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과 광덕스님

2015. 3. 13. 11:41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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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과 광덕스님

 

 

원정 차대완(圓淨 車大玩)|조형도예가

 

 

1. 해인사 백련암

 

 

광덕 큰스님을 생각하면 성철 큰스님을 자연히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두 분을 생각하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세월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시절은 나의 생애에 가장 자랑스러웠던 때이기도 했다. 우선 두 분은 동산 노스님이 가장 아끼셨던 제자들로서 절 집안에서 사형제로 형님과 동생이 되는 각별한 사이이다.

 

 

1970년대 초 광덕 큰스님은 자주 해인사 백련암을 찾아오시곤 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광덕 큰스님을 뵙게 되었는데, 큰스님은 백련암에서 보름씩 혹은 일주일씩 머물 때도 있었고 어느 날은 한밤중에 오셨다가 아침 일찍 가실 때도 있었다. 그때의 내 나이는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감수성이 아주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 절 집안의 사정을 겨우 알 듯 말 듯한 그런 어린 나이였다. 그 당시 광덕 큰스님은 40대 초반의 연세로 한국불교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시던 시절이었으리라 회상된다.

 

 

광덕 큰스님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은 이목구비가 단정한 아주 잘 생긴 미남 스님으로 어린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때 해인사 백련암에는 우측 대밭 속에 관음전이라는 조그마한 처소가 있었다. 두 평 남짓한 방에 관세음보살 입상이 모셔져 있던 곳이었고, 그래서 건물 이름이 관음전으로 불렸다. 관음전은 백련암을 찾아오는 당대의 큰스님들께서 쉬어 가시던 곳인데 청담, 향곡, 석호 큰스님 등께서 하루나 이틀씩 머무시던, 말하자면 백련암 초특급 귀빈실이었다.

 

 

광덕 큰스님도 백련암의 초특급 귀빈으로 관음전 단골이셨고 여러 귀빈 중 가장 오랫동안 관음전에 머물면서 성철 큰스님 방을 수시로 오가며 여러 가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셨다. 또 때로는 원고 뭉치를 한아름 안고 와서 두 분이 함께 이런 일 저런 일을 밤새워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시곤 했다. 어떤 때는 성철 큰스님께서 관음전으로 광덕 큰스님을 찾아가 긴 시간을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격 없이 지내기도 했다. 한마디로 광덕 큰스님은 백련암 관음전 귀빈실에 장기 투숙하는 단골 손님이셨다. 백련암에 오신 광덕 큰스님은 성철 큰스님을 만나 진지하고 열성적으로 불법을 묻고 토론하며 궁구(窮究)했다. 그런 장면들을 돌이켜 생각하면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십여 년이나 젊었던 시절, 광덕 큰스님의 참모습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나는 그런 열정의 광덕 큰스님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고 존경스러웠다. 다른 어느 큰스님들보다고 유난히 달라 보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큰스님들만 오시면 마냥 좋아서 날뛰던 시절이었다. 큰스님들의 공양과 잠자리, 그 외 소소한 심부름들을 모두 도맡아 해야 했던 나로서는 비상이 걸리는 셈이었지만 마음은 즐겁기 그지없었다. 성철 큰스님의 시자로 있으면서 한창 말뚝 신심이 하늘을 찌르던 때였으므로 큰스님들께서 오시면 나의 일손은 더욱더 바빠져도 그래도 알지 못하는 행복감과 기쁨에 넘쳐 있었다.

 

 

스승인 성철 큰스님께 말 한마디 제대로 여쭈어 볼 수 없었던 어렵기만 했던 시절, 광덕 큰스님께서 성철 큰스님 방을 수시로 드나들며 함께 한국불교를 걱정하고 토론하던 광경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너무나 작게 느껴진다. 그때 성철 큰스님께서는 광덕 큰스님이 가고 나면 입버릇처럼 “광덕이 만큼 열심히 중노릇하는 사람도 없어.”라고 칭찬의 말씀을 하셨다.

 

 

광덕 큰스님은 벌써 그때부터 새로운 불교사상운동을 위하여 서울에서의 왕성한 포교활동과 수많은 한문 경전들을 우리말로 번역하기 위하여 성철 큰스님과 함께 무언가를 의논했고,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하여 그때부터 선구자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광덕 큰스님이 백련암에 오신 날에는 성철 큰스님께서 가끔 공양 준비를 하고 있던 나에게 다가와 “이눔아, 우리 광덕스님 맛있는 반찬 많이 해드려라.” 라고 좀처럼 없는 특별당부를 하기도 하셨다. 지금도 그때를 다시 생각해 보면 성철 큰스님께서 사제이셨던 광덕 큰스님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셨는지를 금방 알 수 있고 뚜렷이 느껴진다.

 

 

그런 광덕 큰스님이 어느 때, 꽤 오랫동안 백련암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보름 전 날 백련암에서 삭발을 하신 일이 있었는데, 나는 성철 큰스님의 머리를 먼저 깎아 드린 다음 광덕 큰스님의 머리를 깎아 드린 일이 있었다. 그때 광덕 큰스님의 두상이 너무나 잘생겨서 무심코 “큰스님, 큰스님 머리가 우리 큰스님 머리보다 훨씬 더 예쁘게 생겼습니다.”라고 했다. 수많은 세월이 이미 흘러갔지만 기억은 오히려 새롭다. 그때 광덕큰스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었고, 나는 머리 깎으면서 그 미소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어쩌면 그렇게도 고우신 미소였을까. 가끔 그 모습에서 관음보살의 미소를 떠올려보기도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흔이 넘고 쉰이라는 나이가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다. 하물며 수도하는 스님의 모습에서는 자비로운 성자의 미소를 느낄 수 있어야 하리라! 만약 자기 얼굴에 자신이 없고 자비의 미소가 없다면 우리는 각자 깊이 자신을 되돌아봐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부처님의 젊었을 때의 모습이 광덕 큰스님 같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 자비스럽고 환하던 광덕 큰스님이 보고 싶다. 무척 그립다. 가끔 백련암을 찾아오시던 푸른 하늘 같았던 광덕 큰스님. 그때 나는 산문 밖까지 원고 뭉치를 싼 보따리를 들어다 드리면서 큰스님의 떠나시는 뒷모습이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마냥 서 있었다. 소나무에 앉아 있던 학이 날아간 것 같은 아쉬움과 허전함을 느낀 때문이었다.

 

 

2. 해인사 승가대학

 

 

성철 큰스님과 광덕 큰스님이 서로 마음을 가장 깊이 주고받았던 일은 뭐니뭐니 해도 1970년대 초 해인사에 승가대학을 설립하기 위하여 두 분이 동분서주했을 때일 것이다. 성철 큰스님은 광덕 큰스님의 큰 원력과 비상한 재능을 항상 인정하고 아꼈다. 성철 큰스님이 해인사에 승가대학을 설립하고자 했을 때, 그 일에 관한 수많은 크고 작은 일들을 일일이 광덕 큰스님과 의논했던 것이다.

 

 

대학을 설립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큰스님께서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힘들고 어려웠으리라 생각한다. 그러기에 성철 큰스님은 시자였던 천제스님을 광덕 큰스님께 보내 승가대학 설립에 관한 모든 문제를 의논했다고 한다. 성철 큰스님은 명석한 두뇌를 가졌던 광덕 큰스님의 노력과 열성을 얻어서 세계적인 승가대학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두 분의 노력이나 열성에도 불구하고 해인사 승가대학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말미암아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하지만 광덕 큰스님의 대학 설립에 대한 의지와 열성은 참으로 대단했다고 천제스님이 말한 적이 있다.

 

 

성철 큰스님과 광덕 큰스님이 그렇게도 원했던 해인사 승가대학 설립은 우여곡절 끝에 설립되지는 못했지만, 그 뜻은 지금도 사람들 가슴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만약 두 분의 뜻이 그때 이루어졌다면 한국불교는 분명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을 터이고, 가야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과 버금가는 또 하나의 불사가 자리했을 것이다. 아무튼 산 속 깊숙이 자리잡은 유서 깊은 해인사에 승가대학이 들어섰다면 아마 굉장한 일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애석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때 대학을 세우고자 발원했던 선각자들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 계실까. 우리들의 선지식이었던 성철 큰스님과 광덕 큰스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혹시 타방세계에서 또 다른 승가대학 설립을 위하여 도솔천에서 두 분이 머리를 맞대고 계시지는 않을까.

 

 

그렇다. 타방세계가 아닌 바로 이곳 안성 죽산 도솔산에 불교 파라미타 대학원을 설립하기 위해 큰스님의 상좌인 송암스님이 열렬하게 3년 기도 결사 중에 있다. 멀지 않은 시기에 두 분 선지식의 뜻을 받들어 세운 불교대학원이 이 땅에 출현하고야 말 것이다. 나는 평소에 두 분의 큰 뜻이 언젠가는 나타나리라고 믿어왔는데 도피안사에 가서 직접 그 현장을 보고, 송암스님으로부터 설립 계획을 듣고 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느낌이 문득 전해 왔다. 두 분 선지식은 대학원 설립의 총감독이고 송암스님은 일꾼이라는 생각이 들어 반드시 큰 어르신들의 가호와 불보살님의 인도가 있으리라는 메시지가 문득 어디로부터인가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도솔산 도피안사 불교 파라미타 대학원 사바하.

 

 

3. 해인사 주지 자리

 

 

1977년, 해인총림 방장 성철 큰스님은 광덕 큰스님을 해인사 주지로 추천하신 일이 있었다. 성철 큰스님의 그러한 뜻을 광덕 큰스님께 전하기 위하여 그 당시 성철 큰스님의 시자였던 천제스님이 여러 차례 서울 대각사로 걸음을 했다. 끝내 광덕 큰스님의 고사(固辭)로 해인사 주지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성철 큰스님과 광덕 큰스님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다시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광덕 큰스님께서 끝까지 성철 큰스님의 뜻을 완곡하게 사양했던 까닭은 서울에서 이미 시작한 불광운동에 대한 신념과 새로운 불교 전법에 대한 소신과 책임감 때문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한 성철 큰스님의 흔쾌한 양해도 광덕 큰스님에게 오히려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흔히 스님들의 벼슬은 닭볏만도 못하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해인사 주지란 직함이 사십대의 나이에 주어진다면 누구나 한번쯤은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광덕 큰스님께서는 끝내 당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훌륭한 스님을 추천하는 것으로 주지 자리를 면했고, 성철 큰스님은 광덕 큰스님으로부터 주지 추천 받은 것으로 아쉬움을 흔연히 떨쳤고,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광덕 큰스님의 새로운 불교운동의 든든한 후원자 겸 협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를 미루어보더라도 두 분의 인간관계는 여간 돈독한 사이가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역시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흔치 않는 일일 것이다. 대개의 경우는 해인사 주지 자리에 연연하여 주지운동을 할 법한데도 오히려 초연하게 남에게 양보하고 본래의 뜻을 굳건히 세워 나갔던 광덕 큰스님은 그 옛날 범어사 시절부터 존경해 마지않았던 도광 큰스님을 해인사 주지로 추천했다. 존경해 마지 않았던 사형님, 방장 성철 큰스님의 뜻을 거절하기가 너무나 송구스러워 사죄하는 마음과 정성으로 추천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무튼 광덕 큰스님은 자신의 새로운 불교사상운동을 위해 일체를 사양하고 오직 외길을 묵묵히 걸었던 것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오늘날 불광의 위상은 해인사 주지 자리도 마다한 광덕 큰스님의 큰 결심에서 세워졌고, 광덕 큰스님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마침내 이룩했던 새로운 시대의 불교사상운동이었고 신앙결사며 획기적이 불사였다. 광덕 큰스님의 큰 서원의 힘으로 나타난 불광, 위법망구의 보살 헌신으로 기초를 쌓은 그 불광은 한국불교의 영원한 미래상으로, 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좌표로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만약 광덕 큰스님이 성철 큰스님의 처음 권유대로 해인사에 내려와 주지직을 수행했다면, 오늘날 해인사는 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두 분의 서로 밀접한 인간관계와 뛰어난 법안의 공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인사 산문 안에 대학이 들어서고 학구적인 분위기가 조성되고 거기에 따르는 새로운 사상운동이 크게 일어나 아마도 세계인의 불교수행과 학문연구의 중심도량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일들을 하여 해인사가 좋은 가람으로 거듭 태어나고 세인의 상상을 뛰어 넘을 만큼 크게 발전할 수도 있었겠지만, 광덕 큰스님께서 혼신을 다하여 이루려 했던 불광의 깊은 뜻은 아마 지금처럼 빛을 발하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새로운 불교를 위해, 불광의 발전을 위해 광덕 큰스님은 해인사 주지자리에도 연연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흘러온 대로 과거 전통에만 머무르지도 않았다. 항상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고 막혀 있던 길을 열어 나갔으며 무한 가능성을 향하여 도전하고 개척해 나갔다. 광덕 큰스님이 미리 먼 훗날을 내다보고 결정한 이러한 여러 일들은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사표가 되고 출가자들의 잣대가 될 것이다.

 

 

그러한 광덕 큰스님을 생각해 보노라면 그대로 우리 한국불교의 보현보살로 느껴진다.

나무 보현보살마하살.

 

 

광덕스님 시봉일기 7권 사부대중의 구세송 중에서- 글 송암지원, 도피안사

스스로에게 독이 되는 나쁜 습관 4가지 

 

 

자신에게 독이 되는 행동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감정 조절을 못하거나 반복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를 수렁으로 빠트리는 것이다.

보다 행복하고 원만한 삶을 위해 삼가야 하는 나쁜 생각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미국 언론매체 허핑턴포스트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줄여야

보다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일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상대방이 가볍게 던진 말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조언이나 권유의 수준에서 말을 했는데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항상 자신이 옳다고 자기도취에 빠지거나 남의 피드백을 무시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상대의 말을 지나치게 의식해 상처를 받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의 평가와 반응에 휘둘리게 되면 건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항상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말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자신이 겪고 있는 힘든 일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으면 기분이 나아질 수 있다.

또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은 SNS를 통해 글로 풀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긍정적인 부분을 아예 무시하고,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만 한다면

결국 왜곡된 시선을 갖게 된다.

본인을 항상 피해자의 입장에 둔다

항상 자신을 희생자라고 생각하는 것도 본인에게 독이 된다.

잘못은 다른 사람이 저지르고 나는 피해만 본다는 생각이다.

이는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내지 못하게 한다.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트라우마가 생긴 사람일수록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고 지휘하지 못한다.

스스로를 불운하고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그러면 삶을 스스로 조율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끊임없이 본인을 입증하려 든다

표면상 보기 좋은 결과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가장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외관상 그럴듯해 보이는 결과물을 내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다보면 삶을 보는 시각이 좁아질 수 있다. 당장 남들보다

좋은 차를 타야 한다는 생각처럼 '지금 당장'의 문제만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소한 일에 집착하다보면 정작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은 잃어버리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삶은 점진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여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피차 / 나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