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여열반과 봉사환생 / 강병균 교수

2015. 7. 11. 20:23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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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여열반과 봉사환생

 

 

불교닷컴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구도자들이 사는 목적이 ‘마음의 고통을 여의고 무여열반을 이루어 사라짐으로써 몸의 고통까지 소멸시키는 것’이라면, 사회구성원들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들은 생산에 종사하지 않아 우리가 먹여 살리는데, 대관절 무슨 연유로 당신들은 목표를 이루자마자 우리를 떠나는 것이오?”

‘당신도 다음 생에는 부처가 되어 고통을 벗어날 것’이라는 약속은 지금 이 삶의 끔찍한 고통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비(非)불교도들의 고통은 고통이 아닌가? 원나라, 청나라, 일본이 쳐들어와 백성들을 학살하고, 약탈하고, 겁탈하고 끌고 갈 때, 내세에 성불할 것이라는 약속이 눈 내리는 겨울날 혹한(酷寒) 속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맨발로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끌려가는 가엾은 피해자들에게 무슨 위안이 될 것인가?

<법화경>에 의하면 천하의 오역죄(五逆罪)를 저지른 데바닷다도 언젠가 성불할 것이라는 수기를 받는다. 미래세의 성불이 모든 고통에 대한 영약(靈藥)이 된다면, 그리고 어차피 긴 세월이 지나면 누구나 성불할 몸이라면, 현세의 고통이 중요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현세의 고통은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든 고통이다. 이 점에서 사명과 휴정의 승군활동은 위대한 희생정신이다. 자신들의 불교적인 이상을 포기하고, ‘200여만 명이 학살당한’ 아수라 전쟁터에 뛰어들어 지옥의 고통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였다. 그들은 불교도 비불교도를 가리지 않았다. 보살의 마음은, 깨달음의 마음처럼, 조작(造作)과 취사(取捨)와 범성(凡聖)이 없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삼무일종(三武一宗)의 불교탄압이 일어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위정자 입장에서 볼 때 승려집단의 과도한 증가는 노동력, 군사력, 세금, 그리고 인구(증가)의 과도한 감소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키고 불교재산을 몰수한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재위 954-959)은 역대사가들로부터 영명한 개혁군주로 평가를 받는다. 그는 유망(流亡)농민들에게 전토(田土 논밭)을 돌려줌으로써 농민생활을 안정시켰다.

중생들은 현생에서 피땀 흘려 노동을 함으로써 목숨을 부지(扶支)한다.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고, 전쟁이 나면 목숨을 잃거나 바치고, 뼈 빠지게 번 돈으로 세금을 내며 힘겹게 살아간다. 그런데 도를 닦는다고 해서 열심히 먹여 살렸더니, 도를 닦는 자들의 (결과적인) 목표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라면 도대체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성공했으면 보답을 하는 것이 도리 아닌가? 세속인들도 그 정도의 도리는 안다. 아직도 고통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신음하는 중생들이 가엽지도 않다는 말인가?

이 점에서 대승의 보살정신이 위대한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수행자가 무여열반에 들면 이 세상에 다시 못 올지 모른다. 그래서 영원히 인과(因果)의 고리를 벗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보살은 다시 오기로 한다. 중생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사회를 이루고 사는 군집생물인 인간은 타인의 행·불행(幸·不幸)이 자신의 행·불행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대승운동은 바로 이 점을 자각한 것이다. 자신과 사회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사실은, 인간은 의식이 발달함에 따라 자아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의식이 확장될수록, 혹은 세계의 이면을 보는 지혜의 눈이 깊어질수록 이 현상은 심화된다. 존재는 무엇이든지 간에 궁극적으로는 무아無我이지만, 현상계는 하나이자 둘인 기이한 세계이다.)

유마거사는 이것을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라고 표현했다.

자아(自我)가 망상이고 허깨비라서 무아(無我)라면, 이 사실을 깨달은 보살은 지켜야할 자아가 없으므로 거듭해 이 세상에 오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다. 이 세상과 동떨어진 초세간적이고 초월적인 깨달음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중생의 밥을 얻어먹지도 말 일이다. 옛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현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력이 놀랍게 발달하여 생물계의 비밀을 알아낸 지금은,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뛰어난 연구결과들로 인하여 깊은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니 결단코, 사회를 이루는 ‘확장된 나’로서의 중생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처럼 자원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엄청난 생산물이 홍수를 이루고 쏟아져 나오는 이 시대에, 보살행을 실현할 물질적 토대는 넘치고 넘친다. 그러니 물질적인 빈곤이 ‘영적인 길’의 목을 조르지 않는다. 따라서 보살은 마음만 먹으면, 결코 이 세상을 떠날 이유가 없다.

부처님은, “당신은 놀고먹지 않느냐”는 어떤 바라문의 비난에, “나는 중생의 마음밭에 선근(善根)의 씨앗을 뿌리고 선과(善果)를 거둔다”는 취지로 대답하셨다. 중생을 ‘중생을 구속하는 일체의 정신적인 고통과 어리석음의 구속’으로부터 해탈의 길로 인도한다는 뜻이다. 무여열반은, 그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해방(解脫)이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보이신, 부처님 한 분으로 족하다. 혹은 지난 세월의 구도자들로 족하다. 이제, 보살은 그 좋은 선진(先進) 마음농사법으로 무한한 중생들의 마음밭을 일구어야 한다. 그래서 끝없이 다시 와야 한다. 이것이 대승의 위대한 원력수생(願力受生) 사상이다. 참극의 현장으로 되풀이해서 돌아가 희생자들을 돕는 것이 보살정신이다. 편하게 영화관에 앉아 팝콘과 콜라를 마시며 영화 ‘명량’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영화소재가 될 현장으로 달려가 피와 땀을 흘리는 것이 보살정신이다.

문제는 과연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있느냐는 것이며, 만약 아직 없다면 부단한 노력과 수행으로 획득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그리 가는 도상(途上)에서의 모든 행은 이미 보살행이다. 그래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라고 하는 것이다.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쏘크라데스의 사과 

 

 

"인생은 언제나 단 한 번의 선택을 해야 하거든.

살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서지만,

기회는 늘 한번 뿐이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책임은 모두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한 번뿐인 선택이 완벽하길 바라는 일이 아니라,

때로는 실수가 있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자신의 선택을 끌어안는 일이다.

 

오늘 나의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다. 

 

- 윌리엄 베너드의 “위즈덤 스토리북” 중에서 -

  

 

 

바람은 그 소리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성긴 대숲에 바람이 불어 와도 바람이 지나가면 그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기러기가 차가운 연못을 지나가고 나면 자신의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일이 생기면 비로소 마음이 나타나고

일이 지나고 나면 마음도 따라서 비워진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소유하기를 원한다. 

눈을 즐겁게 해 주는 것. 귀를 즐겁게 해 주는 것,

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내 것으로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남의 것이기보다는 우리 것으로,

그리고 또 우리 것이기보다는 내 것이기를 바란다.

나아가서는 내가 가진 것이 유일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기 위하여 소유하고 싶다고 거리낌 없이 말한다.

이 얼마나 맹목적인 욕구이며 맹목적인 소유인가?

보라. 모든 강물이 흘러 마침내는 바다로 들어가 자취를 보이지 않듯이

사람들은 세월의 강물에 떠밀려 죽음이라는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된다.

 

소유한다는 것은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사물이 어느 한 사람만의 소유가 아닐 때

사물은 살아 숨쉬며 이 사람 혹은 저 사람과도 대화한다.

 

대자연을 보라.

성긴 대숲에 바람이 불어 와도 바람이 가고 나면 바람 소리를 남기지 않듯이,

大自然 의 모든 것은 그렇게 어떤 흔적도 없이 자신을 떠나 보낸다.

 그러니 하찮은 일에 집착하지 말라.

지나간 일들에 가혹하게 미련을 두지 말라.

 

그대의 존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반기고

그대의 존재를 찾아와 잠시 머물고 떠나는 시간을 환영하라.

그리고 마음을 텅~비워 두라. 언제 다시 그대 가슴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최안순 목련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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