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이 서글프다

2016. 4. 3. 11:2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불교교리·용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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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童遙指杏花村을 그린 중국의 그림(출처=인터넷)





봄꽃이 서글프다

제가 사는 곳은 산과 맞닿은 아주 조용한 아파트 단지입니다.


주변으로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아파트 사방으로 나무며 초목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아파트 앞으로 화단도


넓게 조성되어 있어서, 목련이며, 벚나무, 연산홍들이 즐비하게 심어져 있습니다.

어제 낮에 마침 막내가 학교를 마칠 시간이라 아파트에서 운영하는


작은 셔틀버스를 탔습니다. 15분 단위로 운행했습니다.


아파트에 연세가 많은 분들이 많이 사셔서 자가용을 두지 않고 이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자리는 언제나 가득 차는 편입니다.

마침 제가 앉은 뒷자리로 칠순이 훌쩍 넘은 할머니가 타셨습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비슷한 연배의 할머니가 반갑게 맞으십니다.
"형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예? 그동안 못 봤지예?


허리를 다쳤다고 하는데 많이 좋아졌어예?"
"많이 좋아졌는데 허리도 치료할 겸 여기저기 아픈 데가 있어서 병원에 가는 길이야."
두 분은 형님 동생하며 아파트에서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인가 봅니다.


나이가 점점 드니 여기저기 아픈데도 많고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차창 밖으로 피어난 꽃들에 대해 얘기합니다.
"저렇게 꽃이 많이 피어 좋긴 좋은데 서글퍼지기도 해. 저 꽃들이 피는 걸 보면


왜 이리 시간이 빨리 가나 싶어. 슬퍼."
가끔 이런 생각에 눈물이 나기도 한답니다.


그 말을 듣던 동생분이라는 할머니의 눈가에도 벌써 이슬이 맺혀 있습니다.
"그렇지예. 저도 그래예. 꽃이 피는 게 반갑지가 않아예."

저는 옆에 있다가 조금 놀랐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꽃을 보면


반갑고 따뜻한 봄이 오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여기고 있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렇게 아름답게 핀 꽃이 슬프고 두렵고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꽃이 핀다는 것은 세월이 흐른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육체가 시들어 사라져가고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 몸이 아파와서 마음속으로 저세상 갈 날이 멀지 않았구나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까지 나무가 휑 했는데 며칠 사이에 꽃이 만개하니


시간의 흐름을 대놓고 광고하는 것 같습니다.

'봄꽃이 서글퍼. 꽃들을 보면 슬퍼.'
할머니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꽃은 이 육체의 죽음을 적나라하게 상기시키고


있으니.이 육체가 자신이라고 여길 때는 세월의 흐름이 반갑지 않습니다.


계절의 변화가 점점 스스로의 죽음을 예고합니다. 그러나 이 육체가 내가 아니라는


실상에 눈을 뜬다면 꽃이 지고 피는 것에 별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봄꽃이 반가울 수도 있겠지요. 물론 그때뿐입니다만.

자연의 변화는 누구나 경험합니다. 육체의 노화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생겨난 것들은 당연히 사라지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드러나 변화하는 것을


실체로 여긴다면 고통이 싹틀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이 실상에 눈이 어두워 착각 속에서 생겨난 번뇌라는 데에 이르면


안타까움이 일기도 합니다. 드러난 현상은 그림자와 같습니다.


꽃을 보며 아무 생각이 없을 때는 생사도 없습니다. 그러나 꽃을 보며 생사를 생각하고


생사의 흐름을 받는 것이 나라는 고정관념이 작동하면 피어난 꽃은 고통입니다.

나, 꽃, 생사, 깨달음 등 모든 일어난 현상이 이렇게 일어난 생각과 이미지,


기억과 감각의 산물일 뿐임을 사무치게 깨달아 그것들에 대한 동일시에서 벗어난다면


그 어느 것도 고통이 되지 않습니다. 고통은 스스로가 착각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고통도 없습니다. 고통받을 사람도 고통도 없습니다.

지금 온갖 꽃이 피어나지만 그 꽃들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상징도 아니며,


나의 사멸을 예고하는 신호도 아닙니다. 전체가 모두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깨닫고 보면 그러한 일이 없습니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본래 모습입니다.


인연 따라 지금 이렇게 꽃이 피고 떨어지고 육체가 점점 시들어 가지만 그 모든 것이


내 마음 하나로 평등하기에 생사가 곧 여여입니다.

저 봄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차가운 겨울을 뚫고 피어나서가 아니라,
그저 지금 이 순간 생멸하는 모습으로써 생멸하지 않음을 몸소 가리켜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당장 여기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저 아무 일이 없을 뿐입니다. 일없는 일조차도.




- 릴라 임순희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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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 이야기


 


어제 골프장에 갔더니 비 속에 여기저기서 살구꽃이 만발해 있었다.

오후 내내 봄비가 바람도 없이 조용히 부슬부슬 내렸다.

비에 젖은 살구꽃은 누가 뭐라해도 보기에 처연한 맛이 있다.

봄비에 젖어있는 살구꽃

검버섯이 핀듯한 저 검고 딱딱한 살구나무 등걸에 매달린 살구꽃.

저 딱딱한 나무가지가 저렇게 부드러운 꽃닢들을 피워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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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에 젖어 서 있는 살구나무

 

살구꽃은 비가 부술부슬 뿌리는 날에 더 볼만한 꽃이다.

내가 서울서 살 때 우리집 마당 한 쪽에 제법 오래된, 실한 살구나무가 한 그루 있엇다.

봄비 내리는 날이면 안 방 창 밖으로 비에 젖어

하늘하늘 하염없이 낙하하는 살구꽃비를 보는 맛이 특별했다.

내가 해마다 그 서울집 살구나무와 살구꽃을 그리워하는 이유다.

 

살구꽃은 한자말로는 행화(杏花)라고 한다. 

그래서 살구꽃이 필 때 내리는 비를 행화우(杏花雨)라 한다.

매화꽃이 지고나서 매실이 익을 때쯤 내리는 비는 매우(梅雨)다.

살구꽃은 해마다 청명 때 핀다.

달력을 보니 올해 청명(4월4일)이 일주일 쯤 남았으니 어제 부슬부슬 내린 그 비가

행화우고, 여기가 남녁이니 지금이 살구꽃이 필만도 한 딱 그 시기인 것이다.

 

내가 갖고있는 책 중에서 나무와 꽃에 대한 책으로는 임경빈 저 ‘나무백과'(전6권),

이상희 저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전3권), 그리고 문일평의 ‘花下漫筆'(삼성문화재단)이 있다.

모두 내가 아끼는 책들로 꽃이나 나무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면 꺼내 보곤 하는 책들이다. 

문필평은 ‘화하만필’에서 “행화(杏花가 비록 선연(嬋娟)한 것은 도화(桃花)에 미치지 못하며,

명려(明麗)한 것은 해당(海棠)에 미치지 못하며,

가염(佳艶)한 것은 장미에 미치지 못하나 요염(妖艶)한 것은

도화 해당 장미가 행화에 일보(一步)를 양여(讓與)할는지도 모른다”고 평하였다.

 

이는 도화(복숭아꽃)나 행화(살구꽃)나 둘 다 연분홍의 요염한 꽃이나 행화가

요염하기로는 한 수 위라는 이야기다.

다시말해 도화는 좀 노골적인 요염함으로 천하게 여겨지나  살구꿏은 덜 노골적으로, 

은근하게 요염함을 자랑하는 꽃이라는 이야기로 해석된다. 

 

내 나름대로, 좀 쉽게 세속적으로 풀이하면 도화나 행화나 둘 다  룸살롱 같은 데에서

만나게 되는 이쁜 기집애들에 비유할만 하다.

그런데 도화는 술집에 나온지 좀 되는, 여러 모로 능숙한 아가씨라고 한다면

행화는 남 모르는 사연으로 술집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앳된 아가씨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봄비에 젖은 행화는 자신이 ‘초보’가 아니라고 애써 태연한 체 하지만

뭔가 어려운 사정이 있는 것으로 짐작이 되는 풋내기 술집아가씨를 보는듯한

애처러운 느낌을 주는 꽃이다.

 

 

- 살구꽃과 달음산.

 

살구나무 너머로 비구름이 달음산 산골짜기로 치솟고 있다.

살구꽃은 술집과 인연이 있다. 행화촌(杏花村)이라고 하면

‘살구꽃이 피어있는 마을’이라는 뜻도 되지만

그것보다는 ‘술집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술집하면 아가씨든 나이든 주모든 술집여자를 빼놓을 수 없다.

행화촌이 술집을 뜻하게 된 것은 중국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청명(淸明)’이라는 시에서 비롯됐다.

 

淸明 / 두목(杜牧)

 

淸明時節雨紛紛  청명시절 비 부슬부슬 내리는데
路上行人欲斷魂  길가는 나그네 마음 쓰리게 하네

借問酒家何處在  술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니

牧童遙指杏花村  목동은 저만치 행화촌을 가리키네

 

청명 즈음해서는 비가 잦다.

그 부술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나그네가 길을 가고 있다.

사람들의 왕래도 드문 시골길이다. 몸은 피곤하고 마음까지도 우울하다(欲斷魂).

술 한잔 생각이 간절한데 저 쪽에서 목동이 소등에 얹혀 오고 있다,

근처에 술집이 어디 있냐고 물으니 목동은 말없이 손을 들어 행화촌을 가리킨다.

목동의 손 끝이 가는 곳에 살구꽃이 뿌옇게 피어있는 시골마을이 보이는데

그 중 어느 집에 장대 끝에 매단  붉은 주기(酒旗)가  보인다.

한 편의 그림 같은 정경이다.  이 시는 살구꽃에 봄비의 운치(韻致)를 더해주고, 

살구꽃과 술집의 이미지를 찰떡궁합으로 묶어놓은 명시다.

이 땅의 많은 옛 시인묵객들도 두목의 청명의 시의를 본 따

시나 시조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牧童遙指杏花村’이라는 화제(畵題)로 그린 옛그림들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