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夜 가을 밤 / 李白(이백)
秋風淸 가을은 바람이 맑아서
秋月明 가을 달이 더욱 밝구나
落葉聚還散 낙엽이 모였다 다시 흩어지니
寒鴉栖復驚 깃들은 까마귀들이 놀라 소란한데
相思相見知何日 못 잊어 그리는 정 언제나 만날까
此日此夜難爲情 오늘 이 밤 따라 더 괴로운 그리움
소우주
인체를 소우주라고 한다.
오장육부의 돌아가는 모습이 우주의 운행 원리와 비슷하고
장기마다 수십억 개의 세포가 어우러지는 모습도 지구 같은 혹성을 닮았기 때문이다.
과학이 밝혀낸 바로는 인체 내엔 수십조 개의 세포가 있으며 세포 안에 다시 독립된
생명체(미생물)가 있고 부위부위마다 세균이 함께 산다고 한다.
그러면서 조직과 조직, 세포와 세포간에 통신하는 기능, 유통 기능, 생산·소비 기능
등이 세상의 어떤 과학적 소산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인체를 일컬어 중생의 국토라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닌 셈이다.
수많은 생명체가 같이 먹고 같이 살고 어울려 돌아가는 모습은 지구 속에서,
나라 안에서 사람들끼리 뒤섞여 사는 방식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세상도 인체도 우주도 모두가 공동체이다.
개개인이 따로 따로 사는 게 아니며 세포나 장기가 따로 따로 움직이는 게 아니며
혹성들이 제각기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니다. 서로 의지하며 서로 주고 받는 질서
아래서 공생하고 있는 것이다.
도를 구하고 이를 세상살이에 대입하면 해탈의 도를 닦아 보살행을 한다는 의미가
되지만, 이를 인체에 대입하면 내 몸을 끌고 다니는 근본을 아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내 육신 속의 수십조 세포를 몽땅 제도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인체와 세상과 우주가 공생·공용·공체의 섭리 위에 존재할진대 ‘나 하나 잘되면 그뿐’
이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반(反)우주적, 반인간적인 사고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일생 생활 중에 좀처럼 공생·공용·공체의 섭리를 자각하지 못한다.
아니, 그것을 자각하기는 커녕 그 섭리를 ‘적극적으로 깨트리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면서 한 술 더 떠서 그런 삶을 유능한 삶, 보람있는 삶으로 간주하기까지 한다.
알게 모르게 짓는 업이 수미산같다한들 틀린 말이라 하겠는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관계는 적자생존의 관계가 아니라 협력생존의 관계이다.
함께 가는 길, 함께 사는 길만이 제 길이요 바른 길이다.
- 불교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