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20. 14:36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반야심경
반야심경의 약해 – 금타대화상
삼신(三身) 사지(四智)에 만덕(萬德)을 구비(具備)한 일대인(一大人)의 대자재경(大自在境)을 관찰(觀察)하는 보살(菩薩)이/ 심밀(深密)의 정지(正智)로써 피안(彼岸)에 도(到)하는 법(法)을 수행(修行)할 시(時)에/ 먼저 망정(妄情)으로 임의 분별(分別)하든 색법(色法)인 색온(色蘊)과 심법(心法)인 수상행식(受想行識)의 사온(四蘊)은 일즉이 가상가명(假相假名)으로서 명상(名相)이 본공(本空)일새 오온(五蘊)의 개공(皆空)함을 조견하야/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사고(四苦)를 주(主)로 한 일체고액(一切苦厄)의 고해(苦海)를 도(渡)하나니/ 사리자(舍利子)야 색(色)이란 공성(空性)의 여여상(如如相)으로서 색체(色體)가 별유(別有)함이 않이오/공체(空體)의 환화(幻華)일새 색(色)이 공(空)과 불이(不異)하고 공(空)이 색(色)과 불이(不異)하야/ 공(空) 그대로 색(色)이오 색(色) 그대로 공(空)이라/ 사온(四蘊:受想行識)도 또한 그러하니/ 사리자(舍利子)야 이러한 오온(五蘊:色受想行識)의 제법(諸法)이 본공(本空)한 실상(實相)은/ 원래 생(生)하였음이 않이니 멸(滅)하지 못하고 염구(染垢)하지 않았으니 세정(洗淨)하지 못하고 흠축(欠縮)없이 원만(圓滿)하니 증감(增減)하지 못할지라/ 그럼으로 제법공(諸法空)의 실상(實相)엔 색(色)이란 가상(假相)도 무(無)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이란 가명(假名)도 무(無)하야 무명(無明)이란 가상가명(假相假名)의 총(總) 대명사(代名詞)로서 근본무명(根本無明:色受想行識)이 무(無)하니/ 육근(六根:眼耳鼻舌身意)도 무(無)하고/ 지말무명(枝末無明:六根)이 무(無)하니 육진(六塵:色聲香味觸法)도 무(無)하며/ 이미 근진(根塵:六根六塵)이 무(無)하니 전오식(前五識)의 소지경계(所智境界:眼耳鼻舌身~識界)도 무(無)하고 능지(能智)의 의식계(意識界)도 무(無)하야/ 무명(無明)이란 도시본무(都是本無)할새 무명(無明)의 진(盡)할 것도 무(無)하며/ 따라서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진(六處)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도 무(無)할새 내지(乃至) 노사(老死)의 진(盡)할 것도 무(無)하며/ 이와같이 삼세(三世)의 고과(苦果)와 그 집인(集因)을 밝히신 십이지(十二支)의 인연법(因緣法)이란 곧 오온법(五蘊法)에 기(基)한 자(者)로서 실상(((實相)에 본무(本無)할새 수도증멸(修道證滅)할 것도 무(無)하니/ 이상(以上) 오온법(五蘊法)의 범부지(凡夫智)와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의 연각지(緣覺智)와 사제법(四諦法)의 성문지(聲聞智) 등(等)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의 유루지(有漏智)란 몽환포영(夢幻泡影)을 계집(計執)함과 여(如)하야 개시허망(皆是虛妄)일새 일체(一切) 유루(有漏)의 지(智)가 무(無)하고 따라서 유루(有漏)의 득(得)도 무(無)하며 생사유루(生死有漏)를 득(得)할 바가 무(無)함으로/ 제상(諸相)의 무명운(無明雲)을 개(開)하고 비상(非相)의 불성일(佛性日)을 견(見)하는 개사(開士)는/ 무위법(無爲法)의 무루지(無漏智)로써 열반안(涅槃岸)에 도(到)하는 법(法)에 의(依)함으로/ 심(心)에 유루(有漏)의 괘애(罣碍)가 무(無)하고 괘애(罣碍)가 무(無)하므로 무명심(無明心)의 극단(極端)인 사액(死厄)의 공포(恐怖)가 무(無)해짐에 따라 일체(一切)의 전도몽상(顚倒夢想)을 원리(遠離)하고 열반(涅槃)에 구경(究竟)하나니/ 삼세제불(三世諸佛)도 여차수행(如此修行)하야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증득(證得)하시나니라/ 고(故)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가 구경각(究竟覺)까지 성취(成就)하는 묘불가사의(妙不可思議)의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며/ 근진식(根塵識)의 제혹(諸惑)을 단(斷)하고 증멸(寂滅)을 증(證)하니 도무극(度無極)의 삼명(三明)과 육통(六通)이 생(生)하는 대방편(大方便)이며/ 팔만장경(八萬藏經)을 독파(讀破)하고 천칠백공안(千七百公案)을 입증(立證)함보다 승(勝)한 법이며/ 최상무비(最上無比)의 총지(總智)니/ 이상(以上) 그대로의 해의수행(解義修行)이 견고(堅固)하면/ 다라니신통장(陀羅尼神通藏)에 주(住)할새 제마(諸魔)가 불침(不侵)이오/ 일체(一切)의 허망상(虛妄相)을 이(離)한 실상(實相)의 지혜(智慧)라/ 고(故)로 이의 실상지(實相智)인 반야(般若)로써 도피안(到彼岸)하는 약법(略法)을 중설(重說)할 새/ 곧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의 화두(話頭)요 공안(公案)이라 이를 더욱 단축(短縮)하야 총괄(總括)하면
아제아제(揭諦揭諦) 바라아제(爬羅揭諦) 바라승아제(爬羅僧揭諦) 모지사바하(菩提娑婆訶) 라시니 반야바라밀다주(般若波羅蜜多呪) 그대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의 인(因)이 되고 과(果)가 됨을 요지(了知)할지니라
개명심이(蓋明心而) 견성(見性)이오 견성이(見性而) 오도(悟道)일새 선수후오(先修後悟)란 수(修)는 미수(迷修)요/ 선오후수(先悟後修)란 수(修)는 오수(悟修)니 수법(修法)에 있언 강의(講經)이나 송주(誦呪)나 참선(參禪)이나 관법(觀法)이나 그의 방법(方法)은 다소 차이(差異)가 유(有)하지만 미오(迷悟)의 경(境)은 일야(一也)요 증(證)이란 신증(身證)이며 오(悟)란 심오(心悟)일새 신증심오(身證心悟)를 증오(證悟)라 운(云)하나니라
심우도에 관한 시
1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 시 분명하다면 찾은들 지닐 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 尋牛裝 한용운
2
일찍이 나는 바다 아래 남모를
사원(寺院)을 한 채 숨겨 놓았다
그리운 바다여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틈에서
그대를 가끔 만난다
그대가 썰물이 되어 지나가 버린 자리마다
사람들의 서글픔이 갯벌로 나타나고
그대가 어디선가
밀물처럼 몰려오는 소리가
사람들의 기침소리 속에 들려온다
나는 언제 바다를 잊고 말았는가…믿음은 참으로 덧없구나
그리움은 속절없이 병이 되었구나
사원(寺院)은 바다 아래 모래알처럼 멀기만 하구나
- 박제천 시인의 <여름바다의 비밀 見跡, 심우도 2 > 중에서
3
애린
네 목소리가 생각 안 난다
어디 있느냐 지금 어디
기인 그림자 끌며 노을진 낯선 도시
거리거리 찾아 헤맨다
어디 있느냐 지금 어디
캄캄한 지하실 시멘트벽에 피로 그린…
- 김지하 시인의 <소를 찾아 나서다>에서
4
삶도 올가미도 없이
코뚜레를 움켜잡고
매어둘 형법(形法)을 찾아 헤맨 걸음 몇 만보냐 / 4. 득우
생 선 비린내가 좋아
견대 차고 나온 저자
장가들어 본처는 버리고
소실을 얻어 살아볼까
나막신 그 나막신 하나
남 주고도 부자라네.
일금 삼백 원에 마누라를 팔아먹고
일금 삼백 원에 두 눈까지 빼 팔고
해 돋는 보리밭머리 밥 얻으러 가는 문둥이여,
진문둥이여. / 10. 입전수수 - 무산스님
5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를 끌고 가네
길은 멀고 날은 저무는데
돌아보니 첩첩 빌딩이네
빨리 가려다가 더 늦게 가는 자들이여
오토바이를 타고 간 사람이나 비행기를 타고 간 사람이나
모두 오리무중이네 / 권태웅
권 시인에게 소는 자동차이고, 오토바이이며, 또 비행기이기도 하다.
곽재구 시인은 이렇게 평했다.
“당신도 흰 소를 찾아 나선 적이 있는가.
흰 소가 어디 있을까 중얼거리며 세상의 이곳저곳을 뒤진 적이 있는가
길은 멀고 날은 저무는데, 문득 옆 차선 운전자가 하품을 한다.
하품을 하다 눈이 마주치자 한손으로 피곤한 얼굴을 비빈다.
그대 또한 흰 소를 찾으며 한 세상을 보내겠지. 욕망과 아집,
이기의 강물 속에서 첨벙첨벙, 종래는 흰 소의 이름조차 잊었겠지”
내 소는 어디에 있을까.
자칫 만해스님처럼 소를 찾으려다 또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안거철을 맞아 틈틈이 내 소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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