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 즉 보리/강병균 교수

2016. 1. 24. 19:29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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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 즉 보리

 

불교닷컴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 평상심이 도이다 平常心是道 <조주>

- 사람들이 믿어 온 것은 부처의 신통력이지 삼법인(三法印)이 아니다

- 번뇌는 깨달음을 키우는 비옥한 토양이다

- 번뇌를 먹고 자란 지혜는 번뇌 없이 생긴 지혜보다 더욱 위대하다

- 사랑의 힘으로 극복된 증오심은 사랑으로 옮겨가는데
   이런 사랑은, 증오심을 먼저 경험하지 않은 사랑보다 위대하다 <스피노자>


I. 깨달음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어떻게 번뇌가 보리냐고?

오색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장엄한 아미타 극락세계를 방문하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거나, 가지가지 신통력을 갖춘 초월적인 마음을 획득하거나, 수많은 윤회를 거쳐, 앞으로도 한참 뒤에나 가능한 것이 보리(菩提 깨달음)가 아니냐고 묻습니다. 하다못해 20년 참선이나 10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해야 찾아오는 것이 깨달음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히 자신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어찌 감히 내가? 그래서, 깨달음의 세계는 나와는 동떨어진 초인(超人)들이나 성인(聖人)들의 세상이며, 그분들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재료로 이루어진 존재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깨달음이란 뭔가 비밀스러운 비전을 얻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지극히 사적인 비밀지식전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스승과 제자는 승려로 한정됩니다.

이런 생각들에 반기를 든 것이 대승불교이고 선불교입니다. 이들은 도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우리 마음이며(直心是道場),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이고 중생이라고 선언합니다(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 기독교는 그리고 고대 종교는 사제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유대교이건, 힌두교이건, 베다교이건, 조로아스터교이건, 기독교이건 모두 사제들을 통한 집단적인 희생제의와 종교의식을 통해서만이 신과 소통이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개인적인 구원이란 꿈도 못 꿀 일이었습니다.

이에 반기를 들고 나온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사제를 통하지 않고도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특히 개신교가 철저합니다. 루터가 1522년과 1534년에 라틴어를 번역한 독일어 성경은 구텐베르크의 활자인쇄술을 통해서, 라틴어를 모르는 민중에게 대량으로 퍼졌읍니다. 이런 보편적인 대중적인 깨달음 운동이 이미 2,000년 전에 불교에 대승불교형태로 일어난 것입니다.  

 

 

  
▲ 루터의 1534년 성경: 독일어 번역본. 신의 말을 직접 접함으로써, 누구든지 신과 직접소통이 가능하게 한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II. 유심정토: 우리 마음이 극락정토이다

번뇌 즉 보리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예토(穢土)가 정토(淨土)’라는 사상이 있습니다. 크게는 유심정토(唯心淨土) 사상의 일종입니다. 정토가 우주공간에 지구에서 아주 멀리 수백 광년 떨어져 있는 (깨끗한) 외계행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일견 더러운) 마음이 정토라는 사상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바람 한 번 잘못 피웠다가 지옥에 다녀왔다”고. 거꾸로 누구나 선행을 하고 난 뒤에 느끼는, 더없이 가볍고 수승한 행복감을 압니다. 한 사람이 두 가지 극과 극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 둘은 다른 사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같은 사람의 마음이 그 마음을 씀에 따라 지옥이 되기도 하고 극락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토는 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만약 정토가 외계에 그것도 아주 멀리 있다면 그리 가기 위해서는, 첫째 우주선을 만들어야 하며, 둘째 빛의 속도를 넘어갈 방법 즉 웜홀(worm hole) 통과방법을 알아내야 할 것입니다. 이도 저도 불가능하면, 열심히 선행을 닦아야합니다. 정토에 갈 수 있을 정도의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문제는 그게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갔다 돌아와 일러주는 자도 없고 소문만 무성하며, 자기보다 착한 자가 많아 보여 보잘 것 없는 자기에게까지 차례가 올지 몹시 의심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생의 마음은 자꾸 위축됩니다: 버젓이 잘 살다가도 더 잘사는 친구집에 다녀오면, 갑자기 남편이 못나 보이고 미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 친구의 인물이 자기보다 못하면 증세는 더 심해집니다.

사실은 크게 문제가 될 일이 아닙니다. 단지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우리 삶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대체로 평온한 삶을 삽니다. 먼저 인생의 1/3을 잠자느라 바빠 그 시간만큼은 나쁜 일을 안 하고, 사실은 못합니다. 깨어있는 시간에는 생업에 쫓겨 정신이 없으며, 남은 시간에는 출·퇴근차 안에서 졸지 않으면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거나, 텔레비전 앞에 앉아 멍청히 시간을 보냅니다. 배우들은 시청자들을 위해서, 상상이 가능한 기기묘묘한 나쁜 짓들을 막장드라마라는 이름으로 다 대신 해줍니다. 그래서 나쁜 일에 진력이 날 지경입니다. 나쁜 짓을 좀 할라고 하다가도, 자기가 하려는 나쁜 짓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나쁜 짓들에 비하면, 그 상상력이나 잔인함에 있어서, 엄청 모자라고 한참 초라해 보여서 그만 의지가 꺾입니다. 그러니 무슨 나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대부분 사람들이 을(乙)인데 무슨 나쁜 짓을 모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가면서 때때로 느끼는 보람과 행복이 있습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커피 잔이나 녹차 잔을 앞에 두고, 따뜻한 창가에 앉아, 사색을 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친지와 담소를 나누는 기쁨이 있습니다.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사유하는 기쁨도 있습니다.

전 세계 환경오염을 말끔히 정화할 수 있는 과학기술발명을 상상하는 기쁨 역시 빠뜨릴 수 없습니다. 의학과 생명과학을 발전시키고, 에너지와 식량문제를 해결하여, 모든 생명체가 질병없이 장수하며 평화롭고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상을 꿈꾸는 기쁨은 잠시일지라도 가슴을 벅차게 합니다. 그런 에너지를 얻기 위해 허공을 억세게 비틀고 쥐어짜는 상상을 해보면 정말 신나는 일입니다.

정토란 이런 기쁨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유심정토이론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쓰기에 따라 기쁨도 오고 고통도 오는 것이지, 따로 극락과 지옥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극락과 지옥은, 바로 지금, 우리 마음 안에 건립되고 경험된다는 이론입니다. 당신이 경험하는 소박한 기쁨이 바로 극락이라는 이론입니다. 우리는 흔히 가꾼 꽃만이 아름답다고 느끼며, 야생화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잘 모릅니다. 우리가 겪는 소박한 기쁨은 모두 야생화입니다.

극락은 멋지게 꾸민 인공 꽃일 뿐입니다. 극락의 가로수는 보석으로 만들어져있습니다. 수관, 체관으로 물과 양분이 바삐 오르내리고, 가을이면 샛노랗게 온 세상을 물들이는 살아있는 은행나무가 아닙니다. 매미가 목청이 터져라 울어대는 참나무도 아니고, 큰 잎으로 찰랑찰랑 삼복더위를 흔들어대는 플라타너스도 아닙니다. 극락의 나무는 가지가지 보석으로 만들어진 인공물입니다.

‘끝없는 락’이라는 극락(極樂)은 본래 불교의 가르침과도 어긋납니다. 욕망의 불꽃이 꺼진 평온한 상태가 열반입니다. 그런데 갈 데까지 간 ‘극도의 쾌락’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열반과는 거리가 멉니다. 다시 돌아오려면 한참 시간이 걸릴 겁니다. 불교에서 말합니다. “천국에 가면 깨닫기가 힘들어진다. 오히려 인간계가 깨달음을 얻기 가장 좋은 곳이다.” 술에서 깨어야만 제정신이 돌아옵니다. 술이 만든 극락에 오래 머물수록, 깨는 데 더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더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인간세상에 있을 때 신속히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극락에서는 바람이 불면 보석나무들이 삼법인(三法印) 설법을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한한 낙을 누리는 극락에서 무상·고·무아가 어떻게 귀에 먹히겠습니까? 쉴틈없이 끝없이 변하는 남섬부주에서 고락(苦樂), 애증(愛憎), 화쟁(和爭), 승패(勝敗), 우지(愚智), 한서(寒暑), 염한, 기포(飢飽) 등으로 롤러코스트를 타는 인간계에서 무상·고·무아를 깨닫기 더 쉽지요. 그래서 극락은 망상입니다. 가면 절대로 깨닫지 못하는 ‘저주의 땅’입니다. 만약 당신의 최고목표가 깨달음이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세계를 외계에 건립했을까요?

술꾼들이 ‘술을 매일매일 마음껏 마시고도 간경화 위궤양 뇌세포손상을 입지 않는’ 술꾼들의 천국을 상상하는 것처럼, 세상 고통에 짓눌리고 절은 사람들이 온갖 낙을 누리고도 깨달음을 얻는 ‘신(新)행성’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극락은 이율배반의 행성입니다.

우리 마음이 바뀌면 우리 마음이 바로 극락입니다. 이 마음은 번뇌를 내는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즉 정토(淨土)는 예토(穢土)와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음식이 똥이 되기도 합니다. 깨끗한 음식과 더러운 똥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음식이 되기도 하고 똥이 되기도 합니다.

염정(染淨 더러움과 깨끗함)은 우리 마음의 분별일 뿐, 절대적인 염정은 없읍니다. 똥은 더럽고 먹는 음식은 깨끗한 것입니까? 그럼 우리는, 깨끗한 음식을 먹고 더러운 똥을 만들어내는 존재입니까? 구더기들은 똥을 사랑합니다, 똥은 존재의 근원입니다. 개들에게는 인간의 똥은 부드럽고 따끈하고 맛있는 음식입니다.

인간은 소화·흡수율이 낮은지라 똥에 영양가도 풍부합니다. 게다가 구수한 냄새까지 납니다. 혹시 개들의 제호(醍醐)가 아닐까, 우스운 상상까지 하게 됩니다. 더불어 샛노란 거품이 이는 맥주 같은 오줌으로 목을 축이면 더할나위없이 훌륭한 한 끼 식사였습니다. 예전에 강아지들은 어린아이들이 똥싸는 것을 기다려 다 받아먹고, 디저트로 똥꼬까지 깨끗이 핥아먹어 뒤를 닦을 필요까지 없었습니다. 그러다 붕알까지 따먹어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였지만요. 혹시 붕알을, 떨어지다 엉뚱한 곳에 낙하한 똥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요? 하하하. 고의가 아니었으니 죄를 묻기도 힘들겠지요. 피해자에게는 미안합니다.

염정(染淨)은 같은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염정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번뇌 즉 보리라는 말은 바로 이 말입니다. 우리 마음을 떠나서는 따로 보리라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식으로 설명하자면 칼은 칼일 뿐입니다. 그 칼이 사람을 살리는 주방용 칼이 되느냐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되느냐 하는 것은, 칼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달린 문제입니다. 칼에는 살기(殺氣)도 자비심도 없습니다. 이 둘은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극락과 지옥은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번뇌 즉 보리’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생물이라면 보리는 얻을 수 없습니다. 지성이 없는 돌멩이에게 무슨 반야지혜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생각하는 능력이 있기에 번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생각하는 힘’이 동시에 반야지혜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이 ‘생각하는 힘’을 번뇌에서 보리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소위 전식득지(轉識得智)입니다.

흔히 오해하듯이 아예 생각을 없애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고사목(枯死木)이나 돌멩이밖에 더 되겠습니까? 그게 맘에 안 들면 중력(重力)이나 전자기력(電磁氣力)이 되시던지요.


III. 평상심시도: 깨달음은 인식의 전환이다

아무튼 번뇌는 보리입니다. 보리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단지 번뇌·망상을 멈추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런다고 신비로운 초월적인 마음을 획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밥먹고 똥싸는 평범한 마음일 뿐입니다, 소위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입니다. 휘황찬란한 천인(天人 하늘나라 사람)들이 영접하고, 아미타 삼존불이 영접하고, 비로자나불이 만다라 궁으로 인도하고,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불이 관정(灌頂)을 베풀어 인가해주는, 그런 깨달음의 세계는 없습니다. 그런 증상이 나타나는 분들은 사실상,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병동으로 직행한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환망공상(幻妄空想)적인 깨달음의 세계라는 우주적 규모의 정신병원으로.

번뇌와 보리는 같은 바탕위에 건립됩니다. 번뇌와 보리는 같은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같은 공장을, 전쟁용품생산시설에서 생활용품생산시설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생존경쟁 전쟁터에서의 ‘개체적이고 이기적이고 투쟁적인 번뇌’를 ‘집단적이고 이타적인 평화의 반야지혜’로 바꾸는 것입니다. 앞의 두 공장은 같은 공장입니다. 같은 대지위에 건립된 같은 건물을 사용하는 시설입니다. 마찬가지로 번뇌와 보리가 건립되는 땅과 구조물은, 동일한 심전(心田)과 심택(心宅)입니다.

상·락·아(常樂我)로 보던 것을 무상·고·무아로 보는 것입니다. 대상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뿐입니다. 일체가 본래 무상·고·무아였음에도, 그동안 상·락·아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도 보는 마음은 같은 마음입니다. 번뇌를 내는 마음이나 지혜를 내는 마음이나 같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번뇌 즉 보리(煩惱卽菩提)’입니다.


IV. 깨달음은 사회적인 현상이다

부처님 당시는 석가족의 나라 카필라국 등 부족국가들이, 코살라국 등 대국으로 통합되는 시기였습니다. 그 후 수백 년에 걸쳐서 페르시아제국,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아쇼카 왕의 통일인도제국이 탄생하였으며 인간은 더 도시화하였습니다.

대규모로 모여 살게 되어 인간 의식이 발전하였습니다. 인간의 사회적 특성이 발현되고 발전했습니다. 타인의 마음이 자기 마음 안에 들어와 의식이 복잡해졌습니다. 인간의식이 단세포에서 진핵세포로 그리고 다시 다핵세포로 진화하는, 캄브리아기(期) 같은 대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가히 심(心)캄브리아기라 불릴 만한 이 기간에, 인간의식에 대한 고찰과 복잡한 마음에 대한 정치(精緻)한 고찰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대승불교가 탄생한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인간마음에 대한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연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거 단순한 시절보다 더 세밀한 이론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사회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회화, 대도시화, 대국화, 제국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대승불교는 일어나지 못했고 ‘번뇌 즉 보리’라는 말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번뇌 즉 보리’라는 ‘복잡한’ 말이 생기기에는 소규모의 시골사람들의 마음이 너무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번뇌가 보리가 되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V. 깨달음은 우리와 같이 산다

깨달음이란 신비하고 초월적인 불생불멸(不生不滅), 상주불변(常住不變), 영생불멸(永生不滅)하는 참나(진아 眞我)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당신은 천불(千佛)이 출세해도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당신의 일상생활에서 당신의 평범한 마음에 찾아오는 것이지, 당신의 참나를 찾아 당신의 마음을 떠나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은 “어찌 자성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짐을 알았으리까?“라고 영탄(詠歎)하는 것입니다. 


VI. 깨달음은 과학적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흔히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으면 모든 지식을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자 그대로 모든 지식을!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신비주의적이고 신화적인 ‘한탕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견해는 ‘전지전능한 신’을 ‘깨달음’으로 바꿔치기한 것에 불과합니다. 냉엄한 진실은 이렇습니다. 깨달음을 얻어도, 배운 적이 없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진화론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진제 종정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가섭을 초조(初祖)로 하는 유구한 전등(傳燈) 역사상의 제79조(祖)도 아닙니다. 그런 지식은 따로 긴 시간을 투자해 체계적으로 배워야만 습득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깨달아도 당신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갑니다. 당신의 의식주와 생필품은 거의 다 타인들이, 즉 깨닫지 못한 자들이 제공합니다. 함부로 말하자면 귀뚜라미 보일러가 없으면 도인도 얼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충치가 생기면 치과에도 가야하고 암에 걸리면 입원도 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를 부인하는 것은 궤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로는 ‘마실가듯 도솔천궁을 드나든다’ 하지만, 일상생활은 하나에서 열까지 속인들에게 의지해 삽니다. 화려한 말에 속지 말고 그 행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볼멘소리로 “그럼 도대체 깨달음이란 뭐냐?”라고 묻습니다. 깨달음은 모든 생명과 현상이 무아이고 그 작동원리는 연기법이라는 것을(諸法無我緣起), 그리고 ‘나’라는 것은 독립체가 아니라 사회와 자연 속에서의 연기체(緣起體)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我者卽緣起體). 그래서 나라는 것은 얼마든지 커질 수 있고, 반대로 얼마든지 작아질 수도 있습니다. 무언가,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신비롭고 초월적인 주체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연기체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더라도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결코 끝이 아닙니다. 그 다음은 열심히 세상이치를 공부해서 생명계와 자연계에 유익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걸 불교에서는 회향(回向)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 때 이 땅은 불국토로 변할 것입니다. 번뇌가 비옥한 흙이라면 보리는 아름다운 꽃입니다. 연꽃은 진흙을 떠나 살 수 없기에, 번뇌 즉 보리이지, 저 멀리 오색구름 위에 보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35억년 인류역사는 의미가 없는 헛수고로 전락하고 맙니다.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1 여래좌상 


 



부엉골 마애여래좌상(鮑石溪谷磨崖佛坐像)

상실절터에서 도로 아래로 100m쯤 아래로 내려가면 부흥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부흥사로 올라가다 크게 도는 길에서 산등성이를 타고 아래로 150m쯤 내려가면 조금 큰 묘가 나오는데 그 남쪽 바위 절벽아래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이 선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 곳은 매우 가파른 곳이며, 건너편에는 거대한 바위 절벽인 부엉더미가 보인다.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는 자연으로 처마가 이루어져, 부처님은 눈비를 맞지 않는 자연으로 된 법당에 계시는 것이다. 바위면의 붉고 누른 부분이 많은 곳에 부처를 새겨 석양무렵이 되면 부처님은 황금빛을 발하는 신비스러운 부처님이다.

넓은 연꽃 위에 결가부좌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앉은 평안한 상이다. 선에 힘이 없고 부드럽기만 한 것으로 보아 신라하대 또는 고려 불상에 가까운 느낌이 든다.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 위에는 석등대석이 있으며, 이곳에서 올려다보는 늠비봉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2 마애불



 


 



 


 유느리골 마애삼체불(배리 윤을곡 마애불좌상, 지방유형문화재 195호)

포석정 주차장에서 순환도로를 따라 약 500m 들어가면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있고, 다리를 건너자 말자 북쪽 등성이로 올라가는 길이 있으며 100m 정도 올라가면 바위가 보인다. 높이 3m, 넓이 6m 가량 되는 ㄱ자 형으로 절벽으로 솟아있는 바위에 마애삼존불이 새겨져 있다. 넓은 면은 2.5m로 두 분의 여래상이 새겨져 있고, 좁은 면은 0.9m로 한 분의 여래상이 새겨져 있다.

서향을 하고 계시는 부처님은 보생여래(?)로 추정되며,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오른손바닥은 배에 대고 있으며, 가사는 통견이며,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에는 각기 2체씩의 화불(化佛)이 있다. 남향의 벽면 왼쪽은 석가여래(釋迦如來)로서 겹으로된 연꽃 위에 설법인을 하고 있으며, 가사는 통견이며, 광배에는 화불이 없고, 옷주름이 선명하여 생기가 도는 듯 하다.

오른쪽은 약사여래(藥師如來)로서 왼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으며, 가사는 편단우견이며, 광배는 주형광배이다. 이 마애불의 왼쪽에「태화을묘9년(太和乙卯九年 : 張忠植 교수 해독)」이라는 명문이 있다. 태화 9년은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 10년(835)에 해당되는데, 이 불상들이 새겨진 연대인지는 더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이 주변에는기와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아 부근에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