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 / 법상스님

2015. 2. 20. 17:3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화엄경·보현행원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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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게 / 법상스님

 

1. 화엄일승법계도 지금 강의 하는 중이었습니다.

오늘 법성게의 강의는

초발심시변정각 初發心時便正覺

생사열반상공화 生死涅槃相共和

이사명연무분별 理事冥然無分別

십불보현대인경 十佛普賢大人境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게송인데요

‘초발심시변정각’ 하면 처음 일으킨 이 한 마음이 발심한 이 한 마음이

바로 곧 깨달음이니 생사와 열반이 함께 어우러져있다.

‘이사명연무분별’ 이치와 현상세계가 아득하여 분별되지 않으니

‘십불보현대인경’ 이라. 모든 부처님과 보현보살님의 큰 어떤 설함의 경지가

바로 이와 같다 하는 얘깁니다.

 

어~ 오늘 이 게송부분이,

어~ 화엄경의 아주 그 중중무진의 그 법계연기라고 하는,

혹은 뭐 이 ‘사사무애법계’ 라고 하는 그 화엄경의 어떤, 이~ 아주

그 대승불교의 꽃이라고 하는 그 연화장세계의,

화엄세계의 어떤 실상을 보여주고 있는 게송이라서

 

어~너무나도 놀라우면서도, 어~ 뭐 선불교의 어떤 바탕이 되는

하나의 어떤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고,

불교의 어떤, 대승불교의 어떤 핵심이 되는 그 사상입니다.

사상이면서 어~또 어렵습니다. 아주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 먼저 ‘초발심시변정각’ 이랬습니다.

 

처음 발심한 그 때가 초발심을 일으킨 그때가 바로 정각의 때와 같다.

뭐 이렇게 이야기한 이유는 왜 그러냐하면 우리가 지금 중생이란 말이죠.

근데 내가 깨달아서 부처가 되겠다 하고 발심을 하면

그 때 이 정각, 완전한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

이 얘기는 이 바탕이,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냐하면

 

지금 내가 깨닫겠다 한다고 해서 제가 바로 부처가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가?

이미 우리의 본바탕이 우리가 생각했을 때는 우리의 본바탕이 어리석고

분별망상에 시달리고 이 중생이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이 화엄경의 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지금 착각 속에 빠져있다는 겁니다. 중생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있다.

내 삶은 괴로움이다 라는 착각 속에 빠져있을 뿐이지 본래 우리 삶은 괴로움이 아니고

본래 우리 삶은 이미 완성되어있다. 이 자체로써 완성되어 있다.

우리가 그냥 중립적인 아무런 시비분별 할 수 없는 한 가지 일을 벌이고 있는데

그것은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할 수 있는 아무 분별할 근거가 없는데

우리는 마땅히 머리를 굴려서 분별을 함으로써 그것을 중생의 경계로 바꿔놓는 겁니다.

 

2. 그냥 배고픈 어떤 사람이 있어요.

배고픈 어떤 사람이 배가 고프고 있고, 밥이 있고, 김치가 있어서

밥을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김치와 밥을 먹고 있다.

어떤 사람이 배가 고프고 그 사람이 밥과 김치를 먹고 있습니다.

그건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뭐 아름다운 겁니까?

 

아니면 불쾌한 겁니까? 유쾌한 겁니까? 행복한 건가요? 불행한 건가요?

밥과 김치를, 배고픈 사람이 밥과 김치를 먹고 있다.

그 이건 그냥 중립적인 겁니다.

그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그런데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야! 내가 옛날에는 정말 잘 살고

 

맛있는 음식에 맛있는 반찬에 그냥 막 상다리가 부러지게 밥을 먹고 살았는데

내가 이렇게 가난해가지고 밥과 김치밖에 못 먹고 사니까 정말 비참하구나!

내가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되나!

나, 이렇게 밖에 못 먹고 사는 내 인생은 정말 완전히 망한 인생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막 비참해하면서 밥과 김치를 먹을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어떤 아이들 같은 경우에는

밥을 한 번도 그렇게 진수성찬으로 배부르게 먹어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풍성한 밥과 이렇게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이게 행복한 일인가!

음~ 저는 이렇게, 이렇게 점심을 먹을 때

 

그 저는 김치를 너무 좋아해서 특히나 우리 저 법당 김치가 너무 맛있습니다.

그래서 반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저~ 한 번씩 보살님들한테 혼나는데 반찬 두루두루 안 먹는다고.

반찬이 있음에도 이게 때로는 뭐 좀 귀찮기도 하고 또 때로는 뭐 굳이 따른 게

굳이 따로 필요도 없고 그래서 그냥 그릇 하나만 들고 공양간에 가서 밥을 뜨고

 

그 밥그릇 위에다가 김치를 수북이 올리고 그러고는 그냥 들어가서 저 방에 가서

그냥 이렇게 천천히 씹어서 먹기도 하고 그러기도 하는데

그, 그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3. 근데 아프리카에 다 죽어가는 아이들이 그 상황에서 김치와 밥을 먹는다면

너무나 행복해 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비참해 할 수도 있단 말이죠.

이 김치와 밥을 먹는 이 상황만 이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주어진 삶,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삶의 조건은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이나, 뭐 어떤 최악의 사람들이 봤을 때는

 

너무나도 놀라운 행복의 삶이다.

하루하루가 놀랍고도 놀라운 행복의 삶을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중인 겁니다.

심지어 저 전방에서 막 그냥 힘들게 근무하는 군인들조차, 생도들조차

하루하루 아침에 일어날 수 있고, 아침밥 먹을 수 있고,

물 막힐 때 물 마실 수 있고, 아플 때 약도 받아먹을 수 있고,

 

근데 이것을 불행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머리가 하는 일이지 삶 자체는 아무런 그런 분별이 없단 말이죠.

그니까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의 삶은 우리와 전혀 다른가? 그게 아닙니다!

삶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이 자세가 달라지는 거죠.

마음이 달라지는 거죠.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깨달음을 얻는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삶은 그대로 유지가 될 겁니다.

그냥 밥 먹고, 무리하면 아프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집에 가는데 뭐 차도 타고 갈 필요도 없고 기름을 안 넣어도 차가 그냥 가고

이런 게 아니란 말이죠. 잘 못 먹으면 배탈 나고.

 

그러나 그 마음에서는 아무런 차별이 없는 것이죠.

이처럼 본래 우리는 깨달아 있기 때문에 뭐 닦고 자시고 뭘 해야 되는

이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발심하는 그 때가 바로 정각을 이룰 때와도 같다.

그래서 이 발심이 중요하다.

 

발심이 뭐냐하면 내가 지금까지는 생각이 나를 이끌고 왔습니다.

생각과 망상, 분별 이것이 나를 이끌고 왔어요.

그러다보니까 얼마나 억울하게 살았습니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머릿속에 생각이 만들어낸

이 허상의 세상을 지금까지 우린 살아온 겁니다.

 

삶이라는 진짜배기 실상을 내 던지고, 차버리고.

여러분! 진수성찬이 있을 때, 그러고 막 남들하고 같이 막 먹을 때,

경쟁도 되고 이럴 때 이게 그렇게 맛있지가 않아요.

남들보다 빨리 먹어야 되고 막 그냥.

 

 

4. 그런데 혼자 조용히 앉아서 맨 밥을 입에 넣고 가만히 씹고, 씹어보세요.

혹은 거기다가 그냥 김치 작은 거 김치 한 조각만 입에 딱 넣고 가만히 씹어보면,

어~ 어떤 일이 벌어지냐 면요,

그냥 밥과 김치를 나는 분명히 씹고 있는 거 밖에 없는데,

일상생활 속에서 밥 먹는 것과 제가 지금 말한 이 밥 먹는 것은 전혀 차이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왜 차이가 나냐면 밥과 김치를 입에 넣고 씹는데요,

입에서, 아! 그야말로 아! 이것이 천상의 맛이구나!

아 이거 제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단맛이 정말 입에서

이게 막 설탕 같은 그런 단맛이 아니라 아주 단~맛이 나서

어떻게 이렇게 맛이 있을 수가 있지? 한 번 경험해보세요.

 

그니까 이 삶을 여러분들이 경험해 본적이 있느냔 말이죠.

그냥 밥 먹고, 반찬 먹고, 이 반찬 저 반찬 막 잔뜩 먹어야 되니까

그 밥 한 숟갈만 먹고 반찬 하나만 넣고 오래도록 음미하면서 먹는

그랬을 때, 내 입에서 침이 나와 가지고 이게 섞이는데서

그 오는 그 꿀맛 같은 그 아름다운 행복, 그 놀라운 밥맛의 비밀을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잘 못 느끼고 살 겁니다. 허겁지겁 먹기 바쁘니깐.

그런데 그 밥 한 공기, 한 숟갈 속에 그냥 우리가 허겁지겁 먹고 버릴 수도 있지만

놀라운 맛을, 천상의 맛을 음미하면서 먹을 수도 있습니다.

머릿속으로 밥을 먹으며 딴 생각을 하고, 망상을 피우고, 야! 이따가 또 뭐해야 되지?

공부해야 되는데, 일해야 되는데, 뭐하고, 뭐하고, 뭐해야 되는데

 

이런 온갖 생각을 하면서 밥을 먹게 되면 그 밥이 어떻게 그 맛이 있겠습니까?

밥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그게 맛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고 그냥 먹을 뿐이죠.

그래서 사실은 많은 사람과 함께 먹을 때는 이 진짜 제대로 밥을 먹을 수가 없어요.

입으로는 밥을 먹고 있지만 밥을 먹고 있다 라는

 

이 생생한 진짜배기 삶은 오히려 무시해버리는 겁니다.

이 밥을 먹는다 라는 지금 이 현실은 우리에게 없는 거예요.

그냥 입에 뭐가 들어가고 있을 뿐이지.

 

5. 삶을 산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머릿속에서 망상을 가지고 아니면 남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 허망한 말의 잔치 속에서, 생각의 잔치 속에서 우린 놀고 있었던 것 일 뿐이죠.

우린 그걸 보고 인생을 산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건 인생을 사는 게 아니고

망상, 분별 속을 거닐고 있는 겁니다.

 

이, 그야말로 상의 세계 속에서, 그 관념의 세계 속에서,

생각과 분별 세계 속에서, 허망한 인생을 살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진짜배기 생생한 삶, 정말 놀라운 매순간순간의 놀라운, 뭐 놀랍다 표현 할 수도 없어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니까.

 

지금 이 자리 이 삶을 우리는 내 팽개치고, 그 머릿속에서 분별로 만들어낸 환상의 세상,

똑같이 이 육군사관학교를 다니고 있어도, 똑같이 군생활을 하고,

똑같이 어떤 직장을 다니고 있고,

똑 같이 학교를 다니고 있어도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되게 행복하게 공부하면서 다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정말 학교 다니는 게 지옥에 가는 것 보다 싫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직장도 마찬가지고. 부대도 마찬가지고.

이걸 삶, 그냥 하나로 똑같은데, 사람이 어떤 망상 속에 사느냐에 따라서

어떤 생각과 관념 속에 사느냐에 따라서 그 행복할 수 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는 똑같은 현실을 경험해도 결국 그것은 똑같은 현실이 될 수가 없죠.

 

어떤 사람은 맨밥만 있어도 먹어도 천상의 음식을 맛보면서 그 순간을 누릴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아무리 막 비싼 뷔페를 먹고 있어도 전혀 그 순간을 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것은 이 현실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내가 어디에 집중하면서 어떤 망상분별에 집중하고 살았는지

그니까 이게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이게 자기 마음의 문제인거죠.

 

그래서 이 초발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 그래서 이 발심을 했다 라는 것은

내가 이런 생각과 망상, 분별의 세상을 살아오던 이런 습관을 이젠 버리겠다.

내가 이제는 내 머릿속에서 내 생각으로 꾸며낸 이 거짓 세상을 사는 것

이런 인생들 이제는 내가 버려보겠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는데, 이게 가짜인 게 분명하게 드러났으니까.

 

우리 인생이 얼마나 허망합니까? 주변상황에 울고 웃고.

그런 삶이 얼마나 허망한지가 딱 드러났잖아요.

그러나 이제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 진짜배기 생생한 삶을 내가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내가, 내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꾸며놓은 이 머릿속에서 만들어 놓은 세상에

내가 거기 들어 가가지고 울고 웃고,

 

늘 생각으로 만들어 놓은 즐거움 속에 빠져서 좋아했다가

생각으로 만들어 놓은 괴로움 속에 빠져서 막 괴로워했다가

그 이런 허망한 삶을 사는 것을 난 이제 포기하겠다.

그리고 난 이제 진짜 생생한 삶을 살아보겠다. 그게 발심입니다.

그것을, 그런 삶이 있다. 지금 이 자리를 중생으로써 사는 삶의 방식도 있고.

 

그러나 지금 이 자리를 똑같이 살지만, 완전한 행복으로 사는 방법도 있다.

이걸 가르쳐주는 분이 부처님 아니겠습니까?

그걸 딱 깨닫고 나면 그게 바로 우리가 부처가 되는 것이고,

그걸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내가 발심을 하게 되면,

 

첫 번째 내 발심, 내가 한 번 깨달아보겠다, 이 깨달아보겠다 가 거창한 게 아닙니다.

이, 내가 생각과 망상으로 만들어 놓은 거짓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

진짜 세상을 살아보겠다.

그...,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그 우리가 지금 내가 괴롭다 라고 생각하는 게

이게 머릿속의 괴로움이지 진짜 괴로운 건 아니잖아요.

그 어떤 얘기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6. 행복이라 생각하는 것도 그게 진짜 행복은 아닙니다.

내가 행복이라고 해석했을 뿐이지.

옛날과 비교해서 지금은 더 괴롭다. 뭐 어떤 점과 비교해서 지금은 괴롭다.

이렇게 하고 있을 뿐이지. 진짜 괴로운 삶이라는 건 없어요. 진짜 즐거운 삶이란 건 없고.

그래서 내가 한 번 딱 발심을 하게 되면 진짜 제대로 된 발심을 하게 되면

 

그, 그야말로 그 자리가 바로 정각인 것과 똑같은 그런 공덕이 있다.

불교를 마음공부라고 하잖습니까?

사실은 일체유심조란 말이 일체가 우리 마음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 세상도 사실은 그렇죠. 부자가 되겠다. 마음내면 부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마음내면 뭐 다 할 수 있죠. 그런데 이 세상은 물질이 세상이지 않습니까?

 

이 물질인 세상을 마음 낸 대로 막 바로바로 됩니까? 바로바로 안 되죠.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부자가 되고 싶지만, 다 부자가 되는 게 아니란 말이죠.

이 물질 세상은 이게 되는데 시간이 걸린단 말이죠.

이 그래서 거칠다를 거친경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낸 세상은 어때요? 이 내 마음이니까, 내 마음이니까

 

이 마음공부는 이게 직바로 일체유심조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부자가 되는 것은 마음 낸다고 바로 되는 게 아닐 수 있지만,

잘 생겨지고 싶다! 하! 마음 낸다고 바로 잘 생겨질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이.

본바탕을 확 바꾸긴 힘들죠. 뭐 어느 정도는 바꿀 수 있겠지만.

그건 물질의 공부이기 때문에 그래요.

 

근데 이 마음의 공부는 마음의 공부이기 때문에 마음내면 바로 돼버립니다.

이 공부는 마음공부 아니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내가 한 번 깨어나 보겠다.

이생을 넘기지 않고 내가 한 번 부처가 돼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딱 내면

이 마음공부기 때문에 이 본바탕인 마음에서

뭐 본바탕인 마음과 내 마음이 따로 나뉜 것도 없지만

 

방편으로 표현을 한다면 그 근원의 차원에서 마음 낸 대로 되게 만들어준다니까요.

스승을 보내주고, 좋은 도반을 보내주고, 책을 펴면 좋은 책을 보내주고,

TV를 켜면 나도 모르게 자꾸 그 마음을 낸 사람은 자꾸 불교 TV나 불교방송에

시선이 가게 되고, 그런 책에 시선이 가게 되고, 그 스승님과 파장이 맞게 되고,

그 공부의 인연이 자꾸 나에게 올 수 밖에 없습니다.

 

럼 내 스스로도 자꾸 공부에 관심이 가게 되고, 그 마음의 힘이에요.

마음을 딱 내면, 마음만 내면 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것은

마음 내는 것 밖에 없습니다.

마음만 내면 물질세계는 저절로 따라 오는 거지

물질세계를 억지로 바꾸려고 애쓸 필요 없단 말이죠.

 

마음을 내고 그냥 내 맡기면 되는 겁니다. 마음 내고 내 맡기면.

그 처음에는 우리가 그걸 모르니까 기복적으로 뭔가 기도하는 게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하고 빌기 밖에 안합니다. 좋은 대학가게 해주세요. 딸이 뭐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하고 기복적으로 빈단 말이죠. 그 어느 정도 기복적으로 빌던 것에서

이제 공부를 조금 더 하게 되면 비는 이런 기복 불교에서 탈피해가지고

 

이제는 어떻게 되냐 하면, 아 지금 이 순간 내가 빌지 않더라도

삶은 이리도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구나.

그래서 굳이 빌지 않더라도 아! 이대로 만족하는 삶을 살기 시작하게 됩니다.

 

7. 그 빈다는 건 뭐예요? 원하는 걸 이루고 싶다는 거잖아요. 그 욕심과 집착.

이 기죽이는 삶이었다가 인생을 턱 내 맡기게 됩니다. 그냥 만족하게 되는 거예요.

그 순간순간 아 이만하면 충분하구나! 만족할 수 있구나!

아 지금 주어진 삶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구나!

그래서 그냥 인제 만족하게 되고, 자족하게 되니까

 

욕심과 집착이 많이 떨어진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 삶에 특별히 바라는 것도 없고 특별히 반드시 돼야 된다는 생각도 없고

그냥 턱 내 맡기고 살게 돼요. 이 법신 부처님을 신뢰하는 겁니다.

삶 자체를 신뢰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내 맡기고 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불교공부를 하다보면 이제 괴로울 게 별로 없어요.

 

그 내 맡기고 사니까 모든 걸 부처님께서 알아서 나를 끌고 가는데

이 진리가 나를 끌고 가는데, 내가 굳이 뭘 이렇게 억지로

저렇게 억지로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없이 그냥 흘러가는 겁니다.

그니까 마음이 상당히 편안해지죠. 근데 그렇게 편해진다 할지라도

이 알음알이의 생각 망상이 딱 떨어져 없어진 건 아닙니다.

 

내가 이제 머리로 어느 정도 이해해서 가슴으로 어느 정도는 그 삶을 살고 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알음알이 분별심은 계속해서 들어오는 거예요.

또 여러분들이 부처님 가르침인 다른 삶을 살아서

상대가 행복해지고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졌어요.

만족이 많아지고 집착이 좀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다할지라도 여전히 집착은 계속 나를 괴롭힙니다.

여전히 친구들이 어디 투자하면 좋다더라 하면 거기 솔깃하고,

자식의 성적에 더 집착하게 되고, 끊임없이 자꾸 내가 좋아하는 것들

이런 거에 욕망과 집착이 계속 올라올 수밖에 없어요.

그 때론 거기 또 빠지기도 하고. 그걸, 그걸 기분 나빠하거나

 

그게 내가 퇴전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당연한 거예요.

분별망상의 습관이 얼마나 오랫동안 온 건데. 한 방에 끝나겠습니까.

근데 그렇게 공부하다가 어느 정도 편안해졌는데,

그러다가 이제 내가 딱 이 발심을 한단 말이에요.

내가 야! 이렇게 사는 게, 이거 머리로 되는 게 아니구나!

 

내가 머리로, 알음알이로 불교 공부해봤는데 그게 다가 아니구나!

그래서 공부가 끝나는 게 아니구나!

요즘은 내가 상당히 편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가 끝나지 않는 것이구나.

이게 다가 아니구나. 내가 진짜 내가 발심을 해서 진짜 공부를 끝내야 되겠다.

쉽게 말해 성품을, 성품자리를 보고, 이, 이, 내가 그야말로

 

깨달음을 얻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거구나.

딱 답이 나온단 말이죠. 그래서 인제 공부를 하게 되는 겁니다.

진짜, 진짜배기 공부를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딴 건 관심이 없어지죠.

세상에 세속적인 거 관심 아무리 가져봐야 그~ 돈, 명예, 권력, 지위,

그 아무리 많아봐야 그 뭐 고작해야 몇 십 년 하고 끝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근데 이 공부는 수억 겁을 윤회하고, 윤회하고,

윤회 해 오면서 지금까지 풀지 못한 과제 아니겠습니까?

이것만 하나 딱 끝내버리면 다음생, 그 다음생, 그 다음생 윤회할 필요가 없고,

더 이상 고통과 번뇌로 망상으로 시달릴 필요가 없는데

그냥 이게 얼마나 참! 얼마나 비교될 수 없는 공부입니까? 이게...

 

이 공부는요, 누가 나한테 대통령을 시켜준다 하고, 마~ 수조 원을 갖다 준다고 해도

너 그럴테니까, 니 공부 하지마라. 마음공부 하지마라.

내가 미쳤다고 내가 수조 원 따위를 가지고 내 마음공부랑 바꾸겠느냐

하고 한마디로 물리칠 수 있어야 되는 거죠. 사실은.

이 와중에 그것 벌어봐야 뭐하겠습니까? 그렇다고 벌지 마라. 그렇게 전혀 잘못됐다.

 

이런 게 아니라, 그 자연스럽게 내가 내 삶에 살면서 벌어지는 거는 그냥 벌어 쓰는 거죠.

그 내게 주어진 나의 어떤 뭐 자기가 지은 공덕이 있고, 복덕이 있으면

그 공덕, 복덕이라고 받아쓰면 되고, 많으면 남과 나눠 쓰면 되고,

좋은 데서 그냥 쓰면 되는 거죠. 그냥 복이야 뭐 많고 적고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부자고 가난하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 마음공부에 있어서는.

 

8. 그렇게 인제 공부를 하다가 그야말로 인제 탁 그야말로 진지한 발심을 해서

한소씩을 딱 해서 성품을 봤다. 뭐 초견성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참성품을 봤다.

물론 그야말로 그 순간 이제 놀라운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죠.

그 뭐 어떤 사람은 그러면서 세상이 그야말로 환해지는 것 같고,

그야말로 황홀경에 빠져서 몇 일, 몇 날 몇 일을 보내기도 하고,

 

너무나도 놀라운 그야말로 모든 게 끝난 것처럼 느끼기도 하겠죠.

근데 거기, 거기서 의문이 시작되는 겁니다. 사실은.

성품, 견성을 할 때부터 의문이 시작되는 곳, 것이기 때문에

그게 공부가 끝난 것이 아니고 그때부터 공부가 진짜 시작되는 것이죠.

인제는 더 이상 퇴전하지 않고 공부가 된단 말이죠.

 

그럼 인제 중요한 건 그렇게 공부를 했다할지라도 여전히 분별, 망상이

우리를 그때그때 순간순간 올라오지 않을 수가 없다라는 것이죠.

그럴진대, 지금 우리가 쪼금 알음알이로 공부해놓고

그러고 나서 나는 여전히 분별망상이 있어요.

왜 그렇죠? 뭐 불교를 공부해봐야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애요.

 

이런 얘기를 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우리가 가고 있는 공부의 과정은

초중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으로 본다면

지금 우리는 한 중고등학교 쯤~, 마~ 인제 가고 있는 정도 밖에 안됩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을 가지고 지금 불교에 대해서 어떻다 저떻다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요 이렇게 첫 발심을 하는 그때가 그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공부인지 모릅니다.

이 화엄경에 어떻게 이 ‘초발심시변정각’ 을 표현하고 있냐면,

 

만약 보살이 초발심에 머문다면 복덕과 지혜를 성취하게 되며

생사를 떠나 초세간에 이르며 정등각법을 두루 얻게 된다.

 

보통 인제 화엄경에서는 52위라고 해서

뭐 십신, 십주, 십행, 십회양, 십지, 등각, 묘각 이라는 단계를 거쳐서

뭐 깨달음을 얻음에 든다. 뭐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데

방편으로 이렇게 얘길 하고 있죠.

근데 이 십신이라고 해서 믿음 열 가지 단계의 어떤 믿음.

 

 

야! 내가 부처님 공부한 저, 저 길로만 가면 내가 분명히 깨달을 수 있구나 하는 믿음.

아! 이 옛날 큰스님들이 깨달음을 얻었다하는 그 깨달음이 분명히 있는 거구나.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을 가지고 나서 그 다음에 해야 되는 게 바로

십신 다음에 십주인데 십주의 첫 번째가 바로 이 발심주, 초발심주 이럽니다.

여기에 인제 초발심에 대해서 어떻게 경전에 나오느냐하면요,

초발심공덕품이란 곳에 화엄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제석천왕이 법혜보살에게 물었다.

 

“불자여! 보살이 처음으로 보리심을 내면 그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했더니 법혜보살이 말했다.

 

 

“이 이치는 깊고 깊어서 말하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분별하기 어렵고,

믿고 이해하기 어렵고, 증득하기 어렵고, 행하기 어렵고, 통달하기 어렵고,

생각하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다.

가령 어떤 사람이 모든 즐거운 일로써 동방아승기세계에 있는 중생들에게

한 겁 동안 공양을 하고 오계를 갖추도록 하며, 남방 서방 북방 네 간방과 상하방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면, 그 공덕을 많다고 하겠느냐?

이 공덕을 초발심의 공덕에 견주어보면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고,

천분의, 백 천분의 일도, 억분의 일, 백 억분의 일,천 억분, 백 천 억분,

나유타 억분, 백 나유타 억분, 천 나유타 억분, 백 천 나유타 억분,

수분, 가라분, 산수분, 비유분, 우파니사타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느니라.“

 

이 뭐 수분, 가라분, 산수분, 우파니사타분 이런 것은

인도의 무한히 많은 어떤 숫자의 단위라 그럽니다.

초발심을 낸 공덕은 수도 없이 많은 이 동방, 서방, 남방, 북방에 있는

수도 없이 많은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 전부를

완전히 즐겁게 해주고 그 사람들에게 불법을 가르쳐주고

오계를 갖추게 해주고 공양해주고 이런 공덕보다 더 크다.

 

9. 근데 이런 수도 없이 많은 비유들이 나옵니다. 심지어 또 이럽니다.

“시방에 열 아승지 세계에 있는 중생들에게 백 겁 동안 공양하고

그들을 가르쳐서 십선도를 닦게 하고 백 천 억겁 동안 그들을 공양하고

사선에 선정에 머물게 하고 백 천겁을 지낸 뒤에 사무량심에 머물게 하고

억겁이 지난 뒤에 사무색정이라고 하는 최고의 어떤 선정단계에 머물게 하고

나유타 억겁을 지낸 뒤에 아라한과에 머물게 하고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을 아라한과에 머물게 하고 벽지불도에 머물게 하였더라도

초발심의 공덕에 비하면 백분의 일 내지“ 아까처럼 나가서

“우파니사타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불자여! 이 비유를 그만두고라도, 가령 어떤 사람이 한 생각 동안에

갖가지 맛 좋은 음식과 향, 꽃, 의복, 당기, 깃발, 일산과 훌륭한 궁전,

 

보배, 휘장, 그물과 갖가지 장엄한 사자좌와 여러 가지 보배로써

동방의 무수한 부처님과 또 무수한 세계에 있는 중생들에게 공양하며 공경하고

존중하고 예배하고 찬탄하며 몸을 굽혀 우러르기를 계속하여 무수한 겁을 지내며

또 저 중생들에게 권하여 모든 이렇게 부처님께 공양하게하고

부처님이 열반한 뒤에는 각각 탑을 세우고 그 탑이 높고 크고 무수한 세계의

 

여러 보배로 이루어져 갖가지로 장엄하였으며 낱낱 탑 가운데

무수한 여래의 형상을 모시고 광명이 무수한 세계에 두루 비치며

이렇게 수없는 겁을 지내었고 남서북방과 간방과 상하방도

역시 이와 같이 하였더라도 이 사람의 공덕은 초발심의 공덕에 비하면

백분의 일 내지 우파니사타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아! 우리가 뭐 상상할 수 없는 그냥, 이런 이 경전의 비유가 이런 식입니다.

이렇게 아무리 뭐 놀라운 공덕을 짓고 해도

이 초발심 공덕에 미치지 못한다 하는 얘기에요.

이렇게 이제 수도 없이 많은 비유를 들고 나서 뭐라고 얘기 하냐 하면

발심을 하게 되면, 발심을 하였으므로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항상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그를 기억해주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게 되며

묘한 법을 주실 것이고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성품이 바로 평등해지며

깨달음을 돕는 가르침 즉 37 조도품을 다 닦은 것이 되고

모든 부처님의 힘과 두려움 없음,

여래 십력과 사무소외라고 하는 것을 성취하고

 

18불공법 뭐 이건 아까 십력사무소외와 삼념주대비라는 것도 다 갖추게 되고

모든 부처님의 설법지혜를 다 얻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발심함으로써 마땅히 부처가 될 것이다.

이 사람은 곧 모든 부처님과 평등하게 되고

곧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함께 칭찬하게 될 것이고

 

능히 법을 설하게 될 것이고

온 세계에 있는 중생들을 교화하게 될 것이고

일체 세계는 진동할 것이고 일체 세계를 비출 것이며

일체 세계의 나쁜 고통들이 멸할 것이고

일체 국토를 깨끗이 장엄할 것이며

 

능히 일체 세계에 성불함을 보일 것이며

능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하게 할 것이며

곧 능히 일체 법계의 성품에 들어갈 것이며

곧 능히 일체 부처님의 종성을 지닐 것이며

곧 능히 일체 부처님의 지혜광명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초발심보살은 삼세 그 모든 법에 대하여

아무리 법을 얻는다 할지라도 한 법도 얻은 바가 없느니라.

오직 온갖 보살은 지혜를 구할 뿐 모든 법계에

그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 부처님의 뭐 신통한 힘으로 시방 각각 일만 부처님의 세계에

 

티끌 수 같은 세계가 진동을 하고 하늘 꽃이 내려지고

화만과 옷과 보배와 장엄 풍류가 연주가 되고

광명을 놓으면서 하늘의 음성이 내려졌다.“

 

 

10. 이렇게 인제 표현을 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이제 경전을 빌어서 말씀을 드렸는데

이렇게 초발심시변정각, 초발심을 내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큰 공덕인지

우리가 발심, 마음을 내어서 내가 정말 부처가 되어야 되겠구나!

야! 내가 이거 찌지구레하게 불교 공부해서 좀 더 부자 되고 좀 더 잘 살고

 

이게 아니고 내가 진짜 한 번 부처가 돼봐야 되겠다.

내가 진짜 이렇게 이 망상분별에 속아서 사느니

인생을 청산하고 진짜배기 생생한 멋진 삶을 한 번 살아봐야 되겠다.

이렇게 발심을 딱 내는 순간 이 모든 공덕이 동시에 이 모든 공덕이

나에게 깃들게 되기 때문에 우주 법계가 환희응약 하고 나를 돕기 시작합니다.

 

이 우주 법계의 수없이 많은 화엄성중들, 신중님들이, 수호천사들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스승들이, 도반들이, 부처님, 보살님들께서

나의 깨달음을 도와주기 시작한다.

이게 우리가 마음을 내는 발심, 발심이 마음을 내는 거 아니겠어요?

마음을 내는 건, 힘입니다.

 

그러니까 나쁜 쪽으로 마음을 내면

이 엄청난 게 나쁜 쪽으로 현실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좋은 쪽으로 마음 내면 좋은 쪽으로 이것이 모든 공덕들이 깃들게 되고

이 마음이라는 게 얼마나 놀라운 겁니까.

근데 이 마음을 나쁜 쪽으로 쓰면 되겠습니까?

 

그 나쁜 쪽으로 쓰임과 동시에 우주법계의 모든 힘들이

그 나쁜 것이 이루어지도록 만들기 시작하는데

좋은 쪽으로 발심을 하면 이 엄청난 발심의 공덕이 나에게 깃들기 시작하는데.

그래서 아까 말했지만 이렇게 발심을 내게 되면 그 자리서 바로 정각을 이룬다.

왜냐면 이미 우리는 우리가 부처에서 떠나있다 라고 착각하고 있는 게 중생이고

 

착각을, 아 착각이었구나 라고 아는 게 부처니까.

우리는 단지 착각하고 있을 뿐이지 한 번도 부처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착각만 버리면.

 

의상스님이 이것을 이렇게 표현을 하셨어요.

 

행행본처지지발처 行行本處至至發處 라.

간다, 간다하지만 언제나 본래 그 자리고,

닿았다, 닿았다하지만 언제나 떠난 그 자리에 있다.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밤에 잠이 든 사람이 여행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는 본래 제자리에 있었음과 똑같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자고 있단 말이에요. 근데 꿈, 여행이라는 꿈을 꿨어요.

그 여행하는 꿈을 꿨지만 그 진짜 여행 간 겁니까?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거지.

꿈 깨고 보면 그 자리가 아니겠어요? 언제나. 인도를 가든, 뭐 저 안드로메다를 가든.

아무리 먼 곳을 떠나서 여행을 했어도 그건 꿈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중생 세계 속에서 빠져서 울고, 울고, 웃고 많은 일들을 만들어 냈어도

사실은 한 일도 일어난 일이 없이 그냥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냥 꿈일 뿐이지.

 

불성천진자연 佛性天眞自然 이요,

역무인연수조 亦無因緣修造 다.

불성은 천진하여 자연그대로 꾸밀 것이 없으니

수행을 통해 닦아서 인연을 만들 필요가 없다.

 

불성이라는 것은 자연 그대로 이미 이 자리에 꾸밀 것 없이

조작하지 않아도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니까 수행을 통해서 닦아 인연을 만들 필요가 없다.

수행을 통해 깨닫는다? 흐흐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발심을 하느냐?

 

이게 인제 대승불교의 사상이에요. 선불교의 사상이고.

한 마음으로 간절히 발심 낸 사람은 이게 뭔가 막 간절히 공부해야 된다라는

발심이 막 있고, 있고, 있게 되면은, 그 사람은 그야말로 한 마디 말에도

그 자리에서 탁 열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고 선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해가 안 되죠. 발심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발심을 해서 꽉 차 있는 사람에게는

한 마디 말을 던져 주면은 그 자리에서 공부가 된단 말이죠.

 

11. 생사열반상공화 生死涅槃常共和 죠.

지금 말씀드린 게 그거죠. 생사, 생사란 게 중생의 삶을 얘기에요.

중생이 생로병사 하잖습니까? 그걸 줄여서 생사 이럽니다.

중생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라고 환상 속에 빠져있습니다.

나는 것도 아니고 늙는 것도 아니고 병드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지금 이 자리에 일이 있을 뿐이지. 그냥 지금 이 자리에 일이 있을 뿐이지.

지금 내가 이렇게 이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여기 늙는 게 있고 병드는 게 있고 죽는 게 있습니까?

여기에 나이 든 게 있고, 나이 든 게 있습니까?

아무리 나이 드신 어르신도 젊은 여성분이나 젊은 남성, 남자들을 보면, 잘생기고,

 

설렌단 말입니다. 기분 좋고. 20대 때나, 30대 때나, 50대 때나 똑같단 말이죠.

내 마음 속에서 나는 늙었다! 이런 생각이 있으니까 늙어지는 거지.

그래서 그런 얘기가 있죠. 우리가 늙는 유일한 이유는 늙는 사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옆에 사람들이, 내 친구들이 다 늙는 걸 보니까

아 나도 저렇게 늙었겠구나 하고 지레 짐작하는 겁니다.

 

또 거울을 보니까 아 나도 이렇게 늙고 있구나. 다 마음이 하는 거예요. 마음이 하는 거.

그래서 생사라는 것, 나도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생사의 고통이

사실은 그 생사 자체가 열반이다.

그래서 생사 그 자체가 열반과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가 있어요.

 

이게 바로 화엄경에서 말한 사사무애법계를 말합니다.

이 자리를 지금 우리가 드러난 현실세계가 그대로 열반의 세계다. 그대로 부처의 세계다.

망상이 그대로 부처라는 것이죠.

 

지공화상은 불이송(不二頌)에서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우인탐착열반 愚人貪着涅槃 지자생사실제 智者生死實際다.

어리석은 이는 열반에 탐내고 집착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생사가 곧 진여실상위주란다.

미오본무차별 迷悟本無差別 열반생사일여 涅槃生死一如

어리석음과 깨달음에 본래 차별이 없고 생사와 열반이 하나로 같다. 

 

우리가 인제 생각했을 때 불교는 이 세상을 등지고

새로운 저 멀리 있는 열반을 찾는 종교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등지고 또 다른 열반을 구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열반이란 뭐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뭔가 감촉할 수 있는 뭔가의 열반이 있다? 그런 거 없단 말이죠.

불이무일물이라고 했단 말이에요. 열반이라는 게 따로 있어서 얻는 게 아닙니다.

 

 그냥 지금 이 자리에 이대로가 열반이지.

지금 이 자리의 이대로를 내가 망상으로 보니까 중생이고

있는 그대로 봤을 때 열반인 겁니다.

그 열반이란 어디 가서 따로 찾을 게 있는 것이 아니다.

따로 찾을 게 있으면은 따로 구할 게 있으면 구하려고 애써야죠.

 

없는 걸 있도록 만들려고 하니까.

나에게 멀리 떨어져 있는 걸 내 껄로 만들려고 쫒아가야 되지 않습니까?

근데 언제나 이 자리에서 내가 지금도 쓰고 있는 거니까.

지금 이 열반의 자리가 없으면, 불성이 없으면,

본래자리가 없으면 여러분들은 제 말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해를 할 수도 없고. 이 소리도 들을 수가 없고. 손 하나 까딱 할 수가 없어요.

부처가 이 자리에서 같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니까 손을 폈다, 굽혔다하는 이게 바로 부처가 하는 일인데.

부처가 뭐냐? 이 손가락 하나만 들었단 말이에요. 구제스님은.

뭐 그걸 통해서 우린 부처를 확인 할 수 있단 말이죠.

 

다만 분별망상으로 자꾸 생각을~

(손가락을 쳐다보며) 이게 부처란 말이야?

이게 그러면 이게 뭐, 뭐, 뭐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이제 막 분별하기 시작하면은 그거는, 그것과는 거리가 먼 일입니다.

왜냐하면 육식이라고, ‘식’이라는 게 알음알이인데,

 

‘식’,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하면서 인생을 살아왔던

그 알음알이, 분별심, 마음이라고 하는 ‘식’, 분별심,

그거 가지고 부처 확인할 수 없습니다.

12처 18계가 다 공하다 그러잖아요. 그걸 가지고 부처를 확인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공부가 어려운 이유가 뭐냐면요,

 

우리는 습관 때문에 불교공부를 지식으로 할려고 합니다.

알음알이 지식으로 할려고 해요.

그니까 불법을 법을 설하면 여러분들은 자동반사적으로

머리로 이제 헤아려서, 이해해서 아! 이해됐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불교공부가 안 되는 거예요.

 

물론 이제 머리로, 알음알이로 헤아리면서 하는 공부는, 이제 쉽게 말해서 방편의

이~ 한 초등학교 중학교 쯤 되는 공부를 하고 있는 거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그겁니다.

우린 지금까지 머리로만 자꾸 공부를 할려고 하잖아요.

이 공부가 이제 어느 정도 해도 안되는구나 하고 답이 나옵니다, 인제.

그러다가 이제 불교경전이나 조사어록을 보게되면은

 

갑자기 내가 지금까지 뭔 짓을 한 거지?

하는 변화의 어떤 각성이 일어납니다.

아! 내가 지금까지 이걸 머리로 알음알이로 분별하고 있으면서

안다고 내가 착각을 했구나!

아! 이거 그 세계가 아닌데. 그 세계가 아닙니다.

 

이 다음에 나오는데요, 그래서 아까 ‘생사열반이 상공한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생사는 뭐 그 자리서 열반인데 분별하는 사람에겐 열반이 아니다.

 

 

12. 어~ 인도의 바라문 가족 세 사람이 길을 걸었다해요. 먼 길을.

남편과 아내와 아들이 길을 걷고 있었는데, 가다가 인제 잠시 쉬었다 그럽니다.

쉬고 있는데, 잠시 젊은 나그네가 와가지고 같이 쉬고 있는 거예요.

같이 한참을 쉬다가 이 나그네가 먼저 길을 떠났죠.

근데 이 부인이, 부인이 그 남자를 눈이 맞은 거죠.

 

그 남자를 따라서 그렇게 가는 겁니다. 근데 아버지는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아들아 우리도 이제 갈 길을 가자,”

하고 그냥 자기 길을 가는 거예요. 마누라 냅두고.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 저 엄마가 딴 녀석 쫒아 가는데 왜 그냥 가십니까?”

 

그랬더니 아버지가 아들한테,

“저 여인은 처음에 나에게 올 때도 그냥 자기 의지에 따라서,

자기 의지에 따라서 그냥 어떤 남자에게 왔었을 뿐이고,

또 지금도 자기 의지에 따라서 또 딴 남자에게 갈 뿐이다.

나에게 오는 것만이 진리고 저 사람에게 가는 거는 진리가 아니거나

 

나에게 오는 거는 선이고 저 사람에게 가는 건 선이 아니거나

그 어떤 분별,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라는 거예요.

우리는 나에게 왔던 사람이 딴 사람에게 가면 이혼했다, 저 사람이 나를 배신했다,

저 사람은 천하에 있을 수 없는 짓을 해서 나쁜 놈이다.

증오와 원망을 마음속에 품으면서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이제 뭐 이혼남, 이혼녀로 보겠지.

나는 인생의 패배자야. 이런 온갖 시비, 분별과 망상 속에 자기를 괴롭히면서

남들을 원망하면서 그 놈을 원망하면서 살잖아요.

이게 자기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착각입니다.

이 세상에 이혼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이혼 한 사람은 비정상이고 이혼 안한 사람만 정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어디서 만든 법이예요? 그런 건 없습니다.

심지어 한 남자가 두 명, 세 명, 네 명을 데리고 살아도 이 정상일 수도 있어요.

어느 나라에서는.

또 뭐 티벳같은 나라에서는 한 여자가 남자를 세 네 명 데리고 살아도

 

근데 티벳에서는 그 남자가 다 형제인데도,

형제를 다 내가 남편으로 데리고 살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리라는 게 정해져 있지 않단 말입니다. 한 여자만 데리고 살아야 된다.

아니면 이 여자가 나에게서 떠나가게 되면 그건 실패자다, 패배자다?

이건 우리 관념이 만들어 낸 겁니다.

 

이 세상이 함께 공동 작업으로 만들어낸 관념의 틀일뿐이죠.

그, 그런 관념에 갇혀서 사니까 우리는 생사의 사고방식이,

이 분별망상의 사고방식에 갇혀서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갑자기 비참해지기도 하고. 남들과 비교해서.

아니면 우월감을 느끼기도 하고. 우월감도 환상이고 비참하다는 것도 환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냥 한 존재가 있을 뿐이지 잘 살고 있거나 못 살고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냥 아름다운 삶을, 독자적인 자신의 삶을.

그냥 하~나 그 누구도 분별할 수 없는 그냥 하나의 삶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지.

근원에서 봤을 때는 죄도 없고 선도 없습니다.

선도 없고 악도 없습니다.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이겠어요.

 

내가 그렇게 망상분별을 피우니까 그 때 선이 되고 악이 되죠.

그러니까 거기서 생사 앞의 사고방식, 중생의 사고방식이 나오기 시작한 거지

본래 부처의 자리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 근데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내 삶이

내가 옛날에 한 50평대 아파트에 살았는데 지금 갑자기 18평 아파트에 살고 있다.

비참한 게 아닙니다. 전혀 비참한 게 아니죠.

 

그냥 좀 널직한 데 살다가 그냥 좀 좁은데 사는 것 밖에 없죠.

좁은 데 살면 좁은 데 사는 대로 좋죠. 멀리 왔다갔다 안 해도 되니까.

화장실 갈 때, 밥할 때, 청소할 때, 이 뭐 짧게 왔다 갔다 하면 되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뭐 관리비 많이 안내서 좋고, 신경 덜 써서 좋고.

이 생각의 차이 아니겠어요? 생각의 차이.

 

뭐, 저~ 제가 일부러 한 번씩 보는데, 정글의 법칙 보면요, 참, 참 공부할 게 많습니다.

정글의 법칙보면은 그 화려한 삶을 살던 연예인들이 그냥 거기서 풀 하나

이렇게 풀떼기 이렇게 올려놓고, 나무짝 위 풀떼기 하나 올려놓고

그 밑에서 비 맞으면서 자도 행복하다고 하잖아요.

집을 지었으니까 좋다고 생각하고 잔단 말이에요. 그냥 먹을 거 하나만 있어도 좋아하고.

하지만 그 가능성이, 거기서 하루 종일, 종일 굶다가

 

뭐 하나 잡아서 하나 먹을 때 얼마나 기뻐합니까?

우리는 그냥 밥 한 공기만 있어도 기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잰데

이렇게 많이 먹으면서도 비참하다고 생각하는 건 내 분별심이고

중생의 마인드인 거지 본래 부처세계에서는 그런 거 없단 말이죠.

 

 

13. 그래서 이사명연무분별, 이게 이제 화엄경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데요,

이, 저, 화엄경 사상에서 사사무애법계, 혹은 뭐 이법계, 사법계해서

이 사종법계 이렇게 해서 어~설명하는 건데,

그 ‘이’와 ‘사’가 명연되는, 그윽해서 분별할 수 없다.

즉 다시 말해서 이법계는 이치, 진리, 어떤 이치의 세계입니다.

 

근원의 세계다면, 사법계는 현상세계의, 현상의 세계, 현상의 세계,

이 눈에 보이는 이 물질세계, 현상세계, 다양한 삶 그 자체를 얘기하죠.

그런데 이치의 세계와 이해의 세계, 이법계와 사법계가 이사무애법계란 말이죠.

이와 사가 무애, 걸림이, 서로 걸림이 없다. 즉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전할 때,

진리를 설명한단 말이에요. 그럼 이법계를 설명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법계만 설명해서 관념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은 연기법이고 중도고

공이고 어쩌고저쩌고 관념적으로 막 배우는 건 이법계만 배우는 겁니다.

그럼 이법계만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삶이 바뀌지 않으면 그것이 무슨 불교 공부가 된 거겠어요?

이법계만 알고 있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처음엔 우리가 사법계 속에서만 살죠.

불법, 진리는 전혀 모르고 살죠. 그니까 약육강식 속에서 막 사는 겁니다.

그러다가 이법계를 눈을 딱 뜨기 시작해요. 아! 이치가 있구나. 이런 진리가 있구나.

아! 이 세상이 내가 그렇게 붙잡지 못해 안달하더니

이게 집착할 꺼리가 아니였구나. 공한거구나.

 

이런 걸 깨닫게 되는 이법계를 안단 말이에요.

그러나 알기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이러다가 나중에

이사무애, 이치와 현실세계가 이제 걸림이 없이

하나로 인제 원융자재하게 섞이는 겁니다.

서로서로 이제 그야말로 상즉상입이 되어서.

 

이제 현실세계를 살면서 그대로 부처님 가르침 이치가

그대로 현실세계와 하나가 되는 거예요.

누가 나를 돈을 내가 왕창 버린다 할지라도

아 이게 고정된 실체적인 어떤 집착할 게 아닌데 하고

인제 깨달으니까 괴로움이 덜한 겁니다.

 

그 이, 사가 무애하게 되면은 이치만 따로 있고 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이, 사가, 현실과 진리가 하나가 되어서 이 삶 자체를

보다 자유롭게 살수가 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인제 이 이사무애법계 차원에서 우리가 이와 사를 다 알고

이와 사를 다 융통자재하게 쓰니까

 

그야말로 이 이사무애법계를 잘 실천하는, 뭐랄까 대표를 예를들면,

법륜스님같은 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애요.

이치도 확연히 알고 현실적인 것도 확연히 아니까.

현실세계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온갖 질문을 하면

거기 이치를 사와 융통자재하게 답을 탁탁 내준단 말이죠.

 

이사무애하게 답을 내 준단 말이죠.

그래서 이사무애법계 차원에서는 어떻게 표현을 하냐면

망상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망상은 사입니다. 사.

근데 이치는 망상만 딱 걷어내면 본래자리로 돌아간다 라는 게 이치에요.

그 이거 망상을 망상 분별하던 것을 탁 내려놓으면 바로 부처가 됩니다.

 

이게 이와 사를 자재하게 딱 설명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고 이것이 화엄의 세계가 아닙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사사무애법계다. 사사무애법계.

사와 사. 현실세계와 현실세계 그 자체가 무애하다.

즉 현실세계 낱낱의 현실세계가 사실은

 

이치가 세계가 따로 있고 현실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낱낱의 현실세계 그 자체가 이치 그 자체다.

낱낱의 현실세계가 그대로 부처의 세계다.

현실세계가, 현실세계가 따로 있고 이치 세계가 따로 있어서

이것을 두 개를 이사무애로 막 융통자재할 필요가 없이

 

현실세계 그 자체가 법이다.

이 사사무애법계입니다. 즉 이런 식이에요.

이사무애법계에서는 망상만 걷어내면 부처가 돼. 이겁니다.

사사무애법계는 망상 그 자체가 실상이야.

 

번뇌 그 자체가 부처다.

번뇌 그 자체가 보리다.

망상을 걷어 내려고 하지마라.

망상과 싸워 이기려고 하지마라.

 

망상과 싸워 이겨서 승리했을 때 그 때 부처가 드러나는 게 아니다.

이미 우리는 언제나 부처를 드러내고 쓰고 살고 있다.

이게 바로 인제 쉽게 말하면 선불교에서 선사스님들이 쓰는

어떤 방법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냥 사사무애법계 두두만물 사사, 현실세계, 현실세계가 그야말로 그대로 다 법이니까.

 

이 사사무애법계는 이제는 이사무애법계까지만 해도 생각으로 이치를 이해하고

이치와 현실이 나눠져 있으니까 이치를 제대로 이해해서

현실과 잘 조립해서 현실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에요.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게 주로 이사무애법계를 공부했었단 말이죠. 그 동안은.

근데 요즘에 제가 자꾸 이제 사사무애법계 쪽을 자꾸 얘길 하고 있는 중인 겁니다.

 

근데 걔 중에 자꾸 못 따라 오는 분들이 계시니까

또 다시 이사무애법계 쪽을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14. 사사무애법계에서는 여러분, 인제 이 사실을 깨달으셔야 됩니다.

사사무애법계에서는요, 여러분들이 이제 앞으로 가야 할, 앞으로

지금까지 이사무애법계를 공부해왔다면

앞으로 여러분들이 공부해가야 할 방향이 이 사사무애법계의 방향이에요.

이건 뭐냐 하면, 생각을 굴려가지고 갈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이제 사사무애법계는.

부처가 뭐냐? 컵뚜껑이다.

이 컵뚜껑 자체가 사라고 생각해서 이거와 별도의 이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사무애법계에서는.

선사스님들은 도가 무엇입니까? 이 컵이 부처다.

 

도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마이크다.

도가 무엇입니까? 부처가 무엇입니까? 마른 똥막대기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뜰 앞에 잣나무다. 마삼근이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내가 그늘 아래 있으니 바람이 시원하구나.

이렇게 왜 이렇게 얘기하겠습니까?

 

사사무애법계에서는요, 생각이 갈 길을 잃게 만들어야 됩니다.

망상을 딱 끊어버리게 만들어야 돼요.

생각과 망상 분별로써 이해하게 만들면 이건 사사무애법계가 아닙니다.

이사무애법계 차원밖에 안되는 거예요.

사사무애법계를 들어가게 할려면

 

여러분들이 시비분별과 생각 망상을 딱 끊어주게 만들어야 돼요.

도가 무엇입니까? 컵뚜껑이다.

허! 여기서, 여기서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구제가 불가능하죠.

어떻게 생각을 해서 이게 도라는데 뭔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하지 말란 소리에요.

 

이렇게 얘기했는데 사람들은 뭐라고 질문 하냐 하면은.

헛! 이해가 되게 쉽게 좀 설명 해주세요. 이렇게 얘기한단 말이에요.

이해가 되게 쉽게 설명을 하면 그건 이사무애법계의 차원이니까.

그건 이해되기 쉽게 설명하면 안돼요.

그 이해를 하겠다고 하면 벌써 어긋나는 거니까.

 

도가 무엇입니까? (죽비를 치며) 이겁니다.

어떻게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데 뭐가 생깁니까? 도가 뭡니까? (죽비를 치며) 이거를, 이걸 깨달아야 됩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근데 알아졌어요, 몰라졌어요?

(죽비를 치며) 이거를 딱 확인하게 되면 깨닫게 되면

 

내가 깨달았나, 안깨달았나? 이 생각하고 있으면 이건 깨달은 게 아닙니다.

오! 알 것도 같고. 이건 아는 게 아니에요.

알 것도 하는 순간 아는 게 아니에요. 아닙니다. 알고 모르고가 나뉘어져 있는데.

그냥 (죽비를 치며) 이걸 깨닫는 것은 그냥 내가 알았나, 몰랐나를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저절로 아! 이거였단 말이야! 이거였단 말이야!

 

어쩌면 허무할 수도 있죠. 고작 이거였어?

언제나 내가, 언제나 내 옆에 있던 것이고 언제나 내가 쓰고 있던 당연한 거니까.

근데 확실해진다. 확실해진단 말이죠. 아 언제나 이거밖에 없었구나.

내가 뭐 잘 살려고 애쓰고, 뭐 온갖 세상을 살면서 온갖 세상을 만들어 왔지만

허! 그게 아무런 분별할 게 없었구나! 그냥 이거밖에 없구나!

 

그냥 불성 이거 하나밖에 없었구나. 부처, 이거 하나밖에 없었구나.

뭐 불교, 불성이라고 해도 이건 틀려요. 뭐라고 말로 하면 어긋납니다.

그래서 옛날 선사스님들은 어떤 방편을 즐겨썼냐면,

이해하지 못하게 할려고, 헤아리지 못하게 할려고

이거다, 이렇게 했습니다. 이거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 이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도가 무엇입니까? (죽비를 치며) 이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모른단 말이에요. 모든단 말이에요. 모르잖습니까? 그죠?

근데 이걸 답을 내세요. (죽비를 치며) 이겁니다.

이거에 대한 답을 내세요. 답을 낼 수 있습니다.

답을 낼 수 있을 때 모르니까 모를 뿐이란 말이에요. 깝깝하단 말이에요.

 

저게 뭐지? 저게 뭐지? 아 이게 뭐지? 눈깜빡하는 게 이게 법이라고 했는데

숨 들이쉬고 내쉬는 게 이게 도라고 했는데,

난 맨 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는데

이게 뭐지, 이게 뭘까?

이게 이 뭣꼬 아닙니까? 이 뭣꼬. 이것이 무엇인가?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게 이게 누구인가?

모른단 말이에요.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는데 알고자 하는 마음은 있어요. 근데 모른단 말이에요.

그럼 알고자 하는 마음이 딱 얻는데 그게 화두예요. 화두.

그게 의정이고 의단입니다.

 

이게 처음엔 머리로만 알고 싶은데 나중에는 알고 싶은 마음은 크고 큰데

도저히 알지 못하니까 막 깝깝해가지고 가슴이 막 저린단 말이죠.

이게 이제 의정이라고 그럽니다. 의정.

그걸 이제 의정이랑 다 사무치게 몰라가지고 알고 싶은 마음이 사무치는데

오직 모를 뿐이에요.

 

그니까 생각으로는 답을 낼 수 없으니까 생각은 할 게 없어요.

그래 이거를 어떤 스님은 머리를 딱 떼놓은 것처럼 공부해라 이런단 말이에요.

생각을 굴리기 시작하면 진짜 공부가 아니다. 이게 이제 사사무애법계.

 

 

15. 이 서암도 화엄에 바탕이 되어있다라는 이유가

이 사사무애법계를 가르쳐주는 겁니다.

선에서 직지해준다 그러잖아요.

도가 무엇입니까? (죽비를 치며) 죽빕니다 하고 직지,

우리 직지심경 뭐 이런 거 있잖아요. 직지심체요절.

 

직지, 바로 직지, 바로 짚어주는 겁니다.

도를 바로 짚어줘서 심체, 마음의 요체를 바로 깨닫게 해주는 거예요.

이게 직지인심견성성불 하는 겁니다. 그 마음이라는 게 깨달음을 얘기하는 거 거든요.

직지인심, 바로 그 마음 자체를 직바로 찍어줘서 견성성불하게 만든다.

그게 간화선이고 조사선이고 이 불교핵심입니다.

 

이게 바로 사사무애법계를 설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사법계 속에서만 사는 중생들은 이 사사무애법계를 설하는

선사스님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해가 되게 얘기해줘야 되는데 이해를 못하게 만들어버리니까.

박사님들이 불교를 무시할 수밖에 없어요. 박사는 왜 박사가 된 거예요?

 

머리를 잘 써서 박사가 됐는데, 이거는 머리를 쓰는 것과 상관이 없는 거니까.

꽉 막혀버리는 거니까.

그래서 이렇게 사사무애법계를 그야말로 딱 드러낸 게 바로 이사명연무분별.

이와 사라고 우리가 지금까지 시비하고 분별하고 해왔던 것이

명연, 그윽하고 어두워서 그야말로 분별할 수 없는 자리다.

 

이 사사무애법계를 이제 의상스님은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해주신 겁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사사무애법계를 조금 더 보완 설명 해 드리겠지만,

그래서 이렇게 이제 한 겁니다.

보현십불대인경이라.

십불, 수없이 많은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대인의 경계다.

 

그게 바로 사사무애법계라는 것이 바로 우리 중생들에게 뿐만아니라

수 없이 많은 부처님과 큰 보살님의 경계가 바로 이 사사무애법계인 것이다.

법장이 오교장이라는 곳에서 법장스님이 오교장이라는 곳에서 뭐라고 썼냐면

법계의, 제가 말한 이 법계, 이, 이 사사무애법계를 설명하는 이걸 법계연기라고 하는데

이 법계연기를 과분불가설과 인불가설이란 것으로 나누고

 

그것이 바로 십불, 십불자경계와 보현자경계라고 했습니다.

즉 법계연기를 십불의 경계와 보현의 경계 두 가지로 나눴어요.

그니까 이 오교장 일곱 가지의 의상스님이 다 공부를 당연히 했겠죠. 십년을 유학했으니까.

그래서 여기서 말한 이 법계, 법계라는 이 사사무애법계라는 것을

십불과 보현의 경계로 나눴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십불과 보현이라는 그 대인의 경계를

법장스님의 오교장에서 설한 그 가르침이

바로 이 이사명연무분별이라고 하는 이 사사무애법계를

설하는 것이다 라고 인제 표현을 해놓은 겁니다.

 

예, 조금 어~ 이해가 좀 안되는 부분들은

다음 주에 사사무애법계를 조금 더 보충하면서 진도를 또 나가드리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한마디는 “미안하다”

 

 

"임종 앞둔 아버지가 유언처럼 니 에미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8년이 지난 뒤다
어머니가 생전에 듣고팠던 미안하단 한마디 하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나

 

말은 칼과 다르다

사용하지 않아 안전한 게 아니라 사용하지 않아서 위험하게 된다

좋은 말은 늘 그렇다"

 
외국인이 본 한국 사람에 대한 글에서 사과를 주고받는

한국인들의 독특한 방식에 관해 읽은 적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잘못을 했을 때도

어지간한 일에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쩌다가 어렵게 미안하다고 말을 하면

상대방이 아니라고, 무엇이 미안하냐고 손을 강하게 흔든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더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미안하다고 말을 하고 나면

상대방이 미안하기는 무엇이 미안하냐고 함으로써

미안하게 한 잘못조차 없는 것처럼,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는 이야기다.

 

쉽게 잘못을 저지르는 무례(無禮)와 그 못지않게 빠른 화해가

외국인에겐 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었나 보다.



"니 에미한테는 미안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바로 말문을 닫을 무렵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15세 동갑내기로 만나 결혼하셨고, 50년을 함께 사시다가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고, 18년을 더 사시다가 돌아가시는 시각에야

아버지는 자식들 앞에서 어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내비치셨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데
그렇게도 긴 시간이 걸려야 했던 것일까.

그것도 어머니가 그렇게 듣고 싶어했던 그 말을

자손들에게 간접으로 유언처럼 하신단 말인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듣고 싶었던
"미안하다"는 말은 바로

아버지의 마음을 받고 싶은 속내였을 것이다.

참고 살아줘서 고맙다는 이야기, 그래서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어머니는 애타게 듣고 싶었던 것이리라.

내 상식으로 생각하면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은

억만 번 해도 모자랄 것이다.

 

 

 

누가 봐도 미안할 일을 아버지는 전 생애에 걸쳐 하셨고,

대궐 같은 집이 빚에 넘어가자

어머니는 고향 땅에서 누추한 꼴을 보이기는 죽어도 싫다며

밤 두 시에 트럭에 짐을 싣고 서울 변두리로 이사를 왔던 것이다.

 

뽐내는 것을 좋아하셨던 어머니의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기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한밤중에 트럭을 타고
손톱도 들어가지 않는 새벽어둠을 뚫고

비포장도로를 거칠게 흔들었을 때도

그 12시간을 단 한 순간도 눈물을 멈추지 않았던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자주 그 순간을 떠올리면서

"그때도 미안하다고 말한 적이 없는

흉측한 물건"이라고 아버지를 저주하곤 했다.

 

그런 아버지가 숨을 놓으면서

"니 에미한테는 미안하다"고 하셨던 것이다.

아마도 죽기 전에는 꼭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인가 보다.

 

그래 그렇게 쉬운 말을 그렇게 어렵게 해야 했던 것일까.

어머니 외에도 아버지는 미안해할 사람들이 많았다.

 

 

아버지가 진 미안한 마음의 부채를

요즘 부쩍 내가 갚고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

 

아마도 내가 나이가 든 것인지, 내가 누구에게 미안할 때

미안하다는 말을 두 번 세 번 하게 된다.

 

한 번은 내가 하는 말이고, 한번은 아버지가 이 세상에 해야 하는 말이고,

한번은 어머니가 일생을 우시느라 못한

미안하다는 한마디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아버지 어머니가 못다 한 이 세상에 대한,

혹은 여러 사람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다 갚아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렇게 말하고 싶은 갈망이 있다.

어쩌면
나 자신 때문인지 모른다.

나도 아버지 어머니에게 실상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딸이었지만 미루고 미루기만 했다.

 

 

 

'부모님은 기다리지 않는다'라는 말은 나에게 그래서 천금 같은 말이다.

어쩌면 싸우지도 않고 고요한 경기도 광주 부모님의 묘역에 가면

나는 소리내어 미안하다고 말하곤 한다.

 

배웠다면 배운 여자인 나도, 세대가 다른 나도

생전에 하지 못하고 그 황망한 침묵 앞에 무릎을 꿇고

소리를 내어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
미안하다는 말이 도무지 무엇이기에 입안에 담고

우물쭈물하며 때를 기다리며 세월을 흘려보냈다는 이야기인가.

 

말하면 세상이 변하는, 그래 무슨 고매한 사상이거나

대단한 철학이거나 한 것인가.

우리는 너무 다정한 말에 인색했다.

반드시 필요한 한마디 일상용어에도 인색했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내 딸들에게는 미안하다고 적절한 순간에 말했는지.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때를 놓치지 않으면서

미안하다고 말했는지. 이것이 지금 나에겐

문학에 기울이는 만큼 특별한 관심이며 노력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미안하다고 해야 고맙다고 하고,

그래야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키를 높이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한국인의 특징은 늘 '속에는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는 있으니 염려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감정은 무거워지고 오해도 일어나서 사회의 편가르기는

그 뿌리가 성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가족도 사회도 국가도
이런 감정 은폐에서 비롯된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발전도, 어떤 국가 문제의 대응에도

화해가 가장 먼저 필요한 준비물이며 내적인 힘이리라.

그래서 우리에게 친절은 당연히 노력해야 할 현실적 과제다.

 

말은 칼과 다르다.

사용하지 않아서 안전한 것이 아니라

사용하지 않아서 위험하게 되는 것이다.

좋은 말은 늘 그랬다.

 

by/신달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