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 / 법정스님

2015. 10. 17. 20:5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오매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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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오대산의 법정스님의 집)

 

 

 

◆<必讀>만나서 행복했고 고마웠다"

 

 

흔히

떠나고 빈자리는 더 커 보인다고 말한다.

함께할 때,

그 존재의 의미나 소중함에 대한 자리매김을

충분히 하지 못했을 때 더 그렇다.

 

'무소유(無所有)'의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한

법정스님께서 입적(入寂) 하셨다고 한다.

 

입적이란

생사고계(生死苦界)를 벗어나

열반(涅槃)에 드는 일을 말한다.

 

열반

모든 번뇌를 끊고

분별(分別)의 지혜를 떠나

몸까지 없앤 적정(寂靜)의 상태라고 한다.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하나

그 속에서도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다.

 

 

 

노여움을 통하여 기쁨을 알 수 있으며

슬픔의 체험에서 즐거움을 가늠할 수 있으니

그 넷은

별개가 아니라 한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누구든

그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가 없으며

평생을

괴로움과 슬픔으로 보내는 사람도 없다.

어쩌면

인간은 그런 과정을 통하여 성숙되도록 만들어진

속성(屬性)이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법정스님을 만난 것은

무소유(無所有)’라는 작은 책자를 통해서 이다.

나와 종교는 다르지만

그의 가르침을 따르려 했으며

훌륭한 수필가로서의 그의 철학을 흠모하였다.

 

고승대덕(高僧大德)의 게송(偈頌)이나

열반송(涅槃頌)의 의미는 너무 함축된 것이 많아서

설명을 들어도

이해할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법정스님은 우리 삶 속의 체험을 통하여

이해를 끌어내기에 누구든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 한 예가

난초 화분에 대한 일화로

집착과 무소유를 설명한 수필이다.

 

 

 

"만나서 행복했고 고마웠다."

이 말은

법정스님께서 임종 몇 일 전에 찾아 온

어느 시인에게 하신말씀이라 한다.

 

누군가 임종(臨終)을 앞에 두고

남은 이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는 분명

세상에 온 보람을 충분히 누린 사람일께다.

 

설령

떠나는 본인은 그리 생각이 안 할지라도

보내는 이가 그렇게 생각이 된다면

그 역시 세상에 온 보람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이

자신과의 약속이다.

 

그는

30여 년 전에 미리 써 놓았던

그의 유언대로 살아 왔고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으니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으며

그의

종교를 이미 성취한 분이다.

 

다만

마지막까지 다시 가 보고 싶어 했던

눈 덮인 강원도 오대산 골짜기

더 쓸쓸해 보이는 것은

오직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무소유(無所有) / 법정스님.

 

"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 9월 런던에서 열린

2차 원탁회의(圓卓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語錄)>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地上)의 적()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요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主客)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이름 있는 난초(蘭草) 두 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 왔을 때

아는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 애들 뿐이었다.

 

그 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 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이라는 비료를

바다 건너 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나는 떨면서도 실내 온도를 높이지 않았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개인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 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 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이때에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 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執着)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착해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僧家 遊行期]에도

나그네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 하고 말았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을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 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초를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所有慾)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고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不辭)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利害)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맹방(盟邦)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사절을 교환하는 사례(事例)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 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無所有史)

그 틀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까.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많은

물량(物量)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교훈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

 

 

 

 Evening Bell  / Sheila 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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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1.jpg

 

자비희사 사무량심(慈悲喜捨, 四無量心)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볼관(觀), 들을 음(音)으로
내가 나(세상)를 보고 나(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이

세상을 사는 나를 바로 쓰면 자타를 널리 이롭게 할 것이

자비희사 사무량심(慈悲喜捨,四無量心)을 쓰는 일이다

자타 종교유무를 떠난 부처님 가르침 자비희사

사무량심(慈悲喜捨,四無量心)은 누구나 본래 갖는 마음의

성품(작용)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회광반조해 보자

 

말하지 않아도 이미 누구나 쓰고 있으나
다만 그 참을 아지 못하니 크게 쓰지 못할 뿐이다 
 
1. 자무량심(慈無量心)이라 하면
자타를 떠나 널리 어질게 사랑하는 마음이다
스스로를 소중히하고 나 아닌 것을 나와 같이 귀히 여기는 마음이다
 
2. 비무량심(悲無量心)
자타를 떠나 타인의 슬픔(고통)을 내 아픔과 같이 하여
동병상련의 아픔으로 위로하고 위안 받는 것이다
 
3. 희무량심(喜無量心)
자타를 떠나 타인의 좋은 일은 자신의 일 같이

축하 기쁨을 나눔으로서 기쁨이 배가 되는 것이다
 
4. 사무량심(捨無量心)
일체만물의 근원은 높고낮음 없음이라 일체만물을 대함에 있어

분별을 여의어  자타불이 평등심으로 정행하는 것이다

흔히 기쁨은 나눌 수록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덜한다

하는 것이 이미 일상의 삶 속에서 쓰고 있지 않는가?
다만 그 참을 모르니 온전히 쓰지 못할 뿐이라 

 

 

 

 

 

 

 

달과 아파트 / 이 옥 진

 

산은 엎드렸고
아파트는 우뚝 섰다

두둥실
그 사이로
환하게
떠오른 달

아파트
넘기가 싫은지
샛길을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