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는 부당하게 멸시받는 존재이다.
동서양이 공히 예외가 없다. (수년 전에 미국에서 어떤 남성 정치인이 힐러리 클린턴을 암캐(bitch)라 불러서, 크게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정치인들은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므로, 그냥 “본의가 아니다”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 말하고, 사과하고 끝났다. 도둑질도 해본 놈이 한다고, 거짓말이건 욕이건 평소 하는 놈들이 해야 한다. 착한 사람이 하다가는 "난, 당신 착한 사람인 줄만 알았지, 설마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하며 배신감에 분노하는 대중의 마음을 수습하지 못하고 대참사로 끝나기 십상이다.)
심지어 불교도 그렇다. 조주스님은 "개는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고 주장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선승(禪僧)들이, ‘생불로 추앙을 받던 조주 고불(古佛 옛부처)이 그리 말했을 리 없다’는 큰믿음(大信心)하에, 그 진의를 파악해서 대중의 오해를 풀어주려고, '무(無)라 무(無)' 하며 평생을 참구한다(그런데 선불교 교리에 의하면 '답'은 남에게 알려주지 못한다.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이래저래, 개 인생은 ‘개 같은’ 인생이다. 어렵게 밝혀진 실체적인 진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으니, 개에게 씌워진 누명이 풀릴 길이 없다. (누명풀이 제품)유통에 심각한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이에 무명(無明)중생들은 '불성이 없는' 개를 안심하고 마구 잡아먹었고, 지금도 잡아먹고 있다. ”큰스님, 감사합니다. 잘 먹겠읍니다“ 하면서).
모든 중생이 불성이 있다는데, 유독 개만 없다고 하니 절대로 본뜻이 그럴 리는 없다는 말이다. 혹시 조주스님이 어릴 적에 사나운 개에 호되게 물린 경험으로 인한 외상후증상(post traumatic syndrome)은 아닐까, 얄궂은 상상을 해본다. 하하하. 그러거나 말거나, 자그마치 120살까지 산 조주 스님은 평생, “개는 불성이 없다”고 외치셨다. 하하하.
조주스님은 명성을 얻으신 후에 오랫만에 고향에 갔다가, 고향마을 노인들이 "아, 쟤, (그때 개에 물린) 방아간집 꼬마 아니야" 하며 도인(道人)대접을 안 해주자, 다시는 고향에 가지 않았다. 멘털트라우마(mental trauma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한 내상內傷)는 고향도 앗아 간다. (위 괄호 안 '개에 물린'은 편집실수로 잘못 들어간 말이다.)
아무튼 폐일언하고, 이 글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미국말에 '선오브어비취(son of a bitch 개새끼 개자식)'라는 육두문자가 있다. 이 단어의 복수형(複數形)에 대해 논란이 있다. 네 가지 이론이 있다.
1. son of a bitches 2. son of bitches 3. sons of a bitch 4. sons of bitches
1은 son of a bitch를 관용적인 하나의 단어로 보아, 즉 son-of-a-bitch로 보아 그 끝에 복수어미 es를 붙인 것이며,
2는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어떻게, 'a bitches'라는 형태가 나타날 수 있느냐, 즉 한 단어 안에 단수와 복수가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느냐는 반론이다. 우리말로 예를 들자면, '하나의 사과들'이라는 말처럼 엉터리 말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사과면 하나의 사과이고, 여러 개 사과들이면 여러 개 사과들이지, 어떻게 '하나의 사과들'이라는 말이 성립하냐는 지적이다.
3은, 중요한 것은 son(새끼)이므로 이 말만 복수로 만들어 sons(새끼들)라 하면 된다는 이론이다. 그리고 암캐(a bitch)는 단수로 썼지만, 악마(Saturn)가 모든 악의 대명사로 쓰이는 것처럼, 암캐(a bitch)는 모든 암캐를 대표하는 대명사이므로 구태여 암캐(a bitch)까지 복수로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즉 모든 개새끼들은 예외없이 모두 암캐에서 태어난다는, 극히 당연한 사실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4는 옛날에는 세상이 단순해서, 그 개나, 이 개나, 저 개나 모두 비슷비슷 대차(大差)가 없어서 일부러 구별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개새끼들의 어미인 암캐를 그냥 단수형태인 a bitch라고 써도 무방했지만(또 다른 형태의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의 예이다), 요즈음은 73억 인구 중에 온갖 희한하고 끔찍한 상상을 초월하는 악인들이 많아서 그리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즉 악마가 여러 종류이듯이 개도 여러 종류이므로, 그 breed(혈통)를 밝혀 개새끼의 어미를 복수로, 즉 bitches로 써야 한다는 이론이다.
하긴 예전에는 개는 모두 한 종류였다: 길 잃은 늑대. 그런데 이, 인간마을에 흘러들어온, 늑대의 후손인 개들이 지금은 수천종류로 진화했다. 그래서 어미를 모두 밝혀야 하는 형편이다.
개새끼의 종류가 너무 많아진 것이다. 생물학적인 개새끼가 많아진 것이 '진짜 개새끼'가 많아진 것의 원인일까. 아니면 그 역이 참일까. 아니면 둘 사이에는 아무 상관관계가 없을까. “같이 살면 닮아간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애완견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인간이 개를 닮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개가 인간을 닮아가도 문제다. 그럼 '개새끼'라는 멋진 욕을 쓸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영어에서는 '암캐(bitch)'라고 특정했을까? 그냥 '개'라고 하면 안 될까. 우리속담에 (할머니가 두 손자를 데리고 길을 갈 때) “친손자는 걷게 하고 외손자는 업고 간다"는 말이 있다. 외손자는 자기 손자(피)라는 것이 100% 확실하지만(이 불신의 유위세계에서 정말 몇 안 되는 100% 짜리다), 친 손자는 확신할 수 없다. 며느리가 바람피워 낳은 게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속담이 나온 것이라는 대단히 설득력 있는 (진화생물학적인) 설명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암캐의 아들"이라 해야 '개'라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숫캐가 너무 급한 나머지 고양이나 토끼와 사랑을 하게 되면, 그 후('그 후'이지 '그래서'가 아님을 유의하시기 바란다) 나온 새끼는 고양이나 토끼지 개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냥 'son of a dog'라고 하면 안 되고, 반드시 'son of a bitch'라고 해야 된다는 말이다. 불여튼튼이다. 하하하. 서양인들의 분석적인 면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욕이 난무하는 세태이다. 냉수에 버들잎을 띄워 급한 마음(갈증)을 다스리는 것처럼, 욕의 구조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도 분기탱천한 마음을 식혀주는 역할을 하지는 않을까 희망편향적 사고(wishful thinking)를 해본다. 그런데, 대한민국현대사에서 욕에 가까운 막말을 마음껏 해서, 욕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대혼란(pandemonium)을 자초한 분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신세대는 그 무렵에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들이다. 우연의 일치라 하기에는 좀 거시기하다.
한편으로는, 교육자라는 신분이 주는 구속으로 또는 정언(正言)을 실천하고 분노를 다스리라는 부처님의 눈길과 꾸지람이 무서워서, 평소에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하던 육두문자를 이런 글을 통해서나마 합법적으로 마음껏 손가락 끝에 올리니, 이런저런 세태에 몹시 화가 나고 답답하던 필자의 마음이 좀 풀린다.
누가 욕송辱頌을 작사·작곡하면 대히트를 칠 것이다. 세계적으로. 싸이 강남스타일보다 더. 인류가 지금까지 발명한, 온갖 흉악하고 흉측한 욕을 다 모아서 노래로 만드는 것이다. 노래방에 가서 ‘고래고래’ 이 노래를 부르고 나면 스트레스가 ‘확’ 풀릴 것이다. 세계평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통상 사냥꾼들은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평화롭다고 한다. 폭력을 동물에게 다 쏟아내서 그렇다고 한다(폭력은 비오는 날 웅덩이에 빗물이 고이듯이, 우리 마음에 자꾸 고인다. 그래서 잊지 말고 때맞추어 비워줘야 한다. 태만하면, 넘치는 물로 마음 한 귀퉁이가 허물어진다). 욕송도 그런 기능을 할 가능성이 있다.
예전에는, 지금은 희귀동물 내지는 멸종동물인 욕쟁이할머니들이 존재했다. 비싼 돈 내고 밥 먹으러 가서, 음식점 주인할머니들에게 욕을 덤으로 실컷 얻어먹는 것이다. 그동안 살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저지른 죄에 대해서, 욕을 얻어먹음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돈을 낼 만도 했다. 게다가 죄명과 죄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으니 안전하게 회개할 수 있다. 부산 남포동에 가면 혀가 아리도록 매운 비빔국수에 딸려 나오는 냉수와 욕을 마음껏 무료로 들어먹을 수 있는 ‘욕쟁이할매국수집’이 있었다. 지금은 욕은 홀에서는 사라지고 상호로만 남았다.)
부처님은 인간과 개를 가리지 않고, 이놈도, 저놈도, 모두 내 자식이라 하실지 모르지만(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부처님을 사생자부四生慈父라 부른다), 무명(無明)중생 입장에서는 다른 무명중생은 모두 ‘son of a bitch’ 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형제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다.
"You, son of a bitch. Shut up" 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하다. 복수형으로 "야, 이 개새끼들아! 입닥쳐라" 하지만 않는다면, 세상은 아직 충분히 살 만한 곳이다.
마지막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한 구절 들지 않을 수 없다. "욕을 하는 사람도, 욕을 먹는 사람도 없지만, 욕이 초래하는 업은 존재한다."
욕의 능소(能所 주체와 객체)의 무아성(無我性)을 드러내며, 지나치게 쉽게 분기탱천하는 ‘욕쟁이 인간들(Homo Obscena)'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소중한 말씀이다.
동시에, 실천적으로는, 자신도 육두문자를 얻어먹을 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뒤돌아봐야 하며, 설사 그 육두문자가 자기를 겨냥하지 않았을지라도 혹시 직·간접적으로 그런 욕이 배설되는 데 기여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말세에 가까워 갈수록 독기(毒氣)서린 욕은 난무를 하고, 정통으로 욕에 맞은 중생들에게 해독제로서의 성인의 말씀은 낙양의 지가처럼 구구절절 값어치가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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