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hayan_Dal..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섦기만 하구려
●여승(女僧)
- 백석 -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리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2014. 9. 23. 17:33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길상사
◆시인 백석과 통영
시인 백석.
이 땅의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다.
그는 30대가 되기도 전에 한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서정시인으로 입지를 굳힌다.
그의 시는
발표될 때마다 화제를 낳고,
그의 시가 실린 잡지는
책방에 나오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낯익은 이름은 아니다.
월북시인이 아닌 재북시인이었음에도
오랜 동안
그의 시가 읽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7년 월북작가 해금이 되자
시인 이동순 영남대 교수는
'백석 시선집'을 펴냈고,
그직후
이교수는 '자야' 여사부터 전화를 받고
만나서
백석 시인과 관련된 한 많은 생애를 듣게 된다.
백석 일본 청산학원 유학시절 모습
자야 여사
자야 여사는
백석의 연인으로 우리나라 3대 요정 중 하나로
그 당시 시가
1000억원대에 달하는 대원각을
조건없이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여
길상사로 새로 태어나게 하여 유명세를 탔다.
그녀는 사재 2억을 출연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고,
에세이 <내 사랑 백석>을 쓰기도 했다.
그녀야말로
어둠 속에 가려져있던 백석을
환한 세상으로 드러나게 한 빛이다.
백석과 헤어진 뒤
자야 여사는
평생 백석을 그리며 홀로 살았다.
길상사
그녀는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이 사귄 다섯 여자 가운데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자야였고,
자신 또한 백석에 대한 사랑을
평생
올곧게 간직했다'고 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속의
나타샤는 '자야'라고 했다.
통영(統營)은
'삼도수군통제사의 군영'에서 온 명칭이다.
임진왜란의 사적과
많은 유물이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자야 여사를 만난기 전에
청년 백석이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백석은
절친한 친구 허준의 결혼식 축하모임에서
같은 신문사 동료인 신현중의 소개로
당시 이화고녀 졸업반 학생이던
통영 여자 '난(본명 박경련)'을 만나
첫눈에 반하고 만다.
백석은 스물넷,
난은 열여덟 꽃다운 나이였다.
난이라는 '천희'를 처음 소개 받고
쓴 시가 아래의 <통영>이다.
백석은
<통영>이란 제목의 시를 세 편 남겼다.
그리고
세 번 통영을 방문하였다.
사실 그 시절
교통형편으로 볼 때 한 번 서울에서
통영을 간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였다.
통영은 임진왜란전만해도
아름답고 자그마한 포구에 불과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조 유일의 계획군사도시가 되어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고
통제영문화가 꽃을 피웠다.
300년 통제영문화는
통제영 산하 12공방(工房)을 통해
통영자개, 통영소반, 통영갓등
조선 최고의 명품을 생산해냈다.
녯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 백석 시 <통영> -
통영에서는
아직도 쳐녀를 '천희' 혹은 '처니'라고 부른다.
백석은
난을 만나기 위해 통영을 방문한다.
하지만
난은 겨울방학이 끝나가자
서울로 상경해 버린 탓에 서로 길이 엇갈린다.
이때
상실감을 안고 쓴 시가 <통영2>다.
통영중앙시장
고향이 북쪽 끝 정주인 서울 사는 백석이
난이란 처녀를 만나러 남쪽 끝자락
통영까지 왔다가 못 만나고
그녀가 살던 집과 동네만 하릴없이 기웃거리다가
충렬사 입구 돌계단에 쪼그려 앉아
서글픈 심사로 쓴 것이다.
백석은
또 다시 통영을 방문하지만,
이때도 결국 난을 만나지 못한다.
대신 난의
외사촌 오빠 서병직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고,
<통영-남행시초2>를 헌시(獻詩)한다.
통영중앙시장
통영 장 낫대들었다
갓 한닢 쓰고 건시 한 접 사고
홍공단 댕기 한 감 끊고
술 한 병 받어들고
화륜선 만져보려 선창 갔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열이레 달이 올라서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서병직 씨에게
- <통영-남행시초2> -
그후 백석은
친구 신현중과 함께 다시 통영을 방문해
난의 어머니에게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전한다.
난의 어머니는
서울에 사는 오빠 서상호를 만나
난의 혼사문제를 상의하고
백석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청한다.
서상호는
통영 출신 독립운동가였고
통영의 유력자였다.
난은
외삼촌 서상호의 집에서
돌봄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통영은 예향(藝鄕)이다.
문화와 예술의 고향이다.
통영만큼 이름난 문화예술인을
많이 배출한 고장은 없을 것이다.
시인 유치환, 김상목, 김춘수,
소설가 박경리, 김용익,
극작가 유치진,
음악가 윤이상,
화가 이중섭, 김용주, 김형로, 전혁림 등
우리의 문화예술계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들을 수없이 배출한 곳이
바로 통영이다.
서상호는
고향 후배인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묻는다.
그때 신현중은
숨겨주어야 할 친구
백석의 비밀을 발설하고 만다.
백석의 집이 가난하고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문에
백석과 난의 혼사는 깨져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서 신현중은
서상호에게 자신이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밝히고
단번에 승낙을 받는다.
그리고
신현중과 난은 혼인을 한다.
이 당시
백석은 조선일보을 사직하고
함흥 영생고보 영어선생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랑 앞에 우정 또한 없다.
백석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
친구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연모하는 여인을 잃었다.
그 배신의 아픔과 상실감을
여러 시와 산문에서 드러냈다.
다음 시는 그 중 하나다.
통영은 임진왜란 이후 발달한 통제영문화,
그리고
온화한 기후와 한려수도의 빼어난 풍광이
사람들의 감성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풍부한 수산자원으로
부자들이 많았던 통영 사람들은
일제시대에
자식들을 도쿄로 유학을 보냈다.
그곳에서
문학이나 예술을 공부한 이들은
조국으로 돌아와 시대상을 비관하며
동료 문화예술인들과 어울리게 됐고,
통영은
자연스럽게 이들의 집합소가 됐다.
이러한 것이
통영에서 많은 걸출한 문화예술인들을
배출한 배경이 되었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 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 <내가 생각하는 것은> 중에서 -
자야 여사도
난이란 처녀와 백석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백석이 자야 여사를 만나기 전
서울에 있을 때 난을 알게 되었고,
함흥에 와 자야를 만나는 중에
혼사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
결국은
파탄으로 끝났다.
백석은
이로인한 배신감과 상실감 때문에
자야 여사에게
더 빠져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동양의 나풀리' 통영항 포구에서(2013.3)
백석과 헤어진 후
자야 여사는 사랑하는 연인을 따라
만년에 영문학을 전공했고 글을 썼다.
백석의 생일날에는
하루 동안 전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죽거든
눈 오는 날 자신의 유해를
길상사 뒤뜰에 뿌려달라고 당부했다.
평생
백석을 그리며 치열하게 산 그녀는
시주한 '1000억원의 재산이
그의
시 한 줄만 못해'라고 했다.
사람이 한세상을 살다보면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게 되는데,
사람의 그릇의 크기와 운명에 따라서
그 만남의 대상은
천차만별로 갈라지게 된다.
같은 만남에도
그 사람의 삶을 느끼는
힘의 깊이에 따라서
만남은 가벼울 수도 있고
바다처럼 깊을 수도 있다.
●統 營
녯날엔
統制使가있었다는 낡은港口의처녀들에겐
녯날이가지않은 千姬라는이름이많다
미억오리같이말라서
굴껍지처럼말없시 사랑하다죽는다는
이千姬의하나를 나는어늬오랜客主집의
생선가시가있는 마루방에서맞났다
저문六月의 바다가에선
조개도 울을저녁 소라방 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나는 비가 날였다
●統 營 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 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山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錦이라든 이 같고 내가 들은 馬山 客主집의 어린 딸은 蘭이라는 이 같고 蘭이라는 이는 明井골에 산다든데 明井골은 山을 넘어 冬栢나무 푸르른 甘露 같은 물이 솟는 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冬栢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女人은 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冬栢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녯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여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統 營 ― 남행시초․2 統營장 낫대들었다 갓 한닢 쓰고 건시 한접 사고 홍공단단기 한감 끊고 술 한병 받어 들고 화륜선 만져보려 선창 갔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열이레 달이 올라서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 할 것이다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신간서(新刊書) 하나도 없는 것과
그 '아서라 세상사(世上事)'라도 들을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바다
- 백석 -
'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 > 오매일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본래 면목 / 해안스님 (0) | 2014.10.07 |
---|---|
쌓이는 모든 것은 병이 된다/ 이정우 (0) | 2014.10.07 |
한 생각 벗어 버리면 극락이라네 / 원효 대사 (0) | 2014.09.17 |
일체의 은혜에 감사하라/ 정목스님 (0) | 2014.09.10 |
용서/법상스님 (0) | 2014.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