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 교수] 공이란 무엇인가?

2014. 11. 16. 18:0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728x90

문] 

 

공부를 하다보니 여기저기에서 '공(空)'이라는 용어와 부딪치게 됩니다.

개념의 생소함으로 인하여 헤매던 중 '색'의 자성은 공하다(自性空)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책을 읽으니 무리가 없어 이것이 '공'의 의미로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고민이 생겼습니다.

불교 개념 중 '진여'도 '공'이라고 설명되어 있어

무자성의 의미만으로는 공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아가 불교를 아는 물리학자들은 '질량-에너지 호환', '진공상태에서의 물질(소립자)의 출현' 등을

설명하면서 질량이나 물질에 대비되는 '에너지'나 '진공'의 의미로 '공'을 말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공'을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요?

 

 

인도불교에서의 '공'의 원래 의미가 무었인지, 그 의미로 포괄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시대에 따라 '공'의 개념이 변형된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공의 의미를 잘 설명해 놓은 책도 소개해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답]

 

<1. 공성에 대해>, <2. 진여와 공성의 관계에 대해>, <3. 물리학으로 해석하는 공성에 대해>라는 제목을 달아 답해보겠습니다.

 

 

 

 

1. 공성에 대해

 

 

공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한 불전이

바로 용수(龍樹) 보살(150-250C.E.경)의 <중론>입니다.

 

제 졸저(拙著)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불교시대사 간)과

<중관사상>(민족사 간)이라는 책이

<중론>의 공 사상에 대한 해설서, 개론서입니다.

<중론>에 공의 원래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중론, 논리로부터의 ....>만 참조하셔도  공의 본래적 의미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듯이

‘물질이나 형상(色)’은 모두 실체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긴 막대기를 보았을 때,

길다는 생각은 짧은 것과의 대비를 통해(緣) 생긴(起) 것일 뿐이며

그 막대기가 원래 ‘긴 것’이 아닙니다.

그 막대기의 길이는 ‘연기(緣起)한 것’이기에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으며 공합니다.

 

 

고정불변의 실체(= 自性)가 없다는 점에서 무자성(無自性)하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의 이어지는 경문에서는 ‘수상행식 역부여시’라고 노래합니다.

수즉시공 공즉시수, 상즉시공 공즉시상, 행즉시공 공즉시행, 식즉시공 공즉시식을

“수상행식도 역시 (色과) 마찬가지다.”라고 줄여서 표현한 것입니다.

 

 

‘물질이나 형상(色)’뿐만 아니라

느낌(受), 생각(想), 의지나 조작(行), 마음(識)과 같은 다른 법(法 = 요소)들도

모두 공(空)하며(수상행식卽공),

공이 이런 것들과 별개의 어떤 것이 아니라(공卽수상행식)는 의미입니다.

 

 

‘색즉시공...’이라는 앞의 구절에서는 공성을 가르치고

‘공즉시색...’이라는 뒤의 구절에서는 공성에 대한 오해를 시정합니다.

 

 

그런데 ‘색수상행식의 오온은 ‘우리에게 인식되고 존재하는 모든 것(一切)’을 의미하기에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 수상행식 역부여시”까지의 경문은

“일체는 그 자성이 공하고, 공성은 일체와 유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일체 그 자체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모든 법(法: 생명과 세상의 구성요소)들’이 공하기에

‘공성(空性)’은 모든 법에 공통된 성질입니다. 그래서 ‘법성(法性)’이라고 부릅니다.

 

‘공성(sunyata, sunyatva)’의 성(ta, tva)이나

법성(dharmata, dharmatva)의 '성(ta, tva)'은 보편성을 의미합니다.

특수한(particular) 개개의 법들이 모두 공하기에

공은 그런 법들의 보편적(universal) 성질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얼룩소, 황소, 물소 등 낱낱의 소는 모두 다르지만,

발굽이 갈라지고, ‘음메’ 하고 울며, 위장이 네 개인 점 등등의 공통점이 있기에

그 모두를 소라고 부릅니다.

즉 ‘소 보편(cow-ness)’이 낱낱의 ‘특수한 소’에 내재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인 낱낱의 법들은 제 각각이지만,

‘궁극적으로 공하다’는 점에서는 모두 일치합니다.

‘공’이 모든 ‘법’들의 공통점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성’을 ‘법성’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제법실상(諸法實相: 모든 법들의 참 모습)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온설에서는 세상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를 다섯 가지로 줄였지만

이는 설명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입니다.

일체를 12가지 법으로 나누면, 초기불전의 ‘12처설’이 되고,

18가지 법으로 나누면 18계설이 되며

75가지 법으로 나누면 <아비달마구사론>의 ‘5위75법설’이 되며,

660가지로 나누면 <유가사지론>의 660법설이 됩니다.

그리고 세상을 더 세분하면 국어사전에 등재된 단어 수만큼의 법들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법들, 요소들이 실체가 없으며 공합니다.

 

 

 

 

-----

2. 진여와 공성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진여(眞如: tathata)는 ‘있는 그대로의 것’을 의미합니다.

사태(fact)나 사물(matter)의 ‘진상(眞相)’을 의미합니다. 즉 공성을 의미합니다.

 

그 어떤 사태나 사물이든 분석하고, 분석해 들어가면 궁극적으로 공함을 알게 됩니다.

모든 사태와 사물의 참 모습이 공성임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상은 반야경과 중관학에 근거한 공의 원래적 의미입니다.

 

 

그런데 유식, 여래장 사상이 흥기한 후기 대승시대가 되면

‘진여’와 ‘여래장’과 ‘공성’을 동치(同値)시킵니다.

 

 

‘중생 세계(생명체들)’나 ‘물리적 세계’ 모두가 공하지만,

그 가운데 중생에게 내재하는 법성으로서의 공성을

‘부처가 되게 하는 잠재적 힘’으로 간주하여

여래장(如來藏, tathagata-garbha: 여래의 胎)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모든 것이 공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눈앞에는 온갖 사물과 사태가 어우러진 삼라만상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에서는

‘모든 사물과 사태의 본질인 공성’을 바닷물에 대비시키고

‘갖가지 사물과 사태를 구성하는 법들’을 파도에 대비시키는데

 

 

‘바닷물로 비유되는 본질의 세계’를 진여문(眞如門)이라고 표현하고

‘파도로 비유되는 현상의 세계’를 생멸문(生滅門)이라고 표현합니다.

 

 

진여문은 중관학적 공성의 조망이며, 생멸문은 유식학적 환(幻)의 조망입니다.

그래서 현대학자들은 <대승기신론>의 여래장사상을

중관학과 유식학의 종합이라고 평합니다.

 

 

그런데 ‘진여’나 ‘여래장’이라는 표현의 경우

마치 공성이 실체와 같이 우리 마음속에 내재하는 것같이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츠모토나 하카마야와 같은 일본 고마자와 대학의 교수들을 중심으로

여래장 사상에 대한 비판 운동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불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마츠모토 시로, <연기와 공>(운주사 간) 참조]

 

 

이는 “현상의 이면에 변치 않는 아뜨만이 내재한다”고 보는

우빠니샤드의 아뜨만 이론과 같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일부 일본 불교인들(조동종)의 도덕불감증은

이런 여래장 사상에 기인한다고 분석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비판이고 분석입니다.

(마츠모토 교수 등에 대한 비판은 <비판불교의 파라독스>(고려대장경연구소 간) 참조)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을 때,

“저 여인은 엄청나게 아름답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저 여인은 엄청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후자와 같이 표현했다고 해서

‘아름다움’이라는 실체가 저 여인 어딘가에 내재한다고 오해하지는 않습니다.

여래장사상에 대한 마츠모토 교수 등의 비판은

‘언어의 기능’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3. 물리학으로 해석하는 공성에 대해

 

 

 

‘질량 - 에너지 호환’, 즉 ‘E=MC제곱’이라든지

‘입자와 반입자가 충돌하며 사라지는 현상’ 등을 예로 들면서

<반야심경>에서 가르치는 ‘색즉시공’을 설명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질에 대한 과거의 착각을 시정해준다는 점에서는 현대물리학의 이론들이 가치가 있지만

물리학으로 불교가 완전히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물리학은 현재도 계속 추구 도중에 있는 학문이며

불교는 완성된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거시적 우주’나 ‘미시적 소립자’의 정체에 대한 설만 있을 뿐이지,

확증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넓힌 것이 물리학이며,

일상 세계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준 것이 물리학이긴 하지만

사물의 궁극에 대해 완전히 밝혀 놓고 있지는 못합니다.

 

 

물리학은 객관세계의 진실을 추구하지만 객관세계는 ‘끝’이 없습니다.

보다 먼 우주를 보고, 보다 미세한 입자를 분석하는 새로운 연구기기가 개발되어도,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이 그만큼 확장되는 것일 뿐,

계속 새롭게 미지의 사태가 나타날 겁니다.

객관세계는 무한합니다. 탐색도구가 개발되는 데 맞추어 그 범위가 계속 넓어집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주관세계의 진실’을 추구합니다.

우리가 그 어떤 객관세계를 탐구한다고 해도

결국 주관적 인식으로 그 탐구결과를 해석해내야 합니다.

따라서 ‘주관적 인식의 끝’이 바로 ‘객관세계의 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관적 인식의 본질’이 ‘객관적 물질세계의 본질’인 것입니다.

 

 

연기(緣起)의 법칙은 주관에 대한 깊은 천착을 통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발견하신 것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주관을 통해 객관을 해석해내기에

연기의 법칙은 결국 주관과 객관을 포괄하여

삼라만상을 지배하는 유일무이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리고 연기의 원래적 의미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가르치는 문헌이 바로 <중론>인데

<중론> 제5장 관육종품(觀六種品)에서는 ‘허공’이라는 ‘법’이 공함을 논증합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색즉시공’의 ‘공’은 범어로 sunya이지만, 허공의 ‘공’은 범어로 akasa입니다.

한문으로는 모두 空으로 번역되었지만, 양자의 의미는 다릅니다.

‘색, 수, 상, 행, 식, ↔ 허공’이 아니라

‘색, 수, 상, 행, 식, 허공 ↔ 공’입니다.

 

 

 

이상 답변이었습니다.

 

 

 

 

 

 

- 김성철 교수 홈페이지에서 발췌

 

아주 잘 설명해 놓으셨군요. 공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으니, 일반인들이 보시기에는 아주 좋은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이런 설명은 아주 외우시기를...*보완설명1-'객관세계는 무한합니다. 탐색도구가 개발되는 데 맞추어 그 범위가 계속 넓어집니다.'라 하셨는데, 이건 조금 오해가 있는 말인 듯. 객관세계가 무한한 게 아니라, 그 객관 세계를 이해하는 우리의 인식이 무한한 것이겠지요. 보현행원품에서 '허공계 중생계가 무한'한 것이 그런 무한한 실체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본질, 우리 생명이 본래 무한!한 것이므로 허공계도 중생계도 무한!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무한'은 본래 철학적, 과학적으로 참 괴로운(
?)개념입니다. 무한이 가능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도 고대로부터 논란거리였으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이는 현실적 무한은 없다! 단지 무한을 설명하기 위한 '잠재적 무한!'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지요. 그는 '유한론자'에 속합니다. 그에 반해 브루노에게 영향을 준 쿠자누스 같은 이는 무한론자이지요. 물리학자들은 무한을 무지하게 싫어하지만, 수학자들은 무한을 무지하게 좋아합니다. 물리학에서는 '무한'이 결론으로 추출되면 이론 자체가 틀린 것으로 간주되지만, 수학에서는 그렇지가 않아요. 수학의 무한론에서 미적분학 같은 게 발달되게 됩지요...^.^

 

'‘색, 수, 상, 행, 식, ↔ 허공’이 아니라 ‘색, 수, 상, 행, 식, 허공 ↔ 공’입니다.'라는 부분을 잘 기억해 놓으시기 바랍니다. 흔히 공을 허공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정학하게 말하면 허공은 불교의 공이 아닙니다
! 허공은 가유에요 가유! 그리고 드릴 말씀 하나는, 중론이나 이런 논서의 설명은 현실적으로 대단히 공허!하다는 겁니다. 세상이 공이라면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물으면 이론적 대답은 나수 있겠으나 현실적 구체적 지침은 잘 안나와요. 그러니 논서에는 밝으나 현실적 살아가는 삶은 모순 투성이인 분들이 많은 것이지요. 우리 불자님들은 공부를 할때 '실천'부분을 함께 꼭 생각하시길..^.^

 

하나가 빠졌네요. 불교를 너무 주관적 인식에만 촛점을 맞추는 가르침으로 보는 것은 저는 반대입니다. 화엄은 유심을 강조하지만 현실 세계를 무시않는 대표적 가르침이거든요
? 그리고 윗글에서 ‘주관적 인식의 끝’이 바로 ‘객관세계의 끝’이라는 말은 좀 주위해서 들으셔야 할듯. 불교는 주관적 세계를 많이 강조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주객이 분리되면 불교가 아니라 할 수 있겠지요...^.^

 

 

 

 

 


      그대 오는 길 등불 밝히고
      내 가슴 깊은 곳에 그리운 등불 하나 켜 놓겠습니다 사랑하는 그대 언제든지 내가 그립걸랑 그 등불 향해 오십시오 오늘처럼 하늘빛 따라 슬픔이 몰려오는 날 그대 내게로 오십시오 나 그대 위해 기쁨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삶에 지쳐 어깨가 무겁게 느껴지는 날 그대 내게로 오십시오 나 그대 위해 빈 의자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가슴이 허전해 함께 할 친구가 필요한 날 그대 내게로 오십시오 나 그대의 좋은 친구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그대 내게 오실 땐 푸르른 하늘빛으로 오십시오 고운 향내 전하는 바람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그대 내게 오시기 전 갈색 그리운 낙엽으로 먼저 오십시오 나 오늘도 그대 향한 그리운 등불 하나 켜 놓겠습니다 이해인 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