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인 인생이 진짜처럼 보이는 이유 / 법상스님

2016. 4. 9. 23:00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728x90







가짜인 인생이  진짜처럼 보이는 이유 / 법상스님


 


'나'라고 해서 별게 없다는 말이죠. 나라고 해서...


내 몸뚱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란 어떤 주재자가 있어서


전생에서 '나'란 어떤 놈이 있었고,


이생으로 이렇게 옮겨왔고,


미래와 다음 생에는 또 다른 어떤 걸로 옮겨갈,


뭔가 옮겨갈 하나의 알갱이도 없단 말입니다.




하나의 실체도 없다.


다만 인연 따라 변화해갈 뿐인 것이지.


어떻게 인연을 맺느냐에 따라서


계속해서 바뀌고 변해가는 것뿐입니다.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죠.


 


불교의 어떤 업설이라고 하는 것도


완전히 정해진 실체를 이야기하지 않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뭐 '점을 보러 간다, 뭐 업장이 두터워서 그렇다.'


물론 그게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인과응보의 어떤 법칙에 의해서 그런 것들이 있긴 있지만,


그것은 계속해서 바뀌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정해진 업이라는 것은 없죠.


바뀌는 업이 있을 뿐이지. 변화하는 업이 있을 뿐이죠.




그러니까 ‘내 팔자가 이래서 난 이렇게밖에 못 산다.'


이건 다 거짓말입니다.




‘난 원래 명이 길어서 나는 오래 오래 산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얘기죠.




자기가 부주의하게 살면 아무리 명이 긴 사람일지라도


고속도로에서 그냥 뛰어내리거나 한다면


거기서 죽을 수밖에 없는 거겠죠.


몸을 함부로 굴리면 병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원래부터 정해져가지고 몸이 건강하게 타고나서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 거다.'


이런 건 없습니다.


 


부처님도 상한 음식을 드시면 배탈이 나는 분이란 말이죠.


이와 같이 인과응보의 어떤 인연법에 따라서, 연기법에 따라서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연해서 만들어진다, 기대어서 만들어진다.




홀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전부 다 모든 다른 것과 기대어서, 의존해서


그것이 있음으로  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 세상 만물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실체라는 것은 없죠.




실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실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인연 따라 만들어진 것,


그것이 딱 보면 진짜처럼 보인단 말이에요.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잠시 잠깐 만들어진 허망한 허상에 불과한데,


꿈과 같은 것에 불과한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짜처럼 보이니까.




가짜처럼 보여야 되는데


이게 너무 생생하게 진짜같이 보인단 말이죠.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는 말은 벌써 공하다는 소리거든요.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 이 소리는 ‘텅 비었다, 무아다’ 이 소리예요.


그러니까 인연 따라 만들어진 텅 비어 있고,


무아인 이 대상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단 말이에요.


진짜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마음속에 이게 진짜라는 상을 짓는 겁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은 보인다는 상을 짓는 거예요.


이걸(컵을 가리키시며) 보고 ‘컵’이라고 우리가 상을 짓는 거예요.


이건 컵이다. ‘컵 뚜껑’이고, ‘컵’이다. 이렇게 상을 짓는단 말이에요.


다른 컵을 딱 보면, 다른 컵을 딱 보고서 예전에 컵을 봤던 기억을 더듬어서


'아, 이것을 컵이라고 내가 배웠지'하고 상을 짓게 되는 거죠.


 




그러나 어린애가 태어나자마자는 아무런 상이 없죠.


'이 세상이 실체다, 허망하다 ' 뭐 이런 것도 없습니다.


'너다, 나다'라는 것도 없고,


'사람이다 짐승이다' 라는 것도 없고,


'내 편,네 편'도 없고. '엄마, 아빠' 구분도 없죠.


 


어린애기가 엄마인 줄 압니까?


직관으로 안다고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게 그냥 보이면 보인다는 걸로 알 뿐이지,


이게 엄마고 아빠고, 뭐 내 친척이고,


나랑 먼 사람이고. 나를 해치는 사람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갓난아기는 칼을 갖다 들이대도 생글생글 웃을 뿐이죠.


아무런 분별이 없단 말입니다.


아무런 차별이 없어요.


그냥 세상을 전체로 인식한단 말이죠.




상을 짓지 않고 있었다면, 기억이 없었다면,


이름으로 정해놓은 상이 없었다면


어떤 사람을 보고 좋고 나쁘다는 분별의 판단을 할 수가 없었을 거예요.


 


'옛날에 나를 차버린 첫 사랑과 닮았다.'


그럼 좀 재수 없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마음이 좋게 느껴지기도 하고, 이런 상을 내는 거죠.


'나한테 사기 쳤던 사람과 똑같다.'


그럼 아주 기분 나쁘게 느낄 수도 있고.


 


이것처럼 자동으로 우리 머릿속에서는


옛날에 우리가 배워오고 경험했던 것을 탁 돌이켜 가지고


현재를 그걸로 분별하고 해석해서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서 인식이 되다보니까


이 허망한 세상을, 인연 따라 만들어진 이 허망한 꿈과 같은 세상을


우리는


이름 짓고 상을 짓다보니까


이게 이제 진짜라고 믿기 시작하는 겁니다.


모양이 있는 것은 진짜라고 인식한단 말이죠.


진짜가 아닌데도 우리는 진짜라고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보니까 이 '상' 속에서, 이 '상'을 짓는 속에서


온갖 문제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어떤 상이 만들어지냐 하면,


‘돈을 벌어야 된다.


어느 정도의 아파트는 살아야 된다.


차는 어느 정도로 굴려야 된다.


경제력은 이 정도는 가져야 된다.


내 자식은 어느 정도의 대학은 가야 된다.


이런 건 잘 생긴 사람이고, 이런 건 못 생긴 사람이다.


내가 늙어가면서 자꾸 쭈글쭈글해지면 안 된다.’


이런 온갖 생각들을 만들어 놓는 거예요.


 


어린 아이는 아무런 상이 없죠.


어린 아기들은 비싼 차, 안 비싼 차도 없고,


좋은 집 살 필요도 없고,


잘 생기고 못 생긴 사람의 기준도 없어요.




그러니까 '상'에 따라서,


우리가 어떤 상을 머릿속에 딱! 짓고 있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대학교 어느 정도를 가야 된다’라는 상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보다 못 가면 괴롭고,


‘돈을 얼마큼 벌어야 된다’는 상이 있는 사람은


그것보다 못 하면 괴롭지 않습니까?


 


이처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괴로워하는 모든 것은


내가 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가짜로 만들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