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불여래법계신(諸佛如來法界身) / 청화스님

2015. 7. 4. 12:0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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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불여래법계신(諸佛如來法界身)


우리는 부처님이 간직하고 있는
또는 원래 진리가 가지고 있는 그런 공덕을
절대로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란 것은
그냥 하나의 도리나 논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가운데는 그 모든 성품공덕이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한다하더라도
그 부처님은 그냥 단순한 부처님이라는
그런 명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가운데는 또 여러 가지의 그런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까 보리방편문을 외었습니다마는
보리방편문 가운데도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
또는 원만보신(圓滿報身)이라,
또는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이라,
그런 속성, 거기에 따르는 공덕이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이 우주와 더불어 있는
끝도 갓도 없는 무량무변한 그런 자리로
부처님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청정법신입니다.
또 청정법신은
단순히 끝도 갓도 없는 우주와 더불어 있는
하나의 생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는 자비나 또는 지혜나
모든 만능을 갖추고 있는 그런 자리가 원만보신입니다.

그런 자리를 근거로 해가지고서 이루어지는,
사람이 태어나고 또는 다른 동물이 태어나고
또는 여러 가지 우주의 천차만별의
모든 존재가 이루어지는 그런 자리는
천백억화신인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어렵다고 생각을 마르시고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어느 누구나가 다 알아두어야 될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내 생명의 본바탕이 부처라고 하면
아, 부처가 대체로 어떤 것인가,
그런 아주 난해한 도리는 모르거니와
우선 3가지 4가지 정도는 알아두셔야
불경을 보시더라도
그때그때 의심 없이 알 수가 있는 것이고
남한테 자기 신앙을 전수할 때도
알 수 있게 전수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꼭 그 청정법신은 우리 본래 생명,
우주의 본래생명이 바로 부처님인데
우주와 더불어서
끝도 없는 무량무변의 그런 자리가 청정법신이고,
다만 그와 같이 끝도 갓도 없이
우주에 광대무변한 그런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법신가운데 모든 성품공덕이 들어있는 지혜공덕자리가
원만보신이란 말입니다.

또 그 법신과 보신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이 현상계라든가
또 자기라는 존재라든가
그 모든 변화하는 이 일체만유의 자리,
이런 자리가 천백억화신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원래 셋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에 포함된,
하나의 그런 부처님한테 포함된,
하나의 하느님한테 포함된.
하나님 부처님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다만 언어상 그 지역상 달리 표현된 것이지
성인들이 말씀한 진리가 절대로 둘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오늘날은 지구촌시대 아닙니까.
따라서 다른 종교 다른 지혜 다른 논리 다른 철학도
우리가 다 이해를 해서
모든 진리가 종합적으로 포괄적으로
하나의 진리로 통일을 시켜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선 자기 마음도 불안스럽고
또는 여러 가지 문제에 있어서
그 무수한 난관에 봉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우선
이론적으로 막힘없이
훤히 트인 마음을 가져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가,
우주의 존재근원은 무엇인가,
이렇게 알아버리면 참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성자의 말씀들은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을 편안히 하기 위해서,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불교말로 말하면 하나의 상(相)이란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상이란 말은 가짜라는 뜻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보고 느끼고 분별하는 것이지
성자가 본다고 생각할 때는
상이란 것은 하나의 거품이나 같단 말입니다.
안개나 같고 또는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금강경』 가운데
‘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라,
만약 우리 중생이 우리가 보는 좋다 궂다,
또는 나다 너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그런 상들은 모두 허망한 것인데
그런 허상이 상이 아닌 것을
분명히 본다고 생각할 때는 즉견여래(卽見如來),
바로 부처님을 뵈올 수 있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간단명료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수학공식같이
그야말로 단순직절(單純直截)합니다.
우리 중생들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정확한 진리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번뇌에 가리어서 허상을 본단 말입니다.
따라서 그런 허상을 허상이라고 미처 모르지 않습니까.
그런 허상이 정말로 없다는 것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그냥 그 즉시에 진정한 진리를 본단 말입니다.
진정한 도리가 무엇인가,
바로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저 공중 어디에가 계신다,
부처님은 극락세계에 계신다,
나는 여기 있고 대상적으로 부처님은 저만치 계신다,
이런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의 방편인 것이지 불교가 아닙니다.
진리도 아닙니다.
천지우주가 간격도 없이 빈틈도 없이
진리로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금생에 나와서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 박약한 사람도 있겠지요.
또는 정신이상자도 있겠지요.
여러모로 해서 우리의 그 존재가
과거전생의 업 따라서 금생에 제한된 몸을 받는다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가지고 있는 그 자리는 다 똑같습니다.
계발을 좀 못하고 더하고 그 차이뿐입니다.
따라서 절대로 남을 무시할 아무런 자격도 없고
아무런 필요도 없단 말입니다.

자기 아들이나 자기 딸이
혹시 과거전생에 잘못 지어서 병신으로 태어났다고 합시다.
벙어리로 태어나고 또는 귀머거리로 태어나고
그랬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형식뿐인 것이지
겉만 그런 것이지 그네의 마음은
똑같이 우리마음, 예수마음, 공자마음
다 똑같은 마음입니다.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거니 우리가 누구를 무시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 인간의 행복은
진리와 더불어서 행복이 됩니다.
진리 없이 절대로 행복이 못되는 것입니다.
항시 진리와 행복은 정비례합니다.

진리에 밝으면
우리는 어느 때 언제나 행복스런 것이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제 아무리 지위가 높고
제 아무리 돈이 많이 있고
어떠한 그런 물질적인 혜택이 있다하더라도
그걸로 해서는 행복을 보장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진리는 어려운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인들 말씀은 간단명료합니다.
천지우주가 오직 부처님의 몸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것도 부처님 아닌 것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깨달아서 밝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예수 같은 눈으로 보고
또는 공자 같은 눈으로 보고
노자 같은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찬란스러운 광명의 생명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주는 바로 우주자체가 생명인 동시에
하나의 광명이란 말입니다.
이런 것은 비단 우리 불교인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자들은 다 증명을 합니다.
물질을 분석하고 분석하면 광량자(光量子)라, 
우주의 장(場 field)에너지(energy)를 구성한 것은 광량자,
그 광명이 우주를 구성한단 말입니다.
현대물리학도 이 우주란 것이 모두가 다
그 광량자라 하는 광명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현대물리학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처님제자가
그걸 모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주를 구성한 그런 양자,
현대의 정밀한 현미경을 놓고도
볼 수가 없는 그런 세밀한 것,
무엇이 무엇인가 모르는 것,
물질이란 것은
저 끝에 가서는 무엇이 무엇인가 모른단 말입니다.
빛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지
그것이 무엇인가를 현대물리학에서
다는 규명을 못하는 것입니다.
어째 못하는고 하면
그런 단계에서는 증명할래야
증명할 길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한 무엇이 무엇인가 모르는 바로 그것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성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여불성이라,
진여불성은 꼭 외워두십시오.
우주의 근본생명,
나의 근본생명인 동시에
모든 존재의 근본생명자리가 진여불성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라.
화엄경은 부처님가르침을 다 거기에 집합한 그런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화엄경의 방대한 가르침의 본뜻이 무엇인가,
이것이 일체유심조입니다.
모두가 다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납득이 안가시겠지요.
아, 산도 있고 내도 있고 내 몸뚱이도 있고 다 있는 것인데
어떻게 모두가 마음뿐일 것인가.
우리 중생들이 잘못 봐서 그럽니다.

우리 중생들은 겉만 보기 때문에
겉만 보면 이것저것 따로따로 구분이 있겠지요.
그러나 성품, 본바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진여불성 아님이 없기 때문에
다 똑같단 말입니다.
똑같은 자리를 알아야 우리가 불경을 바로 아는 것이고
부처님 뜻을 바로 새기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생각해야
우리 생활에 있어서 모든 것이 순탄하게 다 풀려갑니다.

너도 부처님, 나도 부처님,
아들도 부처님, 딸도 부처님,
어느 것이나 다 부처라고 생각하고,
또 자연도 부처님이고 말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부처님이라고 생각할 때에
자연을 훼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물방울 하나, 모두가 다 부처님 아님이 없다고 생각할 때에
우리 생활은 저절로 항시 감사한 마음에서
남과 더불어서 걸음걸음 행복스럽게 살다가
또 죽은 다음에는 극락세계에 미처 못가면 천상 가는 것이고
천상까지 미처 도달을 못하면
그때는 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단 말입니다.
 
진리를 알고 하는 생활이란 것이
내일 죽고 모레 죽는다 하더라도
서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갈 것인가,
컴컴해야 서럽고 그럴 것인데
죽자마자 또는 금생에 잘못 살았다 하더라도
임종 때라도 부처님생각하고 마음을 바로 하면
그 마음가지고 그때는 그냥 바로
극락세계에 왕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바쁜 우리 사바세계에서 우리가 잘 못 닦으니까
부처님의 자비심으로 해서 예수재(豫修齋)라,
미리서 닦아두지 않으면 그냥 어언 간에 죽음이 온단 말입니다.
죽음이란 것은 마치 바람 앞의 등불모양으로
언제 올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미리 닦아서
죽을 때 당황하지 않고서 당당하니 저승길에 가고
또는 그와 동시에 예수재를 모시면
어떤 누구나가 아무리 못 태어나도 사람으로는 태어납니다.
조금 잘 태어나면 그때는 천상에 태어나고 말입니다.
보다 더 좋은 일 많이 하고 남한테 베풀고 그러면
그때는 극락 가는 것이고 말입니다. 

오늘 예수재가 반가운 불자님들 많이 모이시고
또는 우리 스님 네도 많이 모이시고
그래서 아주 성황리에 잘 이루어져서
정말로 오늘 이 법회 공덕으로
금생에도 모든 일이 잘 풀리시고,
잘 풀리는 것은
우리 마음이 걸음걸음 부처님하고 가까이 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부처님하고 가까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이름, 부처님 이름은 부사의한 이름입니다.
우리가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 하고 불러도
아버지가 얼마나 참 그리워집니까.
엄마! 엄마! 불러도 엄마가 얼마나 더욱 더 그리워집니까.
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생의 근원적인 생명의 이름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이름자체에 가서 부사의한,
행복이나 지혜나 자비나
모두가 다 거기에 깃들어있는 그런 이름입니다.
한번 부르면 한번 부른 만치.

그러기에 부처님 이름은 아가타약(阿伽陀藥)이라.
아가타란 것은 무엇인고 하면 만병통치약이라,
부처님 이름은 만병통치약입니다.
병이나 무엇이나 우리 번뇌나
부처님 이름은 한번 부른 만치
우리 업장이 녹아지고 우리 마음이 맑아지고
또는 주변도 정화를 시킨단 말입니다.
비단 자기만이 아닌 것입니다.
천지우주는 사실은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살면 바로 산만치
우주가 그대로 정화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오늘 예수재(豫修齋)
더욱 더 부처님한테 우리 신앙을 깊이 하시고
또 끝날 때까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무수히 많이 하시고
돌아가실 때에도 아주 혼잡할 것입니다마는
그 부처님이름 그대로
차에서도 운전하시면서도 외시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부디부디 행복하시기를 간절히 빌어마지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 새 출발의 지혜 ♣


독일이 낳은 시인 괴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구멍이 없어진다'
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두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시작이 중요하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말이다,

인간을 가리켜 이성의 동물,
지혜로운 동물이라 한다,
지혜 중에 가장 중요한 지혜는
새 출발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시작이 중요하듯이 첫 발짝을
내딛는 마음 그 자체가 중요하다,
노자는 "천리 길도 발 밑
한 발짝에서 부터 시적한다고" 고 하였다,

"길을 잘못 들면 아무리 잘 뛰어도
소용이 없다" 라는 격언도 잇다,
하루의 계획은 아침에 있고,
한 해의 계획은 봄에 있고,

인생의 계획은 청소년
시절에 있다고들 말한다,
그만큼 시작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 말글 샘터 시작 중에서 -



♬ When I dream (영화 쉬리삽입곡) / Carol Kidd ♬

내가 꿈을 꿀 때 난 꿈에서 꾼 것보다
더 높은 맨션을 지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재능도 가질 수 있으니
절대 요구하지 마세요

난 파리로 날아갈 수도 있어요
그건 내가 맘만 먹으면 할 수 있어요

왜 난 아무것도 없이 외롭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요?
내가 꿈꿀 때, 난 당신을 꿈꿔요
아마 언젠가 당신은 현실로 내게 오겠죠

난 가수도 될 수가 있고광대가 되어 어떤 역할도 할 수도 있죠
날 달나라로 데려다 줄누군가를 불러낼 수도 있죠

화장을 할수 있고 그 사람의 혼을 빼놓을 수도 있죠
난 혼자 잠자리에 들고그의 이름도 도무지 몰라요

내가 꿈꿀 때, 난 당신을 꿈꿔요
아마 언젠가 당신은 현실로 내게 올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