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생무생" 본래 일어난 바가 없다 / 법상스님

2014. 9. 30. 21:2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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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생무생" 본래 일어난 바가 없다 / 법상스님

 

네, 반갑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이렇게 법당에 와서 앉아 계시고,

또 여러분의 삶이 하루하루 이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그 ‘근원에서 본다면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고,

그 어떤 것도 일어난 바가 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것을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본래 나온 바가 없다, 본래 일어난 바가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렇게 수없이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한 법도 일어난 바가 없다.

하나도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은 없다는 것이죠.

 

왜 그런고 하니

‘인연 따라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무생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요,

 ‘인연 따라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진짜로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제가 어릴 적에 뭐 냇가에서 나가서도 그렇고,

또 강가 주변 같은 데서도 아마 그런 것 같고,

모래사장이 이렇게 있단 말이죠.

그 모래사장이 이렇게 있으면

거기 가서 이제 어린애들이 만날 뛰어놀잖아요.

 

여러분들도 많이 그러셨을 텐데,

그럼 이제 그 모래사장 같은 데,

여러분, 아마 바닷가 백사장 같은 것 생각하면 편할 텐데,

그런 데 가서 보면 아이들이 하루 종일 거기서 뭘 만들지 않습니까?

 

도로도 닦고,

신발을 도로 위에다 자동차인 것처럼 붕~~왔다 갔다도 하고,

또 그 옆에 뭐 빌딩도 만들기도 하고,

또 굴 같은 것을 뚫어서 굴도 만들고, 다리도 만들고,

옆에 나뭇가지 같은 것 주워 와가지고

'이것은 다리'라고 하면서 다리도 놓고 그러면서 만든단 말이에요.

 

제가 뭐 그렇게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신발 가지고 도로를 다 닦아 놓고,

도시를 만들어 놓은 다음에

신발 가지고 마지막으로 붕~~하면서 노는 게

놀이의 어떤 대미를 장식했던 것 같은데요,

 

제가 생각해보니까 신발 가지고 만든 자동차 중에 제일 그럴싸한 자동차가 고무신인데,

고무신을 뒷부분을 이렇게 앞으로 쑥 끼워 넣으면 이렇게 딱 돼 있잖아요?

이걸로 붕~~하고 가다보면 왠지 모르게 이게 참 진짜 차 같고,

왠지 모르게 살아 있는 것 같고,

이런 진짜 차인 것처럼 그렇게 가지고 놀던 기억도 생각이 나는데요.

그렇게 이제 아이들이 “야, 여기는 내 자리야” 이러면서

자기가 먼저 와가지고 도시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아침부터....

 

도로도 닦고 막 굴도 닦고 하면서,

그러다 보면 딴 친구가 와서 옆에서 옆에다가 자기 도시를 만들어요.

자기가 나름대로 길도 닦고 하면서 한참 만듭니다.

하루 종일 그렇게 만들고서 이제 자동차로 막~같이 노는 놀이를 하죠.

 

그러다가 내가 막 힘들여서 이렇게 이만큼 산을 만들어 놓고

산 밑으로 굴을 뚫어놨는데 거기로 자동차가 지나가야 하는데,

옆에서 만들던 친구가 잘못해서 갑자기 확 무너뜨리면

막 그냥 화도 내고 싸움도 하고, 그리고 또다시 놀고 이런단 말이죠.

그렇게 하루종일 정말 엄청난 도시를 하나 만들어 버립니다. 어린아이가....

 

그리고 그렇게 재미있게 논단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만들고 나도 집으로 이제 딱 갔다가 그 다음날,

‘제발 있어야 되는데, 제발 있어야 되는데’ 하고

그 다음 날 딱 오면 다 무너지고 없단 말이에요.

다 무너지고 없습니다.

혹은 누가 또 이렇게 발로 차고 이러기도 하고,

신기하니까 해코지한다고 그러기도 하고.

 

그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그 사실을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루 종일 친구랑 막 만들죠. 막 만듭니다.

신~나게 아주 멋있게 만드는데,

만들고 나서 이제 집에 돌아갈 때,

 “야, 저녁 먹으러 집에 가자” 할 때 그때 우리가 다 허물고 갑니다.

 

어차피 내일이면 다 허물어질 것 다 아니까.

우리가 막 발로 차기도 하고,

막 깨부수기도 하고 그리고 이제 다시 돌아가는 거죠.

그러면서도 또 그 다음날 가면

또 이제 처음부터 하나 새롭게 도시를 또 만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런 놀이를 한단 말이죠.

 

이것을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연생이 무생이라는 것,

인연 따라 생겨난 모든 법은 일어난 바가 없다.’는 것을

아주 잘 비유로써 알게 해줍니다.

 

그 바닷가 모래사장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래사장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이들이 와가지고

아무리 만든들, 도로를 막 멋있게 닦든, 4차선을 닦든, 2차선을 닦든,

건물을 막 좋게 만들든, 막 산을 만들든 사실은 아무 상관이 없죠.

 

그렇게 막 만들어놔도 저녁때 되면 어차피 한방에 허물어질 것이고,

그렇게 모래사장 입장에서는 어차피 ‘부증불감’입니다.

거기 있는 모래 그대로 있고,

그런데 모래가 잠깐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헤집어졌을 뿐이지

실제 뭐 만들어진 바도 없고, 무너진 바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봤을 때는 있단 말입니다.

이 아이들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있어요.

내가 도로를 닦아놨는데, 또 도시를 만들어놨는데

그게 실제 있는 것처럼 생각한단 말이죠.

의미부여를 하기 때문에, 실체화하기 때문에.

그리고 옆에 친구가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서

 ‘야, 넌 나보다 못 만들었구나.'

'네가 만든 도로보다 내 도로가 더 좋다.'

'네가 만든 굴뚝보다 내가 만든 굴뚝이 더 좋다.’

 이렇게 이제 분별심을 일으킨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너와 나를 분별하다 보니까

이게 잘한 건지 못한 건지가 나오게 되고,

또 더 좋은지 안 좋은지도 나오게 되고,

이렇게 분별해서 우리는 인식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다 의미 부여를 하기 때문에

친구가 옆에 와서 이걸 무너뜨리면 괴로워가지고

막 싸우기도 하고, 주먹으로 한 대 때리기도 하고, 이게 뭐라고...

 

모래사장 입장에서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데,

우리가, 어른들이 봤을 때는 아무것도 아닌데,

지네들이 봤을 때는 이거 심각한 거죠.

 

그러니까 이걸 무너뜨렸다고 막 가서 때리기도 하고 이런단 말이에요.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본래부터 이 도시가 실체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것을 만드는 동안은 실체화하면서 만들기 때문에,

의미 부여를 하고 만들기 때문에 그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에 내가 의미 부여를,

분별심으로 인해서 인식, 의식을 가지고 의미 부여를 하니까 거기 의미가 부여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옆에 친구가 무너뜨리면

이게 막 괴롭고, 화도 나고, 짜증도 나고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나 이렇게 우리는 의식을 가지고 분별함으로써

이 세상을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실제 있는 거다 없는 거다'

이렇게 분별하면서 살지만

본래 바탕에서 본다면, 이 모래사장이라는 본바탕에서 본다면

하나도 일어난 바가 없는 거죠.

 

뭐 만들어진 게 어디가 있고, 무너진 게 어디가 있겠습니까?

만들어진들 무너진들 그게 무슨 상관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아이들도 저녁때 돼서는 다 아는 거죠.

 

우리 사람들이 한생을 열심히 살면서 실체인 줄 알고서 인생을 살고,

돈도 벌고, 아파트도 사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하면서 목숨 걸고 살지만

죽을 때가 딱 되면 깨닫잖아요.

‘아, 이거 허망한 짓을 했구나. 지금까지...

이렇게 죽고 말건데 내가 허망한 짓을 했구나.’ 하고

깨닫듯이 아이들도 낮에는 막 그냥 이게 진짜인 것처럼 생각돼서

친구와 싸우면서 모래놀이를 하지만 집으로 돌아갈 때는

그냥 이게 허망한 줄 알고 다 헤집어놓고 집으로 간단 말이죠.

 

이 모래성을 쌓는 이 놀이와 우리 인생과 똑같이 닮아있단 말이죠.

이 모래성이란 것은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죠.

 

그냥 모래인데, 그냥 모래인데

아이가 창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마음을 내서

이러한 집도 짓고, 이러한 도로도 낸단 말이에요.

그 처음으로 낸 것은 본래 집이 있고, 본래 차가 있는 게 아니고

이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난 겁니다.

 

이것이 '일체유심조'예요.

마음에서 ‘내가 이것을 만들어야겠다.’ 하니까 만들어진 거죠.

또 이 마음을 가지고 만들어낸 겁니다.

전부다 바깥에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내가 실체를 만들겠다.’ 하니까 만들어진 것이고,

거기 내가 의미 부여를 하니까 거기 의미 부여가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근데 그 의미부여를 하기 위해서는

인연화합을 해야 된단 말이에요. 인연화합을...

모래를 가져와야 하고, 너무 건조하면 물도 좀 뿌려가며 만들어야 하고,

이렇게도 만들고 저렇게도 만들고,

또는 도로를 만들다 그냥 안 만들어지면

나뭇가지 같은 것도 가져와서 이렇게 밀면 바로 도로가 돼 버리죠.

그렇기도 하고 하면서 온갖 생각을 가지고 도구를 가지고 이걸 만든단 말이에요.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실체화하면 의미 부여를 하고,

중요도를 부여하고 실체화하면 그게 심각한 일이 돼버립니다.

 

여러분들 생각에는 지금 이 비유가 좀 우습게 들릴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아이들 놀이니까.

‘아이들 놀이 가지고 그게 뭐 대단하겠습니까?’ 생각하실지도 모르는데,

어른들한테도 이게 심각해지기도 하죠.

 

요즘에 뭐 저 해운대나 바닷가 백사장에 가면 한여름에 뭘 합니까?

백사장에서 작가들이 와가가지고 모래 가지고 온갖 작품들을 만들죠.

 

무슨 위대한 사람들 얼굴도 만들고, 무슨 물고기도 만들고,

또는 부처님 상도 만들고, 부처님 얼굴도 여법하게 만들고 하면서

모래사장에다가 각 선수들이 일 년 내내 갈고 닦은 실력으로,

일 년 내내 집에서 막 뭘 할까 구상하고, 고심하고 하다가

여름에 한 번 딱 열리는 그 큰 대회,

이 대회도 우리나라에서 1등 하는 사람은

예를 들어 저 세계대회도 나갈 수도 있고 이러지 않겠어요?

 

그래서 나중에 이 대회가 점점 더 커지다 보면

막 상금을 수백만 원, 수천만 원, 막 수억 원을 걸면서

이런 대회를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이런 대회를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때는 그냥 이 모래사장에서

정말 전 세계에서 유능한 작가들이 모여가지고

1년, 2년 갈고닦은 걸 가지고 막 솜씨를 부려서

성모마리아도 만들고, 관세음보살님도 만들고, 온갖 것을 만든단 말이에요.

 

그렇게 만들어놨는데, 그렇게 만들고 있는데

여러분이 가가지고 발로 툭 차거나 거기 넘어졌다면 그분 기분이 어떨까요?

마감시간 지금 한 10분도 안 남았는데, 꼬마가 와가지고 작품을 망쳐버렸다.

그러면 기분이 어떨까요?

이건 심각한 일이죠.

 

내가 1년, 2년 몇 년을 갈고닦아가지고

이 대회 나오느라 고생고생을 해가지고 만들었는데 이것을 무너뜨린다?

이것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 될 겁니다.

 

이때 이 사람이 만드는 그 모래사장의 모래성은,

그 모래로 만든 작품은 흡사 4년 동안 혹은 8년 동안

고생고생을 해가지고 온갖 노력을 다해가지고

올림픽에 나가는 올림픽 선수들처럼,

김연아 선수가 그렇게 어릴 때부터 고생고생을 해가지고

연습하고 연습해서 피겨대회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는 그 감격스러운 순간,

어쩌면 김연아는 피겨에 목숨을 걸고 그냥 그걸 연습한 거지만,

이 작가들은 이거 한 번 나가가지고 상 받으려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이 작가들에게는 김연아가 금메달 따는 것 못지않은 중요도가, 의미가 부여된단 말이죠.

월드컵에서 4강이 아니고 8강이 아니라 우승하는 것 못지않은

의미 부여가 이 사람에게 더 될 수 있단 말이죠.

 

뭐 이것뿐 아니라 모든 작품 활동 하는 게 마찬가지겠죠.

작품 활동한다고 만들어놔도 그게 대단한 작품이라고 해서

막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만들지만,

모래성은 하루면 무너지겠지만,

작품이라고 만든 건 일이백 년 가면 무너진다는,

시간이 조금 길다는 것밖에 없지 사실은 다 무너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그렇게 따진다면

여기 이렇게 63빌딩을 짓느니,

제 2롯데월드를 짓느니,  

전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을 짓느니 하는 그런 것도

불과 뭐 몇백 년 간다 뿐이지 그 또한 모래성을 짓는 것과 똑같은 얘기인 것이죠.

 

그래서 그 모래성을 만드는 그 작가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거기에 엄청난 의미 부여가 되겠죠.

엄청난 의미 부여가 되니까 그것이 무너지게 되면 큰일 나는 겁니다.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거죠.

그래서 그걸 잘하게 되면 상금도 엄청나게 받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의미 부여가 된 사람에게는 그게 심각하지만,

이걸 한참 만들고 있는 사람에게는 심각하지만,

저 옆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있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게 중요한 거겠어요?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죠.

아무 의미가 없는 거죠.

‘왜 저런 짓을 하고 있지? 하룻밤이면 끝나는 것을.’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이죠.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든 순간순간이

우리가 삶에 목숨 걸고 있는 돈이며,

명예며, 권력이며,

지위며, 좋은 집이며, 좋은 차며,

이런 모든 것들이 사실은 이렇게 '모래성'과 같다.

 

인연 따라 잠깐 만들어진 것일 뿐이고

거기에 내가 의미 부여를 했을 뿐이지

내가 의미 부여를 하니까,

내 마음을 가지고 의미 부여를 하니까 그게 중요해진 것뿐이지

그래서 내가 거기 내가 집착하는 것뿐이지

거기에 의미 부여하지 않은 많은 사람에게는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뭐 저한테 무슨 오백만 원짜리 가방을 갖다 선물을 해주면

제가 그게 뭔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게 스님들한테 뭔 의미가 있겠어요?

 

아니면 무인도에서 혼자 사는 사람에게

무슨 뭐 몇억짜리 자동차를 갖다 준들

그걸 뭐 굴리지도 못하고, 기름도 한 방울 없다면 뭐 별 의미가 없을 겁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다른 사람들은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나 스스로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지.

 

예를 들어 똑같은 고3 수험생 부모님인데,

어떻게 의미부여를 하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중요하다고 느끼느냐에 따라서

‘내가 공부를 못했으니까 너라도 분명히 서울대 가야 한다.’고

집착에 집착을 거듭하는 부모님에게는

그 아이의 성적 하나가 정말 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일 수 있단 말이에요.

 

어떤 고3 수험생 아이가 저한테 메일로 상담을 요청해왔어요.

뭐였느냐 하면, 어머니하고 단둘이 산다는 거죠.

어머니하고 사는데 동생도 있다고 했나?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어머니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삶의 의미를 잃고 아주 오랫동안 그 방황을 하셨었다는 거예요.

방황하다가 '내가 이 방황에 딱 종지부를 찍고 내가 열심히 살아야겠다.'

마음을 먹고 열심히 살기 시작해서 좋았는데,

그 원동력이 된 게 자신의 공부라는 겁니다.

 

'내가 남편이 없어도 이놈 내가 공부시켜야 하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돈 벌어야지.' 그래서 이 어머님은 돈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막 뭐든지 하면서 아주 그냥 새벽까지 일해가면서 이 아이를 공부시키고,

또 이 아이가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 되지 않게 하려면

엄마가 엄마들 친구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지만

쉽게 말해 놀아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엄마가 실제로는 식당에서 설거지도 하고,

뭐 아주 힘든 온갖 궂은일들을 다 하지만

친구 부모님들 만날 때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명품을 탁 하고,

당신 아들 기죽을까봐 명품으로 치장하고 딱 만나고,

또 아들한테 사줄 때, 또는 학원도 보내고

이럴 때는 분명히 어머님이 그 능력이 안되는데도 불구하고

막 비싸다는 학원, 잘한다는 과외 선생님 붙여가지고

딴 친구들, 공부 잘하는 친구들과 무조건 같이 하게 하려고

기를 쓰고 그걸 한단 말이죠.

 

그런데 이 아이의 고민은 뭐였냐 하면,

어머니가 너무 내 성적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 보니까

이제는 본인이 보기에 어머니가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너무 심각하게 보이고,

그것이 고스란히 내 무게감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내가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공부 성적이 나쁘면 엄마는 어머님의 모든 삶의 의미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과 똑같기 때문에.

그 어머님은 내가 만약에 없었다면,

내가 공부를 할 이유가 없다면 어머님은 아마 바로 자살할지 모른다.

 

그런데 나 때문에 이렇게 온갖 수고로움을 하고 이렇게 하시는데,

그렇다고 어머님께서 나에게 집착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정말 죽을 것 같이 괴롭다.”

그렇게 얘기한단 말이죠.

 

그것은 그 어머님 스스로 만들어 낸 그 공부에다가

내 인생의 의미를 거기다 부여해 버린 겁니다. 자식에다가....

 

내 인생의 의미를 나 자신에게 부여해서 나만 괴롭히면 되지,

왜 이 의미 부여를 자식에게 해가지고 자식까지 괴롭히느냐 말이죠.

내 스스로 그렇게 하는 거야 나 스스로 깨야 되는 공부니까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그런데 우리는 누구나 이 어머님 같은 일을 지금 벌이고 있는 겁니다.

내가 심각하게 느끼는 모든 것이 사실 남들이 봤을 때는 하나도 심각한 게 아니에요.

 

스님들이 정말 ‘깨달음을 얻어야 되겠다.’ 하고

정말 치열하게 정진을 하는 게

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나

타 종교나 이런 사람들이 봤을 때는 웃기는 일이죠.

앉아가지고 뭐하는 짓인가 싶고,

뭐 때문에 저렇게 하는가 싶고, 그런 마음이 들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실은

내가 이 세상에 심각하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사실은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뿐이고,

그렇게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을 가지고 내가 집착을 하는 겁니다.

 

인연 따라 만들어질 때 내가 수고를 하니까,

노력을 하니까, 노력이 막 개입이 되니까,

노력을 한 것에 따라서 잘 만들어지고,

노력을 안 하면 안 만들어지고

그러니까 노력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그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이 환영인 줄 모르고,

본래 일어난 게 없는지를 모르고 거기에 점점 집착하게 되는 겁니다.

점점 가치 부여를 하게 되는 거예요.

본래 있지도 않은 가치를 있는 것처럼 매겨 놓은 겁니다.

 

아까 그 아이가 내가 만든 이 모래성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옆에 친구가 무너뜨리면 막 화를 내고 싸움을 하듯이

그게 뭐라고, 모래 하나가 뭐라고 그걸 가지고 싸워요. 그 절친한 친구가.......

 

그것과 성인 어르신들 두 분께서

진급의 경쟁자라고 서로 험담하면서

그 절친하던 사람이 진급의 경쟁자라고 서로 싸우는 것과

사실은 뭐가 그렇게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서로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이 다른 것일 뿐이지.

‘이게 중요하다, 저게 심각하다’ 하고 의미부여하는 것이 다를 뿐인 것이죠.

 

이처럼 세상 모든 것은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일 뿐이고,

인연 따라 만들어진 모든 것은 사실은 일어난 바가 없는 겁니다.

 

'불'이 일어날 때

우리가 성냥을 가지고 불이 딱 키면 불이 만들어지죠.

본래 '불'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불이란 것은 없는데,

성냥을 딱 켜줌으로써 불이라는 것이 딱 만들어진단 말이에요.

인연 따라 만들어졌을 뿐이에요.

 

그런데 이 인연이 계속해서 인연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인연이 가합되지 않으면 이 불은 금방 꺼집니다.

성냥 하나만 이렇게 있으면 좀 있다 성냥이 다 타면 꺼지죠.

근데 또 그것도 또 성냥을 이렇게 거꾸로 들고 있으면

그 뒤에 나무를 마저 태울 수 있으니까 활활 타는데,

성냥을 이렇게 바로 딱 들고 있으면,

성냥을 이렇게 하느냐(거꾸로 드느냐), 이렇게 하느냐(바로 드느냐)에 따라서

불이 좀 더 오래갈 것이냐, 좀 있다 꺼질 것이냐가 또 결정이 된단 말이에요.

요 작은 인연에 따라서 불의 생사가 결정이 됩니다.

 

근데 또 불을 딱 켜놓고 나서

여기(불)다 옆에 종이를 갖다 대거나 화장지를 갖다 대거나

이렇게 인연을 자꾸 넣어주면 어때요?

불은 좀 더 활활 타죠.

거기다가 또 뭐 종이 같은 거, 신문지 같은 걸 잔뜩 넣고

거기에 나무 같은 걸 올려놓으면

그렇게 인연을 자꾸 넣어주면 불은 더 오랫동안 타는 겁니다.

 

그 불이 꺼질 만하면 또 나무를 공급해주고, 나무를 공급해주고....

이렇게 가만 놔둬 버리면 인연이 다 하니까,

인연 따라 모이고 인연 따라 흩어지니까

인연 따라 모인 게 제 역할을 다하고 흩어지는 것뿐이죠. 꺼지죠.

 

근데 이걸 계속해서 연료를 공급해 주면,

인연을 가합해 주면 불은 계속되는 겁니다.

 

옛날에 원시인들은 불을 꺼뜨리지 않는 게 얼마나 중요했겠어요?

이처럼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은

우리가 인연을 계속해서 공급해 줘야지만

그게 생성될 수 있는 어떤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지,

아무리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도 그대로 내버려두면,

인연을 계속해서 가합하지 않으면, 가해주지 않으면 그것은 소멸되어 버립니다.

다른 걸로 변하거나 흩어져 버리죠.

 

이처럼 모든 것은 그렇게 다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 인연 따라 없어지는 것을

우리가 인연을 계속 공급해줌으로써 붙잡아 놓았을 뿐입니다.

그렇게 인연을 계속 공급해줘서 붙잡아 놓고서

이게 진짜 있는 것처럼,

언제까지고 천년만년 이어질 것처럼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사실은 우리가 돈 버는 것도 마찬가지죠.

돈이라는 게 실체가 있어서 나에게 언제까지나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돈을 버는 일을 계속해서 해줌으로써,

계속 인연을 맺어줌으로써 돈이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 일을 열심히 안하면, 돈을 벌다 말고도 일을 딱 그만둬 버리면,

내일부터 내가 회사 딱 안 가버리면

당장 다음 달부터 월급이 안 들어올 거 아니겠습니까?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인연을 계속해서 공급해주니까 그게 나한테 실체인 것처럼 있는 것일 뿐이지

인연 공급을 딱 멈추면 거기서 끝나는 겁니다.

 

한 번 높은 자리에 올랐던 사람이라고 계속해서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을 공급해 주니까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일 뿐이지.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고 해서 아름다운 외모가 계속 공급되는 게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변할 수밖에 없죠. 늙고, 병들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죠.

 

근데 거기다가도 이제 인연을 막 과하게 공급해주면 조금씩 좋아질 수는 있어요.

성형수술하면 좀 늙어 보이는 게 조금 더 젊어 보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걸 막 기를 쓰고 바꾸려고 하고.

 

제가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가,

사실 TV 채널을 돌리다가 아니라 제가 그걸 한 번 찾아봤는데,

페이스북을 하다 보니까

어떤 분이 페이스북에 이런 TV 채널이 있다고 써 놓은 게 있는데,

위에 사진을 쫙 올려놨는데 보니까요,

통통하기도 하시고 뭐 외모적으로 이렇게 아주 좀 안 좋았던 분이

무슨 수술도 하고 무슨 뭐 다이어트 하는 무슨 뭐 지방흡입도 하고

뭐 온갖 것들을 해가지고 갑자기 미인으로 거듭나는데,

이게 뭐 몇천만 원 이래가지고 이런 프로가 있던데 참 허망한 프로대요.^^

연생은 무생이라는 것을 모르니까 거기에 목을 매고,

그런 걸 보는 사람들이 그게 이제 진짜인 걸로, 실체인 걸로 집착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

그렇게 해서 급속도로 만들어진 것은 더 빨리 무너질 수밖에 없죠.

 빨리 만들어진 것은.

이처럼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은 인연을 공급해주지 않음과 동시에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각오하고 있어야 돼요. 사실은...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그 높은 자리가 천년만년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근데 이 높은 자리에서 오래 있었던 사람은

이제 그 일을 딱 그만두고 집에 가 있는데도

본인이 그 자리의 그 대접을 받아야 될 것 같고,

그 대우를 받아야 될 것 같고,

왜? 그 대우를 받는 게 나의 실체라고 여기니까.

그런 실체는 없습니다.

 

집, 자동차, 아파트, 컴퓨터, TV 이런 물질적인 모든 것들,

이런 것도 인연을 공급해주지 않으면 어때요? 무너집니다.

 

컴퓨터도 쌩쌩한 것 같아도 안 쓰고 가만 놔두면 나중엔 아예 켜지지도 않죠.

자동차나 아파트나 건물이나 이런 모든 것도 그냥 내버려 둬버리면

어느 순간 무너지고 허물어지고 사람이 못 살만한, 집도 한 며칠 안가다 가보세요.

 

저 대학교 다닐 때,

방학 때 한두 달을 비워놨다가 집에 들어갔더니 이게 사람 사는 집이 아니고,

‘도대체 아무도 들어와서 건든 적이 없는데

어째 이렇게 집이라는 게 이렇게 허망해져 있나.’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습한 곳이라서 막 엄~청 막 습기가 엄청나고 막 그러기도 했었고,

그러니까 쓰지 않으면 인연을 계속 공급해주지 않으면 무너지는 겁니다. 모든 것은.

 

이렇게 얘기하니까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저 숲은 우리가 인연을 공급해주지 않아도 계속 천년만년 유지되지 않습니까?”

 

인간이 공급해주지 않아도 유지되는 것이지

그게 자발적으로 저 혼자 유지되는 게 아니죠.

태양만 없어도 숲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약에 이 지구를 막 오염시켜가지고 지구가 훼손되고,

중국이 그러잖습니까?

사막이 자꾸 늘어나지 않습니까.

땅 자체가 그만큼 양분이 있는 땅이니까 거기 숲이 자랄 수 있는 것이지,

이렇게 사막화가 진행되면 숲이었던 곳이 사막이 될 수도 있단 말이죠.

인연이 계속 공급되지 않으면 허망해지는 거죠.

 

 ‘그럼 그 태양은, 태양은 공급해줘야지만 된다고 하니까

그럼 태양이라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그 태양도 언제나 계속되는 게 아니죠.

보니까 별이나 태양 같은 것도 핵융합반응을 계속 일으켜서

핵융합반응의 원료인 수소를 다 쓰게 되면 소멸될 수밖에 없다고 그래요.

태양도 50억 년 정도 핵융합이 일어났고,

앞으로 50억 년이 지나면 수소 핵융합반응이 끝나서 태양도 이제 사라진답니다.

 

이것처럼 공급이 안 되면, 인연이 공급이 안 되면

이 우주의 그 어떤 것도 언제까지 지속되는 것은 없는 겁니다.

 

물 같은 것도 보면 언제나 이렇게 지속되는 게 뭔가 있는 것 같지만,

인연 따라 비가 됐다가, 눈이 됐다가, 우박이 됐다가, 서리가 됐다가,

이슬이 됐다가, 구름이 됐다가, 수증기가 됐다가,

사람의 피도 되고, 땀도 되고,

바다도 되고, 계곡도 되고, 나무의 수액도 되고,

인연 따라 인연 따라 계속해서 바뀌면서 변화할 뿐이죠.

 

인연 따라 변화하는 것을 ‘제행무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무상하게 변할 뿐인 겁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그냥 변화해갈 뿐인 것이지.

부증불감입니다. 그래서...

더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도 없이 끊임없이 변화할 뿐인 겁니다.

이게 인연법의 어떤 실체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몸에다가 밥을 주니까, 먹을 것을 주니까 몸이 살아 있는 거고,

숨을 쉬어주니까 몸이 살아 있는 거지.

 

그러니까 인연을 계속 공급해줘야지만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은 유지가 되는 거지,

인연을 딱 끊어버리면 그 자리에서 딱 끝나는 것이 삶의 실체다.

 

아까 제가 모래성, 백사장을 얘기했는데,

그 백사장에서 만들었지만,

그리고 거기 의미 부여를 잠깐 했지만

어느 순간 그게 다 허물어지듯이

우리가 삶에서 의미 부여했던 모든 것들은

다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이고,

다만 의식을 가지고,

알음알이, 인식, 분별을 가지고

분별, 망상을 가지고 의미 부여를 했기 때문에

그게 나에게 와서 의미 부여가 된 것일 뿐이지,

사실은 일어난 바가 없습니다.

무엇하나 만들어진 것도 없고, 무너진 것도 없다.

 

내가 갑자기 성공을 해도 성공한 것이 아니고,

실패해도 실패한 것이 아니고,

병이 나도 병인 난 게 아니고,

내가 잘살아도 잘산 것도 아니고,

잘살았다고 거기 막 실체적으로 할 게 아니란 말이죠.

 

백사장에서 만든 것 가지고, 자동차 가지고 놀이는 할지언정

집에 갈 때는 다 허물고 가듯이 언제든 허물어질 것을 알고 살아야 되는 것이죠.

다만 우리가 모든 것에 의미 부여만 하지 않으면

그것은 고정된 실체적인 것이 있는 게 아닙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보니까,

아주 아름다운 시인데, 시 평론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를 해놨대요.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는 모습이고,

존재 의미를 조명하고 또 정체를 밝히려는 의도를 가진 시다.

철학적이고 존재본질 인식이라는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작품이다.”

이렇게 막 풀어놨더라고요.

단순한 얘기를 뭐 이렇게 온갖 말로 풀어놓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의미부여를 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죠.

내가 의미부여를 했으니까 그게 나에게 와서 꽃이 되는 것이죠.

 

자식이 나에게 와서 자식이라는 꽃으로 피어난 거죠.

그러나 전생의 자식은 내 옆집에 있는데,

내가 탁 한소식을 해서 숙명통이 열려서

옆집 사는 말똥이가 ‘아, 내 전생의 내 아들이었구나.’ 하고 딱 깨닫게 되면,

거기에 의미 부여를 하게 되면

‘아, 너도 내 자식이구나.’ 또 이렇게 의미 부여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 다음에 그 시가 진행이 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아름다운 어떤 시죠.

아름다운 진리의 모습을 이렇게 담아놨습니다.

 

그런데 이것처럼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이 되고 싶고,

누군가가 잊혀지지 않는 어떤 의미가 되고 싶단 말이에요.

 

또 무언가를 잊혀지지 않은

오래 지속되는 의미로 만들고 싶어 한단 말이죠.

이렇게 아름답게 시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이렇게 의미 부여하는 것,

이렇게 실체를 부여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고,

내가 남에게 의미가 되고 싶고 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본래 일어나지 않은 것 가지고 일어났다고 허망하게 집착하는 것이고,

허망하게 뭔가가 ‘진짜 있다’ 라고,

내가 불러주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불러주고 나서 '꽃'이 된 어떤 그런 것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뭐로 불러주느냐, 뭐로 이름을 하느냐 그것일 뿐이지

그 본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실 우리가 그 어디에 집착할 게 있겠습니까?

이 세상, 이 우주에 나타나 있는 내가 삼라만상에 집착하고 있고,

그 모든 것들에 우리가 집착하고 인생을 살아오고 있지만,

그 무엇이 진짜라고 해서 집착하겠어요.

 

인연만 공급해주지 않으면 언제 소멸될지 모르는 건데,

이 몸뚱이조차 공기라는 인연만 딱 한 십분, 이십분만 딱 끊어버려도

우리가 바로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 몸이 이렇게 견고한 것 같이 막 평생 우리 몸을 애지중지하고 살지만,

제가 저 설악산에 갔다가, 아침부터 갔다가 저녁 세 네시 됐을 때,

아침부터 물을 안 먹고 한 여름에 걷다가

세 네시 됐을 때 쓰러져가지고 죽을 뻔 했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그것이거든요. 아, 이렇게 견고하다고 이렇게...

 

'내가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사람은 어지간히 짓눌러도 그 사람은 일어나고 깨어나고 전쟁터에서도 살아오고,

아무리 ‘정글의 법칙’ 같은 데서 보듯이 아프리카에 떨어뜨려놔도 살 텐데,

허망하게 물 하나 공급해주지 않았다고

이렇게 하루 만에 죽을 수도 있는 게 사람이겠구나.

견고한 게 아니구나. 인연 따라 만들어졌을 뿐이지.'

 

인연만 딱 끊어버리면 우리는 언제든 이 몸뚱이도 금방 허물어질 수 있고,

아무리 대그룹의 회장이고 사장이라 연봉을 수천억, 수백억, 수조억을 벌고,

밑에 회사 사원들을 몇천명을 거느리면 뭐합니까?

 

갑자기 앞만 보고 일만 보고 달려가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죽을병에 딱 걸리게 되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게 의미가 없어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 죽는 마당에 뭔 의미가 있겠어요. 갑자기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 겁니다.

 

지금 죽는다고 생각한다면,

갑자기 우리가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죠.

길을 가다가도 갑자기 내가 생각지도 않게

남의 차가 와서 나를 쳐서 죽게 만들 수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죽지 않고 이렇게,

부자가 되지 않았을지언정,

자식이 좋은 대학 가지 않았을지언정,

마누라가 바가지를 좀 피울지언정,

돈을 그렇게 많이 벌지 못할지언정,

지금 이대로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본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걸,

꿈속에서 일어난 일을 가지고

진짜라고 지금까지 착각해 온 것일 뿐이고,

'모래성을 좀 더 잘 지었느냐 못 지었느냐,

더 크게 지었느냐, 적게 지었느냐'

이것 가지고 지금까지 막 싸우고 했을 뿐이지

실제는 그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고,

실제는 모든 게 연생일 뿐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 만들어진 인연생일 뿐이기 때문에

그 인연을 계속 공급해주지 않으면 무너지는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실을 확실하게 안다면

사는 것이 하루하루가 달라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

‘어디에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가 없구나.’ 하는 것을 분명히 알 수박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그렇게 목숨 걸어왔던,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던,

그렇게 이게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해왔던 그 모든 것이 허~망한 착각일 뿐이구나.

 

내가 원수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도 사실은 일어난 바가 없는 겁니다.

목숨 걸고 여기던, 정말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던 그 모든 것들이

그 사람에게로 와서 의미가 되고 싶지만,

더 많은 의미를 살면서 찾고 싶지만 그게 사실은 허망한 것이죠.

본질에서 본다면 허망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딱 깨달음을 얻으신 그런 분들을 보면

 ‘뭘 해도 괜찮다, 안 해도 괜찮다.’ 그렇게 아는 거죠.

그렇게 막 크게 연연하지 않죠.

삶은 다 살지만, 살 것은 다 살지만 그 하나에 연연해하지 않고

순간순간만 최선을 다해서 살 뿐이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여 집착하지 않으면서 액티브하게 사는 거죠.

그 자리에서 그냥.

 

그 순간순간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거기에 모든 것을 부여하면서.

미래가 없으니까,

힘을 축적해 놓을 필요가 없으니까

지금 할 수 있는 뭐든 백프로로 하는 거죠. 언제나....

그러면서도 하나 의미 부여를 하지 않고 그냥 할 수 있는 그걸 할 뿐이지.

 

의미 부여를 하고서 그 일을 하면

잘했다고 칭찬받고 싶고,

칭찬 안 해주면 괴롭고,

내가 잘했는데, 너를 위해 도왔는데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 안 해주면 괴롭고.

근데 의미부여 없이 그냥 하면 괴로울 것도 없죠.

 

그래서 여러분 앞에 등장하는

 ‘모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인연 따라 만들어진 허망한 것이고,

‘진짜 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은 사실은 있는 게 아니라 일어나지 않은 겁니다.

 

본래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무생’이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본래 한 법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우리 삶에는 없습니다.

 

제가 옛날에 한 7,8년 전엔가 제 방에 이렇게

‘아무것도 없다. 아무 일도 없다.’

그렇게 딱 써 붙여놓고 살았었어요.

 

힘든 일 있으면, 뭐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딱 들어오면

‘아무 일도 없다. 아무 일도 없다.’ 그렇게 써 있는 것을 보고서,

‘그렇지! 아무 일도 없지!’

아무 일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마음속에서 허망하게 착각으로 만들어 놓은

그 모든 것들을 이제 가볍게 내려놓고,

가볍게 가볍게 자유롭게 인생을 살아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목탁소리 법상스님 -

 

 

 

 

 

 


김민정 / 가을밤의 속삭임

 

 

가을 풀잎의 사랑 - 전병조


풀잎은 바람이 부는대로 쓰러진다
쓰러지면서 다시 일어선다

허허벌판 정(靜)의 중심에
우뚝 선 소나무
풀잎은 물감이 없어도
훌륭한 그림을 그려낸다

구름이 흐른다 내 속을 흐르는
끝내 알지못할 그리움의 물그림자
이 가을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뜨겁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가슴은
동백꽃보다 붉디붉다

풀잎은 배반을 하지 않는다
풀잎은 사람이 바뀌어도
문패를 바꿔달지 않는다

풀잎은 고향을 버리지 않는다
풀잎은 죽어서도
자기가 태어난 곳을 떠나지 않는다

풀잎의 피는 뜨겁다
너무도 뜨거워 어떠한 열병도
감히 근접치 못한다


풀잎은 서로를 사랑한다
황금빛 낱알로 세상을 불태울
환희의 그날까지 



Song Sung Blue(우울하게 부르는 노래) - Neil diam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