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신심명』의 글귀를 먼저 읽고 숙고해 보기로 하자.
“이 종취는 짧거나 긴 것이 아니라, 일념이 만년이요, 있거나 있지 않거나가 없어서 시방이 바로 눈앞이로다.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동거하여서 상대적인 경계 모두 끊어지고,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동거하여서 끝과 겉을 볼 수 없음이라.”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이 확연히 구분된다. 같은 마음인데, 중생심에게 호·오와 선·악과 시·비가 둘로 분명히 갈라져서 그 갈라진 절벽의 폭과 골이 깊어서 대립의 갈등이 메울 길이 없을 만큼 벌어진 상태이고, 불심에게는 그 차이가 다만 다름을 나타내는 기호(記號)에 불과하다. 흔히 불심으로 보면 모든 것이 서로 다 같다는 소박·단순한 생각을 견지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다 동일하다면, 불심은 차이를 지워버리는 결과를 빚는다. 그러나 사실 불심에게 모든 것은 서로 다 다르다는 것이다. 다르기에 서로 상관성을 갖는다.
그래서 여기 승찬대사가 언명한 것처럼,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같고,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다(極小同大, 極大同小)’라는 표현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같다’라는 말을 ‘동거하다’라는 말로 옮겼다. 왜냐하면 ‘같다’라는 말이 너무 차이를 다 지우는 ‘동일화’로 여겨질까봐, ‘동거하다’라는 어휘로 바꿨다. 동거하는 사이에는 서로 대립적인 투쟁의 관계가 애당초 성립하지 않고, 다만 다르기에 상관관계가 맺어지는 연관성이 발생한다. 그래서 동거는 차이의 상관성이 모순 없이 함께 공존하는 연관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극히 크다’라는 것은 ‘지극히 작다’라는 것과 서로 대립적 개념이 아니고, 다만 차이를 알려주는 기호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크다라는 표지는 작다라는 것과 대대법적인 상관성이 있기에 성립하지, 자기홀로 성립하는 하나의 개념적 단위가 아니다. 불심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개념이 아니고 차이를 표시하는 기호일 뿐이다.
그러므로 불법을 개념적 의미로 사고하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불법은 기호론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개념론은 서로 적대적인 개념 사이에 철벽 보다 더 두터운 성채를 쌓고 있으나, 기호론은 모든 것 사이에 깃털보다 더 가벼운 차이의 표시만 있고 그 차이의 표시는 이미 다른 것의 현전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 이것이 연기법이고, 상호의존법이다. 무거운 것은 이미 가벼운 것에 의하여 동거하고, 긴 것은 짧은 것에 의하여 역시 동거하는 공존의 모습을 취한다.
왜냐하면 긴 것 은 짧은 것이 없으면, 긴 것으로 성립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불법은 길고 짧음을 각각 절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관적 차이로 엮어진 것으로 여기기에, 일념이 만년과 서로 동거하여 상관적 차이로 묶여진다.
불법은 절대로 일념과 만년의 차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같다고 우기는 바보스런 주장이 아니다. 있음과 없음을 같은 동일한 것이라고 읊는 어리석음도 아니다. 같다는 것(the same)은 동일한 것(the identical)과 다르다. 동일한 것은 자기 동일성을 말하지만, 같다는 것은 다른 것과 차이가 나는 다른 것을 말하는 기호일 뿐이다. 그래서 같은 것은 다른 것의 다른 것에 지나지 않지, 다른 것과 전혀 무관한 자기 동일성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승찬대사가 말하는 불법은 존재론적 사유를 의미하지 어떤 실체론적인 존재자적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법이 공(空)이나 무(無)를 말하므로 존재론적 사고방식과 전혀 그 궤도를 달리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이제 그런 착각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