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인(道人)도 참회(懺悔)를 한다 /현웅스님

2016. 5. 1. 10:46불교(당신이 주인님입니다)/제불조사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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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인(道人)도 참회(懺悔)를 한다” 
                                                                   - 육조사 현웅스님

 

 


 




‘도는 걸림이 없다’에는 두가지가 있다
깨친 후 성품에 있는 성질이 없는 것이 하나요
몸에 붙은 습이 근본을 받아 무르익어
상황에 따라 자유가 있는 것이 둘이다


참회懺悔와 후회後悔는 다르다


참회懺悔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혜능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참懺이요,

미래에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회悔라고 했다.

 

참회와 후회는 다르다.


“도인(道人)도 참회(懺悔)를 한다” 
                                                                  


현웅 스님




 


‘다시는 하지 말아야 겠다’고 하는 후회는 그 저변에 욕심이 깔려 있다.


 반면, 참회는 근본 뿌리가 끊어진 곳에서 ‘새사람’ 으로 바뀌어져 나온다.


‘새사람’ 은 마음에 안해야 된다는 그 생각이 없다.



‘하지 말아야한다’ 고 하는 후회 속에는 ‘나’ 라는 어둠이 있다. 그런 사람은 욕심이 바탕하고 있다.


다시 기회가 있으면 스프링처럼 눌려 있다가 튀어나 오르듯 더한다.



그러나 참회는 뉘우치자마자 새사람이 되어 나온다. 뉘우침 속에 겸허해져 가고 덕이 자라


사람이 넉넉해진다. 도인은 참회를 먼저 할 줄 아는 사람이이다.  


 


참회에는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이 있다.



일 가운데 뉘우침이 있는 사참은


이 세상 인간관계 속에 내가 살고 있는 도량을 준비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참은 나를 이 삶 속에서 스스로 돌아보고


‘내가 헛살았구나!’ 하고 생각하는 반조의 삶이 온다.



중생은 본성을 떠나면 항상 죄를 짓고 어리석음을 짓기 때문에, 없는 일을 만들어 산다.


참회는 그릇된 데에서 오는 것을 뉘우치는 것이 그 시발이다.


일상의 삶에서도 참회가 없는 삶은 막히는 일이 많고 福門도 열리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어려운 장애를 만나면 우선  뉘우침 대신에 어디로 도망가고 싶어 한다. 


참회가 없는 사람의 생활이다. 몸이 의지해 있는  빈 성품은 부처가 살고 있는 곳이다.


붙어 있는 죄가 없다. 


 


여기 아난의 궁금한 질문이 있다. 불설 능엄경에는 


본시 죄가 없는 데 중생이 어찌하여 생겼습니까?
붓다는 답한다.


홀연히 생겼느니라. 텅 빈 푸른 하늘에 홀연히 구름 한 점 일듯 한 생각이 일어나


그 하나에 의하여 두 생각이 일어나고, 또 그것이 셋이 되고, 넷이 되어 계속 이어져 벌어진다.



중생이 생긴 것은  누구의 책임이 아니다. 한 생각이 일어난 뒤  중생이 짓고 받는다.


본시 비어 있는 곳으로 돌아 갈 줄 모르는 중생은 한 생각이 밖을 쫓아 나가 만나는 것에


몸을 맡기고 변화에 따라 살아간다, 마침내 질서 없는 마음은 욕망의 시작을 모른다.


‘이렇게 하고 싶다 저렇게 하고 싶다. 남이 하니 나도 하고 싶다’와 같은  일고 꺼지는


마음만 이어진다.



이런 곳에 몸을 둔 사람이 우리들이다. 본심은 본시 비어져 있지만 그곳으로 돌아 갈 줄 모른다.


인연에 따라 죄도 짓고 복도 짓는다. 이 윤회 속에 복락은 믿을 수가 없다. 


이 몸과 마음은 불완전한 일고 꺼지는 곳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 지도자나 사업에 총수들이 길이 막히면  자살이라는 극단을 선택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재벌 총수, 정치 지도자들의 시끄러움 속에도 그들 본성은 있다.



몸과 마음이 하는 일을 그들도 잠간 동안 그치고 그들을 안 떠나 있는 본성에 다가가 본다. 


하고 있는 일들의  순서가 보인다. 



지혜가 있는 사람 性品엔 부처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참회는 이 부처 앞에서 온다.


다만 생각을 놓고 그치는 시간을 요한다. 이 작은 시간이 貴하다.   참회가 되는 시간이다.


사람이 나약해지는 것은  人性을 귀히 여기는 일과 바깥사물에서 오는 일들이 뒤바꿔져


있을 때 온다.



그러나 내 안에 지혜를 만나면 일의 앞과 뒤를 보는 순서가 드러난다.


자살은 어리석음에서 오는 약한 자의 길이다. 작은 자기는 어둡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의욕만 앞서 있다. 사람관계 속에 뒤 바뀌어지는 일만 자주 생긴다.


이런 나를 돌아보고  성인 앞에 서있어 본다. 우리는 聖人을 믿는 신앙이 필요하다.


懺悔는 신앙 속에서 쉽게 오기 때문이다.


 


道人 스님도 참회한다.



우리는 부침이 계속 되는 삶 가운데에 내가 살고 있다. 


불교는 사람 속에 있는 지혜를 드러내는 종교이다.


그러나 공부 중에 자칫 한쪽을 버리고 어느 한쪽을 취하여  본시  성품은 텅 빈 것이다.



이제 닦을 것도 없다. 라는  단견을 취한다든가  반대로 전생부터 익힌 업이 너무 지중하니


이 몸을 버리고 내생 몸을 다시 받아 닦는다는  상견에 합류하는 자들이 있다.


이 둘은 다 잘 못된 소견이다.
 
여기 영가 스님의 친절한 證道 歌 한 구절이 있다.


 ‘산승이 잘나서가 아니라,  단견 상견에 집착할까 걱정 돼서 라고! 


道에 드는 간단한 門이다.



공부 인이, ‘죄 없는 것을 먼저 구하다가 깨침의 경계가 오면 텅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라는 단견에 빠질 수가 있다.



그런 사람은 참회를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 참회는 하찮아 보이지만, 깨달은 도인조차도


참회를 놓치고 뒤늦게 참회를 하는 예가 있다. 


이렇게 전도몽상 속에 있는 중생은 나중 할 것과 지금 할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큰 깨달음을 이룬 경허스님 같은 분이 그분이다.


 


스님은 ‘홀연히 깨달으니 도시몽중都是夢中이로다. 본래 생사는 공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았다. 깨닫고 보니 참말로 ‘세상이 아무것도 아니고, 죽음도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이 눈앞에 확연했다.
그러나 도의 이치, 도의 성질은 터득했지만, 도와 떨어질 수 없는 이 몸에 붙은 습기는


하루아침에 제거되지 않는 것이었다.



깨달음을 이루기 전까지 몸에 붙어 익힌 습은 마치 바람이 그쳐도 그치지 않는 파도와 같다.


몸을 가지고 있는 이는 누구나 그렇다. 몸속에서 없는 듯 하는 것도 일시적이다. 


그러나  숨어있는 습은 뒤에 나온다.


 


경허스님은 처음 깨치고 나니 보조의 《修心 訣》을 보고


스님이 활달하지 못한 작은 선비 같이 보였다고 한다.



보조스님은 한 나라의 국사國師를 지냈던 분이었지만 경허의 눈에는 차지 않았는지


‘깨치지 못한 분’이라고 밀어 놨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면서 경 허에게도 뉘우침이 온다.



‘아 내가 잘못 생각했었구나!’  이후 경허스님은 송광사 보조국사 영정 앞에서


10일 동안 참회를 했다고 전한다.


 


인간의 몸은 저 하늘에 태양이 뜨고 지고, 비가 오고, 사계가 있듯이


우주의 순리에 닿아 있어 生하고 滅하는 인과의 화살 앞에 서있다.



이렇게 우리 목숨은 천명에 닿아 있다. 몸 안에서만 보면 걸림이 없는 것 같지만,


자연에 속해 있는 사람의 몸은 생성이 끊임없이 벌어진다. 거기에는 순리가 존재한다.


 


이 변화하는 순리를 거역하면 다시 길이 막혀 나는 충돌을 만나 어두워진다.


경허스님은 본래 생사가 없다고 알았지만, 순리가 막히고 어둠이 찾아든 자기를 본다.


보조스님을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보조스님은 깨침이 익어지신 분이었고 깨친 후에는 아주 자상하게 작은 것, 큰 것을


다 살려 놓으신 분이었다.



큰 도(道)는 수행으로 얻어 지는 것이 아닌데 수행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범부를


위해서다. 이치를 알고 나서 수행을 돌이켜 보면 잘못 공부한 것을 비로소 알리라.  


<옛 지공 화상의 말이다.>
                             
그러나 갓 깨달은 경허스님이 볼 때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공부를 바로 하면


나무의 몸통과 가지와 줄기와 잎이 다 살아나는 것과 같아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회가 있어야 한다. 작은 것 하나 하나가 佛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을 안다.  익어진 공부이다.


 


육조스님도 홍인 조사를 떠나 사냥꾼들 속에서 생활하면서 몸에 붙은 습을 돌아보는


시간을 보낸다. 그런 참회의 과정을 가졌기 때문에 그의 법문은 우리들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런데 그런 참회의 과정도 없이 ‘도는 걸림이 없는 것’이라는 法집을 버리지 못하고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하여 ‘무가애, 무가애고’하며, ‘뭐든 해도 된다, 라고 선을


잘못 익혀 마치 자유인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수행자들이 더러 있다.


 


특히 근래 禪문에는 이렇듯 앞뒤가 뒤바뀌어 져 있는 것이 널러져 있다.


‘도는 걸림이 없다’고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깨친 후 성품에 있는 그 성질이 없는 것이 그 하나요, 또 하나는 성품으로 부터 몸에 붙어


있는 습이 조복을 받아 무르익어 상황에 따라 자유가 있는 것이 그 하나이다.



성품에는 걸림이 없지만, 몸에 붙어 있는 습은 일시에 가시지 않는다.


바람이 그쳤다고 파도마저 그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래서 깨닫는 이도 보림 保任의 시간 속에 뉘우침이 있는 참회의 시간을 가져야 함은


당연한 이치다.


 


사실 본 성품에는 생사가 없으므로 참회라 할 것도 없다.


그러나 본 성품을 깨달았다고 해도 몸에 붙어 있는 습들이 육바라밀로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뉘우치는 일은 계속 되어야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업이 밝아지고 바른 원력이 자라면서 사람의 폭이 넓어진다.


성품을 가린 업이 벗겨지면 두 손에서 천개의 능력이 나오고 양 눈에서 천개의 지혜가


나오는 멸 업장진언(滅 業障眞言), 참회진언(懺悔眞言)도 그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업장이란 우리 몸에 나쁜 습으로 된 어두움이 모여 있는 창고라는 의미이다.


참회가 있는 곳에 어두운 업장은 시간을 두고 밝아져 나온다. 



참회가 없는 삶이라면 불교를 믿는다고 해도 지난날 익힌 나쁜 습들이 밀려와


시끄러운 일들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참회는 세간과 출세간을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이 삶 속에 같이 있어야 하는


귀한 道와 德의 눈이다.


 

가평 아침고요수목원 _ 청산에 살리라 _ 석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