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세나, 윤회, 닭과 알
불교닷컴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
한때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던 질문이 있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재미나는 질문이다. ‘닭이 먼저’라 대답하면 ‘알이 먼저 있어야 닭이 부화할 거 아니냐’고 반박을 당하고, ‘알이 먼저’라 대답하면 ‘닭이 먼저 있어야 알을 낳을 게 아니냐’고 반박을 당한다.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다. 진제 종정스님처럼 “시작도 없는 옛날부터 닭은 닭이었고 알은 알이었다”라고 주장하면 해결되겠지만, 불행하게도 이건 사실이 아니다.
알이 먼저다
과연 닭이 먼저일까? 알이 먼저일까? 당연히 알이 먼저다. 닭은 알을 생산하는 수단일 뿐이다. 난자가 알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유전자가 먼저이다. 닭이 알을 생산하는 수단인 것처럼, 알은 유전자 전달수단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처음으로 단세포 생물이 탄생한 35억 년 전은 알이 생겨나기 한참 전이었으며, 당시에 세포분열이라는 무성생식(無性生殖)을 통해서 전달되던 것은 유전자이다. 그러므로 유전자가 알보다 먼저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나 생물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도 아니다. 17세기에 지동설로 인하여 천동설이 무너지면서, 서양 유신론자들은 ‘우주의 중심으로서의 지구와 인간의 가치가 격하될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며 분노했지만 그래서 그런 주장을 한 사람들을 불에 태워 죽였지만, 그 후 인간은 지동설을 통해서 우주의 진리를 발견하여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의 비밀을 알아냄으로써, 하나님의 작품인, 우주설계의 정밀함과 우주창조와 인간창조의 위대성을 증명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유신론자들은 인간의 진리탐구능력 그 자체에서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발견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종교적 신념으로,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은 아무리 의심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한때의 광기일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전자와 진화론은 무아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유전자와 진화론의 발견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무아론(無我論)’의 과학적 증명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무아론의 위대성을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한국불교계는 조계종정 진제 스님과 대(大)수행자 송담 스님을 앞세우고, 시대에 뒤처지게, 전면적으로 진화론을 부인하며 결사적으로 반대의 기치를 드높이 치켜들고 있다. 아마 이분들이 참나론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참나론자(진아론자 眞我論者 true atmanist)들은 분기탱천할 필요가 없다. 유전자는, (참나가 있다면) 참나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몸을 결정할 뿐이다. 설마 지고의 참나에도 유전자가 있을까?
나가세나는 유전자의 존재를 몰랐다 닭에서 알로 알에서 닭으로 전해지는 것은 유전자이다 유전자와 진화론은 불일불이(不一不異)론이다
인도의 전륜성왕 아소카의 할아버지인 찬드라굽타 시절에 북인도를 침입한 알렉산더가 남기고 간 그리스인들이 세운 나라의 왕 밀린다는 불교에 깊은 조예(造詣)가 있었다. 어느 해 밀린다는 고승 나가세나를 초청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불교문답을 한다. 그 내용이 밀린다왕문경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그중 윤회·무아·업에 대한 부분을 일부 소개한다.
“무아(無我)인데 어떻게 윤회(無我輪廻)가 가능하냐?”는 밀린다 왕의 물음에, 나가세나는, “윤회란 닭이 알을 낳고 그 알에서 닭이 나오며, 이 닭이 역시 알을 낳고 그 알에서 다시 닭이 나오는 것과 같아서, 사람의 생과 사는 결코 중단되는 때가 없다. 하지만, 이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가는 영혼 같은 존재는 없다”라고 대답했다. 소위 불교의 트레이드마크인 무아윤회(無我輪廻)이다. 무아윤회는 불교가, ‘윤회를 주장하지만 아트만(영혼)윤회를 주장하는’ 힌두교와 갈라서는 대(大)분기점이다. 불교와 힌두교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생명체는 특히 포유류는, 설사 조류가 아니더라도, ‘난자라는 알’이 ‘정자라는 단세포’를 만나 이루어진다. 나가세나가 예로 든 닭처럼, 포유류도 알을 낳건 안 낳건 난자라는 알을 통해서 이어진다(오리너구리는 진짜 알을 낳는다). 나가세나는 이 점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알 속에는 물질적인 유전자가 들어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을 것이다. 나가세나가 비유하였듯이, 무아윤회란 밤새워 타는 등불과 같다. 초저녁 등불과 한밤중 등불과 새벽의 등불은 같은 등불로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등불이 아니듯이, 무아윤회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 미래의 나는 같은 나로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나가 아니다.
생물체의 이어짐은 유전자를 통해서 이어진다. 생물의 종(種)의 연속성과 부모자식 간의 유사성을 확보하는 것은, 즉 인간이 인간을, 돼지가 돼지를, 소가 소를, 개가 개를, 그리고 닭이 닭을 낳게 하는 것은 유전자이다. 비물질적인 영혼이 아니라 물질적인 유전자이다. 하지만 이 유전자도 불변의 물질은 아니다. 유전자는 시공(時空 시간과 환경)을 따라 변화한다. 그러므로 부모와 자식은, 600만 년 전의 (지금의 침팬지보다 미개한) 인간과 지금의 문명화된 인간은, 같은 존재도 아니고 다른 존재도 아니다. 소위 중관철학의 ‘불일불이(不一不異)’ 사상이다.
나가세나는 과일들이 맛이 다른 이유는 각 나무들의 종자(種子)가 다르기 때문이라 했는데, 이것 역시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식물도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포에는 동물과 같은 이중나선구조의 유전자가 들어있다. 나가세나는 이 비유를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유로 업(業)을 내세우기 위해’ 들었지만, 사람들이 총명하고 미련하고, 단명하고 장수하고, 병에 잘 걸리고 건강한 것은 유전자가 결정하는 체질 탓이다. 예를 들어 북극곰은 영하 수십 도의 기후에 얼음물을 들락날락거려도 절대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이는 북극곰의 전생의 업 때문이 아니라 유전자 때문이다. 북극곰이 전생에 ‘얼음물에 빠진 동물을 구해준 선업’ 때문이 아니라, 방한기능을 하는 두터운 피하지방층과 물이 스며들지 못하는 촘촘한 털을 만들어내는 유전자 덕분이다. 또, 사자가 풀을 먹지 않는 이유는 풀을 소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전생의 업 때문이 아니라 풀을 소화시키는 소화액을 만들지 못하는 유전자 때문이다. 환경과 문화의 영향도 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자극적인 음식을 즐기는 문화에 태어나면, 위궤양 간경화 위암 간암에 걸릴 확률이 급증한다. 흡연을 장려하는 문화에 태어나면 폐암에 걸릴 가능성이, 그리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는 문화에 태어나면 전립선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커진다. 개인의 전생의 업과는 전혀 무관하다.
유전자와 진화론은 불교 무아론의 쌍둥이 이론이다 유전자는 불단(不斷)이고 돌연변이는 불상(不常)이다 유전자는 가(假)이고 돌연변이는 공(空)이고 진화는 중(中)이다
이처럼 유전자는 생물계 종(種)의 정체성과 특성을 설명하는 이론이며, 진화론은 자연계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종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설명함에 있어서, 신비로운 윤회를 설정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불교도라면 만물을 주관하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연기(緣起)와 업(業 karma)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통속적인 윤회가 생명계를 주관할 이유는 없다. 유전자와 진화론이면 충분하며 통속적인 윤회론보다도 더 잘 설명한다. 더욱이 유전자와 진화론은 불교의 무아론에 딱 들어맞는 이론이다. 마치 부처님의 무아론을 증명하려고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이론이다. 중요한 점은 유전자와 진화론은, 무아론처럼, 단멸론(斷滅論)도 아니고 상주론(常住論)도 아니라는 점이다. (옛날에는 유전자의 존재를 몰랐기에 통속적인 윤회론에 대한 부정은, 불교 신자와 힌두교 신자에게는, 단멸론과 동의어였다.)
‘자신의 의식이 통속적인 방법으로 영원히 이어져야 한다’는 점만 포기하면 된다. 사람들이 윤회론에 집착하는 이유는, ‘자신이 과거의 기억을 하나도 잃지 않고 모두 간직한 채로 영원히 존재해야 한다’는 집착 때문이다. (개인마다 기억은 다 다른데 뭐가 그리 특별해서 그 모든 기억을, 특히 구질구질한 기억까지, 다 기억해야 한다고 믿을까? 달라이라마는 “부처는 과거 일을 문자 그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자신은 어제 일도 가물가물하므로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인간은 (거의) 누구나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면서, 그래서 전생의 악업에 대한 기억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 플래시백(flashback)을 겪듯이 괴로워하지도 않으면서, 전생을 논하고 윤회를 논하는 것은 모순이다. 중증 치매에 걸린 사람은 장기기억까지 상실하여 과거의 안 좋은 기억으로부터 겪는 고통이 없다. 정체성도 상실하여 자아에 대한 심적 고통도 없다. 그런데도 기억에 없는 과거와 미래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자고 하는 가르침은, 아무래도 불가사의한 이론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질문을 하나 던진다. 당신이 잠을 자는 사이에 과거의 기억을 문자 그대로 다 잃어버렸다. 깨어보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나이 직업 친구 주거지 가족관계 등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다. 다시 강조하지만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어제, 그제, 일주일 전, 한 달 전, 일 년 전, 수십 년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없고, 사람을 만나도 조금이라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때 당신은 아직도 살아있는 것인가? 아니면 죽은 것인가?
만약 당신이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다“고 주장한다면, 통속적인 윤회론을 주장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설사 존재한다 해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동일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존재하는 것은 (영혼의 환생이 없이) 유전자를 통해서 비슷한 ‘후손의 몸’으로 살아남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몸이란 살아있어도 어차피 변하는 것이며, 둘 다 ‘과거로부터 이어진 과거에 대한’ 연속적인 의식이 없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과보가 나타나기 전에 업이 있는 곳을 미리 알 수 있다
나가세나는 ‘나무가 아직 열매를 맺기 전에 어느 가지에 열매가 열리고 안 열릴지를 미리 알 수 없다’는 걸 예로 들면서, “과보가 나타나기 전에는 업이 있는 곳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옛날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미리 알 수 있다.
심지어 동물이나 인간이 불임인지 아닌지 암수에 관계없이 알 수 있다. 교미를 해서 그 결과를 확인해 보기도 전에 알 수 있다. 암컷의 무난자증(無卵子症)이나 수컷의 무정자증(無精子症)을 진단할 수 있다. 태아의 유전자를 조사해서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 기형여부를 알 수도 있으며, 심지어 부모의 유전자를 조사해서 아이가 수태되기도 전에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의 유전병유무나 기형여부를 미리 알 수 있다.
그럼 나가세나가 예를 잘못 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떤 예를 들어도 마찬가지이다. 과학의 발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것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미래에는, 심지어, 난자와 정자가 없는 부부일지라도, 자기들을 닮은 즉 유전적으로 동일한, 애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체세포에서 취한 유전자를 섞어 세포(예를 들어 세포핵을 제거한 남의 난자)에 주입한 다음 이 세포를 배양해서 애를 만들면 된다. 이미 동물실험에서는 성공했다.
시대의 한계는 잘못이 아니지만 구시대의 헛소리를 믿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만약 나가세나와 같이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마음을 지닌 이가 현대에 태어난다면 절대로 옛날처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가세나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미래세의 모든 과학발견을 (초능력으로) 미리 다 알고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과학이라는 개념이나 분야조차도 없었다. 당시에, 진리를 판별하는 최고의 수단은 성인의 말인 성언량(聖言量)이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모든 진리를 단 한 사람의 성인이 독점하는’ 일종의 독재체제였다. 뿐만 아니라 성인들의 말은 서로 달랐다. 그래서 제자들은 편을 지어 싸웠다. 우주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아마 나가세나는 (통속적인 윤회론이 참이라면) 이미 환생하여 위대한 생물학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현생의 그가 ‘나가세나였던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의 배려이다. 한없는 과거의 무수한 미련한 엉터리 생각을 기억하는 것은 두뇌용량이 허용하지도 않거니와 결코 유쾌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 시대인이 그 시대의 제약조건 하에서 열심히 사유하여 당시로서는 최선의 이론을 내놓는 것은, 비록 이 이론이 후대(後代)에 잘못된 이론으로 밝혀질지라도,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고 오히려 칭찬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전대(前代)의 잘못은 후대에 시정하면 될 일이다. 이런 탐구심이, 진리를 발견하게 하는 동력이 되어, 인류문명을 발달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앙이 그런 역할을 한 적도 없고 한 바도 없다. 그런 역할은 지혜가 한다. 단기적으로는 엎치락뒤치락할지라도, 장기적으로 인류를 발전시키는 것은 지혜이다. 여기에 자비를 더하면 금상첨화이다. 지혜와 자비를 기둥으로 삼는 불교가 위대한 점이다.
(종교는 파이를 늘이는 방법이 아니라 공평하게 나누는 문제이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종교가 성직자들과 권력자들의 몫을 늘려 민중의 몫을 줄이는 역할을 했다. 이에 비해 과학기술은 인류의 파이 자체를 늘이는 방법이다. 그리고 개인의 부가 증가해야, 지켜야할 부가 있음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발달한다. 그런데 지켜야할 부가 있으려면, 먼저 개인의 재산을 보장하고 키우는 자본주의의 발달이 선행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에서 투표권은, 스스로 무기와 갑옷을 장만하여 외적을 물리칠, 재산이 있는 시민들에게만 주어졌다. 남의 걸 지키겠다고 목숨을 걸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구가 많아야 수백 명인 씨족집단은 공산주의가 가능하고 또 그래야 자본주의보다 더 행복하겠지만, 인구가 수백만 수천만 수억 수십억이 되면 전면적인 공산주의는 불가능하다. 이는 사상의 문제이기 전에 수(數)의 문제이다. 좁은 지역의 적은 수의 사람들 사이에는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넓은 지역의 많은 사람들 사이의 동질성은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집단의 크기가 수백만 명을 넘어서면 거의 불가능하다.)
문제는 이미 거짓으로 밝혀진 과거의 이론에 집착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새로 태어나는 순진무구한 지구촌의 새 생명들을 몽매주의(蒙昧主義 obscurantism)로 물들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특정지역들이 각각 이슬람 망상, 기독교 망상, 유대교 망상, 도교 망상, 참나 망상, 무속 망상으로 집단적으로 물들어 있는 것은, 종교적 망상이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집단의 세뇌'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이와 다르게, 과학은 그런 성향을 보이지 않는다. (설사 있다 해도 단기적인 현상일 뿐이다.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면, 상이한 이론을 지닌 학파로 인한, 국소적인 편향은 사라진다.) 지역에 따라 지지하는 이론이 다른 일은 없다.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이것이, 과학의 눈과 방법으로 종교를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종교인들은 종교를 반대한다 남의 종교만 종교이고, 자기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진리이다
종교인들은, 종교를 옹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옹호하지 않는다. 자기 종교만 옹호하지 다른 종교는 악마의 가르침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은 자기 믿음체계를 수호하는 것이지 종교 자체를 인정하는 게 아니다. 아마 종교에 반대할 것이다. 자기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진리라 생각하고, 다른 이들의 믿음이야 말로 헛소리를 양산하는 종교라 생각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를 옹호하는 사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역사에 나타난, 이교도들에 대한, 무수한 고문·학살과 같은 잔인한 행동을 설명할 길이 없다.
종교는 밈이다
마지막으로 지적을 하자면, 유전자는 물질적인 생체유전자뿐만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문화유전자도 있다. 소위 밈(meme)이다. 한국인이 미국에 입양되면 미국문화를, 미국인이 한국에 입양되면 한국문화를 완벽하게 익힌다는 점에서, 문화는 문화를 통해서 전달된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이슬람국가 아이가 태국의 불교가정에 입양되면 불교도가, 태국 아이가 이슬람국가의 이슬람가정에 입양되면 이슬람교도가 될 것이다. 광신도들의 주장처럼 종교가 개인의 선택인 것은 아니다; 대체로 사회의 선택이다. 갓난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무인도에서 자라면 인간의 현대문명과 현대종교를 복원하지 못할 것은 명백하다. 지금도 석기시대에 사는 뉴기니 브라질 아프리카의 원시인들이 결정적인 증거이다. 그들은 문명인들과 같은 시대를 살아도, 문명과 유리된 탓으로 아직도 석기시대에 산다. 그러므로 선대에서 후대로, 가정과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있는 교육과 제도와 풍습과 전통을 통해서, 전해지는 문화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이다. 인류는 거대한 문화유전자의 연기로 차 있는 아궁이와 같다. 아궁이에 들어가면 연기로 숨이 막히지만, 아궁이를 나오면 땔감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사람이다. 그걸 인간(人間)이라 한다.
강병균 : 서울대 수학학사ㆍ석사, 미국 아이오와대 수학박사. 포항공대 교수(1987~). 포항공대 전 교수평의회 의장. 전 대학평의원회 의장. 대학시절 룸비니 수년간 참가. 30년간 매일 채식과 참선을 해 옴.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 문하에서 철야정진 수년간 참가. 26년 전 백련암에서 3천배 후 성철 스님으로부터 법명을 받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아사상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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