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4. 15:23ㆍ일반/생물·과학과생각
<40>무한비교
-깨달은 두 眞人의 경지 비교 불가능 -
-수학의 무한론 대소·우열 차이 없어 -
대오의 경지를 수학의 무한에 빗대면 매우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수학에서는 두 개의 양에 대한 비교를 1대 1로 설명한다.
어느 강연회를 개최한 강당에는 일정한 수의 의자가 있으며 한 자리에 꼭 한 사람이 앉는 것으로 가정해 보자(의자는 100개로 가정한다). 수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그 많은 사람의 수를 정하는 척도는 강당 안에 있는 의자의 갯수이다. 이때 3가지 경우가 있다.
①빈 의자가 있다면 참석가 수는 그 의자의 수인 100보다 적다.
②빈자리와 서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참석자 수는 꼭 100이다.
③서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수에 100을 합친 것 만큼의 참석자가 있다.
이와 같은 판정을 내리는 데는 1대 1 대응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즉 두 집합 A,B 사이에 하나도 빠짐없이 1대 1 대응이 성립할 때는 A와 B의 수가 같으며 과부족이 생길 때는 그 수만큼의 차이가 있다. 얼핏 유치하기조차 한 이 생각이 무한을 셈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무한을 셈할 때 기본적인 척(尺) 역할을 하는 것이 {1, 2, 3, …… n, …}라는 자연수 전체의 집합이다. ‘1, 2, 3, … n, …‘은 가장 기본적인 수이며 얼마든지 늘어가는 ‘무한’이다.
지금 집합 A를 ‘1, 2, 3, …… n, ……‘로 하고 B를 ‘2, 4, 6, …… 2n, ……’으로 된 짝수 전체를 집합이라고 하자. 분명히 짝수의 집합인 ‘B=2, 4, 6, …… 2n, ……’는 자연 수 전체 집합 ‘A=1, 2, 3, …… n, ……’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하나의 빈틈도 없는 1대 1 대응이 이루어진다. 즉, 1, 2, 3, …… k, ……
↕↕↕ ↕
2, 4, 6, …… 2k, ……
다시 말해서 짝수 2k에 k를 대응시킴으로써 전혀 빈틈없이 1대 1 대응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짝수 전체와 자연수 전체가 같은 정도의 수를 갖는다고 단정지을 수 있다. 짝수의 집합뿐만 아니라
10배수의 집합 C={10, 20, 30. ………}
100배수의 집합 D={100, 200, 300 ………}
등과 자연수 전체의 집합은 같은 정도의 무한인 것이다. 또 n에 1/n을 대응시키면 {1/1, 1/2, 1/3, ……, 1/n, ……}라는 1보다 작은 1을 분자로 갖는 분수 전체의 집합과도 같은 정도의 무한이다. 한편 자연수보다 큰 집합인 0과 마이너스의 수를 포함한 수들의 집합을 생각해 본다. 알기 쉽게 이들을 수직선 상에 나열해 보자.
1, 2, 3, 4, 5 …… 자연수는 0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뻗어 있고 -1, -2, -3, -4, -5 …… 음의 정수는 0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뻗어 있다.
분명히 눈으로 보기에는 좌우 양쪽에 걸쳐 뻗어 있는 음수를 포함한 정수 전체의 집합은 양(플러스)만으로 되어 있는 자연수 1, 2, 3, 4, 5 …… n, …… 의 집합보다 크다.
그러나 정수 전체를 다음과 같이 번호를 붙여 갈 때, 이들 사이에 1대 1대응이 빈틈없이 형성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플러스의 자연수 k에는 2k, 마이너스의 정수 -k에는 2k+1을 대응시키면 이들 사이에는 어김없이 1대 1 대응이 성립한다. 이와 같이 1대 1 대응으로 수들 사이의 크기를 비교하면 미처 상상하지 못한 엉뚱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짧은 선분이라도, 가령 0과 1 사이의 ‘0 ----------- 1’과 어떤 길이을 갖는 직선 사이에도 1대 1의 대응이 가능하다. (P와 P1로 대응시킨다)옆 그림은 선분 A와 선분 B 사이에 1대 1 대응이 성립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입장에서 보면 무한개의 점을 갖는 선분 사이에도 큰 것, 작은 것의 구별이 없어짐을 알 수 있다.
수학적인 무한논의 입장에서도 대소, 우열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하물며 마음의 세계에서 대오(大悟)의 경지를 얻은 두 진인(眞人) 사이에 비교를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일일시호일 日日是好日
세상에는 좋고 나쁜 두
가지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
좋거나 더 좋은 일’밖에 없습니다.
저희 은사 스님의 표현을 빌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복을 짓는 일’이거나
‘복을 받는 일’이거나 두 가지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쁜 일이 생길 때 겉으로 보면 나쁜 일 같지만
실은 그것은 복을 짓느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악업이 소멸되는 것은 다르게 표현하면 복을 짓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힘들고 고된 일이 생길
때는
‘지금은 복을 짓는 시간이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되고
좋은 일이 생길 때는 ‘지금은 복을 받는 시간이구나’ 하고
복을 행복하게 누리고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에는 언제나 좋거나 나쁜 일,
괴롭거나 즐거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좋거나 더 좋은 일’ 두 가지 일밖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날마다 해피엔딩입니다.
- 법상스님
하동 / 이시영
하동쯤이면 딱 좋을 것 같아.
화개장터 넘어 악양면 평사리나
아, 거기 우리 착한 남준이가 살지.
어쩌다 전화 걸면 주인은 없고 흘러나오던 목소리.
“살구꽃이 환한 봄날입니다. 물결에 한 잎 두 잎...”.
어릴 적 돌아보았던 악양 들이 참 포근했어.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배틀재 토지 동방천 화개... 빨리 빨리 타이소!” 하며
엉덩이로 마구 승객들을 들이밀던 차장 아가씨도 생각나네.
아니면 인호 자네가 사는 금성면도 괜찮아.
화력발전소가 있지만 설마 터지겠어?
이웃에 살며 서로 오갈 수만 있다면!
아니 읍내리도 좋고 할리 데이비슨 중고품 몰고 달리는 원규네
좀 높은 산중턱 중기마을이면 또 어떠리.
구례에는 가고 싶지 않아.
마음만 거기 살게 하고 내 몸은 따로 제금을 내고 싶어.
지아는 지가 태어난 간전면으로 가고,
두규도 거기 어디에 아담한 벽돌집을 지었다더군.
설익은 풍수 송기원이 허리를 턱하니 젖혀 지세를 살피더니
”니가 살 데가 아니다“라고 했다며?
하여간 그쯤이면 되겠네. 섬진강이 흐르다가
바다를 만나기 전 숨을 고르는 곳.
수량이 많은 철에는 재첩도 많이 잡혔지만
가녘에 반짝이던 은빛 모래 사구들.
김용택이 사는 장산리를 스쳐온 거지.
용택이는 그 마을 앞 도랑을 강이라고 우겼지만
섬진강은 평사리에서 바라볼 때가 제일 좋더라.
그래, 코앞의 바다 앞에서 솔바람 소리도 듣고
복사꽃 매화꽃도 싣고 이젠 죽으러 가는 일만 남은
물의 고요 숙연한 흐름. 하동으로 갈 거야.
죽은 어머니 손목을 꼬옥 붙잡고 천천히, 되도록 천천히.
대숲에서 후다닥 날아오른 참새들이 두 눈 글썽이며
내려앉는 작은 마당으로.
Dreamy Love Song - Gheorghe Zamf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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