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인생 방정식

2016. 1. 31. 11:50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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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인생 방정식

- 인간의 일생‘12인연 단계’따라 진행 -
- 깨달음 여부가 삶의 무게·깊이 좌우 -

인간의 일생이 12단계에 걸쳐 있다는 ‘12인연설’이 있다. 그것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처(六處),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12항목으로 나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단계를 하나씩 밟아 간다는 일종의 ‘인생 공식’이라고나 할까.

무명(無明)은 진리에 어두움을 뜻하고, 모든 미망(迷妄)의 근원이다. 무명의 발동은 ‘행(行)’이며 행에서 ‘식(識)’, 곧 의식이 발생하므로써 육신과 정신이 같아지는 상태가 ‘명색(名色)’이다. 육신에는 눈, 귀, 코, 혀, 몸, 의식의 작용이 있으며 차례차례 대상들이 분명해진다. 여기까지가 모태(母胎) 속의 일이며 태어날 때는 ‘촉(觸)’이다. 태아가 바깥 세상에 다다랐음을 뜻한다. 뒤이어 어머니로부터 처음으로 식물을 얻으며 성장할 때가 ‘수(受)’이다. 이 단계를 지나면 차례로 욕망이 생기고 자기 주장, 소유욕이 발동된다. 그것이 집착이며 ‘애(愛)’, 욕망의 대상을 얻는 일은 ‘취(取)’이다. 여기에는 돈, 이성, 권력… 등 모든 욕망이 포함된다. 여기까지가 아이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의 단계이다.

그후 이성(異性)을 얻고 아이를 갖는 단계가 ‘유(有), 아이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면 부모는 늙고 죽어 간다. 그것이 ‘생(生)’ ‘노사(老死)’이다.

불교에서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과정을 직시하고 각 단계에서의 고통의 원인을 알아차릴 것을 권한다. 그것을 인식하므로써 인간의 미망(迷妄)의 근원인 무명(無明)을 벗어나는 가르침이다. 여기에 나타난 각 단계에는 모든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판에 박힌 순서와 공식 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마치 불교와 수학은 같은 형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은 이 순서에 따라 태어나고 죽어간다. 식물도 마찬가지로 씨에서 싹이 나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모든 생물은 이 순서의 일부도 뒤바꿀 수 없으며 단지 같은 단계를 밟아 간다. 여기서 일생과 수학에는 공식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수학과 인생은 크게 다르다. 수학에서는 같은 공식에 대해서는 하나의 답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움직일 수 없는 12인연(因緣)을 되새기며 인생의 의미를 깊이를 달리할 수 있다.

‘나’라는 하나의 생명은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것이며, 나의 생명에서 부모, 조부모, … 모든 조상의 생명을 감지할 수 있고 또한 이들 낱낱이가 빠짐없이 12인연을 체험했음을 인식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단순한 한 생명이 아닌 모든 조상과 인간이 하나로 이어지는 생명의 불을 지키고 있다. 인생 방정식, 즉 12인연설은 이 중대한 사실을 깨닫게 하고 스스로 자신의 생명의 귀함을 깨닫게 한다.

한편 수학 방정식은 객관적이며 논리로만 전개되기 때문에 항상 답이 하나이다. 지난호에서는 프랙탈 이론과 불교의 ‘다즉일, 일즉다’(多卽一, 一卽多)의 공통성을 논했다. 12인연설로 모든 생물체가 같은 패턴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한다. 모든 생물과 나 사이의 자기 닮음, 즉 프랙탈적 관계이다.

그러나 자기 닮음 관계에서 깨달음이 인생의 무게를 달리한다. 중생 모두가 구원 받지 못할 때 자신도 성불될 수 없다는 보살의 바람은 중생이 모두 성불되어 명실공히 부처를 중심으로 프래탈적인 존재가 될 것을 말한다. 국토가 불국토가 되고 이승이 극락 세계가 된다. 이 광경은 큰 부처님을 중심으로 수많은 부처가 에워싸고 있는 불교의 벽화, 또는 만다라의 세계와도 같다.
그리하여 12인연의 방정식은 수학이 아닌 인간방정식으로 승화될 것이다.
수학과 불교는 비록 형식은 같을 수 있어도 그 의미에는 큰 차이가 있다.


         玄門前寂光   오묘한 문앞에 고요한 빛이 서리고

         隱峰裏惠菴   숨은 봉우리 속에 띠집을 지어 놓으니

         玄寂無二處   오묘함과 고요함 따로 없는 그곳에

         古佛松林閒   옛 부처는 송림 가운데 한가 하더라


                               玄門 惠菴禪師 : 德崇叢林 初代 方丈

                               寂光 隱峰禪師 : 法弟子. 現 松林寺 住持

- 不用名님 제공

 

 

 

 

다비식을 보며

-갠지스강에서-

 

시/이정님

 

오는 것이 아니다
가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왔다 간 흔적
주검으로 남아 굳어지

육신 한 토막

살을 태우고 뼈를 사르는 다비식에
한숨같이 피어오르는 노란 연기
연기속에서 극락조가 난다

 

선량한 웃음과

자기를 찾던 고통이 잠시 들렸다 간

누구의 육신을 저리 사르는가 

나 또한 언젠가 저 길을 갈 것

그 길은 내가 울고 갈 길이 아니라

남아 바라보는 자들이 울어야 할 길

 

슬프게 바라보던 일몰이

먼저 눈 가리고 돌아선다

   

 

 

 

 

 

우나 (Una) - 솔베이지의 노래( Edvard Grieg, Solveig's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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