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그치게 하려고 / 릴라님

2015. 10. 31. 20:52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728x90

 

 

욕망을 그치게 하려고

무슨 이유로 우리는 고통을 느끼는가? 마음공부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나?

깨달음으로 이끄는 다양한 수행방법과 방편들이 결국 의도하는 바는 무엇인가?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구원의 대상으로 무언가를 추구했던 것같습니다.

지금의 이 상태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깊은 존재의 불안을 느껴서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벗어나려 했습니다. 어느 정도 세상의 변화를 들여다 보니

언제나 시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변할 것이고

그것은 추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이 불안상태를 벗어난 사람들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들이 어떤 변화를 경험했는지

궁금했습니다. 분명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게 생겼고, 우리네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물리적 환경 속에 사는데 아주 다른 내적 상태를 경험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공부를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출발이지 않나싶습니다. 지금의 상태에 대한 불만족과

존재의 불안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언가를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구원의 대상 혹은 지금의 상태보다 더 나은 상황으로 변화하기 위한 것 혹은 더

나아지더라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남겨져 있으니 이 미진함을 완전히 해소하기 위해

노력아닌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 그런데 공부를 하다보니 무언가를 얻기보다는 무언가를 점점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마음공부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작은 얻으려고 들어왔는데 잃어버리지 않으면 애초의 목적이 성취될 수 없다는

지혜의 눈이 열렸다고 할까요?

사실 마음의 평화나 만족을 추구하게 된 것은 다른 어떤 세속적인 욕망보다 이것이

우선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권력이나 명예나 지위나 부에 대한 욕망이 마음의 안정

혹은 마음의 평화보다 우선 순위라면 마음 공부쪽으로 몰입해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공부에 들어선 사람은 다른 물질적, 사회적 욕망을 버리고 근원적 욕망,

어쩌면 가장 큰 욕망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발심은 쉬운 말로

마음의 평화에 대한 욕망입니다. 만족에 대한 욕망이고 안정에 대한 욕망입니다.

​ 그게 아니라 순수하게 진리를 깨닫기 위한 출발이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이 거대한

욕망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진리처럼 엄청난, 남들이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욕망은 없으니까요. 발심, 즉 깨달음에 대한 갈망이 강할수록 공부를 깊이있게 끌고

나간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실상을 깨닫고보면 이 욕망이 삶의 근원적

걸림돌이었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래에 소개되는 마조 도일 스님과 어떤 학인의 대화는 알려주는 바가 있습니다.

한 승려가 물었습니다.
"스님은 무엇 때문에 이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씀하십니까?"
마조 도일 스님이 말했습니다.
"어린 아이가 우는 것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이다."
"울음을 그친 뒤에는 어떻습니까?"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이 두 종류가 아닌 사람이 오면 어떻게 가리켜 줍니까?"
"그에게 어떤 물건도 아니라고 말해 준다."
"문득 그 속의 사람이 올 때에는 어떻습니까?"
"먼저 그가 대도(大道)를 직접 깨닫도록 해 준다."

​?? 마조 스님은 궁극적으로 대도를 직접 깨닫도록 하기 위해 '이 마음이 부처'라

하기도 하고 '마음도 부처도 아니라' 하기도 하고 인연이 된 사람에게 어떤 물건도

아니라고 해준다고 말합니다.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방편을 쓰는 과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이런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의 공부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고

그것에 맞게 임시방편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 만약 조사나 선사의 말이 진실이고 결정적인 답이라면 이런 말, 저런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이 마음이 부처라고 거듭 말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고 변덕을 부립니다. 이에 얽힌 일화는 많고도 많습니다.

마조 스님의 제자 대매 법상 스님은 마조 스님이 '이 마음의 부처'라는 말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그러고 돌아간 법상에게 수년이 지난 후 사람을 보내어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고 전하라고 합니다.

​ 또 동사 여회 스님은 마조 스님의 제자입니다. 이 분은 마조 스님이 돌아가시고

제자들이 마음이 부처(卽心是佛)라고 주장하며 다니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가 어디에 머무르기에 마음이 부처라고 하는가? 마음은 환화와 같은 것인데

부처를 비방함이 너무 심하다. 마음은 부처가 아니요, 지혜는 도가 아니다.

칼을 잃어버린지 오랜데 이제야 뱃전에 표시를 하는가?"

물론 시작은 현상적인 것이 허망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이 네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느냐. 너를 떠난 세계가 어디 있느냐.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니 그 모든 현상세계의 것들을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뜻에서

이 마음이 부처라고 합니다. 분별하여 집착하는 마음을 부수기 위한 시도입니다.

사실 이 말에 일견 수긍이 갑니다. 자신의 마음을 떠난 세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고 사라짐을 경험합니다.

​ 그러면서 이 마음뿐이구나. 그냥 이것뿐이구나 하며 순간적으로 찾는 마음을 쉬고

안심을 하지요. 불안한 마음이 쉬어지니 울음이 그치는 것이지요.

그동안 밖으로 찾아왔고 헤매던 마음의 습관이 멈추어집니다.

그러나 문제는 밖에서 돌아다니던 마음이 이제는 안으로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라고 할 수도 있고 자기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고 참나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드러나는 현상이 아닌 이 모든 것을 드러내는 이 마음바탕 말입니다.

여기에 있으면 편안하고 아무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지내다 보면 미진함이 느껴집니다. 뭔가에 끄달리면 불편함이 확

밀려옵니다. 마음과 경계사이에 틈이 보입니다.

​ 사실 그동안 우리는 무언가 그럴 듯한 게 있다하면 그것에 매달리는 분별심으로

살아왔습니다. 문득 모든 것을 드러내는 바탕에 대한 자각이 있고 나니 이제는

분별심이 교묘하게 이 하나만이 값어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매달리게 합니다.

다른 여러 가지가 아니라 딱 하나에 집착하게 하고 의지하게 하고 매달리게 합니다.

​온갖 것에 의지함없는 삶을 살아본 적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어떤 실수가 도사리고

있는지 스스로는 모릅니다. 이 마음이 부처라고 하니까, 현상계는 놓아버리고 이제는

본질에 매달립니다. 그때 마조 스님이 이 마음을 쥐고 있는 학인에게 말합니다.

그게 아니다. 마음도 아니다. 주재하는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이 따로 있다면 아직 불법이 아니다. 불법은 불이법이어서 둘이 아닌데 너는

현상계를 떠난 마음이 따로 있다고 여기지 않느냐. 참으로 어안이 벙벙합니다.

언제는 마음이 부처라 해서 이 자리를 확인했는데 이것마저 걷어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의 진실한 말씀을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괜시리 농담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하더라도 이 마음이란 것을 놓아버리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것을 놓아버리면 공에 떨어질 것같고 의지할 데가 없어져서 두렵습니다.

​ 그러나 참 묘합니다. 이 마음이란 것의 변화가 묘합니다. 처음에는 생각이나

사물따라서 이것저것 쫓아다니다가 이 자리에 머물러 있는 마음의 습관으로 변하고

보니 뭔가 챙기고 지킨다는 것이 부답스럽습니다.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말씀을 들으니 스스로의 공부상태가 불완전합니다. 조작이 가미된 것같습니다.

마음이 있다면 마음을 신경써야 하고 마음에 사사건건 허락을 받아야 할 것같은

부자연스러움이 있습니다.

​ 어느 순간 마음이란 것이 스스로의 분별심이 마지막으로 의지한 뗏목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럴 것같은 마음', 혹은 '알 수 없지만 존재하는 마음', '현상계 이면에

이 모든 것을 드러내는 마음' 등등 내면의 속삭임이 작동되고 있음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분별심이 교묘하게 들러붙어서 숨을 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구나, 드러나는 현상 그대로가 하나의 일이구나.

현상과 본질이 둘이 아니구나하고 푹 쉬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이전과는 아주 다른

차원의 쉼입니다. 이전에 온갖 것이 있다가 마음뿐이었다는 자각이 왔을 때도 많이

쉬어졌는데 이제는 달리 신경쓸 것이 없습니다.

사실 마조스님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님을 깨달은 이가 오면 어떤 물건도 아니다라고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라는 것도 가지고 있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불이법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또한 망상이지않습니까?

만약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도리, 본질과 현상이 하나인 마음, 불이법이라는 속삭이 있다면

이게 바로 분별망상이기 때문입니다. 법이란 뭐다라고 할 게 없습니다.

무엇이다라고 하면 모두가 다 관념이지요. 그런데 마음과 현상이 둘이 아니라는 자각이

오면 실제로 하나라는 것도 따로 들고있지 않게 됩니다.

​ 모든 현상과 본질이 둘이 아니다. 경계와 마음이 둘이 아니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는 자각은 둘아닌 하나, 불이법,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것마저

놓아버리게 만듭니다. 만약 이해해서 안 것이라면 쥐고 있겠지만 몸소 깨달았다면

스스로의 내면에서 법이라는 단어가 사라져 버립니다.

모든 것이 빈 말임을 여실히 깨닫게 됩니다.

​ 법은 개념이 아니고 지금 이렇게 춤추고 있는 그대로임을 깨닫게 됩니다.

법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고, 법에서 벗어나는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실로 법이란 법과 법아님의 분별이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법도 법이요, 법 아님도 법이지만, 법도 법이 아니요, 법아님도 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굳이 어떤 물건도 아니다거나, 대도를 직접 깨닫게 해주겠다는 말을

마조스님이 따로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마음 자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드러나는 족족 그것 그대로 그게 아니고,

다른 일이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니 둘이니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가 있는 그대로 텅비어 버리지만 또 백지상태도 아니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 사실 마조스님은 처음부터 '이 마음이 부처'라고 여겨서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분별하여 그것이 따로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게 따로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기 위해 약을 쓴 것입니다.

추구하는 마음을 쉬고 있는 그대로 보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또,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는 말에 그러한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도

아니고, ' 어떤 물건도 아니다'라는 결정적인 답을 준 것도 아닙니다. 

 '대도'라는 것이 따로 있어서 그것을 깨닫게 해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 모두가 깨달음의 마음을 내어 마지감으로 무언가를 욕망하는 이들에게 그 추구함의

허망성을 돌아보고 깨닫게 하려고 적절하게 이끈 말이었습니다.

학인들이 마조 스님을 믿고 가르침의 말을 따라가다가 스스로가 변화를 겪어보니

이제서야 그 변덕스런 말씀에 묻어있는 스님의 진심이 보인 것입니다.

모두가 허망한 것에 사로잡혀 고통받고 있는 사람을 꿈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한

아주 자상하고 친절한 환술이었습니다.

마음공부란 앎이 아니라 헛된 망상의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입니다. 

 이것저것이라고 할 만한 일이 따로 없음을 몸소 깨닫는 일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모든 추구하는 바가 사라지고 온갖 것이 따로 없음으로써 욕망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석가모니도 깨달음 사람을 '불 꺼진 자'에 비유했습니다.

욕망의 활화산같은 불이 꺼진 자.

어느 것도 얻을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습니다. 잃었다면 본래 없던 것을 잃어버린

것이고, 얻었다면 여전히 망상분별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 몽지릴라 밴드에서 릴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