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空’과‘0’

2015. 10. 31. 20:29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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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空’과‘0’

- 空사상 수학에 투시‘0’개념 등장 -
-‘없지만 있다’는 철학적 사유 제시 -

기독교의 <성서> 이슬람교의 <코란>, 유교의 <논어>… 등은 그 교리의 창 시자의 언행을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이들 책을 읽으면 그 종교 사상, 교리 등에 관한 핵심을 대부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는 크게는 소승, 대 승의 구별과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문(法門)이 있 으며 오늘날에도 불교 철학에 관한 새로운 해석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이 들을 분리하여 낱낱이 주목하면 때로는 서로 모순이 되는 어구도 있으나 이 많은 경전과 법문은 큰 바다에 흐르는 강물과 같이 불교의 큰 바다에서 융합 되고 있다.

이 바다 어디서나 다즉일, 일즉다(多卽一, 一卽多), 연기(緣起), 공(空) 등의 사상이 바다위에 반사되는 햇빛처럼 번득이고 있다. 모두는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깊이 얽혀 있다. 모든 현상은 연기에 의해 일어나기에 본성은 공(空)이며 연기의 결과는 다즉일, 일즉다(多卽一, 一卽多)로 표현되고 있다. 불교와 수학은 목적부터 다르므로 불교 철학을 수식으로 표현한 것은 잘못이 다. 그러나 논리적 구조로 보면 다음과 같다.

다즉일, 일즉다(多卽一, 一卽多)와 공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생각하면 다(多)를 2, 즉(卽)을 “=”로서 표현해 2=1이란 곧 다즉일(多卽一)의 방정식 이 생긴다. 이식의 양변에서 똑같이 1을 빼면 2-1=1-1, 즉 1=0이다.

1을 존재하는 것의 단위로 하고 다즉일, 일즉다(多卽一, 一卽多)를 인정하면 존재는 곧 공(空)이다.

수학에서도 1+1=2가 아닌 1+1=1의 논리를 받아들일 때가 있다. 두 개의 불 씨를 합할 때, 두 개의 강물이 합쳐질 때, 전기의 흐름이 합쳐질 때는 1+1=1 이다. 수학에서는 이처럼 물, 전기, 불같은 연속양, 즉 분리할 수 없는 대상은 나눌 수 없다고 한다. 우리 속담의 ‘칼로 물 베기’의 세계이다.

공(空)은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이다. 모든 존재와 현상이 연기(緣起)의 결과이 므로 실체가 없는 공이 실상이다. 또 역으로 빈 그릇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 고, 백지에는 어떤 그림도 그릴 수 있는 것처럼 공(空)한 까닭에 모든 존재와 현상이 성립할 수 있다. 이것을 용수(龍樹)는 중관론(中觀論)에서 ‘일체법 (一切法)은 무자성공(無自性空)’, 즉 자성(自性)없이 모든 존재와 현상이 성 립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공의 사상이 수학에 투시되어 영(零)의 개념이 되었 다. 인도에서 맨 처음 영이 발견된 까닭은 이 공의 사상 때문이었음이 수학 사의 창설이다.

현대인은 초등학교 1학년에서부터 1+0=1, 2+0=2……라는 식으로 0을 배운다. 분명히 0은 수세계의 한 멤버이다. 그러나 처음 인간이 수를 발견한 것은 물 건의 집합 요소의 개수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사과 한 개, 두 개의 돌멩이, 세 마리의 양떼가 있다 …. 이것을 1, 2, 3…으로 표시했다.

겉보기에는 두 개의 돌멩이와 두 마리의 양떼 사이에는 “돌”, “양”만 보 일 뿐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하나씩 대응이 성립한다.

이 사실을 인식한 인간은 “2”라는 수를 추상해 냈다. 이와같이 계속해서 인간은 1, 2, 3…을 알아냈다. B·러셀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인류문명 은 새로운 단계로 비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0을 주상 (鑄商)하는 데는 더 많은 지적 단계를 밟아야 한다. 2는 두 개의 물건의 집합 에 대한 숫자이다. 마찬가지로 0은 아무것도 없는 물건의 집합에 대한 수다.

이때 “아무것도 없는 것이 존재한다” 또는 “없는 것이 있다”라는 언뜻 모순에 가까운 논리적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셈(수)의 문제 가 아니라 공을 실제로 인식하는 철학과 관련된다. 그것은 곧 불교적 ‘일체 법(一切法)은 무자성공(無自性空)’과 통하는 신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