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상 좌

2015. 8. 15. 19:3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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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상 좌


천병산 골짜기에 보문암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었다.

규모는 작을망정 천병산 줄기가 내리 뻗어 갑자기 두 갈래로 갈라진 사이

절벽 아래 자리잡고 있어서 아늑하고 경치가 아름다윘다.
 

계곡을 따라 십여리를 내려가면 무학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비룡천이란 개울이 마을을 휘돌아 흐르고 개울을 따라

기다랗게 기름진 땅이 열리어 생긴 곳이었다.
 

보문암에는 육십고개를 넘은 철감대사와 왕노인 단 두 사람이 살고 있었고, 

 
무학 마을에는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옮겨와 서원을 짓고 정주하고 있는,  
 
철감대사와 같이 불교를 신봉하는 유일한 친구요 지기가 된 고진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 비몽사몽간에 한 부인이 나타나서 철감대사에게 발우 한 벌을 바쳤다. 

스님은 제자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아침 공양을 마치자 암자를 나섰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스님은 발길을 돌이켜 암자로 향했다.

 

일과인 법화경을 독송하고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평일보다 좀 늦어졌구나 생각한 스님은 발길을 재촉했다.

바로 그때 시냇물 소리에 섞여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스님은 울음소리를 따라갔다. 반석 위에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가 울고 있었다. 
 
스님은 장삼소매에 받쳐 안고 보문암으로 돌아왓다.

등불을 밝히고 어린아이를 살펴 본 스님과 왕노인은 놀랐다. 어린아이가 장님이었다.

스님은 한참 어린아이를 들여다보고는 업보는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지 하고

다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노인은 심력을 다해 어린아이를 길렀다.

아이의 이름은 혜안이라고 지었다.  
팔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어느날 새벽에 스님을 따라 법당에 올라가 예불을 마치고 나온 혜안은

비통한 표정으로, 저는 스님의 은혜만 입고 아무 보람없이 살아가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죽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스님은, 네 이름은 혜안이다.

 혜안은 육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이다.

네가 내 말대로만 한다면 십년 뒤에는 중생을 살릴 수 있는,

모든 의원 중에서 으뜸이 되는 부처님의 대의왕이 될 것이다 하고 타일렀다.
 

그날 저녁때 스님은 비룡천 개울가에서 삼베 자루에 모래를 가득 담아 가지고 
암자로 돌아왔다.

혜안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법당에 올라가 예불한후에 혜안을 모래자루 옆에 앉히고 말했다.
 

「너는 지금부터 십년동안 이 모래자루를 주무르면서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불러라.

그러면 이 모래 한 알 한 알이 다 신선이 만들어 먹는 효험이 신기하고

오래 사는 약인 선단으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을 조금이라고 의심하면 헛일이 될 것이다. 능히 할 수 있겠느냐?」
 

「예, 이르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혜안의 얼굴에는 기쁨과 희망이 넘쳐 흘렀다.

혜안은 기어코 선단을 만들고야 말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그날부터 모래자루를 만지면서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고 법화경을 독송하였다.

스님은 전보다 더 간곡하게 불법을 가르쳐 주고 불보살의 뛰어난 행적을 일러주어 성불을 도왔다.
 

혜안이 정진을 시작한지 벌써 구년이 되었다.

그 동안 모래자루를 스물일곱 번이나 새것으로 바꾸었고

모래알은 모가 닳고 닳아서 금강석같이 빛이 나는데 아직 선단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혜안은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더욱 정진에 정진을 더해갔다. 
 
철감대사는 여든세 살의 고령으로 이제는 기력이 많이 쇠약해졌다.

어느날 대사는 평일처럼 이른 새벽에 혜안의 부축을 받아 법당에 올라가서 예불을 마치고

거처하는 방으로 내려와서 왕노인을 불러 고진사를 청해 오라고 했다. 

부탁할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기별을 받고 고진사가 급히 암자로 왔다. 왕노인과 혜안이도 옆에 모시고 앉았다. 
 
대사는 새옷으로 갈아입고 단정히 앉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갑자기 진사어른을 오시라고 한 것은 부탁할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실은 오늘로 나의 이 세상 인연이 다하는 것 같습니다.

혜안이 너는 내가 간 뒤에도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을 성심으로 모시고

공부를 계속하여 내 뒤를 이어라.」
 

모두 대사가 입적한다는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대사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왕노인은 오늘부터 절의 살림을 맡는 총지거사가 되어 주시오.

그러나 이 암자를 유지 발전시켜 나가려면 고진사께서 적극 도와 주셔야 하겠습니다.

두 분께 뒷일을 부탁합니다.」
 

말을 마친 대사는 합장하고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을 염한 다음

조용히 자리에 누워 영원히 눈을 감았다.

 철감대사가 입적한 이듬해 시월 십사일은

혜안스님이 정진을 시작한 지 만 십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모래는 아직 선단이 되지 않았다.

혜안스님은 실망하지 않고 앞으로 다시 십년이 더 걸리더라도

기어코 철감대사의 뜻을 이루리라 결심했다.
 

이튼날 혜안스님이 법당으로 올라가 예불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한 신도가 황급히 달려와서, 스님, 스님, 큰일 났습니다.

고진사 어른이 그만... 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스님은 그를 따라 급히 고진사가 있는 데로 갔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고진사는 중풍을 일으킨 것이었다.

 

스님은 사람들을 물리치고 고진사의 맥을 짚어 보았다.

맥박이 몹시 잦고 몸이 불덩이 같이 뜨겁고 숨소리가 몹시 가빴다.

스님은 고진사의 옷을 벗기게 하고 모래를 자리에 흩고

고진사를 그 위에 눕히게 한 다음, 온 몸을 주무르면서 관세음보살을 염했다.
 

한참만에 고진사는 차차 정신이 들어 눈을 떠 사방을 둘러보았다.

얼마 안되어 고진사는 언제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깨끗이 나았다.

모두들 이 엄청난 기적에 오히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혜안스님의 기적같은 의술의 소문은 자꾸만 번져나가

병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몇 달이 안되어

하루에 사십 명 오십 명씩 불어 나갔다. 
그리고 아무리 중한 병에 걸린 사람도 스님의 치료를 받기만 하면 새사람이 
되어 돌아갔다.
 

이 무렵 대궐에서는 공주가 중풍에 걸려 삼년 동안 온갖 약을 다 써 보았지마는 

조금도 차도가 없어서 온 대궐 안이 근심으로 나날을 보냈는데,

혜안스님의 의술이 용하다는 소문이 서울에까지 알려져서 대궐에서도 알게 되었다.
 

사신이 급히 말을 달려 보문암으로 내려왔다.

스님을 만나 왕명을 전하고 급히 상경하기를 청했다.  
스님은 이 보문암으로 찾아오는 병자들을 응급조치할 수 있도록 마련한 후 
 
모래주머니를 가지고 사신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

 

혜안스님은 대궐로 들어가 공주의 병실로 인도되었다. 

 
잠시 공주의 맥을 짚어 본 다음 병실에는 왕후와 여관 한 사람,

 그리고 시의 한 사람만 남아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게 했다. 
스님은 자리에 모래를 깔고 공주를 속옷만 입혀 모래 위에 눕히게 했다.

그리고 합장하고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공주의 맥을 따라 주물렀다. 
스님이 치료를 마치고 미처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공주가 크게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앉았다.
 

삼년 동안이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던 중환자가

금시에 정신을 회복하고 자리에 일어나 앉았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이랴.

 참으로 기적이 일어난것이었다.  
임금과 왕후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사람이 공주의 회복을 기뻐했다.

임금은 몇 번이고 고맙다고 치하하고, 스님의 소원을 말씀하시면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고 이루어 드리리다 하였으나,

스님은 아무런 소원이 없다고 하고  곧 돌아가기를 원했다.

 

임금은 대신을 불러 해마다 쌀 오백섬을 보문암에 내리게 하고,

스님에게 왕이 내린 증표로 내어 보이면

 어떤 관원이고 그의 청을 거역하지 못하는 여의패를 내렸다.
 

혜안스님이 천병산 보문암까지 이틀길이 남은 두 고을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행렬 앞에서 여인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 못보는 불쌍한 여인입니다. 밝으신 사또께서 제 딸을 찾아 주십시오.  
제 딸을 찾아 주십시오.」

 

호위하는 군사가 여인을 꾸짖어 물리치려고 했으나

여인은 그냥 몸부림치며 호소했다.

스님이, 잠깐 나를 내려주고 저 여인을 데려와 주시오 하여,

여인이 스님의 앞에 인도되었다. 여인은 장님이었다.

스님이 인자한 말소리로, 무슨 사연인지 말씀해 보십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도와 드리겠습니다 하고 물었다.
 

「저는 죄 많은 여인입니다. 남편을 잃고 눈이 멀어 어린 딸을 지팡이 삼아서 
유리걸식하다가

오늘 이 근처에서 어떤 자에게 딸을 빼앗겼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갑니까.」 하고 여인이 애원했다.

그리고 빼앗아 간 사람은 이 고을 관속들이라 하더라고 했다.

스님은 우선 그 여인을 고을 숙소로 데리고 가게 하였다.
 

마중나온 원이 이 사실을 듣고 이것 큰일 났구나 생각하고

스님과 여인을 객 사로 인도해 들인 다음 급히 아전들을 불러,

어느 놈이 그 여인의 딸을 겁탈했느냐? 
영접나갔던 관속들을 모조리 형틀에 올려매어라 하고 불호령을 내렸다.

관속들은 사시나무 떨듯했다.
 

그리고, 일을 저지른 놈은 빨리 나오너라 하고 아우성을 쳤다.

한 군노가 벌벌 떨면서,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했다.  
원은 곧 군노를 옥에 가두고 처녀를 데려다가 그 어머니에게 인도하고 

스님의 앞에 끓어앉아 자기의 불찰을 사죄했다. 그리고 범인은 곧 처형하겠다고했다.

 

인자한 스님은,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사람은 찾았고 범인은 자백하였다니 잘 타일러서 석방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원은, 인자하신 뜻을 받들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범인을 데려오라 하여,

너를 당장 처형할 것이지만 인자하신 대사님의 분부로 석방해 주는 것이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렸다 하고 결박을 풀어 주었다.

군노는 눈물을 흘리면서 수없이 절을 하고 물러갔다.
 

딸을 찾은 여인은 감격하여 합장하고 울면서 그 은덕을 고마워했다.

더욱이 스님도 자기처럼 장님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의 지난 날 일이 회상되어 하염없이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스님은 여인을 다정하게 위로하고, 은혜와 원한은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은혜와 원망은 모두 마음의 집착에서 오는 망녕된 생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망녕된 생각을 없애려면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염하면 됩니다.  
라고 하였으나 여인은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스님은 다시, 선과 악 그리고 그 인과응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죄지은 사람이라도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 죄가 없어집니다

하고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설했다.

여인은 어쩐지 스님의 내력이 마음에 걸렸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스님은 어느 절에 계십니까?

성씨는 누구신지요? 부모님은......? 하고 물었다.  
「예, 나는 천병산 보문암에 있습니다. 나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안계십니다. 

철감대사께서 강보에 싸여 개천가 반석위에 버려진 나를 데려다 기르셨으니 

성도 모릅니다.」하고 스님은 기탄없이 대답했다.

여인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럼, 지금 스님의 연세는 얼마이십니까?」 
「열 아홉입니다.」 
 
혹시나 하던 여인은 이제 더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스님에게 왈칵 달려들어 얼싸안고 흐느껴 울었다. 스님도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스님은, 지난 일을 슬펴하실 것은 없습니다.

떳떳하게 자식이라고 부러 주십시오. 모두가 인연입니다. 
피할 수 없는 업보 소관입니다 하고 어머니를 위로했다.

 

그날 밤 스님은 어머니의 눈을 뜨게 하였다.

어머니는 버릴 때의 아들을 생각하면서 하염없이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이윽고 딸을 불러 세 사람은 다시 한 번 얼싸안고 목을 놓아 울었다.

자정이 지나 문득 스님의 눈도 검은 안개가 깨끗이 걷혔다.

세 사람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부처님의 뜻에 감사하여  
스님은 법화경을 독송하고 모녀는 관세음보살을 염했다.

 

여인이 참회의 눈물을 걷잡지 못하면서 이야기한 내력은 다음과 같았다. 
 
스물세 살에 여인과 결혼한 스님의 아버지 남씨는 부농의 아들인데,

몸이 허약한데다가 과거 공부에 너무 애를 써서

결혼한 지 사년만에 스님을 유복자로 남겨놓고 죽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아 기르며 홀로 일생을 마치기로 결심했으나 남편을 잡아먹었다고

트집을 잡아 못살게 구는 시어머니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몇 번을 죽을 생각까지 했었다.

 

그 무렵 이웃에 사는 문씨라는 청년이 넌지시 동정하여

 마침내 어느 날 밤 두 사람은 무작정 집을 떠났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아디로 가서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도 없었다.

그렇게 유랑하다가 어느 집 헛간에서 몸을 풀었다. 갓난아이는 장님이었다.

 

두 사람은 생활고에 몸부림쳤다. 갈수록 앞 길이 막연했다. 문씨의 짜증이 날로 늘어났다.

그들은 산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기로 하고 천병산 골짜기로 들어섰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종일 길을 걸은 그들은 지칠대로 지쳐서

이제 한 발자욱도 옮길 기력이 없었다. 시냇가의 반석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날은 저물어 갔다. 어떻게 시장기를 면할 것인가,

어디서 또 하룻밤을 지낼 것인가?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죽어버리자고 도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마침내 문씨는 눈 먼 아이를 버리고 가자고 했다.

옥신각신 싸우다 못해 어머니가 졌다.

두 사람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어린아이를 뉘어두고 힘없이 발길을 옮겨 놓았다.

얼마를 걸어갔다. 그러나 버리고 온 어린아이가 눈앞에 아른거려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죄책감이 마음을 쥐어뜯었다. 견디다 못해 두 사람은 발길을 돌이켰다.

쉬던 자리에 이르러보니 어린아이가 간 곳이 없었다. 

 필시 산짐승이 물어간 것이라 생각하자 미칠 것만 같았다. 
 
그 근처를 얼마를 헤맸으나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천병산에서 사는 것이 두려웠다.

 며칠을 북으로 북으로 도망치듯 발길을 옮겼다. 
 
그러다가 한 곳에 이르러 어느 부농의 고용인이 되었다.

문씨는 머슴살이, 어머니는 식모가 되었다.  
이때 딸 정화가 태어났다.

두 사람은 오륙년을 부지런히 일하여 조그만 집도 장만하고 논도 몇 마지기 손에 넣었다.

이제 그런대로 아무 걱정없이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또 불행이 닥쳐왔다.

어느 해 그 지방에 전염병이 돌아 문씨가 병에 걸려서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눈앞이 캄캄했으나 딸 하나를 정성을 다해 키우리라 결심했다.

굳세게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문씨가 죽은지 일년 남짓하여 까닭없이

어머니의 눈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더니 기어코 아주 멀고 말았다. 일을 할 수 없었다.

얼마 동안은 논을 팔고 집을 팔아 살아갔으나 이제 아무것도 없게 되어,

어머니는 딸을 앞세워서 지팡이를 삼아 이 마을 저 동네로 구걸하여 목숨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이번에 그 딸을 군노에게 빼앗겼던 것이다.  
「천벌을 받아 진작 죽었어야 할 어미였다.」 

지난 일을 울음 반 말 반으로 다 이야기하고 난 여인은

설움이 다시금 북받쳐 올라 흐느꼈다. 정화도 울고 스님도 울었다.
 

이튿날 아침 원 이하 모든 사람은 자기의 눈을 의심했다.

하룻밤 사이에 장님이었던 스님이 눈을 떳고 장님이었던 여인이 눈을 떴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여인이 스님의 어머니라는 말을 듣고는 또 한 번 놀랐다. 
법화경을 독송하고 관세음보살을 염한 공덕이 이렇게도 클 수 있느냐고 
 
모두들 불법의 거룩함에 새삼스러이 탄복했다.

 

혜안스님은 어머님와 누이동생을 데리고 보문암으로 돌아왔다.

수백 명의 환자가 스님이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스님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주기에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어머니는 삭발하고 출가하여 보살행을 힘썼고,

 감격하여 따라온 군노는 전혀 딴사람이 되어 절의 온갖 일을 도맡아 했다.  
나라의 도움도 있고 하여 절은 크게 번창해갔다. 

전각이 잇달아 세워지고 신도가 급격히 늘어났다.

보문암을 보문사라 부르게 되었고 세상 사람은 혜안스님을 혜감 대사라 불렀다.
 

천병산 골짜기에서 법화경을 독송하는 소리가 멀리 멀리 퍼져 나갔다.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영기가 멀리 멀리 퍼져 나갔다.

그 소리와 영기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나갔다. 
 

■하늘말나리 / 백승훈  

불령산 청암사에서
극락전으로 가는 돌계단을 오르다가
숲 속에 핀 점박이 고운 꽃을 보았습니다


하늘을 향해 여섯 장의 꽃잎 활짝 펼치고
자랑처럼 피어난 하늘말나리 꽃
청암사 눈 맑은 비구니 스님들도
저 꽃을 보았겠지요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잠시
멈춰 서서 가쁜 숨 고르며
하늘말나리 꽃에 눈길을 주었겠지요

무심히 꽃잎마다 하늘 받쳐든 꽃을 보다가
가슴 속에 이는 그리움일랑
마을로 내려가는 물소리에 실어보내고
한 떨기 하늘말나리 꽃이 되고 싶었겠지요
 

 


 

      행복한 수행

       

       

      수행을 많이 할 수록 자꾸 내가 낮아지고 겸손해져서

      저절로 하심이 된다 싶으면

      그래도 조금 잘 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래도 조금'이라고 한 이유는

      정말 공부 잘 하면 따로 '잘 한다'

      '하심이 잘 된 다' 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어렵습니다.

      '내가 수행한다' '내가 수행하니 행복하다' '내 수행이 잘 안된다'

      이런 마음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나'를 놓아가는 것입니다.

      '나'라는 아상을 비우는 것이지요.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도리어

      '내가 수행한다'는 아상을 잔뜩 부여잡고 있는 것을 봅니다.

      '내가 수행한다'고 하면아무리 절 잘하고,

      염불 독경 잘 해도 별 소득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나'를 그냥 몰록 놓아 버려야 하는 겁니다.

      그래도 이것이 잘 안 될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 무슨 잡을 것이 있어야 되는

      우리들의 나쁜 습관 때문이지요.

      그래서 고작 잡는 것이 '나'인 것 입니다.

       

      잡을 것 하나 없는데도

      우리는 무엇이든 잡을 것이 있어야 쉬워요.

      그런데 엉뚱한 것 잡고 가니 괴롭습니다.

      이왕 잡을 거라면 '자성부처님'을 잡고 가셔야 합니다.

      '내가 수행한다' 하지 말고,

      '자성부처님께서 하신다'고 굳게 믿고 놓아 버리세요.

      이 몸과 마음 오직 자성부처님께서 이끌고 가신다고

      굳게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랄게 없고 오직 부처님 뿐이니

      저절로 당당해지고, 떳떳해지고 밝아지게 됩니다.

      든든한 부처님 빽이 계시는데 마음 졸일 일이 무엇 있겠어요.

      무소의 뿔처럼 시원스레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그저 어떤 경계가 오더라도

      '자성부처님!!' 하고 돌려 놓으세요.

      그리고 우리 몸과 마음은

      그저 부처님을 모시는 시자라고 생각하세요.

      석가모니 부처님을 열반하실때 까지

      지극정성으로 모셨던 아난존자 처럼 말입니다.

      모든 일은 부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나는 그저 부처님 시자로써 굳게 믿고 따를 뿐입니다.

      모두 아난 존자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린 그대로 부처님으로 사는 것이고,

      또한 부처님 시자로 살아가는 것 입니다.

      시자와 부처님이 둘이 아니거든요.

      이렇게 살면 당당하지 말라고 해도 당당해 지고,

      행복하지 말라고 해도 행복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