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 인코그니타: 미지의 땅: 환망공상의 땅
불교닷컴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미치는 것도 우주와 자연, 인생을 체험할 수 있는 한 방법이다. - 왕옌린 왕옌린(王炎林)은 중국의 광인(狂人) 화가였지만 이 말을 할 때만큼은 제정신이었다.
I. 마음의 진화
우리는 모두 각자 서로 다른 길로 진화 중이다. 정신적인 진화의 길로.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다른 인간종(種)이다.
지금은 서로 같아 보일지 모르나 훗날 서로 다른 ‘마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불변하고 상주常住하는 실체로서의) 진아(眞我), 참나, 불성에 현혹되면 처음부터 가진 게 있다고 착각하게 되어 게으르게 된다. 그래서 진화하지 못하고 뒤처지게 된다.
(지금부터 수백만 년 후에 이들의 후손은 ‘무아無我인간’들로부터 ‘참나침팬지’라고 불릴 가능성이 있다. 이 우주에 신이 있다면 ‘변화’ 즉 ‘무상(無常)’이다. 불교 신화에서 ‘상(常 불변 不變)’이라는 아수라는 ‘무상(無常 변화)’이라는 천인(天人 神)에게 걸핏하면 반란을 일으키지만 항상 패배한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아수라의 유일한 승리이다.)
게다가, 설사 가졌다고 해도 사실은 그 ‘단어들’이나 가진 것이다. 메마른 마음 밭에 함부로 거세게 부는 무명(無明)풍에 떠밀려 쭉정이 ‘단어들’이 배회하는 꼴이다. 그런 단어들이 주는 한계로 인해서 새로운 길로 진화하지 못한다. 화석화된 언어가 인간의 삶을 가로막는 것이다.
10만 년 전에 생긴 언어로 인해서 인간은 새로운 삶의 터를 닦을 수 있었다. 물질세계인 대지와 사물과 허공은 유한하고 유한함에도 불구하고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지만, 언어는 추상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하고 이 추상적인 사고는 한계가 없고 장벽도 없으며 무한히 넓은 광활한 비물질적인 삶의 터전을 제공한다. 이 새 땅은 경천동지할 발견이었다. 종교 중에서 이 ‘미지의 땅(tera incognita)’을 본 것은 오직 불교뿐이었다. 불교 유식학(唯識學)에 의하면 일체는 사람 마음의 현현(顯現)이다. 외계 사물까지도.
언어의 여명기에는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양, 뿔, 토끼, 달리다 등이다. 이들을 조합하면 ‘뿔 달린 양’이라는 사실적인 복합단어가 등장한다. 단어의 조합이 우연히 뇌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이상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뿔 달린 토끼’. 그리고 북(drum), 구름, 사람이라는 사실적인 단어들로부터 ‘구름 위에서 북을 치는 사람’, 즉 도깨비가 탄생했다. 본시 인간이 창조한 단어에 대응되는 것이 실재로 존재할 필요가 없으나, 인간은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가 유명한 예이다. 데카르트는, 모든 개념은 그에 해당하는 것이 우주 어딘가에 물질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어느 부인이 반박하며 들고 나온 것이 ‘뿔 달린 토끼’였다. 도대체 그 동물이 어디에 존재하느냐고.
(그런데 발상을 전환하면, 그냥 상상 속에 존재한다고 하면 그만이다. 왜 꼭 물질적인 존재로 존재해야 하는가. SF영화나 소설에서처럼 비물질적인 비존재가 뇌에 동일한 만족을 줄 수 있다. 선택이 주어진다면 당신은 물질적인 고통의 세계에 살겠는가, 아니면 비물질적인 낙의 세계에 살겠는가? 도대체 사실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비사실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에 우위를 가질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도 절대적인 우위를!)
(필자가 데카르트를 거론한다고 해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란다. 필자는 과거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발상·착상·상상을 사랑한다. 환망공상을 사랑한다. 정신적 놀이의 즐거움은 환망공상의 수립으로부터 오며, 진보의 즐거움은 환망공상의 타파로부터 온다. 아니, 우리 마음은 과거의 환망공상을 거름삼고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이런 환망공상이 없다면, 대뇌신피질이 지나치게 발달한, 인간의 삶은 한없이 지루할 것이다. 환망공상에 크게 웃을 수 있다니, 그 아니 즐겁지 아니한가? 以幻妄空想可大笑 不亦閱乎? 환망공상을 쌓고 허무는 것, 바로 이것이 인간의 삶이자 즐거움이다. 환망공상은, 한 치의 틈도 없이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물질계의 질곡을 초월한 ‘자유의 땅’이다.)
추상명사의 발명은 ‘죽음’, ‘부정’, ‘존재’ 등으로 발달하여 ‘죽지 않는 존재’, 즉 신(神)을 만들어냈다. 또한 추상명사의 발달과 더불어 의식이 발달하여 ‘나(我)’라는 추상명사가 탄생하였으며, 이 ‘나(我)’가 또 다른 추상명사 ‘참(眞)’과 결합하여 ‘참나(眞我)’가 만들어졌다. 부처님은 참나(atman)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시며, 지나치게 언어와 의식을 희롱하는 인류에게 제동을 거셨다. 그리고 불멸의 신 역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끝없이 변한다고 말씀하셨다(諸行無常). 이와 같이, 부처님은 그 당시까지 인류가 크고 높게 쌓아온 지구라트(ziggurat) 환망공상을 허무셨다. 즉, 안과 밖의 중앙에 자리잡은, 의식과 세계의 근원으로서의 ‘참나’와 ‘신’을 허물어버리신 것이다. 그리하여 항상 그 자리에 있어온, 불법(佛法)의 정수(精髓)인, 연기법(緣起法)을 드러내셨다.
지금은 유전공학의 발달로,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뿔 달린 토끼’를 만들 수 있다. 뇌과학의 발달은 신(神)이 발생하는 부위(神點 God spot)를 발견하였다. 대뇌의 성소(聖所 God spot)에서 수억 개의 뉴론이, 3차원 입체적으로, 현란하게 발화하며 신(神) 만들어내는 장엄한 광경을 상상해보라! 그러므로 신(神)은 이처럼 장엄하고 신비로운, 진화생물학적이고 진화언어학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수만 년 전, 아직 언어가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을 때에 뇌의 동일한 부위(神點)를 자극받았을 때 인간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신’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 인간은 그 경험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일차적인 경험은 이차적인 언어와 개념에 의해서 오염되는 것일까, 아니면 이차 경험으로 창조되는 것일까.
인간은, 언어의 도움을 받아,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이미 일어난 것처럼 마음에 그릴 수 있으며, 이미 일어난 일을 자기 마음에 반복해서 재상영할 수 있다. 충족되지 못한 일도 상상으로 만족할 수 있으며, 이미 충족된 일도 되풀이해서 떠올림으로써 충족감을 만들어낼 수 있다. 또 미래의 행복(불행)으로 지금 행복(불행)해 한다. 다른 사람이 할 행동을 미리 예측하고 분노하거나 기뻐하기도 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마음속 가상의 세계에 구축하고 거기에 감정을 투사하는 것이다. 이 가상의 마음의 세계는 놀라운 세계이다. 이 세계에는 외적이고 물질적인 위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마치 오디세우스가 미지의 땅으로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전혀 알려지지 않은 비물질적인 땅으로 모험을 떠난다. 고대인들은 세계의 끝에 온갖 종류의 괴물들이 살고 있고(예를 들어 메소포타미아 길가메시 신화의 괴물 훔바바 Humbaba), 세상의 끝은 천길 만길 절벽이라 가까이 가면 잡아먹히거나 떨어져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미지의 세계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용감한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있기 마련이고, 그들은 과감히 목숨을 걸고 낯선 곳으로 길을 떠났으며 실제로 아문젠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극지방, 히말라야 고산지대, 아프리카 열대밀림, 작열하는 사막, 광란(狂亂)의 대양 등의 험한 오지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이제 인간에게 지구표면상의 미지의 땅은 남아있지 않으며, 인간이 아니 사는 곳이 없다. 그래서 대지(大地)는 비좁은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비물질적인 땅으로 진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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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끝에 있는 무시무시한 괴물들. 미지(未知)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의 상징이다. |
정신의 땅, 즉 비물질적인 땅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맹독성의 무시무시한 환상·망상의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종교가 대표적인 예이다. 조금만 탐험을 시도해도 이단이나 악마의 사도라고 비난과 탄압을 받았다. 멀리 나가면 악마에 먹히고, 악령에 씌우고, 지옥에 떨어진다고 겁을 주었다. 종교는 인류가 찾아낸 극히 일부분의 비물질적인 땅에 지나지 않는다. 낯선 땅은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사이비종교 등은 사이렌 같은 마력을 지닌 황량하고 기괴한 지형에 해당한다. 새로운 땅은 흥분(희망과 기대)의 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땅이기도 하다.
학문의 세계도 예외는 아니라, ‘패러독스’라는 괴물이 숨어있는 집합론의 세계를 인류 최초로 탐험한 불세출의 수학자 칸토르는, 당시 세계적인 수학자인 포앙카레와 크로넥커로부터 자신의 아이디어는 치명적인 질병이고 자신은 사기꾼이라고 혹독하게 비난을 받은 결과, 우울증으로 수차례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며, 논리학의 세계가 완벽한 세계가 아니라 태생적인 한계를 지닌 불완전한 세계라는 것을 발견한 괴델은 피(被)독살편집증으로 굶어죽었으며, 언어와 개념이 미친 듯이 춤을 추는 철학의 세계를 탐험한 자들도 니체처럼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다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곤 하였다.
종교 역시 그러해서, 전도몽상으로 오염된 유위세계를 초월하고자 불볕더위와 엄동설한을 가리지 않고 불철주야로 참선에 몰두하던 수좌들이 심하게 돌기도 하고, 주님만을 섬기겠다고 몸과 마음과 물질을 죄다 바친 이들이 모두 한입으로 동시에 자기만이 주님의 ‘외아들’이라고 정신나간 주장을 하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초특대 과대망상증에 빠져서 하루 한 번씩 거르지 않고 변을 보는 주제에 무엄하게도 스스로 자신이 주님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한다. 35억년의 장구한 진화의 역사에서 겨우 만년 정도밖에 안 된 신세계인 정신세계의 무시무시한 일면을 보여주는 섬뜩한 예들이다.
간질환자들은 환청을 겪는데 많은 경우 자기 자신의 웅얼거림(독백)을 듣는 것이다. 이 경우 환자의 입을 벌려 고정시키면, 즉 소리를 못 내게 하면 환청현상이 사라진다. 무속인의 신들림 현상도 일종의 자기 독백으로 볼 수 있다. 자기 한 마음(우뇌 右腦)이 자기 다른 마음(左腦)에게 거는 말이다; 같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벌어졌으니 타자가 보기에는 독백이다.
비물질계는 이처럼 무시무시한 세계이다. 곳곳에 투명한 암초와 크레바스가 매복하고 있고, 심반(心盤)은 흔들려 뒤틀림과 균열이 일어나며,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태풍과 돌풍은 돌연히 사정없이 불어댄다. 아메바로 계속해서 머물면 되었을 것을 물고기로 진화하더니, 어느 날 우연히, 화살처럼 쏟아지는 금빛 찬란한 천상의 빛에 끌려, 포근한 무지(無知)의 바다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가 고통의 세계를 만나고 말았다. 3억6,000만 년 전의 일이다. 비물질세계로 이어지는 첫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마음은 앎의 기쁨과 환희로 온몸을 들뜨게 하는 매혹적인 대상이지만, 동시에 일체개고(一切皆苦)의 땅이다. 바람 사나운 날, 흔들리는 배위에서, 예리한 칼끝에 뭍은 꿀을 핥아먹어야 하는 인간은 참으로 가엾은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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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뭉크(Edvard Munch)의 절규(Scream):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공포는 절규를 낳는다. |
괴델에 의하면, 우리는 스스로 자신이 완전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어처구니없는 잘못된 생각을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렇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그 시대와 환경이 제공하는 유한한 지식으로는(공리체계 내에서는), 그 시대와 환경의 사상·철학·종교가 건강하다는 것이 절대 증명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없이는, 즉 돌연변이(새로운 패러다임이나 발견)가 발생하지 않고는, 자체모순의 해결이, 즉 윗방향으로의 진화가 불가능하다. 상당수의 철학자들이 미친 것은, 이 사실을 모른 것이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 다른 이유로는 비물질계 탐구수단이자 장비인 언어의 불완전성·미비성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모순성을 들 수 있다.
인간의 비물질적인 진화는, 물질적인 진화처럼, 정해진 방향이 없다. 진화론에 대한 대중의 흔한 오해는 “원숭이나 침팬지는 언제 인간이 되느냐”는 질문으로 나타난다. 진화의 나무에는 무수한 다른 가지들이 존재한다. 이 다른 가지들은 절대 다시 만나지 않는다. 일단 한번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치면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새와 인간은 물고기라는 동일한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지만, “새는 절대로 인간으로 진화하지 않는다”. 즉 진화에는 정해진 방향이 없다. 인간이라는 생물이 모든 생물들이 도달해야하는 공통의 목적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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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현대화가 팡리준(方力钧)의 작품. 물을 떠나는 인간의 모습. 신세계에 대한 두려움에 눈이 감겼다. |
(그러므로 지구상의 특정한 생명체가 아메바와 같은 미물微物과 인간 사이를 위로 아래로 왔다 갔다 하며, 유한개의 고정된 동물의 몸과 마음의 형태로, 무한한 시간동안 무한히 되풀이해서 윤회한다는 이론은 엉터리 이론이다. 뿐만 아니라 600만 년 전에는 지금의 침팬지보다도 더 야만스럽게 생긴 영장류만 존재했지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2억 년 전에서 6,500만 년 전까지 지구의 지배자는 공룡이었으며, 30억 년 전에는 단세포 생물들만 존재했다. 한마디로, 35억년 지구생물역사에서 거의 대부분의 기간인, 34억 9,400만년 동안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대인들은 거대하고 장구長久한 지질학적인 변화와 진화론에 대해서 무지하였으므로, 엄청난 크기의 환망공상을 절대적으로 하였다.)
비물질계인 마음(정신)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정해진 방향이 없기에 무수한 다른 길이 생기고 그 다른 길끼리 충돌이 일어난다. 그 괴리와 충돌은, 다른 사람의 마음과도 일어나지만, 자기 마음 안에서도 일어난다. 자기 마음 안의 무수한 마음(의식, 모듈 module, 불교는 이 마음들을 대별해서 8가지로 분류했다, 소위 8식八識이다)들이 각기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기 때문이다. 그 괴리가 크면 정신이상·착란에 빠지게 된다. 스스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짝을 구하지 못해서 자손을 남기지 못하거나, 이미 있는 자손은 제대로 돌보지 못해 멸종하기 십상(十常)이다.
물질적이건 비물질적이건, 진화의 과정에 있어서 멸종은 여러 가지 이유로 발생한다. 물질적인 진화의 역사에 멸종한 종들이 무수히 존재하듯이, 비물질적인 종교·철학·사상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멸종된 종교와 사상이 즐비하다. 물론 형태(이름)와 내용(교리)을 변형시킨 진화한 종교·철학·사상들도 존재한다. 성공하면 정통이요 실패하면 이단이다.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역사를 관통하는 불변의 척도는 ‘생존과 번성’이다.
플라톤은 이 비물질계를 고정된 완벽한 형태의 이데아의 세계의 어설픈 주물(鑄物)이라고 보았으며, 불교는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없는 순수의식이 자타로 분열되어 오염된 세계라고 보았다. 하지만, 어느 쪽도 이 비물질세계를 고정되어 있지 않은, 전혀 예측할 수 없이 무한히 진화하는 역동적인 세계로 보지 못했다.
II. 신세계, 비물질적인 세계
평행우주론은 여러 개의 (사실은 무한히 많은) 물질적인 세계가 같은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일종의 다중우주(多重宇宙)이론이다. 비물질적인 세계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미 ‘비물질적 평행우주론’이 증명되어 있다. 우리 인간은 모두 각자 자신이 구축한 비물질적인 세계에 산다. (이 세계를 불교에서는 마음의 세계라고 부른다.)
모든 인간의 비물질적인 세계, 즉 비물질계는 모두 서로 다르다. 이 세계는 물질계에 영향을 끼치며 상호작용한다. 아직은 물질계가 비물질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더 크다. 인간의 욕망이 대체로 물질적인 것으로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물체의 욕망은 진화단계가 낮을수록 물질적이다. 인간이 진화를 거듭함에 따라 완전히 비물질적인 욕망을 향해 가게 된다. 바둑이나 체스가 좋은 예이다. 이들은 순수한 사념의 세계이다. 두뇌가 순수한 ‘논리적인 자극과 구조와 질서’를 사랑한다는 증거이다. 바둑을 두는 즐거움은 순수한 비물질적인 욕망의 예이다. 이 게임들은 어떤 물질적인 것과도 연관이 없다. 혹자는 바둑판과 바둑돌은 물질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나, 숙련된 프로기사(棋士)들은 눈을 감고도 200수 가깝게 바둑을 둘 수 있다.
불교에서는 이 세계를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불교가 인간의 비물질적인 진화를 내다보긴 하였지만, 좀 미흡하다. 지금처럼 기이한 인터넷적인 가상세계로 진화할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물질적이건 비물질적이건) 진화의 세계에는 고정된, 필연적인 방향성이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비물질적인 마음의 세계를 ‘환망공상의 세계’라고 부른다. 한 비물질적인 종種이 보기에, 다른 종의 정신세계는 환망공상이다. 이 세계의 특징은 (궁극적으로) 선악이 없다는 점이다. 선악은 물질계처럼 그 크기에 한계가 있을 때 생기는데, 무한히 큰 비물질계에는 선악이 없다. 누구에게나 무한히 넓은 땅, 무한히 많은 여자(남자), 무한히 많은 음식, 무한히 많은 즐거움, 무한히 긴 수명이 주어진다면 도둑질, 간음, 살인, 거짓말 등이 사라질 것은 분명하다.
설사 그런 일들이 벌어져도 개의(介意)치 않을 것이다. 아무리 빼앗기고 잃어도 여전히 무한히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한한 즐거움과 소유가 보장되어 있는데 그리할 리 만무하다. 45억년 동안, 조그만 행성인 지구라는, 유한한 세계에 갇혀 살아온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버거운 상상이 아닐 수 없다.
설마 '가산적으로 무한히 많은'(countably infinite, Aleph-0) 즐거움을 가진 자가, ‘비가산적으로 무한히 많은’(uncountably infinite, Aleph-1) 즐거움을 가진 자를 시기·질투·해코지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무한한 즐거움 사이에도 차별이 존재할 수 있을까? Aleph-1만큼의 즐거움은 Aleph-0만큼의 즐거움의 선망의 대상일까? (Aleph-1은 실수의 개수이고, Aleph-0은 자연수의 개수이다. 둘 다 무한이지만 크기에 차이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l kg짜리 금괴를 Aleph-1개만큼 가진 자가 Aleph-0개만큼 가진 자보다 더 부자일까? 수학자인 필자의 머리로도 감당하기 힘든 주제이다.
(수학 집합론에 의하면, 돈을 Aleph-1원만큼 가진 자가 Aleph-0원을 가진 자의 돈을 모두 뺏어도 그의 돈은 조금도 늘지 않는다. 여전히 Aleph-1원이다. 또, Aleph-1원 부자가 두 아들에게 각각 Aleph-0원씩 증여를 하고도 여전히 Aleph-1원 재산을 유지할 수 있다. 무한의 세계에는 이처럼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여러분은 이해가 가시는가?)
비옥함, 아름다움, 맛까지 무한히 많다면 더욱 그러하다. 악은 부족함에서 온다. 비물질계의 인간이 선인(善人)인 것은, 한계가 있는 유한 세계를 벗어나, 아무나 마음대로 차지할 수 있는 광활한 새 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비물질적인 땅은 한 사람이 아무리 많이 차지해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 기이한 땅이다. 내가 자비심이라는 땅을 차지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자비심의 땅을 차지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원하는 만큼 마음대로 차지할 수 있다.
한 조각 맛있는 돼지고기는 한 사람의 몸(혀)만 즐겁게 하지만, 한 편의 맛있는 이야기(소설, 영화, 연극, 드라마, 뮤지컬, 오페라, 만화)는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종교는 극단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기독교는 ‘하나’만 지키면 만 가지 즐거움이 따라온다고 주장하고, 불교는, 무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아무것도’ 즐기지 않으면 최고의 즐거움이 찾아온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기독교는 하나(1)의 종교’이고 ‘불교는 영(0)의 종교’라고 표현한다. 물질세계와 달리 비물질적인 세계에서는 ‘하나’를 ‘무한히’ 많은 사람들이 공유를 할 수 있다. 한 모금의 물은 한 사람의 갈증만 해소할 수 있지만, 지식은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예를 들어 구구셈) 무한히 많은 사람의 지적 갈증을 해소한다. 한 조각 지혜나, 한 점 관점이나, 한 마디 가르침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 무지와 어리석음과 고정관념과 고뇌를 몰아낸다. 이들은 실로 화수분(河水盆)이다. 즉 비물질계에서는 열역학 제2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이 비물질계로 진화하는 것은 물질계에 비해서 훨씬(사실은 무한히) 더 경제적이다. ‘인터넷’이라는 발명이 좋은 예이다. 이 발명으로 전(全)인류의, 거의 시차가 없는, 지식의 공유가 가능해졌다. 내가 어떤 사물, 사람, 생명체, 현상, 상황에 대해서 상상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동일한 대상에 대한 상상에 제한이 오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무제약이다. 특정한 물리법칙들과 시공간(時空間)의 제약을 받는 물질계는, 아무 제약이 없는 이 비물질계의 극히 일부분이다. 이 환망공상의 세계는 자유의 땅이다. 비물질적인 신자유주의의 땅이다.
물질적인 먹이사슬의 최정상을 차지한 인간은 물질적인 진화를 거의 멈추었다. 이제 인간은 비물질적인 세계로 진화하고 있다. 각자가 각자의 길로 무한히 가지를 치며 진화하고 있다. 우리는 같은 물질세계에 살아도, 같은 비물질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다. 어떤 비물질적인 세계를 구축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세계의 끝에는 무아(無我)라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 무상(無常)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연기(緣起)의 대해(大海)를 건너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이 끝에 도달한 자들은 이 괴물에게 잡아먹힌다. 그 순간 세계는 찬란한 대자유의 세계로 돌변한다.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대화를 할 때는 가급적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사람에 대한 말은
꺼내지 않는 것이 좋다.
그 내용이 칭찬이든 비난이든 상관없다.
타인을 화제로 끌어들이지 말라.
누군가에 대한 판단,비교,평가를 대화의 주제로 삼지 말라.
누군가가 대화중에 상대를 비난할 때,
동조하기도 동조하지 않기도 어렵다.
어떻게 하든 양쪽 다 대화뒤에는 후회가 따르게 마련이다.
가장 좋은 대화는 제삼자를 끌어 들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그를 평가할 만큼 잘 알지도 못하며,
무엇보다도 판단과 평가,해석 자체가 어리석은 분별심과
번뇌만 키울 뿐이다."
-법상스님의 신간<눈부신 오늘>중에서-
인연은 받아들이고 집착은 놓아라
미워한다고 소중한 생명에 대하여 폭력을 쓰거나 괴롭히지 말며, 좋아한다고 너무 집착하여 곁에두고자 애쓰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기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증오와 원망이 생기나니 사랑과 미움을 다 놓아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너무 좋아할 것도 너무 싫어할 것도 없다. 너무 좋아해도 괴롭고, 너무 미워해도 괴롭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고, 겪고 있는 모든 괴로움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 두 가지 분별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늙는 괴로움도 젊음을 좋아하는데서 오고, 병의 괴로움도 건강을 좋아하는데서 오며,
죽음 또한 삶을 좋아함, 즉 살고자 하는 집착에서 오고, 사랑의 아픔도 사람을 좋아하는 데서 오고, 가난의 괴로움도 부유함을 좋아하는데서 오고, 이렇듯 모든 괴로움은 좋고 싫은 두 가지 분별로 인해 온다.
좋고 싫은 것만 없다면 괴로울 것도 없고 마음은 고요한 평화에 이른다. 그렇다고 사랑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고 그냥 돌처럼 무감각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을 하되 집착이 없어야 하고 미워하더라도 거기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마음이 그 곳에 딱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 때부터 분별의 괴로움은 시작된다.
사랑이 오면 사랑을 하고, 미움이 오면 미워하되 머무는 바 없이 해야 한다. 인연따라 마음을 일으키고 인연따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집착만은 놓아야 한다.
이것이 인연은 받아들이고 집착은 놓는 수행자의 걸림 없는 삶이다. 사랑도 미움도 놓아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수행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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