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것'하는 이 마음자리는 뭘까??

2015. 10. 17. 21:15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선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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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것'하는 이 마음자리는 뭘까??

법은 100% 다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가 부처이고 진실이라고 합니다.

두두물물이 진실이고, 서있는 자리가 진실하다고 합니다.

선어록에서 학인이 법이 무엇인지 질문을 하면 선사들은 주저없이 '차 한잔 해라'

라든가 '컵'이라든가, '아랫마을의 쌀값이 얼마냐?'라고 말합니다.

혹은 학인의 이름을 부르거나 방망이로 때리고 고함을 치기도 합니다.

무엇을 가리켜 보여주고 싶었을까요? 어떤 의도로 이런 납득할 수 없는 대답이나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것일까요?

​ 모두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있는 그대로라는 것이 우리가 알고 이해하는 있는 그대로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있는 그대로'는 있는 그대로가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가 가리키는 말의 뜻을 따라간 '있는 그대로'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참은

액면 그대로 있는 그대로입니다. '있, 는, 그, 대, 로' 어떠한 의미화가 진행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냥 '있 는 그 대 로'입니다.

'있 는 그 대 로'라고 무심히 말해보십시오. 여기에 어떠한 의미와 말이 가리키는 

 무언가를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있 는 그 대 로. 이게 진짜 있는 그대로입니다.

'뜰앞의잣나무', '차나한잔해라'가 바로 그것입니다.

뜰 앞의 잣나무라는 사물이나 그것의 상징이나 그것의 뜻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아무 뜻도 맛도 의미도 생각도 없는 '뜰앞의잣나무' 입니다.

법을 말하는 말을 방편설이라고 합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반만 얘기한 것입니다.

만약 말한 내용을 따라간다면 놓아버려야 할 것이지만, 내용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방편의 말 액면 그대로 법입니다. 온갖 법을 말할 때 그냥 그대로 법입니다.

​ 법문뿐만 아니라 일상의 대화가 그대로 법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말이 법을 설하는 것이고, 이 세상 모든 현상이 일진법계인

것입니다. 온갖 것에 있는 그대로가 법이지 그 현상의 이면에 깊은 요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조심하십시오.

'일상의 대화가 모두 법이고 모든 현상의 법이다'라는 의미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그런 뜻을 헤아리고 간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유로이 온갖 것을 다 쓰고 생각할뿐 뒤가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법을 물으면 바로 이것!이라고 합니다.

똑똑똑, 책상을 두드리기도 하고 손가락을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할 때 '바로

이것'하는 이 마음자리가 무엇일까? 그것이 알고싶다는 마음이 발동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분별심으로 법을 구하는 행위이고 영원히 쉬지 못하는 미혹에 갇히는

일입니다.

​ 왜 바로 이것에서 끝나지 않고 바로 이것하는 이면의 마음자리를 다시 생각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분별심의 전형적인 패턴입니다.

우리는 말과 말이 가리키는 뜻을 늘 분별하며 살아왔습니다.

나무를 말하면 나무에 해당하는 사물을 연상하고 그립니다. 이 분별의 습관이

자동화되어 법도 이렇게 구하고 찾고 알려고 합니다.

그러나 법은 2차원적이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이에 반해 분별의식은 3차원적

사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액면 그대로 드러난 것 이면의 뜻의 그림자를 그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면의 뜻을 찾는

행위도 생각이라는 현상이 드러난 것이지 현상이면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3차원적 깊이로 받아들입니다. 나무라는 말 뒤의 나무라는

생각이 이어진 것인데, 나무라는 말의 심층적 뜻으로 입체화하여 받아들이지요.

바로 이것도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끝인데 바로 이것이 가리키는 무언가가 있을거야라고 말입니다.

어떤 것에 해당된 무언가가 있다면 둘입니다.

나무는 그냥 나무일 뿐이고 나무라는 물체는 그냥 그것일뿐이고, 나무라는 머리속의

그림은 그냥 그것일뿐입니다. 깊이가 없습니다. 이면이 없습니다. 두개가 없습니다.

만법에 자성이 없다는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나무라는 말, 나무라는 한 생각일뿐 그러저러한 실체가 없다.   
 
바로이것!
그냥 아무뜻도 의미도 없는 바로이것입니다.

바로이것!
그냥 바로이것에서 끝난 것입니다.

바로이것!
뒤에 찾아야할 마음자리가 따로 없습니다.

모든 것이 액면 그대로 입니다. 그 현상 이면에 깨달아야할 법이 따로 없습니다.

찾아야할 도리가 따로 없습니다.

모든 경험, 모든 현상, 모든 심상이 나타났다하면 바로 그것뿐인 것입니다.

​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이 평등한 것입니다.

모를때 모른다는 뒷생각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모른다가 그대로 법입니다.

손가락을 드는 일, 뜰앞의 잣나무, 마삼근, 똥막대기,... 아무 뜻도 맛도 의미도

배경도 그림자도 잔상도 없는 그냥 그대로 법입니다.

온갖 말이, 온 세상이 아무 맛도 뜻도 의미도 없는 그대로 평등합니다.

현상의 물결 이면의 물이라는 심연이 따로 없습니다.

그냥 보여지는 현상 그대로가 다 인 하나.

​ 이것이 진실이 발가벗겨져서 드러난 실상이고, 있는그대로이고, 허공성, 공성입니다.

이것을 만법에 자성이 없다 하는 것이고 이것이 불이법입니다.

그래서 <유마경>에 비구가 죄를 지었어도 유마힐이 참회할 죄가 공하다고 한 것입니다.

달마대사가 양무제에게 아무런 공덕도 없다고 한 것입니다.

왜 비구가 계율을 어긴 바가 없겠습니까? 왜 양무제의 공덕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실로 그러할지라도 액면 그대로 그것이 다이지 다른 깊은 체성, 자성, 독자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육조단경>의 무주(無住), 무념(無念), 무상(無相)이고, <금강경>에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입니다.

모든 것에 자성이 없어 텅비어서 머물만한 곳이 없으니, 자연스레 머문바 없이 마음이

나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존재본연의 상태이고 청정법계이며, 세상의 참모습입니다.


세속생활에서는 온갖 말을 따라 의미를 알아야 원활하게 생활하겠지만 법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분별심으로 법을 추구하면 영원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법은 전부 드러나 있습니다.

드러나는 족족, 경험되는 족족 그것일뿐 깊은 3차원적 의미가 없습니다.

​ 법을 가리키는 말에 속지 마십시오. 말 그대로일뿐입니다.

​ "법이 뮙니까?"
법이 뭡니까?

다 드러났습니다.


- 몽지릴라 밴드에서 릴라님의 법문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때는
    친구를 사랑하는 맘이 남아 있을 때이고
    세상에서 가장 울고 싶을 때는
    친구가 내 곁을 떠나갈 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고 싶을 때는
    친구가 점점 변해 갈 때이고
    세상에서 가장 두려울 때는
    친구가 갑자기 차가워 질 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할 때는
    친구가 나의 존재를 잊으려 할 때이고,
    세상에서 가장 웃고 싶을 때는
    친구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마울 때는
    친구가 나의 마음을 알아 줄 때이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할 때는
    친구가 내 곁에 머물러 있을 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다정스러울 때는
    친구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믿고 싶은 것은
    친구가 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친근하게 느낄 때는
    친구의 손을 꼭 잡고 마주 앉아 있을 때이고,
    세상에서 가장 외롭다고 느껴질 때는
    친구가 내 곁에 없다고 생각 될 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바라고 싶은 것은
    친구의 맘속에 내가 영원히 간직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나의 친구
    이 글을 읽는 바로 당신입니다.

    출처 : 좋은 글 중에서


    나오는 음악 : Una Vez Mas - Myriam Hernande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