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15. 19:38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자기 공부만큼 보인다 / 릴라 임순희
마음공부를 하다보면 법을 보는 눈이 각기
공부 정도에 따라 다름을 경험하게 됩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우리가 세상을 보듯이 도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있고,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하나의 분리된 경계로 도를 구하게 됩니다.
분별된 어떤 경계 중 하나로 완전한 어떤 것, 수승한 어떤 것,
적멸한 마음상태를 추구합니다. 그러다가 스스로가 염원하는 어떤 경계를 만나면
그게 도인 줄 알고 머물게 됩니다.
이러한 경계는 신통한 능력이거나 어떤 완전하다고 여기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읽거나, 미래를 예측하거나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이동하는 능력, 몸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능력 등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흔들림없는 마음상태라든지, 어떤 경계에 들어 나와
세계가 하나가 된 듯하고 자기 몸이 사라지는 듯한 체험 등을 하면
그게 도라고 여겨 이 상태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 이유는 그동안에 살아왔던 마음의 습관대로
분별된 특정 의식으로 도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뭔가 특별하고, 신통하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심적
상태를 추구하는 마음의 경향성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야말로 '신통'하고 '신비한' 상에 걸맞는 경계이기에 많은 경우
여기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 특정 경계가 도는 아니라는 가르침을 듣더라도
이 감미로운 유혹을 떨쳐버리기 힘듭니다.
이러한 경계의 공통점은 부단히 노력해야 하고 계발해야 하고
연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쉬지 못합니다.
계속 조작을 일삼아야 하고 온탕냉탕을 오갑니다.
들어갈 때가 있고 나올 때가 있습니다. 세계가 없어지고
나도 없는 듯하다가 돌아서면 다시 예전과 같은 상태로 전락합니다.
여기에서 한계를 느낀 사람은 재발심하거나 눈밝은 선지식을 통해
모두 망상경계라는 얘기를 듣고 놓아버리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특별한 상태가 아닌 일상적인 경험가운데 문득 눈앞의
진실을 체험하는 기회를 맞게 되지요.
순간 눈앞이 또렷해지고 이것뿐이다는 체감이 옵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동안 쥐고 있고 구속받고 있던 분별의식들이
많이 떨어져 나감을 느낍니다.
무언가를 애써 할 필요가 없음을 자각하게 됩니다.
속이 비어지고 번뇌가 사라지는 경험을 합니다.
애써 구할 필요가 없는 일이기에 마음이 안도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소 혼란스런 느낌을 받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법이 이런 것이라는 상을 짓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고수하려 듭니다.
도반들이 법에 대한 얘기를 하면 자기 견해와 맞지 않아 충돌을 빚기도 합니다.
혹은 공부가 된 듯한 사람의 말과 자신의 견해가 달라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스스로가 확인한 자리이외에 뭔가 따로 있는 것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뭔가 확실한 게 있는 것같은데 명확하게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눈앞에서는 밝은 것같은데, 생각을 하거나 꺼려하는 경계를 만나면
아득해져 버리는 듯합니다.
아직 법에 대한 안목이 밝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세한 분별의식이 여전히 작동되고 있습니다.
스스로 확인한 자리에 대한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본성이 전체로 밝은 게 아니라 부분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법이 그래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분별의식이 말끔히 가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이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위해 어록이나 경전 혹은 설법
속에서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불이법의 방편을 정리하여 그것에 의지하려 듭니다.
특히나 이 시기에 잘 속는 것이 법에 대한 말입니다.
불이법, 우주가 하나이다, 한 덩어리, 나와 남이 따로 없다, 마음도 없고
경계도 없다, 오직 마음뿐이다 등 그럴듯한 견해에 매혹되지요.
또 불만족스런 공부상태를 벗어나 흔들림없는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를
동경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스스로가 세운 불이법의 견해와 일치하는 체험, 즉 나와 바깥 세계가
순간적으로 일치하는 경험을 하면 스스로의 공부가 진일보한다는 환상을 갖게 되지요.
아직도 시선이 분별경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가 아닙니다.
공부는 되어가는 게 아니라 본래 완전한데, 경계의 변화를 보고 스스로의 공부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부처의 경계도 없는데 공부인의 경계가 따로 있을까요?
그러나 이 과정에 있을 때는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공부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지요.
이때를 잘 넘기는 게 중요합니다.
분별의식이 습관적으로 발동하여 생각따라 흘러들어가 버리기 십상입니다.
어떨 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데 다른 때는 온갖 것이 다 있고 뭔가 분명하게
밝히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구속받고 있는 미세한 분별망상이 있을 뿐이지,
완전한 법, 완전한 공부상태를 얻고 보는 일이 아닙니다.
불이법은 어떤 경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공안을 통한 점검이나 선지식과의 진솔한 대화라고 봅니다.
의지하는 바를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무언가를 쥐고 그것에 일치하는
경계에 머문다면 분별망상의 굴레에서 완연하게 해탈하기가 어렵습니다.
스스로 의지할 바가 없어지면 저절로 분명해지는 공부입니다.
분명해지려고 노력해서 분명해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 무엇이 바르고 바르지 않는지
점검하는 기회가 중요합니다. 공안이나 어록, 선지식의 설법을 보고
듣는 기회를 다양하게 갖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공안도 공안의 질문에 걸맞는 대답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어록을 보는 것도
억지로 이해하여 알음알이를 짓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지 없는지 점검하기 위한 것입니다.
스스로가 공안에서 모호하면 공부가 부족한 것이고 미심쩍은 구석이 있으면
미세한 분별의식이 작동되고 있는 것입니다.
공안은 그에 합당한 답을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공안 어떤 질문에서도
자신의 본래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는지 단련하는 공부 재료입니다.
특정한 대답을 해도 상관없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은 없습니다.
이 모든 질문과 대답이 말이 아니며 자기를 떠난 일이 아닌지
여실히 볼 수 있느냐의 문제지요.
이 시기의 모든 인연은 공부의 시험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에는 이치도 놓아버리고 상태에도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스스로가 사로잡혀있는 분별의식에서 풀려날 뿐 법은 언제나 변함없었습니다.
그저 어떠한 상태에도 해당되지 않고 어떠한 말도 돌아보지 않으며,
특정한 경계에 속지않을 뿐입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보지 않게 되고,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하게 되며, 어떠한 의도도 사라져버릴 뿐입니다.
일상생활, 삼라만상이 물샐틈없는 마음 하나이기에 따로 보는 법이 없습니다.
법이라는 것, 완전무결한 법의 상태를 얻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물을 보는
것이며, 사람을 보는 것이며, 온갖 드러나는 인연을 보는 것입니다.
따로 보는 법은 없지만 그 온갖 인연 그대로 부족한 적이 없는 일임이 당연할 뿐입니다.
본다면 전체를 보고 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보지 않습니다.
본다면 아무것도 보지 않고, 보지않는다면 전체를 본다해도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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