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에르고 코기토/강병균 교수

2015. 6. 14. 19:3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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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 에르고 코기토

 

 

 

불교닷컴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엉터리 명제이다.

기계가 생각을 하면 기계가 존재하는가? 당신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기계는 절대로 생각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하거나, ‘설사 기계가 생각을 하더라도 기계가 존재한다고는 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주장은, 물질적인 기계는 존재하지만 물질을 넘어선 기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왜 내가, 단지 생각한다는 이유로, 존재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데카르트의 논리에 따르면 생각을 하지 않는, 사실은 생각을 할 수 없는 기절한 사람이나 코마에 빠진 사람은 그 순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존재한다고 선언한 것은 육체적인 몸이 아니므로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기절이나 코마에 빠져 의식이 없는 사람의 그 순간의 (비물질적인) 존재여부를 결정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생각한다는 사실을 자기 존재의 증거로 치는 사람들은 사실은 영혼이나 신비로운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는, 생각한다는 사실을 존재의 증거로 치지 않는다. 그들에게 존재의 증거는 대상의 영혼, 진아, 참나, 주인공의 존재여부이다.

‘기계 앞에 장막을 쳐서 가리고 기계와 대화를 할 때, 혹은 모니터를 통해서 기계와 문자로 대화를 할 때, 사람이 그 기계가 인간인지 기계인지 판단할 수 없으면 그 기계는 의식을 가진 것으로 봐야한다’는 튜링테스트가 있다. 지금도 일부 기계는 부분적으로 튜링테스트를 통과하며, 일부 미래학자들은 수십 년 내로 인간의 의식과 동일한 의식을 지닌 기계가 발명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인간이 생각을 한다고 해서 인간이 존재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당신이 생각하는 인간은 혹시 영혼이나 참나나 진아(眞我)는 아닌가? 뇌가 아니라 영혼, 참나, 진아, 주인공이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미리 가정한 것이 아닌가? 따라서 당신이 해석한 데카르트의 명제는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영혼이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본뜻은 분명 이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뇌의 송과선에 살고 있는 조그만 사람’인 호문쿨리스(homunculus)를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발언은 또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호문쿨리스가 존재한다.' 이렇게 보면 데카르트의 주장은 하나도 지적인 주장이 아니다.

데카르트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호문쿨루스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호문쿨루스는 존재한다'와 다를 바가 없다. 이 문장은 'A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A는 존재한다'의 구조를 갖는다. 그러면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존재해야 한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데카르트나 당신은 설사 생각을 하는 기계를 목격할지라도, 절대로 그 기계가 존재한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 기계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정보를 뱉어낼 뿐’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데카르트는 동물은 고통을 못 느낀다고 생각했다. 단지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동물은 생각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른 서양인들처럼 기독교영향으로 동물은 영혼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를 키워본 사람은 누구나 개가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그의 ‘코기토 에르고 숨’은 엉터리 주장이다. 그 총명한 데카르트가 이런 엉터리 주장을 한 것은, 아마 당시에 아직 뇌신경망(connectome)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뇌신경망은 물질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예는 인간의 사유가 물질적인 과학발전에 상당부분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과학, 종교, 철학의 역사는 환망공상(幻想·妄想·空想·想像)의 역사이다. 이 세 분야의 차이는 과학은 옛 환망공상을 가차 없이 냉혹하게 부수어가는 과정이고, 종교는 첫 환망공상에 죽기살기로 집착하며, 철학은 버티고 버티다 더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뒤늦게 옛 환망공상을 포기한다. 

동물에 대한 데카르트의 견해로 볼 때, 데카르트의 의견은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이렇다: ‘영혼이나 호문쿨리스가 없는 존재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생각을 할 수 있으므로 영혼이나 호문쿨리스가 있다.‘ 이런 말은 그냥 영혼론일 뿐이지, 그 외에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만약 영혼론이 아니라면 데카르트의 말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현상이 존재한다’란 토톨로지(tautology 동어반복 同語反覆)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거꾸로 말하는 것이 옳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생각한다.’ 숨 에르고 코기토! 다시 말하자면 이렇다. ‘(나에게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소프트웨어나 알고리듬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이 말은 ‘스마트폰에 계산 소프트웨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계산한다’와 동일한 구조이다. 혹은 ‘자판기에는 판매 소프트웨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판매한다’와도 같은 구조이다. (중요한 점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소프트웨어나 알고리듬이 자기이지 따로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이 소프트웨어가 진화한다는 점이다. 단세포동물인 아메바나 원시적인 생물인 지렁이는 의식이 없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거의 자판기 같은 자동기계(automaton)에 지나지 않는다(우리 몸의 백혈구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단세포생물로부터 어류, 파충류, 포유류, 영장류를 거쳐 지금의 몸과 마음으로 진화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진화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생물이 무아(無我)이기 때문이다. 무아이므로 몸과 마음의 모습과 기능이 바뀔 수 있다. 즉 무상(無常)이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신경계와 의식의 발달과 더불어 물질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이 발달하고 증가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진화의 역사는 고(苦)의 증가의 역사이다. 물질계와 정신계를 느끼고 인식하게 하는 신경계와 의식의 발달은 (새로운 종류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낳는다; 신경계가 발달하지 못한 곤충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인식이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그 괴리로 인한 고급 고통이 발생한다. 소위 ‘나(자아 自我)’에 관련된 존재론적인 고통이다. 가장 진화한 인간만이 갖는 가장 진화한 고통이다. 고통도 진화를 한다는 말이다. 이렇듯이 지구생물체 35억년 진화의 역사는 바로 삼법인(三法印)의 구현具顯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체유전자와 습성과 지식이 후손과 문화를 통해서,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면서, 35억년 동안 끝없이 이어진 것은 윤회이다.)

그 과정에서 생각하는 마음(소프트웨어)과 뇌신경망(하드웨어: connectome)이 생기고 발전한 것이다. 생각하는 능력은 정확히 진화의 순서와 일치한다(고통을 느끼는 능력인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의 가짓수와 강도强度’ 역시 진화의 순서와 일치한다): 단세포생물<어류<파충류<포유류<영장류<인류 순서이다. 그러므로 더욱더 ‘숨 코기토 에르고‘가 옳다. 즉, 처음부터 생각하는 존재(영혼, 아트만, 참나, 진아, 신)가 있어서 그 존재의 의지와 설계에 따라 인간의 몸과 마음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물질적인 과학발전의 뒷받침이 없는 형이상학이나 신학은 거짓말쟁이 절름발이 신세로 전락한다.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인류역사가 증명하듯이, 조만간에 진실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결정적인 증거이다. 데카르트는 위대한 철학자이자 과학자였지만 몇 가지 심각한 오류를 범하였다. 신이건 인간이건, 도도한 과학문명발달 앞에서 후대까지 변함없이 명성을 유지하며 조금도 체면을 구기지 않고 버텨낼 자는 거의 없다.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행(行) 그리고 업(業)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심하게 하는 말과 행동은
내자신은 물론 나의 인연(因緣)있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처,
내자신의 자성(自性)의 변화(變化)는 물론이고,
그 결과로 인연(因緣)이 변(變)하고,
그 인연이 바뀔 때마다
우주(宇宙)전체의 인연(因緣)이 바뀝니다.

연기(緣起)의 바다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시 매초, 찰나(刹那) 찰나
찰나생 찰나멸의 인연(因緣)따라 변화합니다.

한 사람의 삶은
우주전체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생(生)은
이 세계의 운명(運命)과 직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으며,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분명합니다.

나의 염(念)과 원(願)은
세상 전체의 연기(緣起)를 바꾸고,
내 인생을 바꾸며, 동시에 전 인류의 운명(運命)을
바꿀 수 있습니다.
전 인류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그러나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변화(變化)는 분명합니다.

그 변화는 새로운 인연(因緣)이 되어
나의 업(業)으로 그 결과를
내가 받고, 나에게 돌아옵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쌓는 업(業)은
나와 우주전체의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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