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20. 14:47ㆍ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강을 건너는
꿈
깨달음의 성취가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전과 이후의 경계가 판이하게 달라지니
말입니다.
스스로 어리석다고 여기고, 깨달음을 향해
나아갑니다.
문득 본래성품을 확인하고, 여기에서 막연히
안심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꿈에서 활짝 깨어나고 보면 모든 게
꿈이었습니다.
깨달음이란 것도 따로 없고, 깨달음의 성취도
꿈이었습니다.
깨달음의 체험이 따로 있다고 여긴다면
여전히 꿈에서 깨어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 없다는 방편의
말입니다.
모든 꿈에서 깨어나기 위한
도구입니다.
발심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온갖 망상의 구속에서 벗어난 진정한 삶의 실상이 무엇인지
확인해야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것을 쥐고 있는 이에게는
깨달음이 따로 없어야 합니다.
깨달음이 따로 없다는 것은 없어서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닙다.
있다고 여겨 여기에 머무는 것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한
이끎입니다.
모든 의지하는 것이 스스로에게서 일어난 허망한 생각일
뿐임을
직시하게 하는 것입니다.
관념화된 깨달음이 진실한 깨달음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의 깨달음이란 인간의 사고 영역이 아닙니다.
본래면목은 인간 의지의 결과물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의지와 저항, 성취의 욕망이 이것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본래 이것이지만 이것에 어떠한 견해도 없고,
이것에 어떠한 시간과 공간적 위치가 없습니다.
바로 이 자리이지만 자리라는 관념이 없는 자리이며,
지금 여기이지만 시간속 좌표가 아닙니다.
바로 당장 이 모든 만물이 생동하는 이 자체이지만,
진실 앞에 인간의 노력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인간 의지, 생각, 행위, 부질없는 성취가 그 성패와 결과물과 시도에 상관없이
그대로 이것이니 달리 마음쓸 일이 없습니다.
당장 여기에서 모든 조작을 쉴뿐입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온갖 관념을 내려놓을 뿐입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진리에 항복할 뿐입니다.
마음을 낸 이는 깨달음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깨달음이란
깨달음의 자취가 없는 것임을 스스로 수긍해야
합니다.
이제 시작이라면 깨달음을
향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이 길에 들어섰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텅 비어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을 때 본심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아무 것도 그것이랄 게 없을 때 존재자체가 한계없는 자유로
해탈합니다.
강을 건너는 꿈을 꾸지 않고는
결코 강을 건너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러나 마음 속에 먼지티끌만큼이라도 무언가 있다면
결코 강을 건넌 적이 없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 릴라님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다니며 복음성가 가수로 널리 활동하던 빌 만(Bill Mann)의 생애에 잊지 못할 기억이 있었다고합니다.
어느 날 복음성가 공연을 은혜와 감동 가운데 마치고
대기실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그곳에 한 여인이 그녀를 안내하는 분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귀머거리요 벙어리요 소경인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빌 만(Bill Mann)에게 마지막에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불러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였습니다.
그가 공연 중 마지막에 불렀던 노래는
'거기 너 있었는가' (Were you there)였습니다.
그는 기꺼이 다시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여인은 벙어리요 귀머거리였기 때문에 손가락을 말하는 사람의
입술과 성대에 대고 떨림으로 그 노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 만은 바로 그 여인 앞에서
그 여인의 손을 입에 대게 하고 다시 한번 찬양을 했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그러자 그 여인은 눈물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되풀이 해서 말하였습니다.
옆에서 통역하는 분이 말합니다.
"I was there!"
"I was there!"
"I was there!"
"나는 거기 있었습니다."
"나는 거기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바로 그 유명한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였습니다.
거기 너 있었느냐?
"아무도 없었다"는 비통한 이 찬양에 헬렌 켈러는 고백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니요, 나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아니요, 나는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는...
나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한마디 눈물의 고백을 드리고 싶어서 헬렌 켈러는 공
연이 끝난 뒤 이곳을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 나는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는 그 광경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가 죽을 때 그리고 살아날 때 나는 거기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았습니다.
나는 한 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지만
이제 성령의 인도를 얻었습니다.
내가 살아 숨쉬는 동안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같이 시공(時空)을 뛰어 넘는 영적 체험을 현실로 느끼며
고백하는 사람들을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과 고난 주간은 내가 곧 갈보리 십자가
현장 바로 거기 너 있었는가 라는 질문에
"저도 그곳에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주간입니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현실의 내 삶의 현주소이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지금 내 삶이 살아지고 있어야 합니다. (언)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대화하기 위해
그의 입술에 손을 대고 있는 헬렌 켈러
점자 책으로 독서하는 헬렌 켈러
헬렌 켈러는 점자 책을 늘 가까이 하며 세상을 익혔다.
젊었을 때의 헬렌 켈러
노년기의 헬렌 켈러
바위고개 조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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