.


우리가 흔히 수행이라고 알고 있는 그 모든 것들 즉 절, 염불, 간경, 진언 다라니, 위빠사나, 간화선, 묵조선 등 그 모든 수행법들 또한 사실은 분별없는 관찰의 대상에 따른 수행법이며, 중도와 팔정도, 사념처에 이르는 길이다.


예를 들어 염불수행은 그 집중과 관찰의 대상이 부처님 명호인 것이다. 염불을 하면서 온갖 생각과 판단, 분별들은 내려놓고 분별없이 염불하는 소리를 관찰하거나, 염불하는 놈이 누구인지를 관찰하는 것이 바로 염불수행이다. 마찬가지로 절이나 간경, 진언, 다라니, 호흡관, 간화선 등도 근본에서는 마찬가지다. 절을 하면서 온갖 생각을 내려놓고 분별을 쉬고 절하는 몸의 동작에 집중하여 관찰하고, 간경이나 진언, 다라니를 외우면서 외우고 있는 것을 분별없이 관찰하는 것이다.


이처럼 온갖 번뇌, 망상과 생각을 그치고 마음을 모아 집중하는 수행을 지()라고 하고, 분별없는 관찰을 관()이라고 하여, 지관겸수, 혹은 정혜쌍수라는 수행법이 나온 것이다. 이처럼 불교 수행은 부처님 명호나 진언, 다라니, 호흡, 화두 등 특정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분별없이(中道) 관찰()하는 것을 통해 무아와 연기, 중도와 공, 자비를 깨달아 가는 것이다.


현재 한국 불교의 핵심 수행법인 간화선 또한 부처님의 수행법과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근본 원리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면서도 최상승 근기의 수행자들을 위한 역사적인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간화선에서 간()볼 간자로 이 또한 본다는 것이다. 그저 자신의 본성을 보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려워하기에, 화두를 주고 그 화두를 의심함으로써 그 의심 자체를 보도록 하는 것이다. 화두를 통해 정정과 정념, 즉 지관의 수행이 이루어진다. ‘분별없는 관찰이 생겨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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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기도와 수행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기도를 단순히 개인적인 소원을 이루는 것으로만 한정시켜 기복적인 불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기도는 아직 수행으로 옮겨가기 어렵거나, 당장에 괴로움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위한 훌륭한 방편이며, 결국에는 기도로 시작하지만 기도 속에 담긴 불법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고, 나아가 근원적인 생노병사의 고에서 해방되고, 일체 중생을 구제하리라는 참된 원력으로써 수행의 문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또한 수행에 대한 초기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을 기본으로 하여, 그 이후에 역사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방편의 수행법들을 아울러 닦아가며, 자신에게 맞는 수행법을 찾아 나가되, 어느 특정한 수행법만이 최상이라고 하거나, 특정 수행법을 폄하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불법은 일체의 상을 타파하는 종교이므로, 수행법의 높고 낮음이라는 상, 수행을 잘 하고 못한다는 상 등 일체의 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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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수행의 목적, 자비의 실천


금강경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하는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들을 내가 모두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리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설하고 계신다. 또한 화엄경에서는 보살이 발보리심을 내는 이유가 열 가지 있으니 그것은 일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일체 중생의 고통을 소멸하기 위해, 안락을 주기 위해, 어리석음을 없애기 위해, 불지혜를 주기 위해, 공양 공경하기 위해, 법을 듣고 환희케 하기 위해,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를 보기 위해, 광대한 지혜에 들게 하기 위해, 부처님의 힘을 나타내고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해 보리심을 낸다라고 함으로써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불교의 핵심에는 일체 중생을 구제하여 고통을 여의게 하고 완전한 행복인 열반에 이르게 하겠다는 서원이 담겨 있다. 기도와 수행을 하는 목적 또한 이와 같다. 불교의 목적, 기도 수행의 목적은 자신 개인의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대자대비심에 있다. 일체 중생을 완전한 열반에 이르게 하려면 나 먼저 열반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에 불교에서 그렇게 깨달음을 중시하는 듯 보이지만, 그 근원에서는 나의 깨달음이 먼저가 아니라 일체중생에 대한 구제가 먼저인 것이다.


그렇기에 기도든 수행이든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이타적인 원력과 서원이 바탕이 되었을 때 비로소 참된 기도 수행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구월이 오면 / 안도현 그대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강물이 여물어 가는 소리를 듣는지요 뒤따르는 강물이 앞서가는 강물에게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밀어주면 앞서가는 강물이 알았다는 듯 한번 더 몸을 뒤척이며 물결로 출렁 걸음을 옮기는 것을 그때 강둑 위로 지아비가 끌고 지어미가 미는 손수레가 저무는 인간의 마음을 향해 가는 것을 그대 구월의 강가에서 생각하는지요 강물이 저희끼리만 속삭이며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젖은 손이 닿는 곳마다 골고루 숨결을 나누어주는 것을 그리하여 들꽃이 피어나 가을이 아름다워지고 우리 사랑도 강물처럼 익어 가는 것을

그대 사랑이란 어찌 우리 둘만의 사랑이겠는지요 그대가 바라보는 강물이 구월 들판을 금빛으로 만들고 가듯이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사람과 더불어 몸을 부비며 우리도 모르는 남에게 남겨줄 그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을 구월이 오면 구월의 강가에 나가 우리가 따뜻한 피로 흐르는 강물이 되어 세상을 적셔야 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