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동은 없었다.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고, 걱정하는 우리의 아이들은 철저하게 문화적인 구성물이다. 원래부터 있던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편집되었다.
근대 이전의 가내수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 가족이란 사랑의 공동체가 아니라 재화의 생산을 위한 경제단위일 뿐이었다. <필립 아이레스> - 소파 방정환이 '어린이 날'을 만든 이유는 조선인들이 하도 아이들을 때리니, 제발 아이들을 사랑해주라고 만든 것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도를 닦으려면 심산유곡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토굴이나 동굴에 홀로 살며 티베트의 밀라레빠처럼 도를 닦아야 깨달음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무인도에 표류해 혼자 산다고 해 봅시다. 당신이 미워할 사람도 좋아할 사람도 없읍니다. 당신이 화를 낼 상대도 기분이 좋을 상대도 없읍니다. 혹시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 일어난다면, 그건 옛일이 떠올라서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갓난아이 시절부터 무인도에 홀로 산다면 어떨까요?
불경을 읽은들 도를 닦을 마음이 날까요? 사랑, 미움, 질투, 시기, 거짓말, 음모, 분노 등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감정은 타인으로 인하여 일어납니다. 즉 사회로 인하여 일어납니다. 번뇌도 그러합니다. (정확하게는, 나와 타인 사이의 연기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다른 사람들로 인하여 일어납니다. 깨달음이란 궁극적으로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번뇌는 사회적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결코 개인적인 일이 아닙니다. 태어나서부터 홀로 사는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가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겁니다. 있다 해도, 사회 속에 사는 사람보다는 훨씬 적을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죽음’이라는 개념조차 없을 겁니다.
병에 걸린 동물은 육체적인 고통을 느낄 뿐이지, 자기가 죽을지 모른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습니다. 공격을 당하는 동물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폭력에 대한 공포를 느끼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무인도에 혼자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마 죽을 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를 터인데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아프리카의, 수렵채집을 하는 소규모 원시종족인, 부시맨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습니다. 이 사실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본능이 아니라 문화적인 현상임을 암시합니다.
사회를, 적어도 가족을 이루고 살아야 죽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감정도 알게 됩니다. 대승불교는 왜 인간의 의식에 천착했을까요? 같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대승은 자신들을 사회로부터 분리시키지 않고 사람들과 같이 살았습니다. 물리적으로도 그랬고 정신적으로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사회란, 밖에만 존재하는 것이라, 안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혼자 살아도, 자기 안에 있는 여러 마음이 만들어내는 (내적인) 사회에서 유리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고립된 개인의 깨달음은 의미가 없다는 점을 깨달은 것입니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야생과일과 뿌리식물을 먹으며 혼자 외로이 살다가 도를 이루고 아무도 모르게 죽은들,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무(無)입니다. 이름 없는 단년생 들꽃이 봄에 심산(深山)에서 꽃을 피웠지만, 씨를 남기지 않고 가을에 사라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회 속의,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고립된 깨달음도 무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번뇌 속에서 일어난 깨달음만이 번뇌 속으로 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홀로 바람에 날려 사막에 떨어져, 가까스로 한 점 흙 위에서, 아침에 꽃을 피웠다 저녁에 사라지는 꽃은 자신을 퍼뜨릴 수 없습니다.
‘번뇌 속에서 깨달음을 이룬다’는 말은 사회 속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번뇌는 사회로부터 온다’는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我)는 독립아(獨立我)가 아니라 연기아(緣起我)이기 때문입니다.)
숲이나 동굴에서 홀로 정진하는 수행자에게 일어나는 번뇌는 그들이 속세에 있을 때 사회적으로 경험한, 즉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경험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번뇌는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것입니다. 마음이 진화하여 여러 마음으로 분화하지 않으면, 즉 다수의 마음이 사회를 이루지 않으면, (대부분의) 번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승려들이 더 큰 집단을 이루고, 속인들과 더 자주 접촉함으로써 인간 간의 관계를 통해서 인간 의식에 대해서 더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고립하여 은거생활을 하는 소승들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마음의 일은 기본적으로 집단의 일입니다. 한 마음은 “하라” 하고, 다른 마음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 마음 안에 있는 여러 마음은 서로 경쟁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이미 ‘마을’입니다. 마음이 있는 이에게나 깨달음이 가능한 것은, 깨달음이 사회적인 현상이고 마음이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비친 자기 마음을 보게 됨으로써, 우리는 마음의 다자아성(多自我性)을 깨닫게 됩니다. 아직 마음이 복잡하게 발달하지 못한 생물에게 깨달음은 불가능합니다. 아직 마음이 충분히 큰 마을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옥과 천국 등 통속적 의미의 윤회가 없이는 불법(佛法)의 기반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불법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윤리와 도덕의 근거가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수행의 동기를 박탈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가 윤회를 탈출하는 방법을 가르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깨달음이 사회적인 현상이라면, 윤회에 대한 생각 역시 사회적인 현상입니다. 윤회의 의미, 즉 윤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사회적인 현상입니다. 유신론적인 타종교인들조차 천국과 지옥은, 특히 지옥은, 안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교인들도 아마 그럴 겁니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우주를 보는 눈이 같이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무인도에서 갓난아기 때부터 홀로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할지 의문입니다. 태어나는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무인도에 짐승이 없다면 말입니다.
이 점에서 성인들은 세상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아무 문제없이 잘들 살고 있는데, 누군가 나타나, “당신들 잘못 살고 있어, 그렇게 사는 게 아니야. 내가 가르쳐주는 대로 살아야 되!” 하고 꾸짖은 꼴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인들 말이 서로 크게 어긋났으므로, 특히 사후세계에 대한 가르침이 극과 극으로 상이했으므로, 세상에 혼란은 가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지지하는 성인이 달랐으므로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흉측한 무기를 동원해서 상대방을 죽이면서도, 성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대망상을 피웠습니다.)
동굴에서 홀로 도를 닦는 것은, 무인도에 태어나 홀로 사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까?
“무지개는 왜 생길까?” 또는 “천둥은 왜 칠까” 등의, “저건 왜 그럴까?” 하는 자연현상에 대한 의문은 사회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이런 의문은 홀로 살건 사회를 이루고 살건 일어납니다. 오히려 사회를 이루고 살면 적게 일어납니다. 그 이유는 사회적인 현상에 대한 의문이 더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며, 사랑, 미움, 협력, 분열, 평화, 싸움 등의 사회적인 관계가 온통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과학자들 중 많은 수가 자폐적인, 즉 비사회적인 성향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사회적인 현상은 사회 속에서 발생하고, 사회 속에서만 의미가 있읍니다. 예를 들어, 무인도에 홀로 사는 사람은 고백해야할 죄도 짓지 않을 것입니다. 죄의 대상인 타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계인 살인 절도 음행 망어는 모두 타인에 대한 죄입니다. 타인이 있어야 가능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죄는 사회적인 것임을 즉 사회로부터 발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는 무아(無我)입니다. 구성원들의 연기적 관계로 생성·유지·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디에도 시공을 통해서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주재자(主宰者)는 없습니다. 사회자체는 유동적입니다. 끝없이 구성원이 증감을 하고 구조도 변형을 거듭합니다. 외적인 사회도 그렇고, 내적인 사회인 우리 마음도 그렇습니다. 뇌도 그렇습니다. 구성원인 1,000억 개 뇌세포에 증감이 일어나고, 뇌세포들 간의 연결도로인 500조 개 (축색·수상)돌기들에 생성·소멸과 구조변형이 일어납니다.
본시 없던 것이 생긴 것은 무아(無我)입니다. 인간은 단세포생물에서, 외계와 자연이라는 사회를 통해서 관계를 맺으며, 100조 개 다세포 동물로 진화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몸과 뇌의 수많은 세포들 사이에, 폭발적인 의식·지능·기능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 분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담 스미스가 경제적인 분업을 제안하기 이전에, 즉 수십만 년 전에 이미 생물학적인 분업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은 그 구조가 이미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몸적으로나 마음적으로나 무아입니다.
분업은 번뇌를 만들고 키웠습니다. 번뇌는 우리 몸과 뇌(마음)에 발생한 내적인 분업의 결과로 생겼으며(이 점은 아메바·달팽이·지렁이·짚신벌레처럼 원시적인 동물은 번뇌가 없다는 점에서 명확한 사실입니다. 불교적으로는, 제7식 말나식의 등장으로 생긴 것입니다), 외적인 분업인 사회적 분업과 더불어 양적·질적으로 증가했습니다(이 점 역시, 수많은 동물들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해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사실입니다). 아마 ‘번뇌의 양과 질’은 ‘분업의 양과 질’에 정비례할 겁니다. 기하급수적으로 비례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과 번뇌가 우리와 내적·외적 사회 사이의 연기관계로 발생하므로, 우리의 깨달음은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사회를 이루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내적·외적 사회의 모습이 깨달음의 모습이지, 따로 (어딘가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형태로) 깨달음의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나(眞我 진아 진짜 아트만 true atman)’는 그릇된 이론입니다. 몹시 그릇된 이론입니다.
참나는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존재했고 우주가 없어져도 여전히 존재할, 또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 정체성을 변함없이 유지하는, 비연기적이고 초월적인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나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비연기적(非緣起的)이고 초월적인 영원한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