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신(痕迹神) 흔적천(痕迹天) 도는 어디에 있는가?

2015. 10. 24. 20:0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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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신(痕迹神) 흔적천(痕迹天)
도는 어디에 있는가?

 

 

 

 

불교닷컴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I. 사업을 하려면 차용(借用)은 필수이다

<장자> 지북유에 장자와 동곽자 사이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습니다.

동곽자가 물었읍니다.
“도는 어디에 있는가?”


“없는 곳이 없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지적하여 말해 보시오.”


“쇠파리에 있다.”


“도가 그렇게 지저분한 곳에 있는가?”


“가라지나 피 같은 잡초에 있다.”


“어째서 하찮은 것에 있는가?”


“옹기조각에 있다.”


“왜 점점 심해지는가?”


“똥오줌에 있다.”


“......”

장자가 말했읍니다.

“당신의 질문은 본질을 말한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물을 벗어나 도를 이야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지극한 도는 이와 같고, 위대한 말도 이와 같다.”

 

<장자 지북유: 김교빈, 이현구의 <동양철학 에세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습니까?

‘초목와석(草木瓦石 풀 나무 기와 돌)도 모두 불성이

있다’는 중국 선불교의 ‘초목와석실유불성 사상’과, 부처가 뭐냐는 질문에 대한 운문선사의 답인 ‘간시궐(幹屎厥 마른 똥막대기) 화두’ 등 말입니다. 잡초와 옹기조각이 바로 초목와석입니다. 똥오줌은 간시궐이구요. 장자가 말한 대로 모두 구체적인 사물들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도가 있는 곳으로 쇠파리를 들었다는 점입니다. 파리의 일종인 초파리는 유전자가 60%나 사람과 일치합니다. 누가 “사람에게 도가 있다면 초파리에게도 60%정도는 있는 거 아니냐?” 하고 주장하면, 그냥 헛소리라고 내치기는 뭐 할 겁니다.

 

남의 말이나 이야기를 이용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인간의 역사가 그러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의 모세오경의, 즉 기독교인들의 구약의, 노아의 홍수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길가메시 신화를 빌려온 것입니다. 이곳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지역이므로 홍수가 그것도 큰 홍수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막이 많은, 그래서 홍수와는 거리가 먼, 가나안 지방의 종교인 유대교에 대홍수이야기가 삽입되는 사연(事緣)입니다. 학자들은 유대인들이, 당시 지금의 뉴욕에 해당하는 국제적인 문화중심지,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갔을 때 배워온 것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빌려온 이야기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식탁에서 갑자기 손님이 암살자로 돌변해 달려들 때, 달리 다른 무기가 없다면, 식기인 포크나 젓가락을 빌려 호신용무기로 사용한들 뭐가 문제이겠습니까? 눈이나 명치나 목젖을 정통으로 찌를 수만 있다면 소기(所期)의 효과를 보고도 남을 것입니다.

 

 

II. 부실사업은 과감히 정리하라

 

초점은 불교가 도교에서 빌려온 파리, 초목, 옹기조각, 똥오줌으로 새로운 의미를 창출했는지 여부입니다. 만약 돌, 나무, 물에도 사람처럼 보고 듣는 의식이 있고 심지어 피를 흘리며 복수할 수 있다고 믿으면, 이는 엉뚱한 방향으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한 것입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큰스님들 중에 이런 분들이 있으니 대원스님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런 절집문화 때문인지 진제종정스님은 진화론을 범주적으로 부인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현재 불교는 초기불교에서 퇴화한 점이 제법 많아 보입니다. 뭔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불교 근본교리인 무아론(無我論)과 자업자득(自業自得)에 어긋나는 생전예수재, 천도재, 49재 등 말입니다. 철학이 잘못되면 행으로 반드시 나타납니다. 뒤틀린 모습으로 발현됩니다. 현대과학과 지식수준에 안 맞고 한참 뒤떨어지는 괴이한 이야기들은 불교인들에게 괴이한 행동들을 유발할 뿐이며, 이것이 현대한국불교의 문제의 근원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상습적으로 친딸을 성폭행한 인면수심 아비를 잡아넣으려하자, 어미가 사법기관에 선처해달라고 탄원을 했습니다. 가장이 감옥에 들어가면 가족이 먹고살 길이 없다는 것이었읍니다. 종종 이런 이유로 형이 감량됩니다. 그래서일까요, 불교에 숨어있는 고질적인 미신적인 면(의식과 교리)을 지적하는 저에게 사람들은 반문합니다. “그럼 당신의 대안은 뭐냐? 대책없이 비판만 하는 것이냐? 우리더러 굶어죽으라는 거냐?” 하고 항의합니다. 옳은 길을 가면 우주법계가 먹여살려주지 않겠습니까? 유학자들은 특히 선비들은 개인적인 유불리(有不利)를 따지지 않고, 심지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옳은 길로 가곤 했습니다. 맹자님이 강조하였듯이 ‘소인은 이익을 보지만 군자는 의(義)를 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초야에 묻혀 살다가도,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이런 정신으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임진왜란과 구한말의 의병장들이 그들입니다. 불교에 둥지를 튼 미신은 그냥 없애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도(道)입니다. 이 풍요로운 자본주의 시대에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습니까? 굶어 죽을까봐 노심초사 애지중지 돌보아야 하는, 비만한 애완동물인, 욕심이 문제겠지요.

 

 

 

   

▲ (왼쪽)고도 6,714미터의 카일라스 산의 위용 불경에 묘사된 모습과 일치해서 수미산으로 추정된다. 수미산 중턱에 사천왕천이 있고 정상에 도리천이 있다. (오른쪽)마나사로바 호수에서 본 카일라스산 원경 초호화 주택단지이자 초고층 주택단지인 타워팰리스처럼 보이지 않는가? 중턱의 사천왕천은 로열층이고, 도리천은 최고층 펜트하우스이다.

 

 

 

III. 야훼와 사천왕천은 낙후사업이다

 

종교도 생물체처럼 진화를 하는 것이고, 진화는 일시에 기존의 것을 없애고 새것을 만드는 혁명이 아니라 쓰던 것을 개량하거나 그 위에 새로운 것을 덧붙여 가는 점진적인 과정이기에, 종교에는 옛날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기독교 구약이 좋은 예입니다. 구약에는 인종청소와 대량학살을 명령하고 인신공희를 받던 미개한 야훼 하나님이 버젓이 남아있습니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이런 야훼의 만행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을 안 하는 점을 보면, 구약의 야훼신은 (최소한 눈뜬 기독교인들에게는) 흔적기관이 분명합니다, 즉 흔적신(痕迹神)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오래된 신인 구약의 야훼를 없애지 않고, 그의 부정적인 속성인 분노와 시기와 질투와 식인(食人)과 도륙(屠戮) 등의 증오(瞋) 본능은 버리고 그가 가진 창조주로서의 상징적인 힘만 빌려와 사랑의 신인 신약의 하나님을 만들었습니다. 야훼가 흔적신으로 전락한 연유입니다. 비유하자면 조선 지배계층이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기를 들다 살해당한 정몽주로부터 (고려왕에 대한) 충성심만 분리하여 그를 충신으로 만들어 문묘(文廟)에 모시고 섬긴 것과 유사한 현상입니다. 정몽주는 문묘18현(文廟十八현) 중 설총, 최치원, 안향 다음입니다.

또 다른 예로서는 불교 우주론에 남아있는 힌두교 신들입니다. 불교는 차마 힌두교 신들을 다 없애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는 생존이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신자가 없지 않겠습니까? 인간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옛날부터 신이라는 소마(soma)를 만들고 거기 취해 살았습니다. (생각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상하게도, 맨정신을 싫어합니다.) 그러니 신들이 다 없어진 텅빈 공허한 하늘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그 위에 불교 우주론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천문학적인 상식과 지리학적인 상식으로 보기에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읍니다. ‘카일라스 산으로 추정되는 수미산 중턱에 사천왕천이 있고 정상에 도리천이라는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6,714m 고산지대 호화주택단지라는 소리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높은 곳에 도시를 만들다니, 그곳은 공기가 희박하고, 바람은 사납게 불고, 날씨는 몹시 추울 거라는 점을 몰랐을까요?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도 이런 낡은 우주관을 믿고 가르치는 것은 ‘사람 꼬리뼈나 고래 뒷다리 같은 흔적기관이 지금도 여전히 유용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천왕천이나 도리천은 이미 그 기능을 다한 흔적기관일 뿐입니다. 사천왕천의 주재신인 사천왕(四天王)이나 도리천의 주재신인 제석천(帝釋天 Indra)은 일종의 흔적신(痕迹神)입니다. 다른 그럴듯한 답이 없었던, 고대 인도인들의 우주적 지적 호기심을 다스려준 기능 말입니다. 그런데 혹시 이런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은 흔적기능마저 사라져 쪼그라진 흔적기관에 누가 살고 있을까요? 혹시 이미 폐도시가 된 것은 아닐까요?

지나가는 길에 말씀드리자면, 우주는 거의 진공입니다. 우주에 있는 물질은 상암 경기장만 한 공간에 좁쌀 하나 있는 정도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주공간에 흩어져있는 좁쌀들이 별들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인 센타우루스 자리의 프록시마까지도 4.3광년이나 걸립니다. 자그마치 40조 km입니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의 27만 배 거리입니다. 이 거리 안에는, 즉 태양을 중심으로 한 반경 40조 km 안의 허공에는 아무 별도 없다는 말입니다.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지요. 이처럼 우주는 비어있습니다. 그런데 왜 밤하늘은 별들로 빽빽이 가득 차있는 것처럼 보이냐구요? 가까운 별, 먼 별 할 것 없이, 별이란 별은 모두 한꺼번에 동시에 이차원 망막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광활한 빈 우주공간을 채워줄 신들이 사라진 우주는 정말 삭막할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인간이 신에 대한 믿음을 버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신이 없이도, 사실은 신이 내는 초대형 소음에도 불구하고, 생명과 우주의 기원과 발생과 전개와 소멸을 성공적으로 설명해온 것이 인간 역사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인간을 한없이 존경합니다.

 

 

IV. 사업을 하다보면 실패는 반드시 일어난다 成敗事業之常事

 

인간은, 의식과 지능이 발달함에 따라 자연현상과 사회현상에서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발견한 이후로, 지적 호기심이 충족되지 않으면 몹시 힘들어 합니다: 우주와 인간의 기원, 생사, 길흉화복, 영고성쇠의 원인을 알고 싶어 합니다. 옳건 그르건 뭔가 그럴듯한 답을 주어서 그 호기심이 마구 날뛰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가짜 젖꼭지를 물리지 않으면 아무거나 마구 집어먹다 크게 탈이 나는 갓난아이 같습니다.) 잘못하면 통제불가능한, 황당무계(荒唐無稽)하고 난폭한 이론을 답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중미(中美) 아즈텍제국인들이 내어놓은 답인, 태양신은 인간을 마구 잡아먹었습니다. 생사람을 무수히 제물로 바쳤으니, 인간의 호기심은 잘 다루지 않으면 몹시 위험합니다. 물에 휩쓸려 죽고, 번개에 맞아 죽고, 가뭄에 굶어 죽고, 더위 먹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던 인간은 천둥, 번개, 비, 구름, 홍수, 추위, 더위, 질병을 관장하는 신들을 만들어내고는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이들을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설사 기도가 안 이루어지더라도 그건 자기 정성이나 행이 부족하기 때문이니, 영문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은 자학의 대가입니다. 이집트와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가거나 로마제국에 멸망당하는 등, 일이 잘못될 때마다 “야훼를 잘못 섬겨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자책(自責)했습니다. 일의 원인과 결과가 명확했습니다. 이민족들이 보기에는 자신들의 신이 야훼보다 더 셌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다 헛소리였지만, 최소한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무시무시한 번개 신이라 불리어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만약 당신이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면 이 번개를 보고 과연 뭐라고 생각할까?

 

인간의 지식은, 인간이 어느 때 어느 곳에 있든지, 시공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 내놓는 답은 항상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답이 없는 것보다는 어떤 형태의 답이라도, 불완전하고 심지어 잘못된 답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더 낫습니다. 앞으로 엎어지고 뒤로 넘어지더라도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즉 더 나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인간 지성의 활동과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미개한 미신과 종교에 대한 믿음을 지금기준으로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리 믿는다면 어떻게 깨인 젊은이들의 비난을 면할 수 있으며, 세인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필자가 흔적기관의 예로 기독교 신 야훼와 불교 신 사천왕과 제석천왕을 들었지만, 잘 찾아보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각자 부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사유하고 수행하여 개발한 지혜로 면밀히 살펴보면 스스로 여기저기에서, 숨어있어 눈에 잘 안 띄는, 흔적기관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유레카! 그렇다고, 건실(健實)한 믿음을 지닌 분들이 그 흔적기관들의 존재와 발견에 대해서, 부인하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워 할 필요는 없읍니다. 사업을 함에 있어서 성공과 실패는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成敗事業之常事). 하물며 생명과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설명하고, 생물계에 만연한 고통의 원인과 그 해소책을 제시하려는 종교에 있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그 실수에서 배워, 새 출발을 하면 그만입니다.

 

 

V. 창업자들이 처했을 어려움을 생각해보라

 

일본불교를 중흥시킨 쇼토쿠(聖德 성덕) 태자는 백제로부터 목수 세 명을 초빙해서 사천왕사를 지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인 금강중광(金剛重光 곤고 시게미쓰, 한국명 유중광)의 후손들이 578년에 금강조(金剛組 곤고구미)라는 건설회사를 만들어 사천왕사 유지·보수와, 나라의 호류지 건립과, 주요 사찰 복원 등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연매출 75억 엔에 종업원이 100명에 이르던 이 기업이 1,400년 만에 파산하여 사라졌습니다. 거품경제 때 토지구입으로 진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감당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2006년에 벌어진 일입니다. 금강조는 일본역사상 최장역사의 기업이었으며, 대대로 이어오면서 운영한 가족기업으로서는 세계최고(最古)의 기업이었습니다. 이런 기업이 한 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서구 자본주의 주식시장 400년 역사에서 지금까지 백년 이상 살아남은 대기업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20세기 대기업들의 평균 수명은 75년에 불과합니다. 131년 전에 다우존스지수를 구성하던, 미국을 대표하던, 우량 대기업들은 지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부단한 혁신이 없이는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세계가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느 것도 당신의 정체성을 항구불변(恒久不變)한 것으로 지켜주지 않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인도대륙의 천년 전통종교 베다교를, 그 방대한 경전을, 생명과 우주의 기원을 설명해주던 가르침을, 누구나 절대적 진리라고 숭앙(崇仰)하던 가르침을, 그리고 그 가르침과 오의(奧義)와 깨달음을 천년 동안 이어온 성스러운 현자들을, 모조리 미신과 사이비 깨달음으로 규정하고, 총체적으로 부정하고, 철저히 타파(打破)하고 혁신하려 했던 석가모니 부처님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자연은 인간의 환망공상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필자>인도에서 촬영한 판공 호수의 모습이다. 티베트어로 길고 좁고 신비로운 호수라는 뜻이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소금물 호수가 완전히 얼어붙을 정도로 혹한의 겨울이 닥치는 곳이다. 히말라야 4.350미터 높이에 있고 길이가 130 킬로미터가 넘는데 티베트에 60%, 인도에 40% 정도가 속한다. 인도인이 촬영한 사진에서 황무지와 하늘과 호수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규석 기자>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點一二口 牛頭不出




조선 성종시대 개성에 가무 절색 기생이 살았다.
예전의 기생이 명기가 되려면 미색 뿐 아니라,
글과 가무에 아주 능해야 했는데 이 기생이 그러했다.

 

기생의 소문은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나
잰틀맨보다 더 급속히 파급되어
팔도의 많은 한량이 모두

이 기생을 아가서 연정을 고백했으나
그때마다 이 기생은 한량의 청을 들어주는 대신
문제를 내고 그 문제를 푸는 조건을 내 세웠다.

 

그러나 희대의 문장가라는 사람도
기생이 낸 글을 풀이하지 못하고 허탈하게 돌아 갔다.
기생은 자신을 사모하는 한량이나 선비를

모두  이렇게 거절하고
언젠가 자신의 글을 풀고 사랑을 나눌 님을 기다리며
평생 기생으로 가무와 글을 익혔다.

 

얼핏 한량이라하면 건달쯤으로 알기 쉽지만
예전엔 한량이라하면
사서삼경은 기본이고
글체가 좋고, 속심이 넓으며
기백이 뛰어나고, 인물 또한 출중하고
무엇보다 풍류를 알아야 했다.



허지만 내노라하는 한량들 어느 누구도
기생의 앞에서 문장과 지혜를 능가할

기량을  가진 한량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루한 중년의 선비가 기생집에 들었다.
기생집 하인들은 남루한 그를 쫒아 내려고 했다.

 

이 소란을 목격한 기생은 선비가 비록 남루했지만
범상치 않은 기품이란 것을 알고

대청에 모시고 큰 주안상을 봐 올린 후
그 선비에게 새 집필묵을 갈아 이렇게 써 보였다.



點一二口 牛頭不出

 

선비는 기생의 글귀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기생의 명주 속치마를 펼치게 한 후 단필로 이렇게 썼다.


 




순간 기생은 그 선비에게 일어나 큰 절을 삼배 올렸다.
절 삼배는 산자에겐 한번, 죽은 자에겐 두번
세번은 첫 정절을 바치는 남자에게 하는 여인의 법도이자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하례다.



그날 밤 선비와 기생은 만리 장성을 쌓았다.
그리고 보름이 지난 후 선비는 기생에게 문창호지에
시 한 수를 적어놓고 홀연히 길을 떠나 버렸다.

 

물은 고이면 강이 되지 못하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꽃은 피지 아니한다.
내가 가는 곳이 집이요, 하늘은 이불이며,
목마르면 이슬 마시고, 배 고프면 초목근피가 있는데
이 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느냐?




이후 기생은 그를 잊지 못하고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며
비단가죽 신발을 만들며 세월을 보냈다.
풍운아인 선비의 발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애틋한 사랑에
손마디가 부풀도록 가죽 신발을 손수 다 지은 기생은
마침내 가산을 정리하고 그 선비를 찾아 팔도를 헤매 다녔다.



정처없이 팔도를 떠돌며 선비의 행방을 물색하던 중
어느 날 선비가 절에 머물고 있다는 풍문을 듣고
찾아가 극적으로 재회했다.
기생은 선비와 꿈같은 재회의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는 선비를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꿈같은 재회의 첫 밤을 보낸 다음 날 
해가 중천에 올라도 움직일 기색이 없는 선비에게

 기생이 물었다.
낭군님 해가 중천인데 왜 기침하시지 않으시온지요?
그러자 선비는 두 눈을 감은 체
이 절간엔 인심이 야박한 중놈들만 살아
오장이 뒤틀려 그런다고 했다.



기생은 선비의 말을 즉시 알아 들었다.
급히 마을로 단걸음에 내려가
거나한 술상을 봐 절간으로 부리나케 돌아왔는데
하룻밤 정포를 풀었던 선비의 방앞 툇마루엔
선비 대신 지난 밤 고이 바쳤던

비단 가죽신만 가지련히 놓여 있었다.

 
 

수 년을 찾아 해맨 끝에 재회한 선비가
홀연히 떠나버린 것을 알고 기생은 망연자실했지만
이내 선비의 고고한 심증을 깨달았다.
선비의 사랑은 소유해도
선비의 몸은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친 기생은
선비의 깊고 높은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하며 평생을 선비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이 기생이 유명한 평양기생 황진이다.
황진이는 평양기생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사실은 개성기생이고 개성여인들은 미색이 뛰어나고
재주가 특출했다고 한다.
황진이가 그토록 사랑한 남자는
저서 화담집의 조선 성종 때 철학자 서경덕이다.




황진이를 만났을 때 서경덕이 푼 황진이의 글 뜻은
點一二口는 글자대로,
點一二口 이고 글자를 모두 합치면
말씀 (言) 자가 되고
牛頭不出 이란  소머리에 뿔이 없다는 뜻으로
牛에서 머리를 떼어 버리면 (午) 자가 되는 것이다.
이 두 글자를 합치면 허락할 허(許)자다.



결국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뜻을
이렇게 사행시로 전한 것이다.
이 글자를 해역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자신을 송두리 바쳐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
황진이의 기발한 사랑찾기가 절묘해서
옮겨왔습습니다.

 



夜思何(야사하) / 황진이 詩


蕭寥月夜思何事(소요월야사하사)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굴 생각하세요?
寢宵轉輾夢似樣(침소전전몽사양)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問君有時錄忘言(문군유시녹망언)
붓을 들면 때로는 내 얘기도 쓰시나요?
此世緣分果信良(차세연분과신량)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바쁠 때 나를 돌아보라 하면 괴롭나요? 반갑나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정겨운가요?


悠悠憶君疑未盡(유유억군의미진)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日日念我幾許量(일일염아기허량)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忙中要顧煩或喜(망중요고번혹희)
바쁠 때 나를 돌아보라 하면 괴롭나요? 반갑나요?
喧喧如雀情如常(훤훤여작정여상)
참새처럼 떠들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