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數와 철학

2015. 11. 7. 19:14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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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數와 철학

空사상 선입견 배제 대상접근 가능
수체계 ‘0’ 개념 도입 획기적 발전

불교의 ‘모든 것은 공(空)’-일체법(一切法)은 무자성공(無自性空)이라는 사상은 그릇된 교육 또는 사회적 통념등에서 오는 모든 선입견을 배제하고 대상의 본질에 똑바로 접근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처음에 공(空)이 있었다’이며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는 것이 유태·기독교의 사상이다. 이들 생각이 시간관에 투영되면 불교의 ‘무시무종(無始無終)’과 유태·기독교의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으로 대조를 이룬다.

인간이 수를 집합의 개수와 대응시킴으로써 1, 2, 3, …과 같은 수를 매우 자연스러운 발생 과정으로 형성했으므로 ‘자연수’라 한다. 그러나 ‘처음 공이 있었다’의 불교적 사유를 따른다면 자연수란 0, 1, 2, 3, … 으로 해야 옳다.

실제로 수학의 기초를 닦았던 수학자들중 페아노는 그것에 따르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수가 훨씬 철학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우리는 이미 처음 수학을 대할 때부터 ‘0’을 배웠으나 상당한 수학 수준을 가졌던 고대 문명사회에서도 0의 기호가 없었다. 수(數)는 하나, 둘, 셋, …이라고 셈하는 것이라고 믿어 온 선입견 속에서 ‘아무것도 없는’ 대상을 현실적으로 취급하여 기호화할 때에는 철학적인 성찰이 앞서야 했다. 가령 중국의 경우를 본다면 ‘0’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一, 十, 百, 千, 萬, 億, 兆, 京, …이라는 식으로 단위가 하나씩 올라갈 때 언제나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야 했다.

一이 10개이면 十,
十이 10개이면 百,
百이 10개이면 千,
千이 10개이면 萬……
이런 식으로 단위가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새로운 단위와 글자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일단 0을 도입하면 수 체계에서는 0, 1, 2, …, 9가지 10개의 수만으로 어떠한 수라도 표시할 수 있다. 주판이 그 원리를 따르고 있다.

이것은 아무것도 없는 ‘공’ 즉 0의 상태이다. 0이기에 어떤 수도 넣을 수 있다. 한글로 506을 나타낼 때는 ‘오백육’이므로 5006으로 잘못 쓰는 사람도 있다. 506을 백의 자리가 5개, 십의자리가 0개, 일의 자리가 6개 있다는 뜻이다. 공(空)은 곧 0으로 표시되어 506이 인도식(이 수체계는 인도에서도 발명되고 아라비안인도 발명했으므로 정확하게는 인도·아라비아식이다)숫자로 불린다. 만일 그것이 없었다면 천문학적인 수를 어떻게 일일이 문자로써 표시해야 하며 또 실제로 계산에는 엄청난 불편이 따른다 가령 ‘3352×207 2’의 계산은 초등학생이라도 할 수 있지만 ‘삼천삼백오십이’ 곱하기 ‘이 천칠십이’로는 좀처럼 셈할 수가 없다.
이 수체계는 기록용이지 계산용은 아니다. 요컨대 0의 발견 없이는 수학의 발전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일이 었다. 0의 개념은 무명의 인도인에 의해서 발견되었으나 그것은 앞에서 말했 듯이 특히 불교의 공(空)의 사상이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은 정보시 대라는데 그것은 전자계산기가 주역이다. 전자계산기의 수학은 {0과 1} 두 개의 수만을 이용하는 2진법의 수체계이다.

10진법 2진법


1 1

2 10=2×1+0

3 11=2×1+1

4 100=22×1+2×0+0

? ?

이것은 {1, 0}↔{유, 무}↔{on, off}로 대응한다.
E·토리첼리가 진공의 존재를 물리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하기 전까지는 ‘진 공(眞空)은 존재할 수 없다’라는 것이 유럽에 있어서는 형이상학상의 전통 적인 명제였다.
‘말씀이 계셨다’에서 시작되는 세계관에서는 “아무것도 없다”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상풍토에서는 공을 수의 대상으로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공이 모든 만물의 실상’이라는 철학을 갖는 정신풍토에서는 자연 스럽게 0을 수로 취급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랑은

                                              인생의 처방이라는

                                              가장 강력한 진통제이다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순간 살아볼만한 곳으로

                                              새롭게 만들어 주는

                                              신비로운 존재이다

                                              인간이 견뎌내야 할

                                              모든 시련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사랑이다.

                                           

                                              - 법정스님의 사랑

 

 


 

 

라즈니쉬의  <선의 최고봉 백장과 대주>중에서

여기 바쇼의 하이쿠(일본 단문 시인)가 있다

지나가는 세월은
시간속의 영원한 여행자라네

그는 왜 이 하이쿠를 쓴 것일까?

 

선에대해 모르는 사람은 이시에서 아무 의미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의 맥락을 아는 사람은 기본맥락은 주시자다 

  
겉으로 보기에 이하이쿠는 주시자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시자에 관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주시자는 거울과 같다
흐르는 세월은 영원한 여행자다
세월이 계속 우리앞을 스쳐가지만 우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우리는 여행하지 않는다. 우리의 존재 전체가 항상 <지금 여기>에있다
몸이 어디에 있건 상관이 없다


하이쿠는 명상가들에게만 의미를 갖는다
모든 것이 스쳐지나간다
별이 가고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고 계절이 바뀐다
세월이 대상의 행렬처럼 지나간다.
그러나 그대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대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머물면서 묵묵히 이 행렬을 지켜보고 있다
결코 움직이지 않는 이 부동의 중심은 그대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의 중심이다
우주 전체가 이중심을 축으로해서 움직인다
이것을 알면 그대는 안주한다
자신의 전체성을 발견한 그대는 릴렉스(relax)한다
모든 욕망과 야망이 사라진다
갈곳도 없고 성취할 것도 없다
모든 것이 당연히 그렇게 존재해야하는 방식대로 존재한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이것을 경험하는 순간에 그대는 붓다가 된다
이것이 우리가 깨달음이라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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