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하고 염불하면 뿔달린 호랑이

2014. 12. 13. 10:3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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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하고 염불하면 ‘뿔 달린 호랑이’

 

 

선종(禪宗)과 정토(淨土) p286~ p299

 

 

객(客)이 허운 스님에게 참선이 염불보다 못하지 않느냐고 물으면서,

 “영명 수 선사가 이르기를,

 ‘선(禪)만 닦고 정토(淨土)를 닦지 않으면 열에 아홉은 길을 잘못 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조 계 선사의 후신이 소자첨(소동파)이고,

안탕의 스님은 진씨집 아들 회가 되었습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였다.

 

스님이 답하였다.

[능엄경]에서 문수보살이 원통(圓通)을 선택하는 게송에서 이르기를,

 

歸元性無二 근원으로 돌아가면 성품에 둘이 없으나

方便有多門 방편에는 여러 가지 문이 있습니다.

聖性無不通 성현의 성품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順逆皆方便 순과 역이 모두 방편입니다.

 

하였고,, 또 ‘여러 가지 문’중에서 이근원통(耳根圓通)을 긍정하여 말하기를,

 

此方眞敎體 여기서 참된 가르침의 본체는

淸淨在音聞 청정함이 소리를 듣는 데 있습니다.

欲取三摩提 삼마지를 닦아서 얻으려 하면

實以聞中入 진실로 들음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적하기를,

 

自餘諸方便 그 밖의 여러 가지 방편문들은

皆是佛威神 모두가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卽事捨塵勞 일을 당해서 번뇌를 벗어버리는 것일 뿐,

非時常修學 항상 닦고 배울 것은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염불삼매에 대해서는,

 

諸行是無常 모든 의지 작용은 본래 무상하고

念性元生滅 생각하는 성품은 원래 생멸하는 것,

因果今殊感 인과가 이제 다르게 나타나리니

云何獲圓通 원통을 어떻게 얻겠습니까?

 

하였습니다.([능엄경] 제 6권).

 

 

영명 선사의 [선정사료간]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문장을 보자면 , ‘禪만 닦고 정토(淨土)를 닦지 않으면 열사람에 아홉은 길을 잘못 들어,

음(陰)한 경계가 홀연히 눈앞에 나타나면 금방 그것을 따라가고 만다.

 선(禪)을 닦지 않고 정토(淨土)만 닦으면 만인(萬人)이 닦아 정토에 가서 아미타불을 뵈올 것인데,

어찌 깨닫지 못할 것을 근심하랴. 선(禪)도 닦고 정토(淨土)도 닦으면 머리에 뿔이 난 호랑이 같아서,

현세에는 인간의 스승이 되고, 내생에는 불조(佛祖)가 될 것이다.

선도 닦지 않고 정토도 닦지 않으면 구리 상에 쇠기둥이요,

만겁 천생에 의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근세에 정토를 닦는 사람들은 [사료간]을 고집하는 사람이 많고,

마음을 비우고 [원통게]를 연구하는 사람이 극히 적을뿐더러,

[사료간]에 대해서도 그 뜻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문수보살을 저버리는 것일 뿐 아니라,

영명 선사마저 잘못된 견해에 끌어넣는 결과가 됩니다.

 

결국 방편(方便)과 실상(實相)의 법문에 대해 두루 통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선(禪)과 정토(淨土)의 법을 물과 불, 얼음과 숯의 관계처럼 보게 됩니다.

저 허운은 여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영명 수 조사에 대해 살펴보자면,

 

그는 송나라 때 태어났는데, 여항 왕씨의 자손입니다.

그는 중국의 여러 조사들 중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세 분 중의 한 분입니다.

 

[불조통기]권 26에서 말하길,

“오월 전씨 때에 세무를 전담하는 사람이 되었는데,

공금을 가지고 물고기와 새우를 사서 방생하였다.

사건이 발각되어 네거리에서 사형에 처해지게 되었는데,

오월 왕이 사람을 시켜, 가서 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안색이 변하면 바로 사형에 처하고, 안색이 변하지 않으면 놓아 주라“ 가서 보니

안색이 변하지 않으므로 목숨을 살려 주었다.

 

그리하여 사명 취암 선사에게 출가하였다.

비단이나 풀솜을 입지 않았고, 음식에는 두 가지 맛이 없었다.

다시 소 국사에게 나아가서 심요를 밝혔다. (...)

 

지자암에 올라가서 두 가지로 제비뽑기를 했는데,  

하나는 ‘한평생 선정(禪定)에 매진한다.’  

다른 하나는 ‘송경(誦經)하고 온갖 선을 행하며 정토(淨土)를 장엄한다.’였다.

 

그리고 마음을 그윽히 하여 정성껏 기도한 뒤에 

‘송경하고 온갖 선을 행한다.’는 제비를 연거푸 7번이나 뽑았다.“ 했습니다.

 

그는 종문 하의 법안 선사 제3대이며 ,(법안종 3대조사라는 뜻)

 저서가 아주 많습니다.

 

예를 들어 [심부]와 [심부주]는 명심견성을 이야기한 것이고,

[만선동귀]는 모든 법이 원융한 도리를 이야기한 것이며,

[종경록]100권은 꽃을 들어 보임으로써 깨닫게 하는 도리를 널리 천명하고,

각종의 핵심 취지를 한 데 융합하여, 모두 한 마음에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불학을 13종으로 나누고, 중국 사람들은 10종으로 나눕니다.

[종경록]은 마음을 근본으로 하고, 깨침을 목표로 합니다.

그 말하는 바는 비록 깊고 얕음이 있으나, 모두 근원을 철저히 궁구하였으며,

아주 미세하게 이 마음을 드러내어, 삿된 것을 배척하고 바른 것을 도움으로써,

후인들로 하여금 샛길로 잘못 들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평생토록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선종(禪宗)을 안 좋게 말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는 종문에서 깨달아 들어간 분이었는데, 어째서 정토(淨土)를 널리 선양했습니까?

크게 깨달은 사람의 법은 원통하기 때문에,

참선(參禪)도 도(道)이고 염불(念佛)도 도(道)이며,

나아가 우리가 일을 하고 땅을 파는 것도 도(道)입니다.

 

그는 말법시대의 근기가 하열(下劣)한 사람들을 건지기 위해서,

정토(淨土)를 널리 선양한 것입니다.

그는 정토종의 제6대 조사인데,

한 평생 정토를 찬양했고,

돌아가신 뒤에도 사람들이 그분을 존경하여 정자사(寺)에 탑을 세웠습니다.

 

[불조통기]에서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스님이 임천에서 왔는데, 그가 하는 말이 자기는 병이 들어 있던 중에

저승에 갔다가 보내 주어서 도로 왔는데, 저승의 법당에 보니 어떤 스님의 상이 있고

염라대왕이 몸소 와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길래, 저 분이 누구냐 하고 관리에게 물어보니,

‘항주의 수 선사입니다. 저 분이 이미 서방정토의 상품에 왕생하셨다는 말을 듣고

우리 대왕께서 그분을 존경하여 저렇게 절을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불교도들은 동짓달 17일을 아미타불의 탄신일로 삼고 있는데,

그것은 어떤 전장에 근거한 것입니까?

[아미타경]에서 말하기는, 아미타불은 서쪽으로 십만 억 불국토를 지나간 곳에 계시다는데,

그분이 동짓달 17일 생인지 누가 압니까?

이것은 원래 영명 선사의 생일인데, 그가 아미타불이 원력으로 다시 오신 분이다 해서

그것을 아미타불의 생일로 한 것입니다.

 

[사료간]이 한 번 나오자, 선종과 정토종 간에 갑자기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정토종 사람들은 말하기를, ‘선(禪)만 닦고 정토(淨土)를 닦지 않으면

열 사람 중에 아홉이 길을 잘못 든다.’고 합니다.

 

선종(禪宗)만 닦으면 생사를 끝내지 못하지만, 정토(淨土)만 닦아도

 “만인이 닦아서 만인이 간다.‘, 그리고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면 ’호랑이 머리에 뿔이 난 것 같다.‘,

 ’선도 닦지 않고 정토도 닦지 않는 사람은 세간의 악인이다.‘ 합니다.

 

정토종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선종을 비평하는데,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면서

참선의 폐단을 계속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증거로서 끌어오는 이야기인즉,

“계 선사의 후신은 소자첨이고, 청초당의 후신은 증노공이며, 손장로의 후신은 이시랑이고,

 남암주의 후신은 진충숙이며, 지장 아무개의 후신은 장문정이고, 엄수좌의 후신은 왕구령이다.

그 다음에는 승 선사가 한씨집 아들이 되었고,

경사의 스님이 기부자가 되었다. 그 다음에는 선민스님이 동사호의 딸이 되고,

해인스님이 주방어의 딸이 되었다. 더 심하게는........ 보통 사람도 되고, 여자도 되고, 악인도 되어서,

갈수록 더 하열해진다.

설사 명신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그리될려고 해서 된 것이 아니다.“합니다.

 

저는 수행인의 후신이 ‘갈수록 하열해진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법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 회종 때에 , “염부의 관기는 입에서 연꽃 향기가 났는데,

사천성 출신의 스님이 말하기를, ‘이 영자는 전생에 비구니였다.

[법화경]을 20년이나 독송했다..’} 했습니다.

 

[법화경]을 독송했는데도 환생애서 기생이 되었다고 해서

[법화경]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없고,

참선인의 후신이 ‘보통사람도 되고, 여자도 되고, 악인도 되었다.’고 해서,

이 또한 참선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32응신을 나투시는데, 어떤 몸으로도 응해서 중생을 제도합니다.

그런데 어떤 하열한 몸으로 현신해서 법을 설한다고 해서 관세음보살의 응신도

‘갈수록 하열해진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아미타불의 화신이 영명 선사이고,

영명 선사의 후신이 선계조사이고,

선계 선사의 후신이 무상거사 송렴이라 합니다.

 

선계스님은 소주의 창문 밖 반당 수성사(寺)에서 [화엄경] 한 부를 혈서로 썼는데,

그의 홍법사업은 영명선사에 비하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송렴은 벼슬아치가 되었는데, 끝이 좋지 않았으며, 선계 선사만도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아미타불도 갈수록 하열해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선종(禪宗)의 태 수좌는 잠깐 앉은 사이에 좌탈했지만,

구봉 선사가 그를 인정하지 않았고,

 또 지의 도자는 오고 감을 마음대로 했지만,

조산 스님이 역시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정토를 수행하는 사람들도 늘 이것을 가지고 선종을 틀렸다고 비판하지만,

깊이 살펴보고 이러한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구봉 선사나 조산 스님이 말씀하신 이것이 바로 선종의 선지식의 바른 지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선종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인데,

어떻게 반대로 선종을 과소평가합니까?

우리는 지금 태 수좌나 지의 도좌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어떻게 감히 선종을 경시합니까?

 

저는 선종에도 깊고 얕음이 있고 현교와 밀교에도 돈점과 정사(正邪)가 있으며,

염불에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선의 깊고 얕음을 구별해본다면, 외도, 범부,소승, 중승, 대승 등이

모두 각기 제 나름의 선(禪)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 선종의 선(禪)은 상상승선으로서 위에서 말한 선들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말세의 수행인들이 하는 참선은 확실히 길을 잘못 드는 경우가 있어서,

영명 스님의 [사료간]에서 지적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생각건대, 저는 평소에 전장을 주의깊게 보는데,

아직까지 [사료간]이 영명 스님의 어느 저작에 실려 있는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유통된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위작이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선만 닦고 정토를 닦지 않는다’고 비난한 것이,

선과 정토를 둘로 본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염불하는 사람의 마음이 깨끗하면 불국토가 깨끗하여,

자기 성품의 아미타불을 보게 됩니다.

 

이 정토(淨土)와 선(禪)은 둘이 아닌 것인데,

다만 지금 사람들이 오히려 염불은 정토이고,

참선은 선이라고 굳이 한정하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 부처님께서 성을 넘어 출가하셔서,

단특산에 들어가 수도하실 때, 처음에 알라라 깔라마 밑에서 3년 동안 불용처정(定)을 배우셨으나,

그것이 아님을 알고 버리셨고, 다시 웃다카 라마풋타에게 가서 비비상정(定)을 배웠으나,

역시 아님을 알고 버리셨습니다.

 

다시 상두산에 이르러 여러 외도들과 함께 마맥만 드시고 6년을 지냈습니다.

... 여르렛날 샛별이 뜰 때 확연히 대오(大悟)하여

등정각을 이루시고는 탄식하며 말씀하시기를,

“기이하도다 ! 일체 중생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다 갖추고 있건만,

단지 망상(妄想)과 집착(執着)으로 인해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하셨습니다 

그 때 선(禪)이니 정토(淨土)니 하는 것이 어디 있었습니까?

 

그 뒤에 49년 동안 법을 설하셨지만, 모두 구경의 가르침이 아니었고,

꽃을 들어 보이며 미소하심으로써 법을 가섭에게 부촉하셨을 때에도

아직 선(禪)이라는 것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선(禪)은 최상의 일승법인데, 비유하자면 순수한 우유와 같습니다.

그런데 우유를 파는 사람이 매일 물을 조금씩 타게 되면 나중에는 우유의 성분은 전혀 없어지듯이,

 부처님 법을 배우는 사람도 순수한 우유에 물이 스며들게 하고 말았습니다.

 

영명 스님이 이것을 보시고

물이 스며든 선(禪)에 대하여 말슴하시기를,

“선(禪)만 닦고 정토를 닦지 않으면 열 사람 중에 아홉이 길을 잘못 든다.”고 한 것이지,

순수한 우유 같은 선(禪)을 두고 “길을 잘못 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영명 선사가 지자암(菴)에 올라가서 선(禪)과 정토(淨土)의 둘을 놓고 제비를 뽑을 때,

그윽한 마음으로 정성껏 기도하고 정토의 제비를 일곱 번이나 뽑았습니다.

 

만약 선(禪)이 좋지 않은 것이었다면

그는 결코 제비뽑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정토(淨土)가 그가 내심 좋아하는 것이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일곱 번 까지 제비를 뽑지도 않고 결정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영명 선사는 선종(禪宗) 출신으로 , 법안종의 제3대인데,

어떻게 자기의 종을 억누르면서, 선(禪)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참선의 방법은 부모미생전의 본래면목을 보아야 하는데,

그 목적은 명심견성하려는 것입니다.

 

후세 사람들의 참선은 이러한 방법을 위배하여,

약간의 청정한 경계를 얻어서 온몸이 가뿐해지면 곧 방선(放禪)해 버리고는

스스로 공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음(陰)한 경계에 걸려 있는 것인데도,

오히려 한 생각이 무생(無生)에서 인연(因緣)을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니 어떻게 백척간두에서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영명 선사가 “음(陰)한 경계가 홀연히 눈앞에 나타나면 금방 그것을 따라가고 만다”고 한 것이고,

그런 참선(參禪)은 염불 수행을 열심히 해서 힘을 얻는 것보다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공염불을 해도 “만인이 닦아서 만인이 간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정토에 가야 아미타불을 뵐 수 있는데,

“아미타불을 뵙기만 하면 깨닫지 못할 것을 어찌 걱정하랴”하는 말을 믿는다면

이 또한 망상(妄想)입니다.

 

[능엄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난이 부처님께 ‘제가 부처님을 따라 발심출가한 뒤로 부처님의 위신력만 믿고,

내가 애써 닦지 않아도 여래께서 나에게 삼매를 얻게 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습니다.

몸과 마음은 본래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제 본심을 잃었습니다.”(능엄경 - 제 1권)

 

석가모니 부처님의 위신력도 나에게 삼매(三昧)를 베풀어 줄 수 없는데,

어찌 아미타불의 위신력인들 나에게 삼매를 베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염불(念佛)은 망상이나, 삼독, 오욕에 비해 좋은 것임을 틀림없습니다.

 

좋은 꿈을 꾸면 깨고 나서 정신이 유쾌하지만, 나쁜 꿈을 꾸면 깨고 나서 마음이 답답합니다.

그래서 마구 망상을 피우는 것은 일심을 염불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모든 법에 다 통할 수 잇게 되면 그것이 가장 고상한 수행입니다.

 

‘선(禪)도 닦고 정토(淨土)도 닦으면’,

호랑이 뿔이 난 것 같다는 것은 본래 호랑이가 위엄이 있지만,

뿔이 두 개 있으므로 더욱 용맹스러울 것처럼, 스승이 되고 부처가 될 것은 이치상 당연합니다.

선근(善根)이 없는 사람들로 말하자면,

선(禪)도 믿지 않고, 정토(淨土)도 믿지 않으며 흐리멍텅하니,

 ‘만겁 천생에 의지할 사람이 없는’것입니다.

 

저는 평생 어느 한 사람에게도 염불(念佛)을 하지 말라고 권한 적이 없지만,

다만 다른 사람이 남에게 참선(參禪)을 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은 불만이었습니다.

 

항상[능엄경]에서 “삿된 스승의 설법이 항하사 같이 많을 것이다”고 지적한 것을 생각하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사료간]의 취지를 약간 보태어 설명하자면

모든 수행인은 다시 [사료간]의 말에 치우치고 막혀서

선정(禪淨)의 두 법에 대해 망녕되게 높고 낮음으로 나누어서

영명 선사의 뜻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p299

 

책 [허운스님의 방편개시]-여시아문출판-

 

*** 허운화상 ( 1840년~1959) 120세로 입적. (참고서적 ; 허운화상의 참선요지)

 

 

 

 

 

 

 

영명연수 대사가 저술한 <종경록>의 핵심 법문(명추회요)을 모아 펴낸 책이

바로, 성철스님이 번역한 <마음을 바로 봅시다>(상, 하권)입니다.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으로 알려진 영명연수 대사는

선종의 선사이면서도 정토종의 제6조이기도 합니다.

 

 

 

 

계원(啓園)

(中國 蘇州市 太湖 風景區)

 

석가화원(席家花園)이라고도 불리는 계원(啓園)은

소주 동산진(鎭) 옹항촌 북면에 위치하고 있는 정원으로

태호(太湖)와 서로 임하고 있다.


소주에 있는 모든 원림(園林) 중 유일하게 산을 기대고

곁에 호수를 두고 지은 정원이다.

중앙의 화원과 사면의 홀, 복랑(復廊), 정원을 휘감는 호수,

모형 산, 갖가지 건축물들의 구도가 규형을 잘 이루고 있으며 조화롭다

 

소주시내를 벗어나 40여km를 길 양옆으로 갈대가 너무 아름다운

태호(太湖)변을 따라 30여분 달려가니 끝이 안보이는 태호 변에

아름다운 계원(啓園)이 우리를 반긴다

 

 

 

 

정원들어가는 입구마을부터 노점에 귤을 많이 팔더니

계원정문 들어가니 정원내에 먼저 귤나무가 반기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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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폴 이광요 수상이 다녀 간 흔적을 남기셨군요

 

 

 

 

형님! 한국에서 제일 잘 생긴 남자가 왔다 갔노라고 인증 샷은 날려야 하지 않을가요?

그럼 그럼 누구라고 짤깍

 

아이고, 할배 몇시간 걸었더니 피곤해 죽겠군

아~~~옛날이여

ㅋㅋㅋㅋㅋ

 

뇌봉탑(雷峰塔)

(中國 浙江省 抗州市 西湖邊 峨眉山)

 

항주를 찾는 관광객이 제일 먼저 방문하는 곳이 뇌봉탑이다

탑 5층 정상에 오르면 아름다운 서호(西湖)를 한눈에 볼수있고

항주 시가지를 감상 할 수 있다

 

뇌봉탑(雷峰塔)은 

중국의 북송시절 975년에 황비의 득남을 축하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중국 민간설화에 나오는 유명한 백사전(白蛇傳)에서

백사(白蛇)요괴가 같히게 되는 塔이 뇌봉탑(雷峰塔)이다 

 

석양무렵 호수 맞은 편에서 뇌봉탑을 바라다 보는 전경이

굉장히 신비롭고 아름답다고 여겨진다.

 

명(明)나라 가정제(嘉靖帝) 때 왜구의 침략으로 불에 타서

탑신만 남게 되었고, 그 뒤 사람들이 병을 치료하거나

도굴을 목적으로 탑을 훼손하여 1924년 완전히 붕괴된 이후에

유적지로만 남아 있다가 2000년 복원 공사에 착수하여

 2002년 10월 완공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신탑(新塔)은 기초 부위를 보존하고 8각형과 5층으로

원탑의 형태를 재현해 놓고,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탑체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등

현대식 시설을 갖추어 놓고 있다.

 

특히 저녁이 되면 석양이 서쪽으로 질 때,

탑 그림자에 비치는 풍경은 정말 아름답다고 하여 서호 10경 중 하나인

뇌봉석조(雷峰夕照석양 무렵 호수 맞은 편에서 바라본 뇌봉탑의 신비로운 경관)

이라고 한다.

우리가 뇌봉탑 5층에 올라 내려다 보는 서호 풍경은 과히 절경이였다

 

 

 

뇌봉탑 인구

 

 

 

 

탑 오르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뭐꼬 하이 히틀러가? 할배 웃겨 ㅋㅋㅋ

 

 

탑2층에서 들여다 본 탑내부 발굴 현장

 

 

뇌봉탑 3층 내부에 진열된 백사전의 전설을 표현한 조각들

 

 

 

뇌봉탑 5층에 올라 서호를 배경으로

한국에서 온 아우의 인증샷 한컷

 

뇌봉탑 5층에서 내려다 본 서호와 항주시내

 

서호에서 바라 본 뇌봉탑의 야경

 

 

백사전(白蛇傳)의 전설 

 

 

 

백사전은 중국의 유명한 민간 설화중 하나인데

영화로도 두번이나 만들어지고 항주서호를 대표하는 연극

"송성가무""인상서호"로도 유명하지요

 

민간설화 "백사전" 줄거리 1

 

백소정은 천년 묵은 백사로 법해 화상의 선단을 먹은 후 신통력이 뛰어나게 되자,
서생 허선이 전생에 자기를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사람으로 변신하였고 이후 청사인 소청을 만나 친구가 되었습니다.

 

백소정은 법력을 통해 계책을 세워 허선과 친분을 쌓고

드디어 그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에 금산사의 화상 법해는

백소정이 자기의 선단을 훔쳐 먹은 것에 대한 보복으로,
허선에게 단오절에 백소정에게 웅황주를 먹이도록 부추겼고

이를 먹은 백소정이 백사로 변하자

이에 식겁한 허선이 놀라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백소정은 천상의 정원에서 선초를 훔쳐와 허선을 살려냈지만,
법해는 허선을 속여 금산사에 그를 연금시켰습니다

 

백소정은 소청과 함께 법해에 대항하였으나 패하고,

금산사에 물이 차올라 이로 인해 부상을 입고

법해에게 잡혀 뇌봉탑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소정이 하늘의 뜻을 어기고 낳은 아들이 장성하여
장원급제를 하고 뇌봉탑에 갇힌 어머니를 구출해 내어
비로소 가족 모두가 모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민간설화 "백사전" 줄거리 2

 

 

 

 

 

 

 

 

 

 

 

 

 

 

백사전 설화는 

절강성의 성도인 항주의 서호란 호수를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청사를 보면 도시 곳곳이 운하로 연결되어 있는 걸 기억하실 겁니다. 

또 허선이 백사인 백소정을 처음 만나는 호수가 서호입니다.

 

 

아미산에서 1000년간 도를 닦은 백사와 그보다는 적게 도를 닦은 청사가 

인간세상에 각각 백소정과 소청이란 이름의 여인으로 변신해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백소정은 허선을 꾀어 

서호에서 처음 만나는 그날 바로 부부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보화당이란 의원을 차려 백소정이 의술을 발휘하여 여러 사람을 돕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사랑에 훼방꾼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금산사의 도력 높은 법해선사.

 

법해는 도저히 뱀과 인간이 같이 사는 꼴을 볼 수가 없어 

허선에게 백소정의 정체를 알려주며

 단오절에 웅황주를 마시게 하면 그 정체를 알 수 있다고 전해줍니다.

 소심한 허선은 단오절에 웅황주를 백소정에게 주고 거절할 수 없는

 백소정은 이 술을 마시고 결국 뱀으로 변하고 이를 본 허선은 놀라 죽어버립니다.

 

허선을 구하기 위해 곤륜(?)산의 영지를 구하러 간 백소정은

 영지를 지키던 백학에 의해 위험에 처하지만 백소정을 불쌍하게 여긴 산신이 

영지를 백소정에게 줘서 허선은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나 결국 법해선사는 이 둘이 행복하게 사는 꼴을 보지 못하고

 허선을 금산사로 납치해서 백소정과 싸움을 벌입니다. 

싸우는 도중 백소정이 허선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고 일단은 그냥 놔줍니다. 

집에 돌아온 허선과 백소정은 아이를 낳고 잠깐 행복을 맛보지만 

다시 찾아온 법해선사는 결국 백소정을 잡아서 뇌봉탑에 감금을 시킵니다.

 

 

 

경극"송성가무"의 한토막

 

 

 

 

 

 

 

 

육화탑(六和塔) 

(中國 折江省 抗州 月輪山)


전당강(錢塘江) 북쪽 연안 월륜산(月輪山)에 위치해 있으며

 원래 이 강은 나팔모양으로 생겨 상류는 좁고 하류는 넓다보니 

음력 8월 15일 전후가 되면 달의 인력 때문인지

바닷물이 역류하여 올라오는데 병목 부분에 이르러 홍수가 나므로

북송 개보 3년(970년)에 지각선사가

전단강의 대 역류를 막고자 하는 기도를 반영하여 세운 탑이다.


처음에는 9층 탑으로 건립하고 탑신네 탑등을 설치하여 첸탄강에서

야간에 항행하는 선박들의 표시등 역할을 하였다

1121년 북송 휘종때 전란으로 거의 전부가 파손되었으며

1153년 남송 고종때 재건 사업에 착수하여 1163년 효종때 완공하였다


재건 된 탑은 7층으로 줄어들었고 높이도 59.89m로 원래보다 낮아졌다

이후로도 여러 차래 개수 작업이 이루어 졌지만

남송 때의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현존하는 육화탑은 당시 건축계의 거장인 유호(喩皓)가 

≪목경삼수(木經三首)≫를 근거로 하여 설계하여

외형은 13층이지만 내부는 7층이다


8각형의 누각식 전목탑으로 탑신은 벽돌로 쌓았고 바깥 처마는 목조이다

탑신 내부에는 나선형 계단이 있어 맨 위층까지 올라 갈 수 있다

각층에는모두 4각형의 탑실이 있다


탑실 천장은 2층의 내쌓기(corbel)구조로 장식하고 두공으로 바치게 하였다

탑의 벽에는 인물과 화훼 조충어수 등 다양한 도안이 새겨 져 있는데

그 형상이 살아 있는 듯 생동한다


중국 목조 건축 분야의 걸작으로 평가되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탑 밖으로 목조처마와 회랑이 넓찍하고 길게 펄쳐저 있어

주변 경관을 구경하기 좋아 

지금은 항주에서 꼭 들러 가는 유명 관광지로

탑에 올라 전경을 감상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이탑의 이름인 육화(六和)라는 의미는

원래 불교에서의 규약인 '육합(六合)'

즉, '천지사방(天地四方)'의 의미다.

 

六和塔

 

전설속의 六和 소년像(소녀같은데 소년이라 함)

 

13세인 육화의 부모는 전당강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높은 해일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전당강을 원망하던 육화는 전당강가의 높은 바위에서

전당강에 돌을 던져 용왕이 사는 궁전의 지붕을 깨뜨렸다고 한다.

 

용왕은 육화가 전당강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 돌을 던지자

그 사연을 들은 후 육화의 부모를 돌려주었다.

 

용왕이 8월 18일 만조 때를 제외하고는 해일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육화에게 약속하자 육화도 더 이상 전당강에 돌을 던지지 않았다고 한다.

"전설 속의 아이지만 참 귀엽게 생겼네요

 

▲육화탑

 

전당강 북쪽에 거대하게 자리잡은 육화탑도

파도에 희생된 원혼들을 위한 위령탑이자

전단강의 대역류를 방지하고픈 염원이 기린 탑이다.


 이 탑의 이름인

'육화(六和)'는 원래 불교의 '육합(六合)'에서 나온 이름으로

천지사방(天地四方)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현재는 전단강도 현대의 기술로 많이 정비되어 역류하는 해일의 높이가

과거와 같이 높지는 않다고 한다.

 

 

우리는 탑의 1층으로 들어가 보았다.

탑의 바깥은 대낮의 태양으로 밝으나

 탑의 내부는 아주 조용하고 어두우며 묘하다.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탑'의 개념과는 다른 곳이다.

이 탑은 탑이자 누각과 같은 기능을 할 정도로 거대하게 지어져 있다.


탑의 한 층만 해도 면적이 한 가옥의 넓이 정도 되니

 옛 중국인들의 스케일이 컸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탑의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한 아주머니가 서 있다.

아무래도 탑을 올라가는 입장료가 또 있는 모양이다.


 2층 입구에는 한글로

육화탑 입장권을 구매하라는 안내문이 친절하게 붙어있다.

육화탑 공원 입장료를 냈는데,

육화탑에 올라가는 입장료를 또 받는 것은 조금 이해가 안 되지만

어쩌겠는가 

위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모두 가파른 나선형 나무계단으로 되어 있다.

겉에서 보기에 13층이지만 실제로 탑의 내부에 들어와 보면

최고층은 7층으로 되어 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의 묘한 소리를 들으며 오르다가,

다리가 아프면 각 층의 중간 방을 빙 돌아가면서 쉬었다.

중국의 중점문물보호단위인 이 탑의 한 층 한 층을 올라섰다.

 


이 탑은 건립 당시에는 9층탑으로,

내부는 나무로 만들고, 외부는 붉은 벽돌로 만든 탑이었다.

그러나 중국 목조 건축 분야의 걸작이었던 초기의 이 육화탑은 파괴되었고,

현재 건물은 남송 때인 1163년에 재건된 탑의 골격이 남은 것이다.


 그 동안 이 탑에 불공을 드리러 온 신자들이 아들 낳기를 기원하면서

육화탑의 벽돌을 하나씩 빼가자 탑이 조금씩 무너졌던 모양이다.

그 후 육화탑은 청나라 때인 1900년에 개축하고,

1991년, 2002년에 재건 수준의 보수를 하였다.


그런데 밖에서 보는 육화탑이 13층의 균형 잡힌 목탑인데 반해,

탑 내부의 일부가 시멘트로 복원되어 있어 목탑의 아름다움을 반감시키고 있다.

바람이 불면, 이 탑의 각층 처마 끝마다 달려있는 총 104개의 풍경이

은은한 소리를 울린다고한다.

 

 

▲ 육화탑에서 바라본 전당강

 

탑의 가장 높은 층에 오르니 그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일품이다.

눈앞에는 중국의 절경인 황산(黃山)에서 발원한

전당강의 거대한 물결이 도도히 흐르고

그 위로는 길이 1453m의 전당강대교가 강물 위를 길게 가로지르고 있다.


 전당강대교 1층으로는 기차가 달리고, 2층으로는 자동차가 달리고 있다.
이 대교는 일제 침략 당시에 건설된 지 몇 개월 만에 파괴되었다가

다시 지어진 것이다.

육화탑 아래의 전당강은 길이가 410km나 되는 절강성 최대의 하천이다.

이 전당강의 흐르는 모습이 ㄱ역자로 구부러지면서 흐르는 구간이 있어

성의 이름이 '절강성(浙江省)'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육화탑 정상에서

전당강의 경치를 감상하는'전강관조(錢江觀照)'를 하였다.

강 위에는 바지선 여러 척이 강물 위에 두둥실 떠 있다.

과거 송나라 당시에는 이 곳에 수많은 정크선이 오고가며

사람과 물자를 날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