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과 다름의 차이

2015. 4. 11. 19:5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신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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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과 다름의 차이

 
 
다르다는 것은 상호 관계를 맺고 있기에 발생
불교에서 차이는 다름을 나타내는 기호일 뿐
 

 

 

 

우선 『신심명』의 글귀를 먼저 읽고 숙고해 보기로 하자.
“이 종취는 짧거나 긴 것이 아니라, 일념이 만년이요, 있거나 있지 않거나가 없어서 시방이 바로 눈앞이로다.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동거하여서 상대적인 경계 모두 끊어지고,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동거하여서 끝과 겉을 볼 수 없음이라.”

 

 

중생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이 확연히 구분된다. 같은 마음인데, 중생심에게 호·오와 선·악과 시·비가 둘로 분명히 갈라져서 그 갈라진 절벽의 폭과 골이 깊어서 대립의 갈등이 메울 길이 없을 만큼 벌어진 상태이고, 불심에게는 그 차이가 다만 다름을 나타내는 기호(記號)에 불과하다. 흔히 불심으로 보면 모든 것이 서로 다 같다는 소박·단순한 생각을 견지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다 동일하다면, 불심은 차이를 지워버리는 결과를 빚는다. 그러나 사실 불심에게 모든 것은 서로 다 다르다는 것이다. 다르기에 서로 상관성을 갖는다.

 

 

그래서 여기 승찬대사가 언명한 것처럼,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같고,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다(極小同大, 極大同小)’라는 표현이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같다’라는 말을 ‘동거하다’라는 말로 옮겼다. 왜냐하면 ‘같다’라는 말이 너무 차이를 다 지우는 ‘동일화’로 여겨질까봐, ‘동거하다’라는 어휘로 바꿨다. 동거하는 사이에는 서로 대립적인 투쟁의 관계가 애당초 성립하지 않고, 다만 다르기에 상관관계가 맺어지는 연관성이 발생한다. 그래서 동거는 차이의 상관성이 모순 없이 함께 공존하는 연관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극히 크다’라는 것은 ‘지극히 작다’라는 것과 서로 대립적 개념이 아니고, 다만 차이를 알려주는 기호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크다라는 표지는 작다라는 것과 대대법적인 상관성이 있기에 성립하지, 자기홀로 성립하는 하나의 개념적 단위가 아니다. 불심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개념이 아니고 차이를 표시하는 기호일 뿐이다.

 

 

그러므로 불법을 개념적 의미로 사고하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불법은 기호론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개념론은 서로 적대적인 개념 사이에 철벽 보다 더 두터운 성채를 쌓고 있으나, 기호론은 모든 것 사이에 깃털보다 더 가벼운 차이의 표시만 있고 그 차이의 표시는 이미 다른 것의 현전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 이것이 연기법이고, 상호의존법이다. 무거운 것은 이미 가벼운 것에 의하여 동거하고, 긴 것은 짧은 것에 의하여 역시 동거하는 공존의 모습을 취한다.

 

 

왜냐하면 긴 것 은 짧은 것이 없으면, 긴 것으로 성립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불법은 길고 짧음을 각각 절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관적 차이로 엮어진 것으로 여기기에, 일념이 만년과 서로 동거하여 상관적 차이로 묶여진다.

 

 

불법은 절대로 일념과 만년의 차이를 무시하고 무조건 같다고 우기는 바보스런 주장이 아니다. 있음과 없음을 같은 동일한 것이라고 읊는 어리석음도 아니다. 같다는 것(the same)은 동일한 것(the identical)과 다르다. 동일한 것은 자기 동일성을 말하지만, 같다는 것은 다른 것과 차이가 나는 다른 것을 말하는 기호일 뿐이다. 그래서 같은 것은 다른 것의 다른 것에 지나지 않지, 다른 것과 전혀 무관한 자기 동일성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승찬대사가 말하는 불법은 존재론적 사유를 의미하지 어떤 실체론적인 존재자적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법이 공(空)이나 무(無)를 말하므로 존재론적 사고방식과 전혀 그 궤도를 달리 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이제 그런 착각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김형효 서강대 석좌교수

 

普賢 10.06.18. 09:55
하하하 오늘 김형효교수님이 제가 평소에 말씀드리는 차이, 차별의 이야기를 딱 부러지게 말씀해 주시네요! 이 말씀을 보시면 저 보고 뭐가 다르냐고 맨날 반발하시는 분이 이제는 아니 계시겠지요?...^0^
 
우리 카페에 오시는 분들은 일단 기존의 불교 상식을 잠시 유보하시라! 그리고 이곳에서 설해지는 말씀들을 눈여겨 보셔라! 화엄불교, 보현행원 불교는 기존 불교와 많이 다르다! 기존의 시각으로 화엄, 보현행원을 보면 이해하시지 못한다! 그러니 기존 시각을 잠시 유보하시고 이곳의 소식을 일단 열공해 보시라~~~ 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당장 '뭐가 다르냐? '라고 반박하시는 분들이 이곳에 몇 분 계셨지요. 문제는, 그 분들이 별로 공부도 안해 보시고 반박만 하셨다는 겁니다. 심지어 카페 가입하신 지 하루밖에 안 된 분이 그러하시니...그러니 제가 답답할 수 밖에...^.^
 
다름을 모르면 같음을 알 수 없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름과 같음이 사실은 하나!임은 더우기 모른답니다! 김형효교수님의 말씀처럼, 다름과 같음이 서로 함께 있음도 전혀 알 수 없습지요! 그러니 차별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별 속에 차별이 없는 것을 알기 위해 다름, 차별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건데, 뭐가 다르냐?고 따지기 시작하면 밝은 세계는 결코 도래하지 않습지요! 내 공부 모자라는 건 모르고, 더 높은 소식을 폄하하기 바쁘시니...그러니 언제 저 화엄의 광활한 소식을 알게 되실꼬...^.^
 
김형효교수님은 그동안 강의나 책을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히 알고 계신 것으로 보여요.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가, 제가 보기엔 하이데거, 원효불교를 접하셔서인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도 문제는 있지만 굉장히 화엄적이거든요?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을 100% 정확하게 보신 분은 원효 말고는 제가 보기에 고금에 아니 계십니다!

열린 종교관을 가진 오 강남 교수님 같은 분도, 미국에 가서 처음 만난 불교가 바로 화엄!입니다. 아마 화엄으로 박산지 석산지 학위를 받으셨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도 그렇게 너그러운 종교관을 가지신 게, 우연은 아닐 겁니다...^.^

 

여담이지만, 우리 큰스님 계실 때 큰스님이 늘 자부심을 가지고 대중들에게 설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 불광 신도들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정
확하게, 빙빙 돌지 않고 바로 접하고 있다!'는 말씀입지요! 그래서 불광 신도들은 그런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지로 다른 사찰의 신도, 그리고 불교학자들도 불광신도들이 교리나 수행에서 참 밝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불광 불자님들 만나본 결과도 그렇고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 불교계 대중 신도님들은 대체로 여러가지로 참 어둡답니다. 밝은 불교를 못 만나고 계십지요. 요즘 유명한 사찰의 경우도 거의 그러합디다...^.^

 

그런데 불광 신도 분들이 그런 불교관을 가지게 된 이유가, 바로 우리 큰스님이 화엄-반야 불교를 설하시는 분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제 개인 생각입니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이라는 반야활구가 바로 그것이지요! 이 말씀이 바로 화엄과 반야를 함께 아우리는 절대절명의 법문입니다. 이 깊은 소식을, 이렇게 짧은 한 마디 말로 딱! 설하신 분은 우리 큰스님뿐입니다! 우리 카페 불자님들은, 이 사실을 정말 잘 아시고, 또 자부심을 가져도 되실 겁니다. 우리 카페는, 그런 밝은 불교를 공부하는 곳입지요!!!

다만 큰스님 가신 후 태반의 불광신도들이 다른 곳으로 가 버리신 게 참..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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