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24. 19:41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오매일여(寤寐一如)
오매일여의 경전상의 근거는 수능엄경(首楞儼經) 10권 상음변마장(想陰變魔障)의
“아난(阿難)아, 저 선남자는 삼매(三摩提)를 닦아서 상온(想蘊)이 다 소멸한 자이다.
이 사람은 평상시에 꿈과 생각이 소멸하여 자나 깨나 늘 한결같다.
阿難, 彼善男子 修三摩提 想陰盡者. 是人平常 夢想銷滅 寤寐恒一.”
라는 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꿈과 생각이 소멸했다는 말은,
바로 착각과 망상과 생각으로 헤아리는 시비분별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나 깨나 늘 한결같다는 말은,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똑 같은 상태라는
말이 아니라, 일체가 한 법이어서 자나 깨나 이 한 법의 일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
자느니 깨느니 하는 시비가 없다는 말인 것이다.
간화선(看話禪)을 창시하고 서장(書狀)을 지은 대혜종고(大慧宗杲)스님이 향시랑
백공에게 답하여 쓴 편지가 서장에 기록 되어 있는데
“보내신 편지에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꿈과 깨어 있음이 하나인가?’하셨는데
이것은 한 조각의 인연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연하는 마음(緣心)으로 법을 들으니 이 법도 반연(攀緣)하는 마음이다.’
고 하시며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至人)은 꿈이 없다.’고 하시니
(이 없다는 것은) ‘있다’의 반대의 뜻인 ‘없다’가 아니니,
말하자면 꿈과 꿈 아님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示諭에 悟與未悟와 夢與覺이 一인가 하온데 一段因緣입니다 黃面老子가 云하되
汝以緣心으로 聽法하니 此法도 緣心이니라하시고 謂至人은 無夢이니라 하시니
非有無之無니 謂夢與非夢이 一입니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부처님께서
“너는 반연하는 마음(緣心)으로 법을 들으니 이 법도 반연(攀緣)하는 마음이다.”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시비 분별하는 네 마음이 짓고 있다는 말이다.
본문에 나오는 연심(緣心)은 인연을 따라다니는 마음으로, 반연(攀緣)하는 마음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반연의 본래 뜻은 ‘객관의 사물에 의지함.’ 또는
‘원인을 도와서 결과를 맺게 함.’이고, 사전적인 뜻은 ‘어떤 사물을 끌어 잡고
의지하여 기어 올라감.’ 또는 ‘세력 있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거나 연줄로 삼음.
또는 그 연줄.’이라는 뜻이다.
이 뜻들을 합쳐 보면, 결국은 사람이 ‘인연되는 바깥 대상에 의지한다.’는 뜻이며,
또, 천목중봉(天目中峰)선사가 지은 산방야화(山房夜話)에 보면
“달마스님이 제자 신광(神光)스님을 가르칠 때에,
‘밖으로는 모든 반연을 끊고, 안으로는 마음의 헐떡임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올바른 방법을 찾은 것이니라.’라고 했을 뿐, 그 밖에 다른 말을 하셨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라고 한 말이 있는데 여기서 달마조사(達摩祖師)가 신광(神光)에게
‘밖으로는 모든 반연을 끊고, 안으로는 마음의 헐떡임이 없어서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올바른 방법을 찾은 것이니라.’
한 말의 뜻을 보면, 결국 반연이란 대상과 경계에 끌려 다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신광은 제 2조 혜가선사(慧可祖師)가 달마조사의 제자가 되기 전의 이름)
사실은 유정(有情)으로 생각을 가진 존재를 제외한 만법은 어떤 것도
이 한 법의 성품을 여의지 않아서 시비와 분별이 없다.
유정(有情)의 존재 중에서도, 특히 인간의 생각은 ‘나’라는 한 생각 때문에
‘너’라는 상대를 만들고는 상대적인 이분법으로 시비와 분별에 물들어 있다.
그래서 경계는 우리에 대해서 어떤 시비도 하지 않는데, 사람의 생각이 스스로
시비를 하며 대상과 경계가 자신을 어떻게 한다고 착각을 하고는,
대상과 경계 때문에 좋은 일이 생기거나 나쁜 일이 생긴다는 망상을 한다.
하지만, 대상과 경계는 인연에 따라 거기에 있을 뿐, 어떤 시비도 하지 않는다.
인간의 생각이 잣대를 만들어 세상을 자기 마음에 들게 하려 하니,
그저 인연 따라 있는 것이, 인연 따라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건드린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착각과 망상이 바로 반연(攀緣)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너는 반연하는 마음(緣心)으로 법을 들으니 이 법도 반연(攀緣)하는 마음이다.”
라는 말도, 사람이 스스로 잣대를 가지고 세상을 보니, 법이 본래 법이 아니라,
사람의 분별하는 마음처럼 시비와 분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하지만, 대혜종고 스님의 편지에 있는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至人)은 꿈이 없다.’고 한, 부처님의 말씀에서
지인(至人)은 경지에 오른 사람으로 이 한 법을 깨달아 이 자리가 분명한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시비와 분별이 떨어진 사람이니,
일체가 오직 한 법으로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至人)은 꿈이 없다.’는 말은,
대혜종고 스님의 그 다음 말인
"(꿈이 없다는 것은) ‘있다’의 반대의 뜻인 ‘없다’가 아니니,
말하자면 꿈과 꿈 아님이 하나라는 것입니다."하는 말과 수능엄경에서
"이 사람은 평상시에 꿈과 생각이 소멸하여 자나 깨나 늘 한결같다."
고 하는 것처럼,
즉, 대혜종고 스님의 ‘없다’는 것은, ‘있다’의 상대적인 개념인 ‘없다’가 아니라,
일체가 이 한 법이고 만법이 이 한 법에 의해서 생기고 변하고 흘러가기 때문에,
‘있어도 이 한 법’이고, ‘없어도 이 한 법’이어서 ‘있고 없음’이 모두 이 한 법이니,
‘있다 없다’하는 것 자체가 없다는 뜻이고,
그러니 수능엄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깨달음을 이뤄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일체를 한 법으로 보고 시비 분별이 사라져,
실상을 보는 부처의 눈(佛眼)을 가졌기 때문에 ‘꿈이니 꿈이 아니니’,
‘자느니 깨어 있느니’ 하는 시비 자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꿈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고 앞으로 모든 사람들이 이 법을 깨달을 때까지
끊임없이 말하겠지만, 세상에 만법이 이렇게 각양각색으로 흐드러지게 펼쳐
있어도, 이 모든 것이 오직 이 한 법이 건립(建立)하여 운용하니,
일체가 모두 이 한 법이요, 이 한 법의 일일 뿐이다.
그래서 꿈이라 해도 이 법이요, 꿈이 아니라 해도 이 법이니,
꿈과 꿈 아님이 모두 이 한 법인 것이다.
선요(禪要)를 지은 남송(南宋) 말기(末期)의 고봉원묘(高峰原妙)선사는
15세에 출가하여 24세 때에, 초견성(初見性)을 하고는 천녕사(天寧寺)로 가서
설암조흠(雪巖祖欽)선사를 시봉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5년 후인 29세가 되던 어느 날 설암선사가 고봉을 불러서
“너는 날마다 일상사에서 주재(主宰)가 되느냐?”하는 말에
“네, 주재가 됩니다.” 하고 대답하고, 또 설암선사가
“잠잘 때에도 주재가 되느냐?”
하니 또,
“네. 주재가 됩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설암선사가
“ 그럼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지도 듣지도 못할 때에도 주재가 되느냐?”
하고 묻는 말에 콱 막혔다.
주재란 일상사에 자신의 주인공이 되어 자유자재로 살아가는 것이어서,
주재자와 주재되는 대상이 있어야 주재를 할 수 있는데,
꿈도 없고 생각도 없고 보지도 듣지도 못할 때에는주재의 대상을 알 수가 없으니 어떻게 주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고봉선사는 그곳을 떠나 용수사로 가서는 5년을 끙끙거리다가,
어느 날 밤, 도반이 몸부림치다가 목침을 떨어뜨리는 소리에 홀연히
가슴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는
사주(泗州)의 대성인(大聖人) 친견한 듯하고 如泗州見大聖
먼 길 갔던 객이 고향에 돌아온 것 같네 遠客還故鄕
다만 원래 옛날 그때의 그 사람일 뿐 元來只是舊時人
옛날 그때 밟고 다니던 자리를 떠난 적이 없도다 不改舊時行履處
라는 오도송을 읊었다.
고봉선사가 설암선사의 물음에 말이 막힌 것은 주재자가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너는 반연하는 마음(緣心)으로 법을 들으니 이 법도 반연(攀緣)하는 마음이다.”
하는 그 마음으로 설암선사의 말에 답을 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도반이 잠자는 중에도 몸부림을 치면서 목침을 떨어뜨리는
소리에 주재자(主宰者)가 자신이 아니라, 이 한 법임을 홀연히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깨어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이 한 법임을 깨닫고 하니,
지금까지 수행도하고, 번민도 하고, 막히기도 하고, 끙끙거리기도 하고,
마음이 활짝 열리기도 한 것도 모두 이 한 법이 하고 있었음을 알고,
그동안, 이미 삼라만상의 모든 일을 이 한 법이 하고 있는 것을, 공연히
자신이 이리저리 생각으로 헤아리면서 엉뚱한 짓을 하려 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오도송에서
“원래 옛날 그때의 그 사람일 뿐 옛날 그때 밟고 다니던 자리를 떠난 적이 없도다.”
라고 하였다.
옛날 그때의 그 사람이나, 옛날 그때 밟고 다니던 자리나 모두 사주(泗州)의
대성인(大聖人), 즉 이 한 법을 말한 것이며,
그 자리를 떠난 적이 없는 것처럼
이 한 법이 삼라만상을 내고 움직이고 있으며 삼라만상 그 자체이니,
어찌 단 한 순간이라도 깨어있지 않으랴?
이 사실을 모를 때의 고봉선사는 ‘내가 있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속아서,
아니, 자신이 ‘내가 있다’는 생각에 속는 것조차도 모르게 속아서,
자신이 주재를 하려고 하였으니, 어찌 그럴 수가 있었겠는가?
지금에 이 공부를 하는 사람의 거의 대부분이 고봉선사처럼, 자신이 하는 공부가
‘내가 있다’는 한 생각에 속아, 생각이 지은 공부를 하면서도, 그것이 스스로에게
스스로 속고 있음을 눈치도 못 채고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이 한 법을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의심치 않고 있는 것이다.
속는 것을 알면 그나마 났지만, 속는 것조차 모르고 있으니 어찌 진짜 꿈
(망상, 실제의 잠에서 꾸는 꿈은 법의 작용이요 일이지만, 망상은 생각이 지은
허깨비 같은 일이니 진짜 헛된 꿈이다.)에서 깨어날 수 있겠는가?
몇 십 년 전에 오매 일여니 숙면 일여니 하고 세상을 떠들썩한 적이 있었다.
그 여파로 아직도 꿈과 생시가 똑 같은 상태가 되어야 제대로 된 수행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는 그 사람도 자신이 스스로에게 속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또 옆의
뭇 사람들을 현혹하여 아직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우기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는 이 한 법의 본 자리를 알지 못하고 생각으로 헤아려서 만든 수행이기 때문에,
생각을 따라 가는 것이라 아상을 더욱 견고하게 할 뿐이고,
물론 그 행위가 주는 만족감은 생각으로 지은 이 자리의 느낌에서는 충만할지는
몰라도, 실상인 이 자리를 아는 데는 티끌만한 이익이 없을 것이요,
오히려 아상만 높아갈 뿐인 꿈속에서도 꿈속의 일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한 순간에 번쩍 정신이 들어
‘아! 모든 것이 이 한 법이 하는데 내가 하려 하는구나!’
하고 알아버리면, 더 이상 자신의 생각으로 헤아리거나, 또 자신이 하려는 것을
멈출 수가 있을 텐데, 수행에 물든 사람이 어찌 그리 쉽게 스스로 수행을 놓을
수가 있겠는가? 참으로 지난(至難)하고 지난(至難)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꿈을 꾼다, 꿈을 꾸지 않는다. 또는 꿈이다 생시다 하고 시비하는 것은 모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반연하는 마음에서 보이는, 그야말로 꿈(망상)일 뿐,
우리가 꿈을 꾸고 있으나 생시에 있으나, 사주의 대 성인(이 한 법)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같은 일이요, 하나의 일이다.
그러니 오매일여(寤寐一如)니, 숙면일여(熟眠一如)니 하는 헛된 꿈에서
얼른 깨어나라.
- 적천 윤기붕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기 초대받지 않은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가 초대하지 않은 건 당신이 싫어서 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단지. 그 역시 용기가 없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서 바라만 보고있다면 당신은 그와 사랑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존재를 그가 눈치챌 수 있도록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는 현명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당신이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당신은 그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발견하고 정말 아름답다 정말 신기하다 단지 그 느낌만으로 그 꽃을 사랑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조금씩 다가가세요. 꽃이 너무 놀라지 않게 꽃이 너무 당황하지 않게 그렇게 조금씩 다가서서 당신이 있음을 깨닫게 하세요. 사랑하기에,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 당신은 한번 더 참아 본적이 있나요. 그 것을 참아낸다는 것은 인내입니다. 한번 사랑한다고 말해버리고 나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당신이 만들어 놓은 사랑을 행복했던 만큼 더 슬프게 깨뜨려 나아가야 하니까요. 혼자서만 사랑한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이 슬퍼한 만큼, 아파한 만큼. 당신은 그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출처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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