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체험적 증명이다 / 춘식스님과의 차담

2016. 4. 17. 17:54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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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은 관념이 아니라 체험적 증명이다

깨달음이란 모든 분별된 상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분별된 생각에 구속되어 있습니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고정관념이란 우리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입력된 분별된 생각들입니다.


이게 그저 필요에 의해 교육되고 습득된 것인데,


이것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방해합니다.

드러나는 상은 다양하고 다채롭습니다.


온갖 사물의 모양이나 소리나 색채나 그것에 대한 추상적인 분류와


따로 따로 갖는 의미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파생되는 감정의 양태들이 다양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드러나는 꿈결같은 것들인데 여기에 분별이 들어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실재감을 부여합니다. 사람이 있고 사물이 있고, 살아 있는 것이 있고,


죽은 것이 있고, 생명이란 이런 것이고 생명없는 것은 이런 것으로 존재한다고


교육받았으며 그 분별된 이미지와 생각, 감정을 믿고있습니다.

깨달음이란 이 모든 다채로운 분리된 것들이 모두 그것이 아니라는 자각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자기마음하나로 평등하다는 자각입니다.


자기 마음밖에 단 하나도 없다는 투철한 깨달음입니다.


어두웠던 실제 세계의 모습에 대해 밝은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분별된 세계가 모두 자기 마음의 투영이라는 자각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온갖 분별된 세계를 경험하면서도


그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를 불러옵니다.


우리 존재자체가 왜소한 이 육체가 아니라 우주전체라는 자각은


한계없는 해방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 어느 생각, 그 어느 감정의 양태들,


그 어느 소리와 모양, 그밖에 분별되는 모든 것들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일어나는 현상 그대로 둘없는 하나라는 명백한 자각은 온갖 현상의 실체성이


사라져 홀가분해지는 경험적 확신을 불러옵니다.

공은 관념이 아니라 체험적 증명입니다.


텅빈 우주가 나라는 생각, 모든 것이 비었다는 관념이 아니라


스스로에게서 일어나는 체감입니다.


그래서 느낌상 스스로 존재의 무게가 제로가 된 것같은 기분을 불러일으킵니다.


온 우주의 무게가 제로인 것같은 느낌을 불러옵니다.


삶의 무게가 본래 없었음을 실감하게 합니다.

삶의 무게, 존재의 무게는 모두가 망상에 사로잡힌 허망한 무게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사로잡혔을 때는 진실로 가슴을 누르는 무게처럼 느껴집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스스로 위축되고, 온갖 관계가 쇠사슬처럼 자신을 얽어매는 듯합니다.


이 육체가 나라는 고정관념이 그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뚜렷하게 느껴지는 자그마한 육체가 나라는 존재감은


깨어나는 공부가 성숙되면서, 그저 나라는 고정관념이었음을


뚜렷이 보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육체적인 나, 관념적인 나에서 풀려나는 홀가분함은 그간 누렸던 자유와


비교할 수 없는 영적 해방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스스로가 실체없는 생각 속에 갇혀있다가 풀려났다는 자각에서 오는


해방감이지 본래 항상 자유자체여서 본질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달라졌다면 망상의 꿈에서 깨어났을 뿐입니다.

본래 부동이었습니다. 따로 따로인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실상에 어두워 드러나는 현상적 분별에 사로잡혀 있을 때도 하나였고,


이제 깨달아 따로 없다는 자각과 해방을 느낄 때도 하나였습니다.


나라는 분리, 법이라는 분리, 마음이라는 분리, 현상이라는 분리, 열반이라는 분리,


공이라는 분리, 깨달음이라는 분리, 해탈이라는 분리, 시간이라는 분리,


공간이라는 분리, 세상이라는 분리, 가벼움이라는 분리, 무거움이라는 분리....


이 모든 분리가 그저 스스로의 생각일뿐입니다.


그동안 익혀온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자기도 모르게 사로잡힌 분별적 존재감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떠나 있지 있습니다.
이 모두가 자기 생각밖의 물건들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자기'라는 분리조차 눈치빠르게 놓아버려야 합니다.
당장 이렇게 여기에서 나고사라져 달리 그 나고 사라지는


공간과 시간을 찾아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쯤에서는 '이렇게' '여기'


'나고 사라짐'이라는 분리마저 놓아야 합니다.

이러한 때 이렇다 저렇다 할 게 없지만 분명한 소식이 있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기만 아는 일이 있습니다.


 


- 릴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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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9일 대덕사 춘식스님과 차담

http://tvpot.daum.net/v/v9542tQuPKtBYQPPPUityyK




                                                                                                                - 간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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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윤동주

봄이 혈관 속에 혈관처럼 흘러
돌, 돌, 시내 차가운 언덕에
개나리,진달래,노오란 배추꽃
삼동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신과 스승과 진아는 같다

스승이라는 말은 넓은 의미로, 영적인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만, 마하리쉬는

"진정한 스승이란 진아를 깨달은 자이며,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을 도와 줄수 있는 힘을 가진 자" 라고 말한다.

 

외적 스승은 가르침을 주고 그의 힘으로

구도자들로 하여금 진아에 주의를 집중케 하며,

내적 스승은 구도자의 마음을 근원 쪽으로 끌어 당겨

진아에 몰입하게 하여 마침내는 그마음을 없애 버린다.

 

사실상 신과 스승은 다르지 않다.

호랑이의 입 안으로 굴러 들어간 먹이가 다시 도망칠 수 없듯이,

스승의 은총이란 찬란한 빛 아래로 다가 온 제자는

결국 구원을 얻게 되며, 버림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제자가 스승이 제시 하는 길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스승의 관점에서 보면 제자란 존재하지 않지만,

제자의 관점 에서 보면 스승의 은혜는 바다와 같다.

그러나 컵을 가지고 스승에게 가는 제자는 컵만큼만 얻을 것이다.

바다의 인색함을 탓해 봐야 소용없다.

그릇이 크면 클수록 많이 담을 수있을  것이며,

그것은 전적 으로 제자 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 마하라지의 명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