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봉김기추의 금강경 강송

2016. 3. 6. 16:38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금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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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봉김기추의 금강경 강송



 


문 :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을 가리키심이니까


답 : 뱀이 대통에 들어서 가는 소식이로다


 


문 : 서쪽에서 오신 뜻을 물었는데 어찌하여 뱀이 대통에 들어서 가는 소식이라 하십니까


답 : 너는 어찌 한 빛깔이 그 한 빛깔 가운데 있지 아니하고


한 구절이 그 한 구절밖에 있음을 모르느냐.


 


문 : 어리둥절 합니다.


답 : 무엇이 어리둥절 하느냐. 方位가 없으므로 하여금 능히 方位를 두고,


去來가 없으므로 하여금 능히 去來를 두는 것이니, 「본래로 검지도 희지도 않으나


곳에 따라 푸르고 누름을 나투네」이르는 의취이기도 하다.


 


문 : 더욱 답답할 뿐입니다.


답 : 너는 오로지 어리둥절하고 답답한 것만을 끌어 잡고 뒹구는구나. 단단히 들어라.


石男이 밑빠진 바리의 밥을 먹으니 「도솔을 여의지 않으시고 이미 왕궁에 오셨으며 」,


木女가 줄없는 거문고를 뜯으니 「어머니의 태를 나오시지 않으시고 이미 중생 을


건져 마치시다」이르신 소식이기도 하니 알몸으로 달려들어서 이 문제를 처리하라


 


古人도 이르시기를 봄 들음 깨침·앎(見聞覺知)에 속하지도 않고 또한 견문각지를


여의지도 않는 것이라니, 견문각지에 나아가서 구하여도 틀리며 견문각지을 떠나서


구하여도 또한 틀릴진대 어떻게 함으로써 여래님을 몸소 뵈옵겠는가?


 


별다른 소식이 따로 없다. 다만 소리와 빛깔에 쏠려서 새기지 말고 그만 그대로 쓰면


그만인걸! 다만 견문각지가 참이 아니어늘, 그 견문각지에 쏠려서 얽히지 아니하고


그만 그대로 쓰면 그만인걸! 알겠는가?


이 곳인지라 한 발자국이 틀리면 그대로 邪道에 떨어지는 갈림길이니 입을 봉하자.


 불씨가 하늘 밖으로 튀니 눈은 별 가으로 가는구나. 에익!


이래도 모르겠거든 봉래산 꼭대기의 탕건바위에게 물어보아라.


 


去來가 本寂하고 動靜이 一如하기 때문에 山河와 木石과 禽獸 따위의 모든 모습이나


善惡과 正邪와 憎愛 따위의 온갖 법이 應然함으로 말미암아서 남자는 남자이면서


여자와 통하고 여자는 여자이면서 남자와 통하고, 부처는 부처이면서 중생과 통하고


중생은 중생이면서 부처와 통하고, 늙음은 늙음이면서 젊음과 통하고


젊음은 젊음이면서 늙음과 통하니 性別間에 迷悟間에 老小間에 안통함이 없고,


큼은 큼이면서 작음과 통하고 작음은 작음이면서 큼과 통하고, 넓음은 넓음이면서


좁음과 통하고 좁음은 좁음이면서 넓음과 통하고, 김은 김이면서 짧음과 통하고


짧음은 짧음이면서 김과 통하니 大小間에 廣狹間에 長短間에 통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럴진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음에 가름이 생기지 않을 것이요 입을 열고 혀를 굴림에


새김을 달지 않을 것이니 이 바로가 밝은 거울에 물건이 비치고 빈 골에 소리가 응함


같아서 비치고 응함도 스스럼없이 확연하지 않겠는가


 


여래의 法性身은 모습이 아니나 모습이 아님도 아니므로 性相이 如如하여


動靜이 不二인 當處이니 이른바 여래는 옴이 아니나 오지 아니함이 아니고,


감이 아니나 가지 아니함이 아니고 앉음이 아니나 앉지 아니함이 아니고


누움이 아니나 눕지 아니함이 아니므로써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는 四威儀中에


항상 空寂性을 여의지 않으심을 여래라 이르겠다.


 


천번 변하고 만번 변하나 변하여 가지 않으니 이 바로 밑빠진 바리의 밥을 먹는 소식이요,


천변 변하고 만번 변하나 변하여 오지 않으니 이 바로 줄없는 거문고의 소리를 듣는 소식이다.


이렇듯이 청정하고 이렇듯이 담적하면서 妙用이 自在하나 그 실다움을 글로 좋이


쓰지 못하고 말로 능히 이르지 못하고 물감으로 감히 그리지 못하고 흙으로 몸소


만들지 못하니 이른바 말길이 끊어졌고 마음길이 꺼진 그 자리인지라 애오라지


청정법신이신 비로자나佛의 얼굴에 봄바람이 가득한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옥이 妄心이면 천당도 妄心이네.


뱀이 대통에 들어서 갈 때 남은 한라산이요 북은 백두산일러라.


「온갖 하염있는 법이 꿈과 꼭두와 거품과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는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러히 관할지어다」부처님은 이러히 게를 읊으셨다.


옳기는 옳은 말씀이나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法界體를 모습에서 취하지도 못하면서


「의젓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이르실까.


온갖 有爲化演法이 法界를 여의면 자체相없음이 앞 노래의 비유와 같이 究竟位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 당처인 절대성자리가 의젓하기 때문에 「응당 이러히 관할지어다」


일컬으심이니 千萬古의 眞理를 들내심이라 하겠다.


 


이렇듯이 모습에서 취하지 아니함이란 三相에서 취하지 않음을 뜻함인데 眞如自性은


非有相이며 非無相이며 非非有相이며 非非無相이기 때문에 常見을 부수시기 위하시어


一切의 空을 말씀하셨고 斷見을 부수시기 위하시어 一切의 有를 말씀하셨고


二邊에 떨어짐을 두려워하시어 不空 不有를 말씀하신 것이니 이 다 緣을 대한 꾸밈새로


알지언정 言句나 字句 自體가 究竟은 아님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러므로 말미암아서 一切法이 다 緣으로 좇아 일어남으로 하여금 有爲法에 속한다


이르겠지만 그러나 그 당처가 비어서 모두 그 자체없음이 꿈은 셈으로 인하여 꾸나


그 자체가 없고 꼭뚜는 착각으로 인하여 생기나 그 자체가 없고 거품을 물로 인하여


일어나나 그 자체가 없고 그림자는 형체로 인하여 나투나 그 자체가 없음같이


위로는 부처님네로부터 아래로는 땅강아지나 개미에 이르기까지 凡聖의 因果等法이


실답지 않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자체는 실답지 않다 할지라도 法法이 서로가 모르면서도 서로가 엉클리어져서


또다시 다른 法으로 줄곧 변하면서 가기 때문에 凡聖의 因果法은 어둡지 않다고 이르는


것이니 인생살이란 한낮 요지경 속이라 하겠다.


 


본래하나 없는곳에 山河大地 나퉜구나山河大地 부수어서 뭉쳐내니


한덩인걸난데없는 파랑새가 납죽주어 먹더구나 (351)


 


人生문제를 다루는 學人들은 이 다섯갈래 중에 어느쪽을 택함으로써 父母未生前의


면목을 접하겠는가 !  이 당처의 소식을 모르고는 臨終때에 사람들이 울부짖어 봤던


이 몸을 代行은 못할 것이며 죽은 뒤에 곳곳마다 비석을 세워 봤던들 冥途의 방향을


틀어 놓지는 못할 것이다. 古人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올바른 修行만 가지면 大根은 三日안에 中根은 三個月안에 下根은 三年안에


見性成道를 할 뿐 아니라 그 功德으로 九族이 하늘에 나느니라!


만약 이것이 거짓이면 내가 대신 지옥에 가겠다」하셨다니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인생 문제의 해결은 제각기의 수행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니 人身을 받은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不生不滅의 바다로 키를 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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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혹은 / 조병화 
 

늘, 혹은
때때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늘, 혹은
때때로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인생다운 일인가

그로 인하여
적적히 비어있는 이 인생을 가득히 채워가며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까이, 멀리, 때로는
아주 멀리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라도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지금,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

아,
그러한 네가 있다는 건
얼마나 따사로운 나의 저녁 노을인가~~
언제나 힘이되어 주는 벗이여!! 님이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여!!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여!! 

 


 

 


 

설사 깨치지 못해도

여러분의 불성자리는 본래 생사가 없다

 

여러분들은 성불(成佛) 하든 안 하든, 깨닫든 못 깨닫든

육신은 죽어갈지 몰라도여러분들 불성자체는

늘고 주는 게 하나도 없고 생기고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건 시작된 바도 없고 끝난 바도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설사 깨치지 못하더라도 본무생사(本無生死).

본래 생사는 없는 것입니다.” 

 

- 백운스님 법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