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현실성

2016. 3. 27. 11:34일반/생물·과학과생각

728x90


<28>현실성

- 고등수학 현실 외면하지 않듯 -
- 禪도 생활에서 참모습 찾아야 -

최근 KBS 프로그램 ‘수학을 왜 싫어하는가?’(1997년9월25일 방영)에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수학을 싫어하고 심지어 수학책만 보아도 알레르기 현상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주로 고등학생의 수학교육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대체적으로 오늘날 각급 학교의 수학 교육의 전반적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들이다. 초등학교 6년, 중·고 6년 합계 12년간이나 배운 수학을 그처럼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수학의 본질과는 관계가 별로 없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수학을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수학은 대학 입시를 위한 척도에 불과하며 대학에 입학하면 별로 쓸모가 없고, 또 시험을 위한 수학이며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서울대생들도 수년이 지나면 지금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도 제대로 풀 수 없게 된다. 이 현실은 입시위주의 수학이 대학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최고 학부 대학에서조차 별 쓸모가 없는 수학이라면 사회 생활에서는 거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떤 지식 분야라도 써먹지 않게되면 지식은 잊혀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수학은 이런 경향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수학은 그 내용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차츰 현실성이 적어진다. 산의 고도가 높아질수록 공기 속의 산소가 적어지면서 답답해지는 것처럼 고도로 추상화된 수학은 비전문가의 접근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고교생이 수학을 학생들이 싫어하는 것은 지적 흥미마저 자극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선(禪)은 속세를 떠나 산중에서 모든 번뇌(煩惱)를 잊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이 지니는 본질(번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고등 수학이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 것과 같이 인간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다. 오히려 번뇌는 곧 보리(菩提)임을 긍정하고 인간 스스로가 지니는 현실(번뇌)로 존재를 규정하고 있다. 내가 존재하기에 나의 번뇌도 따라다니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무조건 번뇌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자신을 똑바로 보고 스스로의 참모습을 파악하라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 ‘파자소암(婆子燒庵)’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파자’란 노파(老婆)라는 뜻이다. 이 노파는 장차 크게 될 것이라고 믿어지는 수도승이 있어서 오랫동안 그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 스님은 열심히 참선을 하고 수십 년간 꾸준히 수도를 했다. 노파는 이제는 상당히 수도가 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그 심경의 깊이를 알아보기 위해 미인인 자기딸을 그 수도승에게 보냈다. 그 여인은 스님을 보듬어 안고 ‘지금 무엇을 느끼는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꼼짝도 않고 ‘바위 위에 선 고목이 3년 지난 것처럼 전혀 따뜻한 기미가 없는 심경’이라고 답했다. 이 말은 전해들은 노파는 그 스님을 당장 내쫓고 수행하고 있던 암자까지 태워 버렸다.

아무리 크게 깨우쳤다 하더라도 인간의 삶, 인간의 감각이 완전 없어졌다면 그것은 이미 인간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여러 욕망, 인간으로서의 번뇌를 갖고 있기에 인간이다. 그것이 모두 없어지고 고목처럼 따뜻한 기가 없어졌다면 이미 인간이 아니지 않는가! 진공 속에 빠져 혼자 있기만 한다면 여러 중생을 제도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 그 노파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선(禪)에 관한 이야기에서 큰 위안을 받는다. 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아야 하고 지적 자극을 받아야 의미가 있다. 단순히 수학을 위한 수학, 특히 시험만을 위한 수학이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은 이 노파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것처럼 지적 흥미, 곧 인간성이 없기 때문이다.

 
 
 

 

분트(UBUNTU)란 말을 아시나요?
 
  "우리가 함께 있기에 내가 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자주 강조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당신이 있기에 우리 모두가 있다.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모두가 함께했을 때에 더  커지는
달콤한 행복을 함께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존재-의식-지복

이것은 말과 생각, 행위를 넘어서 있지만,

말과 생각, 행위를 벗어나 있지도 않습니다.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고 행위할 수 없지만,

말하는 일과 생각하는 일과 행위하는 일 바깥의 다른 일은 아닙니다.

이것을 억지로 말로 표현한다면, 먼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있음,

이와 같이 현존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존재함,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렇게 있음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의식' 자체입니다.

어떤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없는 깨어있음.

대상이 없는 알아차람의 성품입니다.

맑은 거울처럼 어떤 판단이나 선택이 없이

모든 대상들을 비추지만

자기 자신은 결코 대상화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지복'입니다.

극락은 모든 상대적 느낌의 차원을 초월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아무런 느낌의 내용이 없습니다.

굳이 말하지면 아무 느낌이 없는 느낌입니다.

맑고 깨끗한 의식, 순수한 마음 자체입니다.

존재-의식-지복인 이것은 없다가 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있다가 다시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안도 없고 바깥도 없습니다.

이것은 이것인 것과 이것 아닌 것이 없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있는 이대로 이 사실일 뿐입니다.


- 몽지 심성일님

 

-


'일반 > 생물·과학과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자기화   (0) 2016.04.09
<29>돈교와 점교   (0) 2016.04.03
<27>무한과 창조   (0) 2016.03.20
<26>믿음과 인식   (0) 2016.03.12
<25>無와 0의 사이   (0) 2016.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