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9. 18:55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동지법문 [갑오년] - 지유스님[知有哲柱]
입정入定 전에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일상日常생활 중에,
살다가 보면, 보고 듣고 알고 생각<見聞覺知>하는 그것이 우리 인생 아니겠어요?
내 자신, 내 안의 생각이, 내 마음이 지금 법당法堂에 앉아 있는 줄 알고 있지요?
맞습니까? (네~) 모르겠다, 이거는 곤란하지요. (웃음)
그런데 이 의식意識이 또렷합니까, 의식 자체가? (네~)
의식<精神>이 흐리멍덩하면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뭐를 하고 있는지, 소리가
나도 뭔지 모를 겁니다. 여러분 그런 분은 한분도 안 계시지요? 그렇지요? (네~)
우리가 ‘마음을 닦는’ 공부를 한다는 것은 외부의 무슨 특별한 기술을 배우거나
글자를 배우는 것도 공부겠지마는, 의식 자체가 또렷하게 맑아야 딱 보면 알아
차리고 탁 들으면 알아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지금 여러분 자기 나이 몇 살인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인생살이 옛날보다 좋아
지고 의약醫藥도 발달되다 보니 환자도 많지만, 그래도 나이 80 90 100살까지
산다고 보고, 내가 지금 50이라면 반半은 왔습니다.
내가 지금 50인데, 내 의식意識이 어떻게 되고 있느냐? 20년 전에 자기의식과
지금의 의식, 20년 전前에 나는 별로 경험도 많지 않고, 보고 들은 것이 있지만
그래도 20년 전에는 지금처럼 경험이 많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식도 많지 않을 거고, 그렇다면 지혜도 그럴 거고, 지금은 많은 경험
을 했기 때문에 살아 가는데 옳고 그르고, 어떻게 잘못하면 병나고, 어떻게 하면
건강健康해진다 하는 것을 경험 했을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러니까 20대 하고, 50대 지금하고, 의식 자체를 비교해 보면 내가 스무 살 때는
산山에 올라 왔지마는 경험도 없고 해서 잘 자빠지기도 하고, 남과 싸우기도 했는
데, 이제 50쯤 되어 보니까 경험도 많고 실수도 안 하고 짱짱하다말입니다.
그래 앞으로 또 20년 지나면 어찌될까? 스무 살 때하고 비교해 보면 내가 이렇게
좋아졌는데 앞으로 20년 지나, 70대 되면 아마 팔팔 날아 다닐거다 그렇지요?
그렇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공부한다는 거는 뭡니까? 뭐 때문에 이 산중에 올라와 가지고, 부처님 법
문 듣는다고 부처님이 우리에게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사탕 주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깨달았다 하시면 무엇을 깨달았는지, 또 깨치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깨치지 못하고 있는데, 깨치지 못하고 보니까 온갖 고민이 있고, 짜증나고
살아가는데 괴로움을 참기도 어려운데, 이런게 왜 그럴까? 깨닫지 못해서 그렇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다 하는 것이냐?
그렇지요? 깨달으면 어찌 되노?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어찌 되냐?
깨달은 사람하고 깨닫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봅시다. 나는 어느 축에 들어가는가?
내가 깨달은 축에 들겠나, 깨닫지 못했나? 그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공부를
하긴 했는데 아직까지는 깨달았다고는 볼 수는 없는 것같단 말입니다.
어째서? 살아가는데 짜증도 나고, 괴로움도 많고, 마음이 편치 않아, 깨달았다면
그런 게 없다고 들었거든, 그런게 있는 거 보니까 내 딴에 애쓰고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아직 깨닫지는 못했구나 합니다.
그럼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깨달았다는 말일까요, 세계라고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시간時間 아닙니까? 동서남북 처
소, 공간空間이 있습니다.
과거라고 하고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부터인지 그 시작이 있나요?
그때부터 시작했다고 하면 그 전에는 뭐냐고 물어보면 아하! 그렇구나..
우리가 허공Space의 끝을 찾아 나서면 찾을 수 있나요? 허공空은 끝이 없습니다.
시간Time도 마찬가지입니다. 끝없는 과거로부터 지금 현재, 앞으로 내일 모레 끝
없는 미래까지, 또 내가 현재 앉아있는 이 자리에서 사방으로 보면 이 공간도 끝이
없잖아요?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宇宙Spacetime>을 깨달았다 이말 아닙니까?
끝없는 과거, 끝없는 미래, 끝없는 허공 전체,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밖으로
표현하자면 법계의 진상眞相이다, 그 법계의 참모습眞相이란 무엇이냐?
가장 가까운 데, 과거에서 제일 가깝고, 미래에서 가장 가깝고,
동서남북東西南北 상하 중에 제일 가까운 자리가 어디겠습니까?
‘지금 이 자리’아닙니까? 그렇지요? <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是>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일
가까운 데 자기自己를Now 두고서도 자기를 모르고 있단 말입니다. <騎牛覓牛>
부처님께서 깨쳤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는 마음을 알았다는 것입
니다. 원래元來..이것은 어디서 생긴 것이 아니고, 누가 만들어 준 것이 아닙니다.
만일 모든 것이 생겼다고 하면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생기고 여기로 돌아갑니다.
‘여기’라고 하는 자리가 어딥니까?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갖추고 있는 곳입니
다. <天眞自性 人人具足 圓覺妙體 箇箇圓成>
‘여기’서 화도 나고, 고통스런 생각도 나고, 만 가지 고민도 나고 스트레스도 일어
납니다. 그게 전부 ‘여기’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어난 모습에만 사로잡히
고 있지, 일어난 그 자리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왜 출가를 하셨나 하면 인간에게는 생로병사라는 문제가 있잖아요.
아무리 내가 권력權力이 있고, 재물財物이 많고, 머리가 좋다知識 하더라도 사람
몸으로 태어난 이상 한 달 두 달 세월이 흘러가게 되면 늙는다, 그렇지요?
늙게 되면 젊은 때와 같지 않게 몸이 병이 나고 병을 앓다가 마지막에는 죽음이
탁 오거든, 생로병사生老病死 중간에 노병老病을 빼버리면 생사生死 아닙니까?
난 자가 왜 죽어야<生者必滅> 하는가?
사람은 누구든지 죽기는 싫다 이겁니다 혈육을 나눈 가족친지하고 이별하기 싫고
영원히 행복하고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데 그게 안 되거든 야, 이거 어떻게
하는 방법이 없나, 하고서 큰 맘 먹고 이를 밝히려 출가하신 것아닙니까?
이제 그것을 어떻게 해결했는가 하면, 자기 마음 깨달음으로써 해결하였습니다.
‘마음’을 깨달았다, 마음이란 것은 자기自己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늙고 병
들고 죽는다고 하는 것은 육신身體을 두고 하는 소리거든요.
우리가 육신肉身이라고 하는 고깃덩이 속에 잠시 들어앉아 있으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소리 듣고 그러면서 온갖 생각을<見聞覺知>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 몸이 천
년 만년 동안 유지할 수 있나요? 생로병사生死하여 버리는데 나는 뭐냔 말이지요?
‘나’는 육신 속에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는 ‘이것’을 이름으로 구분하여 몸과 마
음이라고 하는데, ‘마음’이다 이 말입니다. 이 자리는 육신이 생겼다 해서 생기고,
육신이 사라졌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마음’을 깨닫고 보니까 이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몸은 왜 늙고 병들어 죽느냐, 태어났기 때문에 없어진다. 그럼 왜 생겼느냐?
생겼기 때문에 없어진다고 했거든, 그럼 생기지 않으면 될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왜 생겼느냐? 생기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을 텐데 왜 생겼느냐?
없어지기 때문에 생긴다, 또 이렇게 되거든요. 도대체 이게 뭐냐?
없어졌기 때문에 생기고, 생겼기 때문에 없어지고..자꾸 반복이다 이거라<허허>
그런데 우리의 본심<淸淨心>, 본래의 마음자리는 생긴 일이 없답니다.
요말이 참~ 어려운 말입니다.
지금 마음이 여기 있는데 생겼기 때문에 있지 않나, 생기지 않았으면 어찌 마음이
있겠노? 이러거든요. 우리는 있으면 생겼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원래元來 이거라.
이 몸은 부모父母의 인연으로서, 우리가 몸<精血>을 받아서 생겼지만, 이 마음은
부모가 만들어 줄 수도 없고, 외부의 신神이나 조물주가 만들어 줄 수가 없어요
각자各自 '스스로가 스스로다' 입니다.
자~ 어디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데,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맨 처음 생겼다고 보면,
생기기 이전을 불교佛敎 에서는 ‘마음’이라고 안 하고 ‘한 물건’一物이라고 합니다.
물건이라니까 눈에 보이는 이런 물건이 아니고,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한 물건!. 모든 것이 생기기 이전에 ‘일물’一物이
먼저 있었고, 모든 천지 우주 삼라만상 만물이 다 없어지더라도 이 ‘일물’은 변变
하지 않는다 그렇지요.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내가 있느니라 - 요 8:58>
그것이 나의 주인공이라, 부처님이 ‘마음’을 깨닫고 보니까 생로병사生老病死
문제가 해결되어 버렸어요. ‘이것!’은 생사生死하고 관계가 없다 말입니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은 깨달았기 때문에 그렇지만, 깨닫지 못한 일반 중생들이야
어디 그렇겠나? 하고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깨닫지 못한 일체 중생衆生들
도 똑같이 불생불멸의 본래의 마음<眞如自性>을 갖추고 있어요.
누가 그것을 건드리거나 무너뜨릴 수도 없는 영원한 자기의 본심本心을 갖추고
있는데 다만,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돌멩이나石 나무토막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이러쿵 저러쿵 생각<思量分別>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 점은 이해하지요? 여러분도 맨날 오늘은 뭘해야 하나? 이러지요, 마음이란
거는 항상 산란스럽게 이러쿵 저러쿵 생각하고 있습니다<動卽魔音>그렇지요?
생각生覺이 복잡하면 어째 됩니까, 편안합니까? 복잡하면 아~ 피곤해 죽겠다
고 합니다. 편안便安한 사람은 복잡한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 항상恒常
이러쿵 저러쿵 생각에 끄달려 자기 본래의 모습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어요.
잊어버리고 있다고 하는 것을 부처님의 말씀으로 보면, 자기의 마음에서 일어나
는 생각들에 사로잡혀 배운 사람은 배운대로, 기술자는 기술자대로 자기 나름대
로의 지식, 가지고 있는 거기[識]에 사로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허망한 집착<妄執>으로 말미암아 원래의 마음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헤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생사윤회라, '마음'은 윤회輪하는 것이 아닙니다.
윤회라고 하는 것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래야 되나, 저래야
되나, 어떻게 해야 되나 그렇게 헤매고 있는 것을 생사윤회廻라고 하는 겁니다.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지, 마음은 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眞如是念之體 念是眞如之用>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문득 떠올랐다, 그러면 생각이 무엇입니까? '자기'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요? 생각을 자기自己라고 볼 수 있어요? 아닙니다, 생각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없어지고 맙니다.<念上生住異滅>
생각을 '자기'라고 한다면, 생각이 났다가 사라지면, 나도 없어졌다고 해야 될 거
아닙니까? '나'는 여전히 있거든. 아하, 생각은 나로부터 났지만 '내'가 아니구나!
그래, 사람들이 불생불멸<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空中無色>마음
을 부처님과 똑같이 갖추고 있는데, 다만 일어나는 생각에 사로잡히다 보니 자기
自己마음을 깨치고자 생각을 하고 있지만 도리어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지금이라도 내가 어떤 생각塵勞에 사로잡혀 있는지, 감정感情에 사로잡혀 있거나
욕심慾心에 사로잡혀結縛 있거나 자기를 가로 막은 이런저런 생각을 털어버리면,
깨치기 싫어도 깨쳐진답니다.
깨치기 싫어도 깨쳐진답니다, 거 참 희한하지요.
우리가 그렇게 마음을 깨달아야겠다고 해서 절에 와서 선방禪房을 쫓아다니면서,
화두話頭도 타고, 염불念佛도 하고, 기도도 하고 다라니陀羅尼도 하고 별별 애를
썼는데도 못 깨쳤거든, 그렇잖아요?
그래, 깨닫기가 참 어렵구나!.. 이렇게 했는데 망상妄相 집착執着을 털어버리면,
깨치기 싫어도 저절로 깨쳐진다고 그랬어요. 여기 큰 힌트hint가 있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왜 못 깨닫는가 하면 깨닫는데 방해妨하고 있는 방해障碍물이 있어요.
그게 뭐냐? 바로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觀念>아닙니까, 깨달아 보겠다고
하는 것도 결국 생각 아닙니까?
깨달아야 되겠다고 하는데 왜 안 깨달아 집니까? 깨달아야 되겠다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정녕 내가 깨치고자 하는 마음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역대歷代 선사들, 조사祖師 스님도 깨닫기 전에는 우리와 똑같이 고민도
하고 생각도 많이 하고 무진한 애를 썼는데 깨달은 대목에선 빙긋이 웃는답니다.
우리는 깨달았다고 하면 뭔가 특별한 것이 따로 있을 것으로 보지요? 그렇지요?
우리는 아직 깨닫지 못했으니까 이렇게 고민하고 고생하고 있지만 깨친 사람은
지혜가 특별히 뛰어나서殊勝 우리처럼 이렇게 고통이나 괴로움이 없을 것이다,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따로 있다고 보고 있거든요. 그렇지요? 이게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라. 깨닫고 보니 그런 것이 없더란 말입니다. 깨달은 사람
의 얘기를 들어보면, 깨치면 어떻습니까? 궁금하잖아요.?
깨치고 보면 너희들하고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다. 깨달은 사람도 너희들과 똑같
이 배고플 때 밥 먹고, 목마를 때 물 마시고, 피곤하면 쉬어가고, 깨달은 사람이라
고 일해도 피곤하지 않다 그런 법은 없다. 일을 많이 하면 피곤하다.
그러면 쉬었다 하고, 한겨울에 추울 때 깨달은 사람은 추워도 얼어 죽지 않는다.
그런 법은 없다, 깨달은 사람도 한데서 벌벌 떨고 있으면 동상凍傷 걸린다. 그러
니까 옷을 껴입고 여름에 더우면 얇은 옷을 입고 너희들하고 똑같다 이거라.
또 용변 보고싶을 때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해서 뭐 어데 특별한 거 그런 거 없다.
너희들과 똑같이 화장실解憂所에 간다, 특별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無無亦無>
그럼 깨쳐도 별 수가 없네요, 그러면 뭐하러 깨치려 하나요? 특별한 뭐가 있어야
우리가 고생하면서 공부 하려 애쓰는데 깨쳐도 그렇다면 깨칠 필요가 없겠네요.
글쎄, 그런데 다르다. 그런 속에, 깨달은 사람은 지금까지 생활해 온대로 배고플
때 밥 먹고, 목마를 때 물 마시는 것은 똑같은데,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은 탁!~ 안정<平常心>이 되어 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마음은 안정, 병病이 나도 안정, 건강해도 안정, 가난해도
안정, 부자가 되어도 마음이 들뜨거나 그런 것이 없이 항상 안정安定되어 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나는 돈이 없기 때문에 불안하고, 그렇다고 돈이 있는 사람은
편안하냐 하면 그렇지도 않아, 나는 권력이 없기 때문에 불안不安하다 그럼 권력
이 있는 사람은 항상 편안하겠다 그 말 아닌가? 절대 그렇지 않다.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가난하면 가난해서 불안하고, 재산이 많으면 많은 대로
불안하고, 권력이 없으면 권력 없는 대로 불안하고 있으면 있는 대로 불안하고.
왜? 깨닫지 못해서 그렇다 입니다.<하하하>
깨달아 버리면 어째서 마음이 편안한 겁니까? 우리는 뭔가 부족할 때 불안不安
하지만, 많이 있으면 넉넉하니까 생활에 여유가 있으니까 편안해 졌다고 보고
있거든요. 그렇지요?
그럼 재산財産이 많이 있는 사람은 더 편안해 질 거 아닙니까? 그런데 아니란
말입니다. 어느 정도 조금 많은 것은 괜찮은데 너무 많으면 더 불안不安하지요?
조금 있을 땐 몰랐는데 너무 많아 불안하다면 덜어내 버리면 될 거 아닙니까?
남 주지 뭐 다 갖고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안 그렇거든, 욕慾심이, 탐貪심이
있다 이거라.
깨달은 사람은 절대로 탐貪心을 내지를 않아요. 배고플 때 밥 먹고, 목마를 때
물 마시는 것은 탐貪이 아니거든. 탐심을 내는 사람은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근본자리'를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면 깨달음은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느냐? 무엇을! 그렇지요? 간단하게
‘마음’을 깨달았다 입니다. 하면 마음은 도대체 무엇을 마음이라고 하느냐?
<摩訶大法王 本來非皂白 無短亦無長 隨處現靑黃>
마음이란 물건이 아니거든 모양이 있다면 검다 희다 크다 작다고 할 수 있지만
마음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없는 거 아
닙니까? 그렇잖아요? 그렇지만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거 뭔가, 저거 뭔가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眞如自性起念 六根雖有 見聞覺知>
나무토막은 모양이 있지만 생각을 못하고 감각도 없습니다. 마음은 이런 물건처
럼 모양은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쿵 저러쿵 잠자리에서 눈만 뜨면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누가 하고 있느냐, 마음 아닙니까?
그렇지요? 여러분 자신이 마음이다 입니다. 그런데 내 자신이 마음이면서 내 자
신이 슬프고 괴롭고 화를 내고 하는 것을 내가하고 있는데, 이 생각하고 있는 원
래 모습, 원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생각들이 일어나기 전에 원래 모습이
있다.<一念不起處>
본래 파도 생기기 전에는 원래 물이 있었다 그렇지요? <波卽水 水卽波>
파도는 외부의 바람에 충격을 받아 출렁출렁 흔들리고 있는 것을 파도라고 하잖
아요. 이 파도가 어디에서 일어났느냐 하면, 파도 일어나기 전에는 원래 잔잔한
물이었을 거 아닙니까?
돌을 던졌다든지, 바람이 일던지 중력이나 외력의 충격 받고 물이 출렁출렁 흔들
리고 있는 상태를 우리가 보통 파도라고 하잖아요. 우리도 생각도 마찬가지거든,
이 생각 저 생각이 마치 파도치고 있는 것 같다 이겁니다.
생각에 사로 잡혀 버리니까 어느 것이 '나'인지, 자기 모습 찾느라고 바쁘거든요.
처음에는 온갖 망상도 많고 생각도 많고 복잡했는데 조금 앉아서 좌선을 한다던
지, 경전도 읽고, 기도를 해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아 조금 맑아졌다고 봅시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 생각에 내가 복잡한 생각에 있던 내가 지금 공부하다가 보니
까 마음이 조금 맑아진 걸 보니까 이제 깨달아진 건가 보다 생각하고 홀연히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고 봅시다. 아 됐다 싶어서 스님, 제가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깨달았느냐?, 네 깨달은 거를 내놔 보아라. 그래 뭐라뭐라 답을 하니까,
야 이 바보 같은 놈아, 그거는 네가 <이해한 것은> 깨닫기 전에 없었지? 네!..
깨닫고 나니까 거기 있었다고 보이는 거는 본래 있던 것이 아니잖아.
없던 것이 새로 생겼기 때문에 사라지고 만다 이거라.
가만 듣고 보니까..그러니까 우리는 참된 자기를 놔두고 자기 속에서 일어난 어떤
모습을 보고 자기라고 내세운다면, 만일 그것이 없어진다면 자기자신도 없어졌다
고 해야 되지 않느냐? 그렇다면 네 자신이라고 볼 수 없지 않느냐?
<不梁萬境而 眞性常自在>
이렇듯이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생각이 떠 오른 것을 깨달았다, 진리를 터득했
다 하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진리眞理라 하고 도道라고 하는 것은, 진리가 따로
있고 도道가 따로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전체가 진리요,
전체가 도인데 우리가 왜 깨닫지 못하는가 하면 내 마음 속에 이러쿵 저러쿵 온갖
사량분별[相]을 일으키고 있어요 생각生覺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이라고 하는 것
은 실제實際 존재가 아니거든, 환상幻相입니다.
여러분, 환상이란 말 이해하시지요? 환상이란 그림자는 실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 고통이다, 괴로움이다, 하고 사람마다 감정感情이 없는 사람 없잖
아요, 그런데 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 존재하지 않고 그림자이지, 맞아요?
하늘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떴다고 봅시다,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이것이 실제 존
재存在라고 하면 비행기가 가다가 무지개에 부딪혀 떨어질 것 아닙니까? 아무렇
지도 않거든, 실제 존재가 아니라 이겁니다.
우리 생각<觀念>도 마찬가집니다. 실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거기 걸리고
있나 말입니까, 가슴이 아파 죽겠다, 답답해 죽겠다, 뭐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고..
그게 실제와 같다면 병원에가서 생각을 칼로 다 도려내 버리면 감정도 안 일어날
건데 어디 그렇습니까?
실제가 아니거든. 네가 생각을 해서 그렇지. 실제 존재는 아니지만 내가, 여기서
‘내’라고 하는 거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화가畵가 산을 그리느냐,
물을 그리느냐, 생각대로 그리듯이 좋은 생각을 하느냐, 나쁜 생각을 하느냐,
감정을 일으키느냐, 생각을 하는 모양에 따라 어떻게 됩니까? 몸이 달라집니다.
몸은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팔譬을 이렇게 들었을 때, 나는 가만히 있는
데, 팔이 제 혼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거든, 그렇잖아요?
여러분에게 보여 드려야겠다 생각했기 때문에 팔이 올라가고
이제 그만 해야 되겠다 해서 내려오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이렇듯이 마음이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 생각한 모양이 그대로 몸으로 나타납니다.
걸음이 가벼우면 그 사람은 좋은 생각을 하고 있고, 얼굴이 맑으면 그 사람 마음이
맑다, 몸이 둔탁하고 뭐가 흐느적거리면 그 사람은 뭔가 고민에 사로잡혀 있구나,
그러잖아요.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외부에서, 하늘에서 내 마음 속에 들어와서 점령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올라 내 마음 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바깥의 소리를 듣던지 대상을 본다든지 냄새를 맡게 되면, 어찌됩니까?
일차적으로 주인공이 먼저 딱! 알아차립니다. 탁!.. 소리에 돌멩이는 소리가 나도
모르지만 이 마음은 소리가 탁! 나자 벌써 소리인 줄 알잖아요, 냄새가 나자마자
딱! 대번에 냄새를 알아차리잖아요. <刹刹塵塵 俱說俱聽 說聽同時 妙哉此境>
어떤 대상이든 오자마자 처억 척! 이거는 뭐 생각할 것도 없이 동시에 아닙니까?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그러다가 이러쿵 저러쿵 자꾸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쫓아다닌다 말입니다. 그게 복잡하면 어째 됩니까? 답답하지요.
마음은 사통오달四通五達이라 막힌 데 없기 때문에 소리가 나면 소린 줄 알고,
산이 있으면 산이 보이고 냄새가 나면 냄새인 줄 척척 알고<見聞覺知>그렇지요?
그런데 만일若 마음을 뭔가 가로 막았다면 아, 무얼 듣기는 들었는데, 보기는 보
았는데, 무엇인자 확실치 않다 이거라. 그러니 의심疑心이 일어나고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마음을 막은 장애물障碍物이 뭐겠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일어난 생각에 사로잡혔다는 말입니다. 환상이다 이거라, 환상幻
이 그림자<障碍>가 되어 내 마음 속에 떠억 차지하다 보면 사통通오달의 마음이
나도 모르게 이러쿵 저러쿵 망상을 일으켜 소통을 가로막습니다.
몸은 곧이곧대로 거짓말 안하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모습을 나타 냅니다. 몸 이
라는 게 마음의 그림자기 때문에 마음이 막힌 데가 없으면 혈액순환도 잘 되고
기운도 막힌 데 없이 잘 통하고 있다면 몸에 병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죠?
몸을 보면 그 사람 마음을 그대로 알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기에
여러분 사람을 만날때 환한 얼굴을 딱 보면, 아 이사람 굉장히 기분 좋은가 보다
또 히야 이 사람 뭔가 모르지만 무슨 걱정이 태산 같다, 얼굴에 다 나타나잖아요.
어떤 사람은 얼굴이 우울해, 우울증憂鬱症 걸린 사람 치고 얼굴이 환하게 밝은
사람 있습니까, 그러면 우울증이라고 안 하지요, 그렇지요, 몸은 마음이 생각하
는 대로 나타나는 겁니다,<몸은 마음의 손각락> 그렇지요.
우리가 마음이라고 사통오달 막힌 데 없이 환히 통해 있다고 하는데, 나도 모르
게 일상생활에 쫓겨 살다 보니까, 이러쿵 저러쿵 생각에 얽매이다 보니 원래 모
습<眞性>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답답하게 살고 있다 이겁니다.
이제 우리가 이런 줄 알아차리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가, 자기
혼자 스스로 생각해 보고, 요 생각이 내 속에 남아 있었구나 하고 탁 털어버리면
그렇게 깨치려고 애를 써도 못 깨달은 것을, 털어버리면 저절로 깨달아 집니다.
그러면 깨친 사람은 어떤 상태냐? 깨친 사람한테 물어보면
"내가 깨달아서 비로소 안 것이 아니라 깨닫기 이전에
우리가 이미 깨달아 있다는 것을 내가 알았다!" 이거라.
"그럼 깨닫기 전에도 본래 알고 있었다는 것이 뭡니까?"
"하하 너희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하지마는 깨닫지 못해도 소리가 나면
소리인줄 알고 찬 것이 오면 찬 줄 안다. 그런 줄을<靈知>내가 알았다!"
요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그것을 깨달았다고 합니까?"
그것을 깨달았다고 한다면, 그럼 깨닫지 못한 사람도 찬 것이 오면 찬 줄 알고
뜨거운 것이 오면 뜨거운 줄 알지요, 그렇지요, 깨달은 사람하고 같다 이거라,
그것을 가지고 깨달았다고 하느냐? 똑같이 아는데..,
깨달은 사람도 때리면 아프고 못 깨달은 사람도 때리면 아프다. 그러면 여기서
깨닫고, 깨닫지 못했다한들 무슨 차이가 있느냐, 똑같이 자빠지고 엎어지거든,
맞으니까 아프더냐, 나도 아프다, 뭐가 차이가 있느냐?
여기에 하늘과 땅 같이 차이가 있습니다.<天地懸隔>
깨닫지 못한 사람은 몸이 아프면 아~ 내가 전생에 무슨 죄罪를 지어가지고 하면
서 온갖 것을 갖다 붙입니다. 뭐 부모를 잘못 만나 그렇고, 자식이 잘못돼도 온갖
망상이 일어나지요, 그렇지요?
깨달은 사람은 그런 거 없습니다, 그저 아플 뿐이지, 부모를 잘못 만나 아픈 것이
아니라, 자식 잘못 만나 아픈 것이 아니라 부딪히니까 아픈 거지 거기 무슨 사주
팔자가 뭐 있나 이거라, 그렇지요?
그리고 편안하지. 아픈 거는 탁!..<스님 머리를 탁 치고 난 후>, 지금은 하나도 안
아프잖아, 아플 때 딱 했지, 그렇잖아요. 깨닫지 못한 사람은 딱!<스스로 때리며>
했는데 그 노무시키 글쎄 하면서 막<생각이>꼬리를 물고... 그게 다르다 이거라.
이해되지요? (예!..)
딱 부딪칠 때<손뼉 치며> 부딪치는 소리가 있다.
지금은 없잖아.
깨닫지 못한 사람은 부딪칠 때 소리 나고, 그 소리가 사라졌는데도 여전히
소리를 안고 있거든.<그 노무시키 감히 나를...> 뭣 때문에 쓸데없는 짐을
안고 있나 이거라, 그것이 스트레스stress 아닙니까?
만일 우리가 자기 마음에 드는 어떤 물건이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물건이 있다
고 할 때, 둘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자기 마음에 드는 거를 택擇하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절대로 안 가져 갑니다. 사실이지요?
그런데 거꾸로 하고 있어요. 제가 잘 말씀 드릴게요. 예를 들어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이나 일 잘하면 칭찬 듣고, 잘못하고 실수하게 되면 좀 꾸지람도 듣고, 욕을
좀 얻어먹으면 기분 좋을 리가 없잖아요.
이 노무◯◯, 입에 담지 못할 욕辱을 얻어먹었다고 보면,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그거 사실 아닙니까? 기분 나쁜 거를 좋아하는 사람 어디에도 없거든, 그러니까
그 자리에 그거를 내버려라... 내버리고 오면 되는데 집에까지 짊어지고 오거든,
여러분은 안 그러시겠지요?
그래가지고 기분이 가라앉아 가지고 '내가 아무리 잘못했기로 그렇게까지 욕할
수 있나' 하면서 집에까지 그걸 데리고 오는 걸 보면<싫으면 내버리고 올 건데>
좋아서 가져오는 거 아니가, 그렇지요? 생각하면 그렇거든<하하하>
싫으면 내버릴 건데 가져가는 걸 보면 싫다는 말이 아니더라 이거라.
"그런데 스님 말씀 들어보면 그 말이 맞기는 맞는데 그게 잘 안 됩디다"
이러거든. 그 왜 그럴까? 습관習慣이 버릇되어서 그런 겁니다.
그걸 우리 불가에서 '업業'karma이라고 하거든.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 자기
도 모르게 한번 두번 하다 보니 버릇이 되어 가지고 나는 생각도 안했는데 손이
저절로 그쪽으로 가더라 이거라,
그러니까 여기에 남의 돈가방이 놓여 있다고 합시다. 노상 남의 것을 훔치고 살
던 사람은, 여기 돈가방이 있구나 아무도 없는데 내가 가져가야 되겠다 그러잖
아요. 이리 저리 보고 사람들이 안 보이면 내가 저거 가져가야 되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됐다, 이제 가져가야 겠다고 그러면 남의 것을
훔치는 도둑盜 아닙니까? 몰랐을 때는 그것이 나한테 이익이 되는 줄 알았는데,
가만히 스님 법문 들어보니 아 그것이 나쁜 짓이구나, 그렇지요?
지금까지는 훔치는 것이 나쁜 짓인 줄 몰랐어요. 도둑맞는 놈이 빙신이고 나는
재주가 있어 훔쳤다고 이래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제 가만 부처님 법문法 듣고
보니까, 그게 나한테 이익 되는 거 같아도 이익이 아니구나,
나중에 필시 화를 부르는 것이다,<自業自得> 이렇게 되니까 내가 오늘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 과보果報가 당장 오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나에게 안 오면
내 자식들에게 그 화가 온다고 보면 부모가 되어 자식한테 물려줘서 되겠나,
아이고야 안 되겠다, 이제 그러지 말아야 겠다, 그렇지요? <因果應報>
그런데 부처님 법문法門 들을 때 나는 '이제 착한 사람 되어야 겠다고' 딱 마음
먹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손이 가거든, 그거는 왜 그런가요? 그러면 안 된다
하는 걸 알고 있는데도 버릇이 되어 가지고 그렇다 이거라.
생각은 절대로 안 하는데도 손이 가고 있거든, 그러면 그럴 때 마다 탁! 전前에
의식을 안 할 때는 벌써 손이 갔는데 이제는 의식을 했기때문에 손이 나가다가
앗차!.. '알아차리면', 손이 밖으로 나가다가도 쓰윽 멈춘다 이거라,
잊어버리고 있으면 또 나가고, 이거 반복 아닙니까? 그렇게 오래오래 하다 보면,
탁! 생각<意圖>이 일어나자마자 자기 속으로 '알아차릴 때' 이제 손이 안 나간다.
나중에는 아무리 좋은 물건이 보인다 해도 욕심望이 일어나지도 않을 뿐아니라
남의 물건 탐貪하는 일도 완전히 끊어진다脫, 그것도 습관習이 되어서 그런거라.
그러니 우리는 이왕이면 좋은 습관習慣을 만들어야 돼요. 이제는 직장에서 기분
나쁜 거 생기면 바로 버려라. 기분 나쁘잖아요? 기분 나쁘면 내 버리면 그만 아닙
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잘 안돼, 잘 안된다고 해서 붙잡고 있으면 어쩔 겁니까?
잘 안 되기 때문에 더 애를 써야 된다 이거라, 그렇잖아요? 이제 그런 것이 자꾸
자꾸<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가면 아, 내가 생각하고 있구나 해서 털어버리라
고...그런데 이게 잘 털리지 않는 사람은 다른 방법을 써야 돼요, 어떻게?
화火anger가 났다고,<망상이 일어났다고> 합시다. 망상妄相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환상이요, 그림자지 실제 존재가 아니거든, 그렇지요? 환상幻相을 환상으로
써 제거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남에게 화가 났다고 하면 기분이 나쁘다 이거라
이걸 좋게 생각을 바꿔야돼, 어떻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라 止, 그 사람이
나를 꾸지람 하고 욕하는 거는 내가 잘못될까봐 나를 걱정해 주셔서 관심이 있어
서 그렇게 욕을 하고 그런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易地思之>아이구야 고맙구나
이렇게 바꿔버립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욕할수록 나를 참 염려해주시는 분이 있
구나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지요, 그렇지요? 기분 나쁜 것을 기분 좋은 생각으로
거꾸로 바꾸면<逆轉> 됩니다.
우리가 병病이 있기 때문에 약을 먹듯이, 만일 거기 ‘기분 나쁜 생각’이 그 당시
그 자리에서 '털어 버렸다면' 굳이 나를 생각해 준다는 생각까지 빌릴 필요도 없
잖아, 그냥 잊어버리면 그만인데. 공부도 이와 같은 겁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중에 온갖 감정들이 일어나잖아요? 깨달은 사람은, 일어나자
탁! 없는 겁니다. 딱! <죽비를 치며> 지금 딱 했지? 지금 없잖아요, 그렇지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생각이 자꾸 꼬리를 물고 있어요. 실제實際가 아니라 환상
에, 자기 머리로 생각에 빠져서 답답하고 제 혼자 눈물 흘리고 억울하다고 애통
哀痛해 하는 그 몰골이 참 볼만합니다, 그게 참. 하하
니 얼굴이 와그렇노? 뭔 일이 건데 그래 오만상 찡그리고 있노? 하면 형제끼리
인데 동생이 날 무시無視했다 이러거든 무시하면 무시하는 사람이 수고스럽지
무시했다고 내가 무시가 됩니까?
내가 거룩하다 소리 듣는다고 내가 거룩한 사람이 되고, 네가 형편없는 사람이
라는 소리 듣는다고 해서 형편없는 사람이 됩니까, 이게? 말하는 사람이 제 혼
자 바쁘지 나는 아무렇지 않다 이거라, 그렇지요?
누가 욕辱을 하거나 말거나 그런데 흔들릴 거 뭐 있어요? 욕이 하고 싶은 사람
욕하는 대로 놔두라 이거라. 마치 욕을 하면 내가 나빠지는 것같이 억울하다고
분하다고 가슴을 치거든, 뭣 때문에 가슴을 치고 야단이냐?
간단히 비유하자면, 가령 태풍颱 불었다고 봅시다. 산길을 가다가 태풍에 나뭇
가지가 똑 부러져 가지고 내 머리에 탁 떨어졌거든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러면
나무한테 "이 새끼~" 그러는 사람 있습니까?
그건 바보라, 나무한테 고함 질러봐야 무슨 소용 있나? 그런데 사람이 때렸다
고 해서 기분이 나쁘거든 깨달은 사람 안목으로 보면우스워 죽겠답니다. 진짜
참 저런 멍청한 사람들...(하하하)
서산 대사淸虛堂가 사불산 대승사大乘寺 등 여러 선방을 거쳐 남원에 가려고
어떤 마을을 지나가는 도중 대낮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고 하거든.
『 성관 聲觀 : 소리를 듣고 부처를 봄
발백비심백 고인증누설 몸이 늙지 마음은 안 늙는다고
髮白非心白 古人曾漏洩 고인이 일찍이 일러 주었다네
금문일성계 장부능사필 오늘 닭 우는 소리로 들었으니
今聞一聲鷄 丈夫能事畢 대장부로 할 일을 모두 마쳤네.
홀득자가처 두두지차이 홀연히 내 안에서 얻었나니
忽得自家處 頭頭只此爾 두두물물 오직 '이것’이어라
만천금보장 원시일공지 천만금의 보배로운 경전도
萬千金寶藏 元是一空紙 본시 한낱 텅 빈 종이였네 』
그러면 그때 닭이 서산西山休靜 대사가 오는 줄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다가 진리
眞理를 설說해줬느냐, 그렇습니까? 닭소리는 누가 들어도 '꼬끼오 꼬꼬덱'입니다.
서산 대사 귓전에 '꼬끼오~ 꼬꼬덱!' 이 소리 듣고 홀연히
앗! 깨달았거든. 다른 사람은 수십 번 들어도 못 깨닫지요.
어떤 스님이 좌선坐禪을 했는데, 어떻게 해도 깨달아 지지를 않아서 이거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이거라. 그래서 어떤 선사를 찾아가서 여차여차 이렇게 했는데
어떻게 하면 깨닫겠습니까 하니까 그때 선사禪師가
"그대가 나를 찾아 왔을 때는 생각이 있었을 테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느냐?"
"네, 스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해야 되는지 좀 가르쳐 주십시오."
"음.. 그러면 내 시키는 대로 해라." <전에도 제가 자주 말씀 드렸지요?>
"너 오늘 공부 쉬어라."
"어, 공부 안 하면 됩니까?"
"시키는 대로 한다고 오지 않았느냐, 그러니 일체 공부 생각지 말고 그저 앉아 있
어라 아무 것도 안 한다고 이불離佛속에 들어가지 말고 다만 앉아서 지금까지 공
부했던 생각은 다 놓고<放下> 어떤 생각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그저 앉아 있다가
내일 아침 되거든 나한테 오너라."
그 선사師가 그 나름대로 다 짐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같으면 공부한다고
머릿속에 화두를 챙긴다든지, 생각한다든지 이러고 있다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니 그냥 ‘우두커니’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벽만 보고 가만 앉아 있었다 이거라.
그러다 이제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절에서는 보통 새벽 세 시 되면 예불禮佛을
하니까, 이 시간 되면 종 치고 목탁도 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조용히, ‘우두커니’
아무 생각 없이, 아시겠어요?
생각이 아니고 아·무·생·각·없·이<우두커니> 턱 앉아 있는 중에 새벽예불禮佛
종鐘소리가 갑자기 터엉!~. 그때 ‘카!~ 아이고 이제 알았다!’
그래 아침에 찾아 갔거든. 그러면 어제도 아레도 목탁소리 듣고 종소리 들었는데,
왜 수없이 들었는데 못 깨닫고, 서산 대사는 아까 그 닭소리에..어째 깨달았을까요?
똑같이 들었는데, 깨달은 사람이 보기엔 너희들은 생각으로 듣고 있기 때문에 그
렇다 이거라. 생각으로 듣기 때문에 종소리 나자마자 이러쿵저러쿵, 온갖 노래가
나오고 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턱 지나가는데 구름아 너를 보니까 이러쿵저러쿵..
그거 다 생각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지요. 구름이 밑에 사람을 보고 노래를 불러
줍니까? 구름은 제 혼자 아무 생각 없이 가는데 우리가 생각을 품고 바라보니까
구름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건 생각으로 들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생각을 빼고 들어라<應無所住>이거라, 생각을 빼고 들으면 종鐘소리 나면 그저
종소리지, 목탁 소리 나면 그저 목탁 소리지, 닭이 울면 그저 닭소리지, 맞지요?
<耳根圓通 反聞聞性>
우리는 생각生覺으로 보기 때문에 본래 모습을 잊어버린다고.
오늘은 무슨 날입니까? 동지冬至 아닙니까, 동지인데 왜 팥죽을 쑵니까? 팥죽을
왜 먹지요? 서양에도 이런 풍습이 있는지 모르지만 동짓날은 해가 가장 짧은 날
아닙니까? 그래서 동지 지나면 새해를 맞는다고 합니다.
새해 맞을 때 잡귀雜鬼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잡귀를 쫓아버리기 위해
서 팥죽을 쑤어서 먹고, 절에서는 점안불사點眼佛事를 한다 개금改金 불사를 할
때 팥죽을 쑤고 팥을 뿌리고 그러잖아요.
귀신을 쫓아낸다 이거라. 이 말이 맞는 말인 거 같아요?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잡귀를 쫓아낸다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쓸데없는 생각을 다 날려 버
려라 이것을 일컫는 겁니다. 팥을 던져서 잡귀가 도망가는 게 아니라 이거라.
⇒ 내 마음 속의 잡념雜念을 털어버려라 ♤!!
그래서 우리나라 옛날 선사禪師들이 이래, 착~ 불자拂子라고 있잖아요? 붓같이
생긴 거 샥~ 이것이 뭡니까?<불자를 좌우로 흔드는 시늉을 하시며>털어버려라,
한 번 털고, 안 되면 두 번 털고, 아직 남았구나, 세 번 털어 버렸다 이거라.
우리가 마음속의 잡념<妄念>을 털어버리면 거기에 부처님이 나타난다 이거라.
아시겠어요? 부처님이라는 자기自己 『본래 마음』자리가 드러난다 이겁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 다 날려버려라 이거라. 우리가 평생 50년 살아왔는데 살
면서 잡귀를 한 번도 털어내지 못하고 살아온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망상妄相
구덩이 속에서... 그러니까 얼마나 답답해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이거라 지금이라도 탁 털어버리라고 깨달은 사람
이나 깨닫지 못한 사람이나, 다 똑같이 차茶 마시고, 밥飯 먹고, 물 마시는 데事
무슨 차이가 있느냐?
보통 사람은 밥을 먹으면서 이러쿵 물마시며 저러쿵 생각으로 밥 먹고 있어요.
생각으로 먹고 생각 속에 있다 보니까 홀연히 옛날 억울한 생각으로 눈물 줄줄
흘리고 또 혼자서 감격에 넘쳐가지고 눈물 흘리고 그거 다 생각이다 그거라.
깨달은 사람은 그런 게 없어요. 배고플 때 밥 먹고, 목마를 때 물 마실 뿐, 옛날
에는 생각 속에서 마셨는데, 생각을 떨어 버렸기 때문에 사리事理를 판단할 적
에 생각을 앞에 갖다 놓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마다 사실대로 판단됩니다.
사람들이 자기 감정感<相>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사리 판단이 옳게 안 됩니다.
이 말 이해되지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결해야 되는 상황에서 어떤 생각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털어버리고 보라 이거라 그러면 시원하게 볼 수 있다 이거라.
그래, 이때까지 잡귀雜鬼 하나도 떨어버리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살아왔는데
오늘은 동지라, 먹는 팥죽이 아니라 마음속의 잡귀를 쫓아버리는 진짜 팥죽을
먹어야 된다 이거라. 그렇잖아요?
이제 지금부터 시작하면 지금 50대, 내일, 모레, 일 년, 이 년, 삼 년...하다보면
마음이 그늘에 <妄靈> 가려 몸이 무거웠던 것이 마음의 그늘이 사라지고 나면
몸이 점점점 더 가벼워질 거 아닙니까?
전에 의식이 흐리멍덩했던 것이 의식이 더 또렷하고 밝아졌다 이겁니다. 맞는
것 같습니까? (네~) 이거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걱정하는 것이,
나이 이제 60인데 치매 걸릴까봐 걱정하거든 치매라고 하는 것은 의식이 또렷
해서 그런 겁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각자 이제 좌선坐禪할 때 보세요, 내 의식이 온전한지, 온전하지
못한지, 내가 벽을 대對하고 딱 앉았습니다 눈을 뜨고 따악 보고 있었다 이거라
의식이 맑으면 이 벽이 내 눈에 환하게 들어올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의식이 흐리멍덩하면, 자기에게 잠이 온다든지, 온갖 복잡한 생각이 일
어나 끄달려 다니면 눈을 뜨고 있어도 이게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거
라. 맞지요? (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요기 면전面前이 눈에 들어오게 하려면 다른
생각하지 말고 정신 바짝 차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굳이 앉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마찬가지라,
우리가 움직일 때, 걸어가기도 하고 걸어오기도 하고, 일을 하고 있을 때는 틀림
없이 잠에서 깨어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깨어 있는 것은 사실인데
복잡한 생각 속에서 깨어 있다 이거라. 그렇지요?
일하면서도, 무슨무슨 생각, 부엌에서 콩나물 다듬으면서 뭐뭐 국을 끓이면서도
머릿속에는 아들 생각 딸 생각,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이 콩밭에 가있다 그러지요
깨친 사람은 어떠냐? 깨달은 사람은 "나도 옛날에는 그랬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래봐야 나한테 아무 소용없는 짓이라. 그걸 알았기 때문에<생각을> 탁 털어버
렸어요
옛날에는 커피 끓이면서 남의 눈치를 보며, 누가 내 평가를 잘해 주면 나도 잘해
줄거고 그렇지 않으면 뭣하러 잘해 줄 거고, 하며 온갖 생각 속에 있었는데 이제
그게 없어요. 그저 커피와 나와 둘이 아니다 이거라.
'커피와 나와 둘이 아니다' 이 말 이해됩니까?
내가 딴 생각을 하면 내가 있고 커피가 있고, 딴 생각이 있으면 커피란 저 놈이
있고 내라는 게 따로 있지만, 생각이 없으면 커피가 내 속에 들어왔고 '내 속에
들어왔다'고 내가 '커피 속에 들어갔다' 입니다.
'커피와 내가 딱 하나가 된다' 아닙니까? 매사每事가 이렇게 되어야 됩니다.
깨달은 사람은 일상생활에, 일하고 있을 때 자기 마음속에 가린<蔽> 것이 없기
때문에 일이 자기 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들어왔다면 내가 일 속에 들어간 거고.
모든 것이 둘이 아니고, 보통 사람은 손님을 대하면서도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
<思量分別>이 생겨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고 있잖아요,
깨달은 사람은 그런 게 없어요, 그저 거울에 흰 물건이 오면, 흰 빛이 그대로 비
치고 빨간 색깔이 오면 빨간 색깔이 그대로 비치듯이, 있는 그대로 보고, 가고
나면 흔적도 없어요, 뭐 미련도 없고 그러니 항상 마음이 개운<爽快>하지요.
옛날에 지게 지고 일하던 시절, 힘들게 일 할 때면 내가 무슨 팔자가 잘못 되어
이런 지게질을 하고 있노, 이러잖아요. 깨달으면 그게 없어요, 그저 무거우면
짐을 줄이고 힘들면 쉬었다 하고 그저 뚜벅뚜벅 맡은 바 하고 있을 뿐이지
보통 사람들이 일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돈이 생기기 때문에 일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럼 도인道人들도 돈錢 생기기 때문에 일하는 겁니까?
돈하고 관계 없어요, 그럼 왜 일하느냐?
'자네들은 돈이 생기기 때문에 일하고, 돈을 모으기 위해 한다,
우리는 돈보다 더 좋은 보배를 얻는다' 이거라.
'그게 뭡니까?'
'가만히 있으면 온갖 쓸데없는 망상妄相에 사로잡히고 또 잠이 온다
일하면 망상도 사라지고, 잠도 도망간다, 이런 좋은 보배가 어디 있나'
이거라. 그걸 얻기 위해서 일하는 거다. 이해됩니까? (네~)
아이고, 벌써 한 시간 훨씬 넘었네. 책을 갖다 놓고 할 줄도 설명을 못했네
할 수 없이 죽비 치고 잠시 입정入定하겠습니다.
인제 진짜 동지 팥죽을 공양<잡념을 버림> 합시다. 이해됩니까? (네~)
그러면 목전에 벽이면 벽이고, 여러분 앞의 사람 모습, 앞 사람의 얼굴이랄지,
뒷모습이 내 눈에 들어오게 되면 잡념 다 쫓아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렇지요?
자, 그러면 생각에 사로잡히고 있던 내가 모든 생각 다 날려버린다 이겁니다,
그게 동지冬至 팥죽입니다. 그럼 잠시 입정入定하겠습니다.
탁!.. (죽비 삼타, 3분 입정)
탁!.. (죽비 삼타 출정)
팥죽 공양 잘 하셨습니까? <망상 털어냈습니까>
잘 하셨다고 보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춘신(春信) / 유치환
꽃등인 양 창 앞에서 한 그루 피어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세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 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려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 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지는 끝업이 작은 길이여.
안으면 행복해지는 날, 허그데이!
어느소녀에게 바친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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