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佛普賢大人境 (십불보현대인경)

2014. 10. 21. 09:37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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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佛普賢大人境 (십불보현대인경)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과 큰사람의 경지네

 

텅~빈 모습 속에 나투는 智慧德相의 부처님 世界가 菩提心이며 大願力이니  

10佛은 菩提心을 말하고, 보현보살은 大願力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보리심과 대원력으로 사는 모습을 말로 나타내자니 큰사람의 경지라 하고 있습니다.

 

마음 하나 꿰뚫어

 지금까지 空性緣起인 一法界의 世界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가 부처님의 세계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의 세계는 말이나 생각으로

알 수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스스로 말과 생각으로 부처님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스스로 모순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 없이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갖는 한계를 如實히 알지만 또한 그것이 우리 일상에서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과 生覺이 비록 부처님의 세계인 진제(眞諦)를 나타내기에는 不足하지만 부처님세계에

이르기까지 중생의 입장에서 보면 말과 생각이 훌륭한 方便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언어와 생각의 方便을 빌려서 나타낸 부처님의 세계는 어쩌면 중생의 수만큼이나

많을지도 모릅니다. 말과 생각이 그 낱낱에 제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공업(共業)의

사회생활을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內容의 微妙한 差理는 별업(別業)으로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엄의 부처님세계는 一法界로 비로자나佛의 世界이면서 同時에 모든 중생과

사물의 얼굴 그대로 낱낱 부처님이 重重無盡으로 겹쳐 있는 세계입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이 無限히 겹쳐 있으면서 緣起實相인 비로자나 부처님 세계를 펼치고 있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부처님과 부처님께서 重重無盡으로 겹쳐 있되 낱낱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無限한 부처님을 화엄에서는 完全數를 나타내는 10을 써서 10불(佛)이라고 합니다.

10佛은 곧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나타냅니다.

 부처님하면 歷史的인 부처님으로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신 이후에는 부처님의 法을 부처님의

몸으로 代身하니 오분법신(五分法身 :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 등이 그것입니다.

나아가 華嚴에서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主佛로 모시는데 緣起實相의 법(法)을

부처님으로 모신 경우입니다. 그러면서 法身, 報身, 化身의 三身佛이 있게 됩니다.

모든 중생과 낱낱의 사물이 그대로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이루고 있는 경우는 華嚴의

 法身思想입니다. 緣起法이 法身佛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緣起法이란 정적(靜的)인 상관관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나타내게도 하고 없게도 하는 등 끊임 없는 變化의 동성(動性)을 同時에 뜻합니다.

 이 同性의 나툼이 모든 중생과 낱낱 사물의 모습인데 이들이 곧 부처님의 지혜 덕상

(德相)입니다. 모든 모습이 제 모습이면서 동시에 모든 모습일 수 있는 相卽相入의

공능(功能)을 보신(報身)이라고 말합니다.

 

法身, 報身의 두 분 부처님께서 만물의 얼굴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나타나 있으니

이를 화신(化身)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에서 보면 化身으로 제 모습이지만

이 모습을 貫通하고 있는 것은 法身과 報身입니다.

 

이 관계를 앞서 일(一)과 다(多), 일념(一念)과 무량겁(無量劫)의 즉(卽)과 중(中)의

관계로 말씀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모습이 바로 三身의 모습 그대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중생의 모습을 떠나서 三身이 있다고 하면 불교 이외의 가르침이 될 것입니다.

이 모습 그대로 三身佛이기 때문에 낱낱의 제 모습만으로 自己를 삼는다면 진정한

제 모습을 잃고 맙니다.

 

그러면 三身佛로 제 모습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大願力의 慈悲行입니다. 이런 중생을 菩薩이라고 부르며 普賢菩薩이 그 代表입니다.

그러나 보현보살이라고 해서 낱낱 중생을 떠나서 저 멀리 훌륭한 모습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慈悲를 實踐하고 있는 衆生의 活動이 普賢菩薩의 모습입니다.

모든 중생들이 갖추고 있는 智慧德相이 언제 어디서나 자비로움으로 나투는 화신 부처님의

 행동이 보살의 원력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흔히 부처님의 세게에 들어가기 바로 直前의 모습으로 중생세간에 있겠다고 원력을 세운

분을 보살이라고 하여 부처님과 차별을 두고 있습니다만 眞正한 보살의 모습이 곧

부처님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이 열반의 세계인데 보살은

이 세계에 들어가기를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이 모습, 곧 열반을 구하지 않는 모습이야말로 부처님의 바른 모습입니다.

이것은 <능가경>에서 보살이 열반을 구하지 않는 그것이야말로 完全한 涅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이를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空 그대로 색[空卽是色]이라고 말했습니다.

眞理의 世界를 完全히 具現했으면서도 중생들을 위하여 現象의 世界에서 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분 보살님들께서는 중생과 같은 生死의 세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니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色 그대로 空[색즉시공]의 모습으로 모든 煩惱를 떠나 있습니다.

菩薩이란 생사에도 머물지 않고[色卽是空]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空卽是色] 분으로 언제

어디서나 自由로운 가운데 三身佛의 모습을 그대로 나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열반조차도 취착(取着)하지 않는 수행자의 모습이 곧 삼천대천 세계를 가득

채우는 부처님의 智慧德相이니 이를 큰사람이라고 합니다. 큰사람이란 크다 작다로 서로

比較되는 가운데서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대승(大乘)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대승의 뜻을 원효스님께서는 <대승기신론소> 첫머리에 '낱낱의 모습으로 나투면서도

고요하고, 宇宙에 기득 찼으면서도 텅~ 비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華嚴緣紀의 一法界가 바로 大乘의 世揭이며 이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 큰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게송 앞까지 말한 화엄의 가르침이 부처님과 보살과 큰사람의 경계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생각을 이어서 알아차려야 할 것은 부처님과 보살이 모든 중생 밖에

있는 어떤 위대한 분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慈悲를 行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華嚴의 相卽相入의 世界는 불보살의 경계일 뿐 나와는 상관없다는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생각생각마다 텅~빈 모습으로 一切를 이루고 있는 것을 如實히 살펴, 나라는 것이

虛妄한 分別에 의해서만 있음을 분명히 알아차려야 합니다.

텅~빈 모습 속에 나투는 지혜덕상의 부처님세계가 보리심이며 대원력이니 10불(佛)은

보리심을 말하고 보현보살은 대원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보리심과 대원력으로

사는 모습을 할 수 없이 말로 나타내서 큰사람의 경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菩提心과 大願心力은 삼신 부처님의 근본이며 아울러 중생의 생명을 이루는 비로자나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때문에 화엄에서는 중생과 부처와 마음이 아무런 差別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연기법계의 지혜덕상은 마음이 나툰 것이며 이 모습 그대로 부처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도 찾을 수 없고 法을 알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떠나 法을 찾는 瞬間 우리는 法의 本性을 놓치고 비로자나佛의 세계도 잃게 됩니다.

지금 일어나는 마음자리의 本性을 보는 것만이 모든 중생과 사물의 本性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禪門의 祖師이신 달마대사께서도, '마음 하나를 꿰뚫어 아는 것 그대로가 모든

중생과 사물을 다 아는 것이다[觀心一法 總攝諸行]'라고 하셨습니다.

 

 

 

樂與餌, 過客止.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악여이, 과객지. 도지출구, 담호기무미.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可旣.
시지부족견, 청지부족문, 용지불가기.

 

아름다운 음악과 맛있는 음식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만,

도라는 것은 밋밋하여 아무런 맛이 없다.

보아도 족히 볼 만한 것이 없고,

들어도 족히 들을 만한 것이 없으나,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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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를 깨닫기만 하면 힘들었던 그동안의 모든 삶을

한꺼번에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도를 알고 보니, 도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위대한 것도 아니고 큰 것도 아니며 눈여겨 볼만한 무엇도 아니었습니다.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자는 알리라.”라는 임제 선사의 말씀처럼, 도란 그냥 이대로,

이 일상 그대로,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심지어 꿈 속에서까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

이대로가 도 아님이 없었습니다.

 

깨달아야 할 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들끓는 번뇌 그대로가 보리(菩提)요, 중생 이대로가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본래 없습니다. 그냥 이대로일 뿐인 것을요.

 

우리는 지금 이대로 이미 깨달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며 그냥 살면 되어요.

이것이 바로 존재의 진실한 모습 즉 실상(實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살지도 않아요.

 

 

도무지 이런 말들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게 도냐고,

  이렇게 초라하고 볼품없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이인 자신이 어떻게 부처일 수 있느냐고,

 남들을 의식하며 쩔쩔 매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허둥대는 이 모습이 너무 못나 보여서

그저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한데,

 

어떻게 이것이 자유일 수 있으며 깨달음일 수 있느냐고…….

그러면서 스스로 ‘그 자리’를 황급히 떠나버리지요.

조금 전까지 딛고 서 있던 그 진리의 자리를 말입니다. 

 

한 순간만이라도 그 발걸음을 멈추어 보십시오.

진리는 진리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며,

  자유는 자유의 모양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으며

다만 받아들여 그 속에 있어 보십시오.

 

지금이 아닌 다른 어떤 순간 속에서

 자유를 찾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하지 말고,

그렇게 늘 피하고 달아나고 도망 다니지만 말고,

 다만 지금 여기에 존재해 보십시오.

 
그 초라함 속에, 그 못남 속에, 그 강박 속에,

 그 부족 속에, 그 허둥댐 속에,

그 번뇌 속에 말입니다.

그러면 오래지 않아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구속되어 있지 않으며,
내가 곧 자유라는 것을.
자유를 찾는 그 마음 때문에 도리어 한없이 구속되었고,
평화를 구하는 그 마음으로 인해 오히려 무한히 힘들었다는 것을.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 다녔던 모든 것은 본래 내 안에 있었고,

단 한 순간도 나를 떠난 적이 없었다는 것을…….

 

- 김기태의 10/15일서울강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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