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연기와 무한

2016. 2. 20. 15:16일반/생물·과학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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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연기와 무한

- 수학 “무한은 그가 포함한 일부분과 대등”-
- 불교 “찰나 속 무한세계 연기고리로 파악”-

지난 호에서는 수학적 귀납법과 연기를 묶어서 생각한 현수법장대사(賢首法藏大師)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자연수 전체는 무한이며 이 무한이 하나의 같은 원리인 연기의 고리에 지배된다는 것이다. 수학에서는 귀납법이 원리이며 법장대사는 연기라고 한다. 이 원리에 주목할 때 무한의 대상이 하나의 통합체가 됨을 설명했다. 한마디로 화엄철학은 무한과 연기를 중심에 둔 철학이다. 평범한 속인들도 때때로 실제로 무한을 목격함으로써 충격을 받을 때가 있다. 필자는 어떤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 중 정면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이 무한으로 이어져 있음을 보았다. 앞의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이 뒷면에 있는 거울에 반사되고 그것이 또 이쪽 거울에 비치고 …… 계속 무한의 열을 형성하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법장대사는 이 수법으로 연기와 무한의 관계를 설명한 일이 있었다.

법장대사는 거울 열 개를 원주 상에 세웠다. 팔방에다 하나씩 세우고 그 위 아래에도 하나씩 놓아 거울의 면이 서로 서로 대면하게 만들어 거울들의 간격을 각각 똑같이 하여 그 가운데에다 불상을 넣고 촛불로 그것을 비추었다. 그것들이 서로 서로 비추고 비추이는 모양을 했다. 이것은 중중무진(重重無盡)의 관계(因緣)와 한 점이 무한에 대응함을 보인 것이다. 이들 사이에는 수학적으로 정확히 일대 일 대응이 되고 있다. 단순하고 명확한 법칙이다.

현대수학에서는 ‘무한은 그가 포함하고 있는 일부분과 대등할 수 있다’고 정의한다. 그것은 수학의 무한을 확립한 칸토르와 데킨트가 내린 것이다. 이 사실을 불교에서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시간적·공간적으로 인간이 유한을 초월해서 무한 체제와 합일할 것을 바란다.

“제불(諸佛)을 공양(供養)함에 있어서 일식(一食)의 사이에 모든 무량(無量), 무수억(無數億)의 제불의 나라에 이르지 못한다면 정각(正覺)을 얻지 못한다.”<무량수경>
이것은 시간의 장단이 단순한 물리적인 시간의 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사유(思惟)하는 한 아무리 짧은 시간에도 무한을 이룰 수 있는 시점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하나다. 그러나 내가 그것이 뒷면에 있는 거울에 비추어져 있음을 의식할 때 무한이 발생한다. 아무리 짧은 물리적인 시간 속에도 무한한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유한의 시간도 무한의 시점으로 나눌 수 있다는 사상이다. 그것은 발상(發想)에 있어서는 현대 수학에서 말하는 무한분석(無限分析)의 개념과 같다. ‘중생심중 일찰나중 유구백생멸(衆生心中 一刹那中 有九百生減)’<俱舍論> 즉 ‘사람의 마음은 찰라(刹那)에도 무한(九百)의 생각을 할 수 있다.’
법장대사의 ‘거울’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 생각하자. 사방 팔방이 거울에 비추어지는 불상은 무한개이다. 이들은 서로 비추고 비춰져 있다. 만일 이들 중 어느 하나가 사라진다면 모두가 없어진다. 일찰라(一刹那) 속의 무한의 세계가 형성되고 없어지기도 하는 연기의 세계이다. 이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나의 의식이다. 무량, 무수억의 여러 부처에 공양하는 일은 이 연기의 고리를 의식하는 일이다. 무한이 낱낱이의 무한의 모임으로 흩어져 있는 것은 아니며 이들은 연기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 이 연기의 이치를 이해할 때 이들 존재가 하나로 귀결된다.

삼라만상이 무한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들에게 관통하는 이치는 ‘연기’라는 매우 단순하고 명백한 것이다. 수학에서는 이들 무한을 무한으로 보고 해석하는데 불교 철학은 수학적인 무한 이론을 발판으로 한 계단 비약한다. 연기(緣起)로써 파악하는 것이다. 

 

아무 일 없을 때가 제일 즐겁고

기약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일이 제일 반가우며

 

까닭없이 마시는 술이 제일 맛있고

절로 부는 바람이 제일 시원하지...! 

 


 

 


모든 것은 바깥에서 온 것이다


조주선사가 후원의 마당을 쓸고 있었다.
먼지와 티끌이 뿌옇게 일어났다.
제자가 의미심장하게 한 마디 건넸다.


- 스님은 고승이신데
   왜 이렇게 티끌이 일어납니까?
- 모두가 바깥에서 온 것이니라.-

제자가 다시 여쭈었다.
- 절은 청정한 곳인데,
  어찌하여 티끌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조주선사가 손가락으로 제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 여기 또 티끌 하나가 더 생겼군!! 

 


 

 

* 우리의 생각이란

그간 살아오면서 자기가 겪은 경험들을

축척해 둔 기억들에서 자기식으로

판단해서 나온 것들이다

그러므로 경계를 맞이할 대마다

생각이라는 가짜 판단으로

청정한 한마음에 티끌이 되어

더럽히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생이 꿈일 수 밖에 없다.

생각이 그칠 때 생각생각에 생각이 없고

語默動靜에 흔적이 없어

自由人으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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