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암 가는 길 풍경 / 도신스님 대담

2014. 10. 28. 12:5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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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암 가는 길 풍경 / 도신스님 대담

 

 

2014년 10월 12일 찾은 설악산 봉정암에서 오세암 가는 길에 본 내설악 가야동 계곡의 풍경입니다.

오색단풍으로 곱게 단장한 내설악 풍경이 환상적인 아름다움입니다.

 

 

운명을 바꾸어 잘 사는 비결

 

업보는 소멸해가는 것이고

운명은 개척해가는 것이다.

법구경에

“모든 과보는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다."고 하였다.

 

 

악한 업보를 피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거나 땅 속으로 숨는다 해서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좋은 업보라 하여 새로이 닦은바 없이

받고 싶어도 오는 것이 아니다.

 

 

인과응보는 불변의 진리요

우주의 이치이므로

뿌린 대로 거두고 자신이 행한대로

받는 만유공동의 법칙이다.

 

 

그러나 인과응보의 법칙은 불변이지만

자기의 노력하기에 따라서

점차 악업에서 벗어나

선업으로 개선시킬 수도 있고

 

 

반대로 선업을 지었어도

악업을 다시 짓게 되면

선업이 빨리 소멸되어

나쁜 과보를 받게 되므로

사람의 업보와 운명은

결국 자신이 하기에 달려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아함경”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선업(善業)으로 과거를 갚는자는

무서운 인과라 할지라도 능히 단절할 수 있어

마치 구름 사이에서 나온 달처럼

세상을 비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엄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이나

참 뉘우침과 행동의 개선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고져하는 사람에게는

밝은 변화를 가져 온다는 뜻이다.

 

 

우리 주변에서

"나는 험한 사주팔자를 타고나서

하는 일마다 꼬이고 않되며

병도 많고 인덕도 없다"는 등의

운명과 사주를 탓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고뇌와 답답함에 이해는 가지만

그렇다고 중요한 인생 삶의 자체를

숙명이나 운명이란 것에

매달리고 끌려가는 자세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

 

 

세상에 제아무리

운세가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무슨 새로운 운명이 열리고 발전이 있겠는가?

 

 

다소 운세가 나쁘다 하더라도

열심히 노력하고 개척 하려는 사람을

불행인들 무슨 방법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운명이란 고정 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가짐과 노력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극복되고 변화되며

바꿀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인간의 운명이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

고 하였고

샤르트르는

“인간의 미래는 그 자신에게 있다“고 하였다.

 

 

참으로 슬기롭고 지혜로운 사람은

불행을 스승으로 삼고

장애를 성공의 디딤돌로 딛고

일어서는 사람이다.

 

 

이 세상의 음악을 비롯한 연극 영화 등

많은 문화 예술들이

인류의 벗이 되고 공감하는 까닭은

그것이 곧 인간의 고뇌에서 시작되었고

인간의 고통과 슬픔의 표현이며 해소하는 까닭이다.

 

 

사람에게 어찌 아픔과 고통이 따르지 않겠는가.

저 인도의 시성 타골이나 괴테는

불행과 슬픔을

자기 성장의 기회와 창조적 계기로 삼았다.

 

 

우리보통 사람들은

어두운 운명과 슬픔의 고통을

인생의 패배로 여기고 상처받아 좌절하지만

 

 

지혜롭게 사신분들은

그것을 인간심화의 계기로 삼고

자기 성장의 모체로 삼았다.

 

 

오늘의 결과가 과거의 원인 때문이라면

미래의 결과와 운명은

오늘의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다.

 

 

지난해의 농사를 잘 못 지었다면

올해의 농사는

더 잘 짓겠다는 마음 자세를 가지면 된다.

 

 

오늘의 행복이나 불행에 대하여

기뻐하거나 한숨짓기 보다는

 

 

업보의 원인을 제거하는 노력과

보다 밝은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적극적인 삶의 자세로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여 진흙속에 연화처럼

거듭 나는 불자가 되도록 노력하자.

 

- 글 법륜 스님 -

 

 

樂與餌, 過客止.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악여이, 과객지. 도지출구, 담호기무미.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可旣.

시지부족견, 청지부족문, 용지불가기.

아름다운 음악과 맛있는 음식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만,

도라는 것은 밋밋하여 아무런 맛이 없다.

보아도 족히 볼 만한 것이 없고,

들어도 족히 들을 만한 것이 없으나,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는다.

 

 

도를 깨닫기만 하면 힘들었던 그동안의 모든 삶을

한꺼번에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도를 알고 보니, 도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위대한 것도 아니고 큰 것도 아니며 눈여겨 볼만한 무엇도 아니었습니다.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자는 알리라.”라는 임제 선사의 말씀처럼, 도란 그냥 이대로,

이 일상 그대로,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심지어 꿈 속에서까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

이대로가 도 아님이 없었습니다.

 

 

깨달아야 할 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들끓는 번뇌 그대로가 보리(菩提)요, 중생 이대로가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본래 없습니다. 그냥 이대로일 뿐인 것을요.

 

우리는 지금 이대로 이미 깨달아 있습니다.

그렇기에, 매 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며 그냥 살면 되어요.

이것이 바로 존재의 진실한 모습 즉 실상(實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렇게 살지도 않아요.

 

 

도무지 이런 말들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게 도냐고,

이렇게 초라하고 볼품없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이인 자신이 어떻게 부처일 수 있느냐고,

남들을 의식하며 쩔쩔 매고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허둥대는 이 모습이 너무 못나 보여서

 

그저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한데,

 

 

어떻게 이것이 자유일 수 있으며 깨달음일 수 있느냐고…….

그러면서 스스로 ‘그 자리’를 황급히 떠나버리지요.

조금 전까지 딛고 서 있던 그 진리의 자리를 말입니다.

 

한 순간만이라도 그 발걸음을 멈추어 보십시오.

진리는 진리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며,

자유는 자유의 모양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으며

다만 받아들여 그 속에 있어 보십시오.

 

지금이 아닌 다른 어떤 순간 속에서

자유를 찾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하지 말고,

 

김기태의 10/15일서울강의 중에서

 

 

그렇게 늘 피하고 달아나고 도망 다니지만 말고,

다만 지금 여기에 존재해 보십시오.

그 초라함 속에, 그 못남 속에, 그 강박 속에,

그 부족 속에, 그 허둥댐 속에,

그 번뇌 속에 말입니다.

 

그러면 오래지 않아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구속되어 있지 않으며, 내가 곧 자유라는 것을.

자유를 찾는 그 마음 때문에 도리어 한없이 구속되었고,

평화를 구하는 그 마음으로 인해 오히려 무한히 힘들었다는 것을.

내가 그토록 애타게 찾아 다녔던 모든 것은 본래 내 안에 있었고,

단 한 순간도 나를 떠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말은 그대로 된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말이 운명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늘 스스로에게

  "나는 재수가 없어" ,
"나는 뭐를 해도 안돼"라고 하면

 정말 그렇게 되고,  
"나는 반드시 잘 될거야"

"나는 성공할 수 있어"라고 하면
또 말처럼 그렇게 될 것입니다.

- 이원설,
 강헌구의 <아들아 머뭇거리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2 > 중에서 -  

* 말의 힘은 큽니다.
긍정적인 말을 하면
긍정적이고 좋은 결과가 오지만
부정적인 말을 하면
반대의 결과가 나옵니다.
그래서 항상

희망과 꿈을 이룰 수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자신과 타인에게
사랑과 긍정과 꿈을 줄 수 있는

희망의 말을 하십시오.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