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번뇌 (根本煩惱) /청화큰스님

2014. 10. 28. 13:5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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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번뇌 (根本煩惱)

                                                             청화큰스님

 

번뇌(煩惱)…무명(無明), 혹(惑), 루(漏)

근본번뇌(根本煩惱)…약설(略說)하면 탐(貪), 진(瞋), 치(痴)의 삼독(三毒)

 

십번뇌(十煩惱)…십혹(十惑), 본혹(本惑)

 

1. 탐(貪) ┐

2. 진(瞋) │ 오둔사(五鈍使)…사혹(思惑), 수혹(修惑) 또는 사혹(事惑)

3. 치(痴) │

4. 만(慢) │ ※견도(見道) 및 수도위(修道位)에서 점단(漸斷) 함.

5. 의(疑) ┘

┌아견(我見)

6. 신견(身見)└아소견(我所見)┐

7. 변견(邊見) │오리사(五利使)…견! 혹(見惑) 또는 리혹

8. 사견(邪見) │ (理惑)

9. 견취견(見取見) │※ 견도위(見道位)에서 돈단(頓斷)함

10.계금취견(戒禁取見) ┘

 

 

우리가 범부(凡夫) 중생인 한에는 천지우주를 하나의 부처로 못 봅니다. 천지우주가 무량(無量)한 광명이 충만한 부처의 한 덩어리요 청정미묘(淸淨微妙)한 하나의 생명체인 불성(佛性)인데, 그것을 잘못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맑지 못하고 흐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고 어지럽히고 미혹(迷惑)하게 하여 더럽히는 것을 번뇌(煩惱)라 합니다. 또한 천지우주가 바로 부처인 실상(實相)을 바로 못 보고 진리에 어두워서 무명(無明)이라 하고, 또는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미망(迷妄)으로 우리의 본래 청정한 마음을 의혹(疑惑)하는 것이므로 혹(惑)이라고도 말합니다.

 

우리 범부중생은, 마음이 바로 부처요, 천지우주가 한 덩어리 부처뿐인 것을 나요 너요 분별하고, 옳다 그르다 시비하는 어리석은 치심(痴心)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이러한 치심(痴心)은 사물을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대로 둘로 셋으로 분별해 보고, 나와 너를 한계 있게 보고,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어리석은 치심입니다.

 

또한 치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탐심(貪心)을 내고 진심(瞋心)을 냅니다. 이 세 가지 독스러운 마음인 삼독심(三毒心)은 서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탐욕을 내고도 그 마음이 독스러운 줄을 모르고, 성 내고도 그 마음이 독스러운 줄을 모릅니다. 이런 삼독심을 내면 그 즉시에 우리의 생리도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과 정신이 하나인 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에너지와 물질이 둘이 아닌 것을 지금 물리학은 증명을 합니다. 에너지가 곧 물질이요, 물질이 곧 에너지인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이 곧 물질이요, 물질이 곧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을 한번 일으키는 그 순간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물질도 역시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탐욕심을 한번 딱 내면은 미세할망정 우리 몸의 세포에는 분명히, 구체적으로 말하면, 수적(水的) 요소, 자력적(磁力的)요소가 증가됩니다. 우리가 성을 내면 성내는 바로 그 순간 우리 몸을 구성하는 전자(電子)가 증가됩니다.

 

천지우주가 구성될 때 맨 처음에는 텅 비었습니다마는 텅 빈 가운데서 중생들의 탐욕심과 또는 성내는 진심과 이런 것이 모이고 모여서 우주를 구성한 것입니다. 탐ㆍ진ㆍ치 삼독심이 가장 간략히 말하는 근본번뇌이고, 조금 더 풀이해서 말하면 십번뇌(十煩惱)라, 열 가지 번뇌로 말합니다. 또한 십혹(十惑)이라고 말하는 이 번뇌가 근본번뇌이기 때문에 본혹(本惑)이라고도 합니다. 열 가지 번뇌가 근본번뇌인 셈이지요, 더 간추리면 탐심과 진심ㆍ치심이고 말입니다.

 

열 가지 번뇌[十煩惱 ]는 무엇인고 하면,

 

맨 처음에 탐심(貪心)이라, 탐욕심이요,

 

그 다음에 진심(瞋心)이라, 진(嗔)자는 성낼 진자고 진(瞋)자는 눈 부릅뜰 진자입니다. 내나 뜻은 같지만 글자만 조금 다르고 두 가지를 다 쓰는 셈입니다. 성내는 마음 진심이라,

 

셋째번은 치심(痴心)이라, 어리석은 마음이요,

 

네째번은 만심(慢心)이라, 곧 아만심(我慢心)이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조금 잘하면 ‘나’ 이거니 하고 아만심을 냅니다. 아만심도 근본 번뇌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범부(凡夫)인 한, ‘나다’ 하는 마음이 있는 한에는, 자기가 조금 낫다거나 남보다 조금 더 수승(殊勝)한 일이 생기면 그냥 아만심을 냅니다. 재산이나 학문이나 얼굴이나 모두 다 그런 것으로도 아만심을 냅니다.

 

그 다음 다섯번째는 의심(疑心)이라, 의심도 역시 근본번뇌의 하나입니다. 우리 중생은 진리를 모르는 한에는 역시 의심을 냅니다. 어제도 말씀 드렸습니다마는 만물의 성상(性相)이라, 만물의 본성과 현상을 다 알아버리면 그때는 의심이 안 나옵니다. 그러하나, ‘만물의 본성이 무엇인가, 현상계의 여러 가지 복잡한 현상, 이것이 무엇인가’ 이런 것을 모르면 그때는 의심이 나옵니다. 의심도 역시 번뇌입니다.

 

그 다음 여섯번째는 신견(身見)이라, 이것은 자기에 따른 고집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범부는 자기에 따른 나(我)라는 고집을 버리기가 제일 어렵습니다. 일체 번뇌는 ‘나’ 라는 고집 때문에 일어납니다. ‘나’ 라 하는 아상(我相)이 없으면 번뇌가 일어날 턱이 없습니다. ‘나’ 라 하는 번뇌 가운데는 아견(我見)과 아소견(我所見)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아견(我見)이라 하는 것은 ‘나’ 라고 하는 견해입니다. 나의 몸이라 하는 것은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사대(四大) 즉,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그러한 각 원소(元素)가 합해서 겨우 몸이 이루어진 것 입니다. 내 것이라고 고집할 것이 실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인연법(因緣法) 따라서 잠시간 이렇게 한 세포가 이루어져 있을 뿐입니다. 또한 내 마음은 무엇인가? 어제도 말씀하였지만, 내 마음은 우리가 감수(感受)하는 감각작용, 상상하는 작용, 의욕 하는 작용, 분별 시비하는 의식 활동, 이러한 부스러기가 모여서 내 마음이 되었단 말입니다. 불교는 이런 면에서 지극히 분석적이고도 과학적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가 잘 몰라서 내 몸을 ‘내 것이다’ 고 소중히 아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냉정히 본다고 하면, 다만 인연 따라 각 세포가 모여서 하나의 존재가 이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도 역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모여서 내 마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것이 나인데, 실은 고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입니다. 이런 나라는 것에 대해서는 또 나중시간에 보다 더 세밀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마는, 이런 것이 ‘나’ 다 하는 아견(我見)입니다.

 

그 다음 아소견(我所見)이란, ‘나’ 다 하는 생각이 있으면 그 때는 ‘내 것’ 이라는, ‘내 소유’ 라는 생각이 따릅니다. 내 옷 또는 내 남편, 내 아내, 내 동생, 또는 내 물건 말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실은, 따지고 보면 허망한 것인데, 허망한 줄을 모르고서 나한테 따르는 모든 존재나 사람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성자(聖者)와 범부(凡夫)의 한계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자는 나라는 고집이 없고 내 것이라는 고집이 없습니다. 업장이 많을수록 내 것이라 하는 소유관념이 강합니다. 그 사람 행동을 보면 다 빤히 아는 것입니다. 업장이 무거운가 또는 가벼운가는 아견, 아소견이 얼마나 강한가, 얼마나 집념이 강한가를 알면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많이 되어서 번뇌가 희박한 사람은 이런 관념이 희박한 것입니다. 내 몸, 내 마음 등 ‘나’ 라는 관념 또는 내 소유(所有) 관념, 이것이 신견(身見)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일곱번째는 변견(邊見)이라, 나다 하는 관념이 있으면 ‘내 몸이 과연 얼마나 존재할 것인가’ 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몸뚱이가 항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견(常見)인데 범부는 욕심인지라 ‘나 같은 몸이 안 죽고 항시 있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래서 죽은 뒤에도 나 같은 몸이 다시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은 뒤에는 나 같은 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영원히 없습니다. 다만, 나를 움직이고 있는 업식(業識)만 존재 합니다. 우리가 한번 죽어지면 몸뚱이는 단 한걸음도 못 따라 갑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죽음을 항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견은, 내가 있다고 생각할 때에 ‘내 존재가 항시 있으면 하겠다’ 하는 상견(常見)과 또 한 가지는 단견(斷見)입니다. ‘내 몸도 마음도 금생에 다 끝나버리는 것이지 후생은 전혀 없다 전생도 없다 우연히 내가 존재해서 내가 있는 것이지 전생도 없고 내생도 없다’ 이와 같이 아주 단절된다고 생각하는 견해입니다. 이것이 단견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인간은 항상 존재하리라는 상견도 아니고 또는 금생만 존재하리라는 단견도 아닙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비록 내가 죽어지면 나 같은 모양은 없다 하더라도 내 마음 따라서 또 거기에 알맞는 몸을 받는 것입니다.

 

가사, 지옥 같은 마음을 쓰고 죽으면 그때는 바로 지옥에 들어가서 지옥도(地獄道)의 몸을 받는 것이고, 사람 같은 행동도 하고 오계(五戒)도 지켰다고 하면은 다시 사람으로 인도환생(人道還生)해서 사람 몸을 받는 것이고, 십선(十善)을 행했다고 그러면 천상(天上)에 올라가서 천상의 안락을 받는 것이고, 도업( 道業)을 많이 닦아서 참선을 많이 하고 계행(戒行)을 지켰다고 하면 그때는 극락에 가서 영생(永生)의 행복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금생에서 우리가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죽어지면 그와 같이 우리 행위인 업(業) 따라서 다시 받는 것입니다. 또한 과거 전생에도 역시 우리가 받아왔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똑같은 몸이 항상 존재한다는 상견도 아니고 또한 동시에 금생만 있고 끊어져버린다는 그런 단견도 아닙니다. 이런 상견, 단견이 변견(邊見)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여덟 번째는 사견(邪見)이라, 이것은 인과(因果)의 법칙을 무시하는 견해입니다. 우리가 악(惡)을 행하면 반드시 악의 과보로 괴로운 고(苦)가 있고, 선(善)을 행하면 그 과보로 반드시 거기에 맞는 안락(安樂)이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그것을 부인합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금생에 조금 좋은 일을 했다 하더라도 그냥 고생만 받는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해도 쓸데없다고 부정합니다. 또는 금생에 별로 좋은 일을 안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되기도 하고 또는 지위도 높은 사람들이나 또는 옆에서 이런 것을 보는 사람들은 ‘아, 착한 것도 쓸데가 없다. 나쁜 짓만 하고 악한 사람도 잘 된다’ 이런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고 사견(邪見)입니다.

 

그러나 인과는 분명한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 좀 못 산다 하더라도 그것은, 과거 전생에 조금 나쁜 업을 지었기에 금생에는 착한 일을 한다 하더라도 우선은 좀 그렇게 고(苦)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쁜 업이 사라지면 그때는 금생에 착한 업으로 해서 다시 안락을 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과(因果)라는 것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은 우선 인과를 믿어야 합니다. 착한 일을 하면 반드시 그 과보로써 안락과 행복이 오고 악을 행하면 또 그 과보로 반드시 불행이 온다는 인과를 믿는 것이 불교인의 초보입니다.

 

그 다음 아홉 번째는 견취견(見取見)이라, 이것은 나쁜 견해를 좋은 견해로 알고서 고집하는 것입니다. 가사 ‘막스주의가 옳다 이슬람주의가 옳다’ 이와 같이 절대주의가 아닌 것을 절대라고 생각하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시야비야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원적인 차원에서 본다고 하면 별것도 아닌데 야당은 야당대로, 여당은 여당대로 서로 옳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모두가 다 견취견에 해당 합니다. 절대적인 지혜가 아닌 것을 가지고서 절대적으로 옳다고 고집하는 견해가 견취견(見取見)입니다.

 

그 다음 열번째는 계금취견(戒禁取見)입니다.

 

이것은 어떤 계행을 지키는 것이, 성불을 위한 계행도 있습니다만, 성불을 위한 것도 아니고 별것도 아닌 계행을 외도(外道)꾼들이 고집하며 지키는 것들입니다. 인도 바라문교의 한 파에는 견행(犬行)이라, 개 같은 행동을 취하면 죽어서 천상에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냥 꼭 개와 같은 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 옷도 안 입고 그냥 발가벗고 다니면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개와 같은 행동을 취하면, 그런 고행(苦行)으로서 내생에는 천상에 간다’ 이와 같은 그릇된 것을 믿고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고행을 하면, 고행 그것이 의의가 없는 것이 아니겠지만, 고행이 바로 성불의 필연적인 길은 아닌데, 고행을 취하면 성불한다고 해서 억지로 고행을 합니다. 이런 것도 역시 계금취견에 해당합니다. 즉 어느 계행이, 어느 계율이나 어느 행동이 참다운 도(道)의 원인이 아닌데도, 참다운 도(道)나 행복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서 고집하고 그러한 법을 지키는 것이 계금취견에 해당합니다.

 

위와 같은 열 가지가 근본번뇌(根本煩惱)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번뇌는 다 외울 수가 없다 하더라도 근본번뇌만은 외워두어야 그때그때 우리가 피하고 지킬 수가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탐심(貪心)내지 말고, 진심(瞋心)내지 말고, 어리석은 치심(痴心)내지 말고 또는 아만심(我慢心)내지 말고, 진리에 대해서 의심(疑心)하지 말고, 또는 신견(身見 )이라, 자기의 몸뚱이나 자기 소유에 대해서 욕심내지 말고, 우리가 사는 한에는 전연 욕심을 내지 않을 수는 없겠습니다만 우리가 관심은 둔다 하더라도 탐욕심인 지나친 욕심을 내면 반드시 화(禍)가 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생명에 관해서 금생 내생을 통해서 다 끊어버린다는 관념이나 나와 같은 몸이 항시 있으리라는 관념인 변견(邊見) 갖지 말고, 다만 인연 따라서 행동 따라서 이런 몸이 생기므로 행동을 내가 좀 더 좋게 하면 보다 더 좋은 데에 태어날 것이고 나쁘게 하면 나쁜 데로 추락할 것이고, 또는 선을 행하면 안락의 과보가 있고 악을 행하면 불행의 과보가 틀림없이 있다는 인과를 믿어야 할 것이지 삿된 견해(邪見)를 믿지 말고, 또는 옳지 못한 무슨 주의나 사상 같은 나쁜 견해를 믿지 말고, 또는 옳지 못한 무슨 주의나 사상 같은 나쁜 견해를 옳다고 생각해서 그런 견취견(見取見) 때문에 하나의 단체를 만들어서 괜히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체로 단체라는 것은 보통은 다 견취견이라, 이런 견해를 가지고 하나의 이념을 삼고 강령을 만들고 단체를 꾸밉니다. 또는 성불의 원인도 아니고 또는 천상에 가는 원인이 아닌데도 삿된 법을 가지고서 고집하고 닦는 계금취견(戒禁取見)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시골 아버지가

대학생 아들에게 꼬박꼬박 부치던 용돈을 끊었다.

아들이 전보를 쳤다.

'당신 아들,굶어 죽음.'

아버지는 이런 답장을 보냈다.

'그래,굶어 죽어라.'

화가 난 아들은 연락을 두절한 채 이를 악물고 노력했다.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아들은

아버지의 전보가 인생의 전기가 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둘러 고향집을 찾았으나

이미 아버지는 세상을 떴고 유서 한장이 남아 있었다.

'아들아,너를 기다리다 먼저 간다.

네가 소식을 끊은 뒤 하루도 고통스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언제나 너를 사랑했다. '

 

한때 사이버 공간을 떠돌던 이 이야기에서처럼

아버지의 정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만큼 속이 깊다.

자식들 사랑한다는 표현도 애틋하게 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놓고 걱정하거나 슬퍼할 수도 없다.

 

김현승 시인은 그 처지를

'아버지의 마음'에서 이렇게 읊었다.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

-또다른 작가의 글-

 

 

아버지의 귀로 / 문병란

 

서천에 노을이 물들면

흔들리며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우리들은 문득 아버지가 된다.

 

리어커꾼의 거치른 손길 위에도

부드러운 노을이 물들면

하루의 난간에

목마른 입술이

타고 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또한 애인이 된다는 것,

무너져가는 노을 같은 가슴을 안고

그 어느 귀로에 서는

가난한 아버지는 어질기만 하다.

 

까칠한 주름살에도

부드러운 석양의 입김이 어리우고,

상사를 받들던 여윈 손가락 끝에도

십원짜리 눈깔사탕이 고이 쥐어지는 시간,

 

가난하고

깨끗한 손을 가지고

그 아들딸 앞에 돌아오는

초라한 아버지,

그러나 그 아들딸 앞에선

그 어느 대통령보다 위대하다!

 

아부도 아첨도 통하지 않는

또 하나의 왕국

주류와 비주류

여당과 야당도 없이

아들은 아버지의 발가락을 닮았다.

 

한줄기 주름살마저

보랏빛 미소로 바뀌는 시간,

수염 까칠한 볼을 하고

그 어느 차창에 흔들리면

시장기처럼 밀려오는 저녁 노을!

 

무너져가는 가슴을 안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돌아오는

그 어느 아버지의 가슴 속엔

시방

따뜻한 핏줄기가

출렁이고 있다.

 

 

TV 예능프로그램에 소개된 초등학생의

'아빠는 왜?'라는 시가 인터넷 트위터 등으로 퍼지면서

가슴을 아릿하게 하고 있다.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아빠들이 관심을 갖고 좀 더 노력하라면서

자성을 촉구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아프다'거나

'눈물나는 아빠들의 초상' 등

애처로워하는 글도 많다고 한다.

 

'아버지한테.../ 최다원 '

 

서예가들이 모여 회식을 했다.

전시와 작업 등을 이야기하다가

식당 벽에 걸린 반려동물 사진을 보며

칠십이 넘은 老서예가는

평균수명을 다했던 반려견의 마지막을 회상했다.

 

이가 빠지고 눈이 희미해졌으며 귀도 어두워지고

냄새도 못 맡더라고 먹이도 먹지 못하고

다리에 힘이 없어 서지를 못하더라고

죽을 쑤어 손으로 입을 벌려 먹여 주었고

잘 쉬지 못하는 숨을 몰아 쉴 때

끌어안고 그의 임종을 지켰다고 했다.

잠시 고개를 떨어뜨렸다가다시 좌중을 향해

그런데,

우리 아버지한테 그렇게 못했어! 라고 말하곤

슬그머니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엄마 노릇,자식 노릇이라고 쉬울 리 없지만

이 시대 아버지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사 할 때 이삿짐 트럭에 아버지가 제일 먼저

올라 앉는다는 서글픈 우스개도 있다.

아내와 아이들이 버리고 갈까봐 무서워서란다.

가정에서조차 밀려나고 있는

아버지들이 몸을 둘 곳은 어디인가.

 

by/이정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