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無常 / 이진경

2015. 2. 20. 16:5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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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무상無常 - 上 / 이진경

 

매순간 끊임없이 달라져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어

'벽암록' 제27칙은 운문(雲門) 스님의 유명한 얘기를 다루고 있다. 들어보라.

 

 

어떤 스님이 운문 스님에게 물었다.

“나무가 메마르고 잎새가 질 때면 어떠합니까?”

“가을바람에 완전히 드러났느니라(體露金風).”

 

동일한 이름의 사람조차 매순간 세포들의 생멸로 동일한 상태를 찾지 못해

무상, 동일해 보이는 것서 끊임없이 달라짐 보는 것 무엇이 완전히 드러났을까?

누구는 잎이 다 져서 나무의 몸(體)이 드러났다고 하지만, 이는 질문이 겨냥하는

바를 완전히 오인한 것이고, 누구는 번뇌와 같은 잎들이 다 져서 본체(體)가

드러났다고 하지만, 이는 본체를 잎새 뒤에 숨어 있는 어떤 실체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란 점에서 정반대로 본 것이다.

다시 묻자. 무엇이 드러났는가? 본체가. 어떤 본체가 드러났는가?

나무가 마르고 잎이 질 때 드러나는 본체, 그것은 무상(無常)이다.

그것은 나무에 물이 오르고 잎이 피어날 때 드러나는 본체이기도 하다.

잎 뒤에 숨어 있는 본체가 아니라 잎이 피든 지든, 바로 눈앞에서 드러나는 본체다.

금풍에 지는 무상이나 춘풍에 피는 무상이나, 무상이란 점에선 다를 바 없다.

그 다를 바 없는 것, 무상, 그게 바로 본체다.

 

그런데 왜 묻는 이는 나무가 마르고 잎이 질 때 어떠한가 물었을까?

우리는 잎이 나고 꽃이 피는 춘풍에 무상을 묻지 않는다. 아니, 보지 않는다.

무상함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은 그 변화와 생성이 소멸로 접어들 때다.

무성하던 것이 어느새 쇠락하고 좋던 것이 시들해질 때, 문득 무상함을 묻게 된다.

고통이나 죽음이 보이지 않으면 삶에 대해 묻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일 게다.

그렇기에 무상이란 말은 흔히 허무감과 함께 온다. ‘꽃이 피고 잎이 푸른 이 좋은

시절이 영원하면 좋으련만, 왜 벌써 잎이 지고 나무는 마르는 것인가!’ 하는 한탄

속에서 무상은 눈에 들어온다.

흔히 말하는 “인생무상, 삶의 허무”라는 짝은 이렇게 출현한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고상한’ 철학이 무상함 속에 숨어 있는 변치 않는 것을 찾는

것은 이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 내가 대면하는 세계의 피안에 있는 불변의 실체를 찾아 나선다.

변하는 세상이 덧없어, 변치 않는 피안에서 영원성을 찾는다.

니체는 이처럼 눈앞의 것, 지금 사는 무상한 현세를 부정하고 변치 않는 피안의 것을

찾는 이런 태도를 니힐리즘이라고 명명한다. 불변의 실체를 찾으려는 시도로 이어진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를 니힐리즘의 역사라고 했던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운문에게 묻는 학인은 이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모든 것이 쇠락하고

소멸하는 것 같은 때에, 본체라고 할 것이 있겠는가를 물었을 것이다.

운문이 그걸 몰랐을 리 없다. 그게 바로 본체라고, 무상이 바로 본체라고,

가을바람에 지는 낙엽이 바로 본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답한다.

변하지 않는 본체가 어디 따로 숨어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항상 진행되는

무상한 변화만이 본체라는 것이다.

믿고 있던 확고한 본체가 소멸한다는 생각을 정면에서 뒤집으며, 스러지는 것이 바로

본체라고, 그게 본체를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답한다.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을 꼽을 때 가장 먼저 드는 것이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제행무상이 바로 본체고, 그것 이외의 본체는 따로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도를 깨친다는 것은 바로 이 무상을 통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무상함을

아는 것뿐 아니라, 무상 속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자신이 만나는 모든 것을 무상함

속에서 대하는 것이다.

 

무상이란 무엇인가? 아니, 상(常)이란 무엇인가?

항상 그대로인 것, 항상 동일하게 있는 것이다.

조건이 달라져도 그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상을, 불변의 실체를 추구한다

함은 변화 속에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걸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상이란, 그런 동일성이 없음이고, 그런 동일성에 반하는 것만이 있음을

뜻한다. 동일성에 반하는 것은 ‘차이’다.

무상을 본다 함은 동일해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달라져가고 있음을 봄이다.

항상된 것을 찾음이 달라보이는 것마저 ‘동일화’하려 함이라면, 무상을 본다 함은

동일해 보이는 것조차 끊임없이 ‘차이화’되고 있음을 봄이다.

동일성이 없다함은 오직 차이만이, ‘차이화하는 차이’만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상의 통찰은 곧바로 ‘차이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차이의 철학은 차이의 존재론적 일차성에서 시작한다.

차이가 존재론적으로 일차적이라는 말이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상태로서의 차이와 과정으로서의 차이. 먼저,

 차이만이 존재한다 함은 무엇인가? 보르헤스는 플리니우스의 ‘박물지’를 인용하며

자주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세상에 똑같은 두 장의 나뭇잎은 없다.” “세상에 똑같은 얼굴의 두 사람은 없다”는

말로 바꾸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일란성 쌍둥이조차 사실은 똑같지 않다는

건 긴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가을바람 불면 정신을 잃을 정도로 화사하게 빛나는 은행잎 단풍잎이 나무마다

가득하지만, ‘은행잎’이니 ‘단풍잎’이니 하는 말들은 대충 비슷한 걸 뭉뚱그려 하나로

묶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심하게 조사해보면, 같은 나무에 매달린 것 중에도 똑같은

두 장의 은행잎은 없다. 크기와 모양, 색깔이 다 다르다.

다른 것만이 존재하며, 차이만이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차이는, 상태로서의 차이를

지칭하지만, 동일성 출현 이전의 차이, 동일성과 짝이 되는 구별의 범주로서의 차이가

아니라, 그 구별 이전의 차이다. 언어 이전의 차이다. 말없는 차이다.

 

좀 더 근본적인 것은 과정으로서의 차이다. 이는 차이화만이 존재함을 뜻한다.

하나의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는 나조차 똑같은 두 개의 상태를 갖지 않는다.

나이가 좀 들었다면, 주민증에 붙어 있는 사진을 보고 낯설어하지 않기 어렵다.

동일한 신체를 갖고 있다고 믿지만, 매일매일 우리의 세포들은 생멸하며 바뀌어가고

있으며, 지금 이 순간에 있는 세포들 사이에선 분자적인 것들이 쉴 새 없이 이동하며

물질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대사하고 변화한다. 나뭇잎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의 감각이 둔하여 그 변화를 보지 못할 뿐이다. 동영상으로 찍어 빨리 돌리면,

꽃이 피고 지는 것뿐 아니라 나뭇잎의 색과 모양이 변하는 것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스스로와도 끊임없이 달라지는 무상한 ‘차이화’ 과정 속에 있다.

무상이란 차이화하는 차이를 뜻한다.

 

동일성은 이 차이들을 무시하고 비슷해 보이는 걸 하나로 묶을 때 오는 것이다.

비슷한 형상의 얼굴이 반복하여 나타날 때, 비슷한 나뭇잎이 반복하여 감지될 때,

우리는 그것이 같다고 간주하고, 그것에 하나의 이름을 부여한다.

그렇게 이름이 부여되면,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거기에

따라붙는다. ‘명언종자’라고 부르는 것이 동일성의 ‘씨(種子)’, 지속되는 동일성이란

환상의 새로운 씨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무상한 것을 구별하며 동일한 것을 포착하려는 성향(업)의 작용이다.

그런 성향이 동일화를 야기하는 ‘종자’인 것이다.

그렇게 하여 동일성을 갖는 것들이 여기저기 들어서고, 그 동일성을 갖는 것들을

비교하며 ‘이것은 저것과 다르네’라며 동일성과 차이를 말한다.

분류학적 차이가 이런 차이에 속한다. 동일성과 짝을 이루는 이러한 차이는, 비슷한

걸 하나로 묶어 다루려는 마음, 구별하고 분별하려는 의지 안에서 작동하는 차이고,

동일성의 짝이 되어 동일성을 보충해주는 차이다. 동일화의 의지 안에 있는 차이다.

 

따라서 흔히 ‘차이’란 말을 ‘동일성’과 짝을 이루는 대쌍개념이라고 보아,

“차이 없는 동일성이란 있을 수 없고 동일성 없는 차이도 있을 수 없다”고들 하지만,

 이는 동일성과 차이란 말에, 쌍을 이루어 작동하는 그 명언종자에 달라붙어 있는

생각일 뿐이다. 동일성 이전에 차이가 있다. 아니, 존재하는 것은 오직 차이 뿐이다.

이것이 ‘차이의 존재론적 일차성’이다.

차이의 존재론적 일차성을 보는 것은 매 순간, 비교 이전의 상태에 오직 차이만이

존재함을 보는 것이고, 차이화하는 차이만이 존재함을 보는 것이다.

무상을 통찰한다 함은 이런 차이의 존재론적 일차성을 보는 것이다.

차이의 철학이란 무상을 통찰하는 눈이 빚어낸 개념적 사유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無常  - 중
同一性 찾는 欲望이 ‘같다’라는 誤謬 만들어
2015년 02월 09일 (월) 16:05:30 이진경 solaris0@daum.net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世上의 實相, 그것은 無常이다. 差異만이 存在하건만, 왜 우리는 어디서나 동일성을 찾으려 할까? 동일성과 짝된 차이만을 보게 되는 것일까? 사실 철저하게 無常함을 보는 것만으로는 대단히 곤혹스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가령 학교에서 수업을 할 때 출석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無常을 깊이 통찰했다면, 출석을 부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지난주에 온 사람과 오늘 온 사람의 동일성을 멋대로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이진경’이라는 같은 이름을 써서 기고하고 연재하는데, 이 또한 어느새 어떤 동일성에 사로잡힌 것을 뜻한다.

日常서 同一함을 찾는 건  實相 있다는 無知서 비롯
 無知하지만 이마저도 몰라  實相 본다는 錯覺에 빠져

無常의 洞察을 철저하게 貫徹하기로 맘먹었다면, 우리는 산사 앞에서 본 동물이 무엇이었는지 答할 수 없을 것이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答할 수 없을 것이며, 직업이 뭐냐거나 어디 가느냐는 말에 答하지 못할 것이다. 눈앞에서 상대방이 하는 말 또한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無常’이란 말의 發音조차 事實 每瞬間 다른 周波數를 갖는, 다른 소리로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人間에게 限定된 게 아니다. 저기서 다가오는 動物이, 얼마 前에 自身의 친구를 잡아먹은 넘과 동일한 (종류에 속하는) 넘임을 알지 못한다면, 저 토끼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긴가 민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일단 비슷하게 생긴 넘이면 ‘같다’고 生覺하고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差異를 正確히 보려고 머뭇거리다간 어느새 다음 生의 문턱을 넘게 될 것이다. 이것이 動物들이 ‘分別’에 연연해하는 一次的인 理由다. 그런 記憶들은 身體에 새겨지며, 細胞나 細胞 以下의 層위에 침전된다. 遺傳子에 記憶된 먹이와 敵에 對한 記憶이 그런 것일 게다.

이런 이유 때문에 同一化하려는 의지가 생겨나고, 同一性을 유지하려는 욕망이 생겨나게 된 것일 게다. 同一性 없는 차이란 카오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同一性은 無常을 보려는 입장에선 대단히 유감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必須的인 有用性을 갖는 必要이고 누구도 避하기 힘든 ‘必然’인 것이다. 그래서 每瞬間 달라져 가는 것에서 共通性이나 類似性을 찾아 連結하며 同一性을 만들어내려는 意志가 作動하는 것이고, 그것이 다음번에 어디선가 유사한 것을 보면 ‘같다’고 知覺하고 判斷하게 하는 ‘씨’(種子)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 좀 더 確實하게 이름이라도 붙여 놓으면, 심지어 그 對相이 눈앞에 없어도 있는 것처럼 말하고 알려주고 명령할 수 있게 된다. 이름 붙은 것들, 言語로 말해지는 것들은 그런 점에서 便宜를 위해 無常을 지우는 同一性의 힘과 意志를 稼動시킨다. 言語로 말하는 것이 언제나 ‘實相’을 놓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問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言語를 쓰지 않고선, 名言種子를 稼動시키지 않고선 無常의 가르침도, 世上의 存在論的 眞實로 알려줄 수 없다는 事實이다. 석가모니가 自身이 깨달은 것이 로 傳할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말고는 傳할 길이 없기에 망설이다 世間으로 내려가는 것도, 禪師들이 道를 로 傳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 道를 傳하기 위해 을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무지가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면, 이는 근본적으로 동일성 때문에 무상의 실상을 볼 수 없는 이런 조건에서 기인한다. 근본적 층위에서 발생하는 이 무지란, 새끼줄을 뱀으로 오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뱀을 뱀이라고 보는데 포함된 오인이다. 눈앞의 대상이 전에 본 뱀과 ‘동일한’ 대상이라고 보는데서 오는 오인이다. 따라서 그것은 눈을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을 使用하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귀가 막혀 들리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귀로 分別하기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지 ‘빛(明)이 없어서’ 無常의 實相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눈이 必要로 하는 빛에 의해 無相의 實相이 가려지는 것이다.

 

이런 無知를 ‘根本的 無知’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세상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알려고 하는 욕구와 함께 온다. 이게 오류라면, 말을 잘못해서 야기되는 오류가 아니라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야기될 수밖에 없는 오류고, 생각을 하지 않거나 생각을 잘못해서 오는 오류가 아니라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면할 수 없는 오류다. 지식이 없음이 아니라 지식으로 인해 야기되는 오류다. 그때그때 발생하는 우연적인 오류가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언제나 발생하기 마련인 필연적 오류다. (칸트의 용어를 확장해서 사용한다면 ‘先驗的 假想’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선험적 가상이란 이성의 잘못된 사용이 아니라 이성을 사용해야 하기에 피할 수 없는 가상을 뜻한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필요와 편의를 위해 치러야 하는 필연적 대가다. 一切有爲法이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다(如夢幻泡影露電)”<金剛經>할 때 ‘幻’이란 個人의 主觀的 錯覺이 아니라 모두의 이 必然的 錯覺을 뜻한다고 해야 한다.

 

根本的인 無知란 同一性을 찾는 빛 속에서 世上을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無知는 自身이 世上의 實相을 보지 못하고 있음을 모른다. 反對로 그것은 世上을 잘 보고 있다는, 實相을 잘 알고 있다는 誤認을 同伴하는 것이란 점에서 二重의 無知다. 이것이 ‘전도망상(顚倒妄想)’을 야기하는 理由고, 그것이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共有되고 있는 理由다. 그래서 이 無知는 벗어나기 힘들다. 자신이 無知한 줄 알면 無知를 벗어나려 애쓰겠지만, 모르기에, 아니 世上을 잘 알고 있다고 믿기에 無知를 벗어날 生覺조차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가 바로 옆에 있어도 부처인 줄 모르고, 부처가 노파심을 갖고 설법을 해도 귀 기울일 줄 모른다. 떨어지는 잎새를 가리키며 實相을 보라고 하면, 그 지는 잎새에서 實相을 보는 게 아니라, 잎새 뒤에 있는, 이파리가 모두 떨어져도 그대로, 同一하게 남아 있는 나무를 보고, 그것이 바로 本體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렇게 反問할 수 있을 것이다. 變化하는 것에서 變하지 않는 것을 찾고, 差異들의 바다 속에서 同一性이란 고기를 잡는 것이 그처럼 世上을 살아가는데 必要하고 不可避하다면, 그것을 굳이 ‘필연적’이란 말까지 붙여서 ‘무지’라고 비난할 건 없지 않은가? 반대로 그것이 바로 세상을 사는 지혜라고, 무상한 카오스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인간의 지혜라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無常함과 差異가 一次的이라고 해서 그것을 보는 것만이 智慧라고 하는 것은, 카오스가 일차적이라고 해서 카오스를 지혜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그럴 수도 있다. 事實 ‘코스모스’나 ‘秩序’, ‘調和’란 槪念은 그런 意味로 사용된다. 그러나 화려한 成孔과 榮華의 瞬間이 좋다고 그것을 同一하게 유지하려고 하지만, 그게 實相이 아니기에 지나가 버리는 것에 ‘虛無’와 苦痛을 느끼는 것 아닌가? 옆에 있는 사람이, 그 사람과의 사랑이 동일하다고, 아니 영원히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기에, 그 사람이 變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사랑이 식어가는 것에 苦痛스러워하지 않는가? 뉴스나 영화에서 종종 보듯이, 그 사람이 永遠히 떠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사랑이 永遠히 變치 않도록 하기 위해 變心의 조짐을 보이는 戀人을 스토킹하며 脅迫하거나 심지어 죽여버리는 것도 無常의 實相 代身 同一性을 유지하려는 愛着과 執着 때문 아닌가? 사랑하는 이가 내 生覺과 다르게 行動하는 것에서 苦痛을 느끼고, 내 뜻대로 行動하게 하기 위해 苦痛을 加하는 일은, 수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일 아닌가?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自我)와 무아(無我) / 묘원

 

 

괴로울 때 괴로워하는 마음을 보라.

거기에는 항상 [나]라고 하는 자아가 있기 때문에 괴롭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의 몸, 나의 마음이라는 생각 때문에 바라는 마음이 일어나

집착을 하게 되고 그로인해 온갖 괴로움이 생기게 된다.

 

마음이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해서 알아차리면 집중이 되어

[나]라고 하는 번뇌가 들어올 틈이 생기지 않는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나]라고 하는 아상(我相)이 일어나는  순간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기 위한 방법을 말한다.

 

자아(自我)는 세상을 살아가는 힘의 원천이되지만,

무아(無我)는 자유인으로 이끄는  길목이며 깨달음을 주는 지혜다.

자아와 무아의 차이가 진정한 행복을 결정한다.

 

 

 

                                                자연의 질서 / 법정스님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연의 도리와

                                                삶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그 자연의 도리와 질서를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

                                                우리들 자신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지를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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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 이 시간의 덧없음을 화두 삼아서
복된 순간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 다같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사십시다.
우리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고
보다 알차게 살도록 다같이 정진하십시다.
새해 복 많이 지으십시오.
 

 

 

 

 

 

 

 

 

 

 

 

 

 

 

 

 

- 법정스님/길상사 홈피에서
 
 내 마음의 보석상자 / 이주원 작사, 곡/ 해바라기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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